2013년 5월호

드골 하야 부른 佛 학생시위 대처 승리 안긴 英 노조파업

폭동과 혁명 사이

  • 이창무│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jbalanced@gmail.com

    입력2013-04-18 12:0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저항의 시대…“금지하는 모든 것을 禁하라!”
    • 법의 지배 vs 저항의 자유
    • 여론 향배가 혁명-폭동 가르는 잣대
    미국 오하이오 주 북부에 위치한 켄트주립대 캠퍼스에 높지 않은 언덕이 있다. 그 언덕 위에 테일러홀이라는 건물이 서 있고 그 앞에 조그만 탑이 하나 세워져 있다. 1970년 5월 4일 이곳에서 미국을 뒤흔든 사건이 발생한다. 오하이오 북부는 겨울이 길다. 바로 위에 있는 이리(Erie)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4월에도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래서 5월은 이 지역이 1년 중 가장 활기를 띠는 시기다. 하지만 1970년 5월 켄트주립대 캠퍼스는 냉기만 가득했다. 흔히 ‘5월 4일 사건’ 또는 ‘켄트주립대 학살’로 불리는 시위대를 향한 발포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당시 리처드 닉슨 행정부가 전격적으로 캄보디아 침공에 나서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닉슨은 1968년 대통령에 당선됐고, 미군의 베트남 철수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1969년 11월 미군이 베트남 양민을 죽인 미라이 학살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베트남 철군 여론은 하늘을 찔렀다. 1969년부터 베트남전이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자 종전에 대한 기대가 커졌으나 이러한 바람과 달리 미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국민의 배신감은 컸다. 징집 대상인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의 불만은 누구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전국적인 학생파업’이라고 지칭할 만큼 미국 전역의 대학가가 시위로 홍역을 치렀다.

    학생들에게 발포한 美軍

    켄트주립대에서 캄보디아 침공에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처음 일어난 것은 5월 1일. 닉슨 대통령이 미군의 캄보디아 개입을 공식 인정한 바로 다음 날이다. 그날 밤부터 문제가 커졌다. 일부 흥분한 시위대가 맥주병을 던져 주차해 있던 자동차를 파손하고 시내 상점 문을 부쉈다. 시위대는 거리에서 불을 지폈고 출동한 경찰을 향해 병을 내던졌다.

    이튿날 켄트 시(市) 시장은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오하이오 주지사에게 질서 유지를 위해 주 방위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날 저녁 주 방위군이 도착하자 시위는 더욱 거세졌고, 시위대는 켄트주립대 학군단(ROTC) 건물에 불을 질렀다. 소방관, 경찰관이 불을 끄려고 접근하다가 시위대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했다. 주 방위군은 대학 안으로 진입해 캠퍼스에 주둔했다. 5월 3일에는 1000여 명의 방위군이 직접 시위 진압에 나섰다. 오하이오 주지사는 시위대를 “나치와 공산당보다 더 나쁜 존재”라며 격렬하게 비난했다.



    문제의 5월 4일, 2000명으로 추산되는 시위대가 대학 광장에 모였다. 시위대는 대학 캠퍼스 내 작은 언덕에 위치한 ‘승리의 종’까지 평화 행진을 벌였다. 주 방위군은 학생 시위대의 행진이 자칫 격렬한 폭력시위로 변질될까봐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오전 경찰관 한 명이 방위군 차량에 탑승한 채 학생들에게 접근해 해산하지 않으면 모두 연행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러자 일부 학생이 차량에 돌을 던졌고 차 안에 타고 있던 방위군 1명이 깨진 유리창 파편에 맞아 부상했다.

    정오 조금 못 미친 시각, 방위군은 시위대에게 해산을 종용했고, 최루탄을 발사했다. 바람이 많이 분 탓에 최루탄은 효과가 없었다. 시위대는 해산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방위군에게 돌을 던졌다. 방위군 일부가 시위대에 몰려 포위됐다. 이윽고 29명의 방위군이 학생들에게 발포했다. 그 자리에서 4명의 학생이 목숨을 잃었고 9명이 다쳤다.

    군이 학생들을 상대로 발포해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미국 국민은 망연자실했다. 미국 전역에 걸쳐 1000여 개의 대학과 고등학교, 심지어 초등학교까지 수업을 거부한 채 과도한 시위 진압에 항의했다. 무려 800만 명의 학생이 시위대열에 동참했다. 켄트주립대 사건은 미국 학생시위의 역사적 상징으로 남았다.

    196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까지 세계는 극심한 시위와 폭동의 물결에 휩싸였다. 미국은 물론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일본까지 각종 시민단체와 학생, 좌파조직의 시위로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었다. 세계 주요 도시가 거센 시위로 극심한 몸살을 앓아야 했다.

    이 시기 미국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저항운동으로는 1963년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서 일어난 데모와 1968년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 시위, 그리고 앞서 켄트주립대 학생시위가 꼽힌다. 버밍햄 시위는 1963년 앨라배마 버밍햄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주도로 진행됐다. 앨라배마는 인종차별이 특히 심한 지역이었다. 조지 윌러스 당시 앨라배마 주지사가 취임선서를 통해 ‘오늘도 차별, 내일도 차별, 영원히 차별’을 맹세할 정도였다. 버밍햄은 이런 앨라배마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은 식당에서 백인과 흑인이 함께 식사하지 못하게 하거나 버스를 함께 타지 못하게 하는 등의 각종 인종차별 행위에 대해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버밍햄 경찰은 시위에 참여한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했다. 어린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때 구속자가 2500명에 이르렀으며 학생들에게도 물대포를 쏠 정도로 시위 진압은 가혹했다.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버밍햄 인권운동 지도자들은 대중 집회를 중지했고, 임시협정이 체결됐지만, 킹 목사가 묵고 있던 게스턴 모텔과 킹 목사 형의 자택이 KKK단에 의해 폭파됐다. 이 시위는 1963년 8월 28일 워싱턴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평화행진으로 이어졌고, 이후 인종차별 개선을 위한 각종 법규 개정의 계기가 됐다.

    “낡은 세계는 등 뒤로…”

    1968년 8월 26~29일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시위 역시 1960년대의 혼란한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를 선출하는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는 대회를 열기 전부터 어수선했다. 유력한 대통령후보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한 후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과 허버트 험프리 부통령이 한 치의 양보 없이 치열한 선거전을 펼쳤다. 특히 베트남전 처리 문제를 놓고 두 후보는 첨예하게 대립했고 각각의 후보를 지지하는 세력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드골 하야 부른 佛 학생시위 대처 승리 안긴 英 노조파업

    초기의 강경 진압이 종종 폭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폭력시위가 예상되자 리처드 데일리 시카고 시장은 법과 질서 유지 원칙을 거듭 천명하면서 밤 11시부터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그러나 군중은 반전(反戰)을 강조하는 여러 연설에 고무됐고, MC5와 같은 록밴드의 소란스러운 연주에 한껏 자극이 됐다. 반전시위대는 전당대회 기간 내내 시위를 벌였다. 초기에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되던 반전시위는 시간이 갈수록 거칠어졌다.

    데일리 시장은 반전시위대의 집회와 행진을 허용하지 않는 등 강경한 방침을 재차 확인했다. 아울러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반드시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원칙을 밝혔다. 시위대의 일부만이 불법적이고 과격한 시위를 했는데도 경찰은 거칠고 과도하게 물리력을 행사했다. 경찰은 소속, 신분, 정파 등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뿐 아니라 행인, 기자, 정치인도 피해를 보았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손자도 취재활동을 벌이다 봉변을 당했고, ‘플레이보이’ 창립자인 휴 헤프터도 경찰봉에 등을 맞았다. 심지어 휴가를 즐기던 영국 하원의원이 가스총을 맞고 경찰에 강제로 끌려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격동의 1960년대는 프랑스도 미국 못지 않았다. 1968년 5월, 프랑스는 ‘5월 학생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사소한 일이 발단이 됐다. 프랑스 낭테르대 여학생 회관은 남자 출입이 금지된 공간이다. 일부 남학생들이 시대착오라고 반발하면서 회관 진입을 시도하자 경찰이 물리력으로 저지했다. 관련 학생들도 체포했다. 정부의 초기 강경 대응이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5월 6일 학생들이 소르본 대학에 모여 항의 시위를 하려 하자 경찰은 소르본대 입구를 봉쇄했다. 2만여 명에 달하는 시위대가 접근하자 경찰은 경찰봉을 휘둘렀다. 시위대가 보도블록을 뜯어 던지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해 시위대를 쫓아내는 한편 수백 명의 학생을 체포했다. 같은 날 고교생들도 시위 대열에 동참했다.

    5월 10일 구속 학생 석방, 대학 주둔 경찰 철수, 대학 폐쇄 취소 등의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또 다시 수백 명이 체포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경찰의 과잉 진압을 방송으로 지켜본 많은 시민이 학생들에게 동조했고 시인과 가수 등 예술인도 시위 대열에 가담했다. 5월 13일엔 1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파리 중심가에 모여들었다.

    학생시위는 5월 한 달 동안 프랑스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금지하는 모든 것을 금한다’ ‘낡은 세계는 너희들의 등 뒤로 사라진다’…각종 슬로건이 권위주의적 학교 행정에 불만이 쌓인 학생들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이후 100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벌이면서 프랑스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마침내 샤를 드골 당시 대통령의 사임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학생시위는 베트남전 등 시대적 문제와 연결되면서 미국, 영국, 독일, 일본의 젊은이들을 저항과 해방의 대열에 동참하도록 이끈 기폭제 구실을 했다.

    흑인에게 집중된 ‘의심법’

    영국의 상황도 비슷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해가 지지 않던’ 대영제국의 영광이 사그라지면서 영국은 경제사회적으로 곤경에 빠져들었다. 사회복지를 강조한 노동당 정권이 이어지면서 노조의 영향력은 한없이 커졌다. “노조의 동의가 없으면 국정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성장을 무시한 분배 위주 경제정책은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하는 위기까지 불러왔다. 이처럼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이민자에 대한 시선이 고울 수 없었고, 이민자들 역시 차별대우에 대한 불만이 누적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터져 나온 것이 1976년의 노팅힐 사건이다. 매년 런던에서 서인도 출신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열리는 ‘노팅힐 축제’는 카리브해 연안 스타일의 화려한 행진과 음악, 다양한 이벤트로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영국 각지와 여러 나라에서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1976년에는 경찰의 자유로운 불심검문을 허용한 일명 ‘sus law(의심법)’로 인해 시민들, 특히 흑인 등 이민자의 불만이 고조돼 축제 시작 이전부터 긴장이 감돌았다. 경찰은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사태에 대비해 평소보다 10배나 많은 3000여 명의 경찰력을 대기시켰다.

    그러나 축제 도중 소매치기 혐의가 있는 흑인을 체포하다 이에 항의하는 흑인 청년들의 거센 시위가 발생했고, 끝내 걷잡을 수 없는 대규모 시위로 악화했다. 주위 상점과 주택의 유리창이 깨지고, 300명 넘는 경찰이 부상했다. 경찰 차량만 35대 이상 파손됐다. 현장에서 부상당한 한 경찰관은 “사방에서 병, 벽돌, 온갖 것이 비처럼 쏟아졌다”고 증언했다. 전혀 무장돼 있지 않던 경찰은 쓰레기통 뚜껑이나 교통표지판 등으로 날아오는 돌을 막아야 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한 방송인은 “경찰이 시위 현장에서 도망가는 것을 처음 봤다”고 상황을 전했다.

    노팅힐 사건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브릭스톤 시위다. 1981년 4월 11일 런던 남부의 브릭스톤 지역에서 20세기 런던에서 가장 심각한 시위 사태가 발생했다. 브릭스톤은 사회경제적으로 문제가 많은 지역이었다. 높은 실업률과 범죄율,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상징되는 낙후지역이자 우범지역으로 꼽히는 곳이었다. 이 지역 주민은 대부분 경찰을 적대시했고, 당연히 경찰의 각종 활동에 비협조적이었다. 런던 경찰은 거리 범죄를 줄이고자 그해 4월부터 ‘스왐프 81 작전(Operation Swamp 81)’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sus law’라고 하는 불심검문 권한을 적극 활용했다. ‘sus law’란 범죄의 구체적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경찰이 의심(suspicion)한 것만으로 불심검문과 심지어 체포까지 할 수 있게 한 규정이다. 이 규정의 적용 대상은 젊은 흑인들에게 집중됐다.

    사달이 난 것은 4월 10일 오후 5시 15분이었다. 경찰이 순찰 도중 상처를 입은 흑인 청년 하나를 발견하고 검문했다. 경찰관 2명이 이 청년을 순찰차로 데려가는 도중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 중 일부가 경찰의 연행에 항의하다 급기야 경찰관을 폭행하기에 이르렀다. 이 소란은 지원 요청을 받은 경찰이 도착하면서 마무리됐다. 10일 밤과 11일 아침 사이 경찰은 이 지역에 대규모 경찰력을 배치했고, 이에 대응해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1일 오후 경찰이 몇 명을 연행하려고 하자 성난 군중이 벽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경찰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려고 이 지역으로 진입하자 시위대는 돌과 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했고, 화염병까지 등장했다. 영국 본토에서 화염병이 사용된 첫 번째 시위였다. 주택과 학교 등 여러 채의 건물이 불탔으며 경제적 피해도 막심했다. 부상당한 경찰이 300명, 민간인도 65명이나 다쳤다. 경찰차 56대를 포함해 100대가 넘는 차량이 불탔으며, 150여 채의 건물이 손상을 입고, 그중 30채가 불에 탔다. 경찰은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해 파괴행위를 한 82명을 체포했다.

    강성 노조의 시위와 파업은 ‘영국병(病)’으로 불리는 비효율성을 낳은 한 축이었으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대한 전기를 맞이한다.1979년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총리의 보수당 정부가 들어섰다. 대처 정부는 공기업 민영화와 사회복지 축소에 나섰다. 정부와 노동계의 대결이 불가피해진 것. 대처 정부는 1984년 노조와의 합의나 교섭조차 없이 174개 국영 탄광 중 20개 광산을 폐쇄하고 약 2만 명의 광부를 해고했다. 그러자 전국 탄광노조가 총파업에 들어갔다. 대처 정부는 전국적 동시 파업을 위법으로 규정하고 경찰력을 동원해 무력진압에 나섰다. 대처 정부는 탄광노조의 파업을 예상하고 수개월 전부터 석탄을 비축해놓고 있었다.

    노조는 내부의 적?

    1984년 7월 19일 대처 총리는 의회연설에서 “탄광노조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은 의회민주주의가 폭도들에게 굴복하는 것”이라며 강경 대응 방침을 천명했다. 또한 파업 노동자를 영국 국민의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내부의 적’이라고 거세게 몰아세우면서 “우리는 포클랜드에서 외부의 적과 싸워야 했지만, 훨씬 싸우기 어렵고 국가의 자유를 더욱 위협하는 내부의 적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해 5월 19일 올그리브에서 노조원들과 경찰이 격렬하게 충돌한 직후 대처 총리는 “지금 폭도들은 법의 지배를 그들의 지배로 바꾸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이는 결코 성공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폭력과 위협을 마다하지 않는 무리들이 있으며, 반드시 법의 지배가 이뤄지게끔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아서 스카길 전국탄광노조위원장은 “경찰이 말을 탄 채 노조원들에게 돌진하고, 경찰봉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면서 “이러한 잔인함과 위협은 중남미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라고 대처 정부의 강경 대응을 비난했다.

    8월, 2명의 탄광 노동자가 노조원 의견을 물어보는 투표 없이 파업이 강행됐다며 전국탄광노조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9월 영국고등법원은 전국탄광노조가 규정을 위반했다며 노조위원장과 노조에 벌금형을 내렸다. 법원의 이런 결정으로 탄광 노조원들은 각종 복지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됐다. 심지어 노조원의 자녀들이 학교 무료급식과 교복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탄광지역 노조원들은 계속 파업과 시위에 동참하느냐 아니면 포기하느냐 하는 기로에 서게 됐다.

    외부 사정도 탄광 노조에 이롭게 흘러가지 않았다. 철도노조, 항만노조가 탄광노조의 파업에 동참했으나 전기노조와 철강노조는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조 탄압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탄광노조를 비난했다. 일부 탄광노조 역시 파업에 동참하지 않으면서 전국탄광노조의 내부 움직임과 관련한 정보를 정부에 제공했다. 경찰은 총동원 태세에 돌입했다. 파업에서 빠져나오고자 하는 탄광 노동자들을 노조의 폭력과 위협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대규모 진압작전에 들어가 1만1291명을 체포하고 그중 8392명을 입건했다.

    여론을 업어라!

    1960년대에 시위가 격화하자 미국에서는 시위와 폭동을 전문적으로 다루기 위한 국가위원회를 만들어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1967년 ‘커너 위원회’라고 불리는 ‘국가혼란에 관한 위원회’가 만들어져 이듬해인 1968년 보고서를 제출했다. 커너 위원회는 주로 도시 폭동에 초점을 맞췄다. 이 보고서는 조사한 24개 폭동 가운데 절반가량에서 경찰의 잘못된 초기 대응이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분석했다. 충분한 장비와 훈련 없이 시위 진압에 나서 문제를 키웠다는 것이다. 특히 수적 열세에 몰려 총기와 같은 살상무기를 사용한 것이 시위를 폭동으로 악화시킨 결정적 요인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1968년 구성된 ‘아이젠하워 위원회’ 역시 시위대를 초기에 해산시키려고 과도하게 물리력을 사용했던 게 시위를 폭동으로 키운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대학시위를 중점적으로 다룬 ‘스크랜튼 위원회’ 역시 대학은 지적 호기심과 비판의식이 강한 곳이기에 다른 곳보다 쉽게 시위가 발생할 수 있으며 설사 폭력시위가 발생해도 폭동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보았다. 따라서 대학 시위를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막을 이유가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들 위원회가 지적한 것처럼 초기에 무리하게 시위를 진압하다 부상자나 사망자가 발생해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예기치 않은 사상자가 생겨 원래 시위 의도를 떠나 걷잡을 수 없이 시위가 커지게 되는 것이다. 미국 버밍햄 사건이나 프랑스 낭테르대 시위, 영국 브릭스톤 폭동 등이 초기에 지나치게 강경 대응 일변도로 나가다 폭동이라는 결과를 낳은 사례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영국 탄광노조 파업과 시위에서 대처 정부는 초기부터 강경 대응으로 나갔다. 그리고 노조의 항복을 받아냈다. 법과 원칙을 들어 처음부터 경찰을 동원해 무조건 해산하고 잡아넣는 게 능사가 아닌 것처럼, 달래고 설득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때그때 다르다. 정부 처지에선 어느 누군들 작은 시위가 폭동으로, 그리고 혁명으로 연결되는 걸 바라겠는가. 작은 부스럼이 악성 종양으로 커지는 걸 원치 않는 것처럼 말이다. 지나고 나서 ‘그때 그랬어야 했는데…’ 하며 후회할 뿐이다.

    미국 진상조사위원회의 분석결과가 놓치고 있는 것은 폭력시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정답이나 왕도가 없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만 정부 대응의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하는 변수는 확실하다. 바로 국민 여론이다. 여론을 등에 업은 대응방식은 항상 성공했다.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시위는 대부분 폭력적이고 과격했다. 그래서 관심을 모았다. 의도하건 의도치 않건 모든 시위에는 폭력성이 잠재돼 있다.

    모든 정부가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시위를 강조하지만 그건 정부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눈길을 끌지 못하는 시위는 ‘시위(示威)’라는 말 자체가 의미하는 것처럼 김빠진 맥주와 다를 바 없다. 역사 속 혁명이 모두 당시 법적 기준으로는 불법 폭력시위로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폭력시위가 단순 범죄로 끝나느냐 아니면 폭동을 넘어 혁명으로 이어지느냐는 전적으로 국민의 심중을 읽는 정부 능력에 달린 셈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