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구 절반이 10대 이하…실업률 46%
- “알 말리키는 또 다른 독재자일 뿐”
- 언론인 355명 피살…기독교인 공격도 늘어
- “미국이요? 사담 후세인만큼 미워요”
폐허가 된 바그다드의 한 마을에 사는 어린이들. 기자가 카메라를 꺼내 들자 뭔가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렌즈를 응시했다.
“아내, 아들이 시장에 감자를 사러 간다고 집을 나섰습니다. 잠시 후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큰일 났다는 걸 직감했어요. 달려가보니 수십 명의 몸이 조각나 있었습니다. 아내의 머리만 찾을 수 있었죠. 아들의 흔적은 찾지 못했고요. 아내의 머리칼과 눈빛이 생각나 도저히 멀리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당에 아내를 묻었어요.”
괜히 물어본 걸까. 그는 터진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히잡 쓴 기독교인
3월 20일로 이라크전쟁이 발발한 지 10년이 됐다. 이날 바그다드에선 20여 차례의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식당, 은행, 시장, 주차장 등에서 폭탄이 잇달아 터졌다. 57명이 사망하고 190명이 부상했다. 폭탄이 터져도 이라크인은 배후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밝혀지지도 않고, 밝혀진다 한들 달라지는 것도 없다. 알라의 은총으로 폭탄이 자신과 가족을 비켜가기만 빌 뿐이다. 5월 1일이 미국의 종전선언 10주년이건만, 전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하이다르 만수르(18)는 바그다드 아라사트가(街)에 터 잡은 옷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한다. 월급은 한국 돈 10만 원가량.
“친구 중 일자리를 구해 돈 버는 사람이 드물어요. 저처럼 학교를 다니지 못한 이들은 돈 벌 곳을 찾기가 더 어렵고요.”
하이다르의 부모는 10년 전 죽었다. 전쟁 초기 집이 폭격을 맞아 부모와 형 둘, 여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마침 삼촌 집에 놀러가 있던 그와 또 다른 여동생 나디아(16), 남동생 아하마드(14)는 목숨을 부지했다.
“미군의 폭격은 정말 무서웠습니다. 부모님 시신은 찾지 못했다고 해요. 신기하게도 아버지 구두 한 짝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고아에게 닥친 현실은 냉혹했다.
“어른들은 제가 동생들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거리 행상부터 시작했어요. 어느덧 10년이 지나 어른이 됐네요. 이따금 악몽을 꿔요. 폭격 맞은 집에서 부모님이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우리 집이 왜 희생됐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집을 폭격한 미군이 미울 뿐이죠.”
폭격으로 파괴된 바그다드의 옛 상점가. 고철 덩어리로 변한 차량이 나뒹굴고 있다.
“여자가 거리를 쏘다니기엔…아직도 위험해요. 여동생이 학교를 다니면 좋겠지만, 혹시 사고라도 당하면….”
그는 옷가게에서 자동차로 30분쯤 떨어진 알도라에 산다. 삼촌이 살던 집. 외과 의사이던 삼촌 가족은 내전이 한창이던 2006년 요르단으로 피난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나디아는 오빠를 기다리면서 집안일을 하거나 친척 아주머니가 맡긴 바느질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바깥에는 잘 나가지 않아요. 학교도 다니고 싶고, 친구도 사귀고 싶은데, 폭탄 테러가 겁나서 거리에 나갈 자신이 없어요.”
나디아는 이라크를 철권통치한 사담 후세인을 잘 모른다.
“외국인들은 사담 탓에 전쟁이 났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미국이 석유를 노리고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나디아는 위성방송을 보면서 세계를 익히고 있다고 했다. 아랍어 방송은 물론 미국 방송, 심지어 한국의 아리랑TV도 나온다.
“TV를 보고 있으면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아요. 예쁜 옷을 입은 유럽 여자들이 부럽기도 하고요.”
칼다니안족(族)인 하이다르의 가족은 이라크 인구의 10% 정도를 차지하는 기독교 신자다. 부모의 고향은 북부 모술 지역의 틸카이프. 하이다르가 태어나기 전에 바그다드로 이주해왔다. 기독교 여성은 무슬림과 다르게 히잡(이슬람식 머리수건)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나디아는 집안에서도 히잡을 쓰고 있었다. 나디아에게 기독교인이 왜 이슬람 복장을 하느냐고 물었다.
“오빠가 히잡을 쓰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요즘 바그다드에선 기독교인에 대한 공격이 늘고 있다. 예전엔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의 갈등이 심각하지 않았으나 전쟁 이후 알 카에다와 이슬람 급진주의자가 기독교인을 테러 표적으로 삼았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어김없이 기독교 교회를 노린 테러가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인 상당수가 급진주의자의 공격을 피하고자 나디아처럼 히잡을 쓰고 있다.
이라크는 최근 30년간 잇달아 전쟁을 치렀다. 1980~1988년 이란과의 전쟁, 1990년 쿠웨이트 침공, 1991년 걸프전쟁, 2003년 이라크전쟁, 2006~2007년 내전이 티그리스의 유려한 강물이 빚어놓은 대지를 할퀴고 지나갔다. 2011년 12월 이라크 사람들이 ‘공공의 적’으로 여기던 미군이 완전히 철수했으나 이라크는 여전히 혼돈 속에 있다. 종파 및 정파 간 대립이 날카로운 데다 내전이 남긴 앙금 또한 가시지 않아서다. 이슬람교 내부 갈등 또한 심각한 것. 이라크 인구의 65%가 시아파, 25%가 수니파다. 이라크는 소수파인 수니파가 장기 집권하다 2003년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시아파가 권력을 잡았다. 시아파인 누리 알 말리키 총리와 수니계가 주도하는 이라키야당(黨)을 양축으로 정치권이 다투고 있다.
‘나 몰라라 하고 떠난 美軍’
테러 집단은 원래 수니파보다 시아파에 더 많았다. 시아파 테러리스트는 미군 철수 이전 미군과 서방을 상대로 테러를 벌였다. 시아파 내부가 친미와 반미로 갈려 유혈충돌을 빚기도 했다. 2011년 12월 미군 철수 이후 시아파가 벌인 테러는 극소수다. 수니계 알 카에다의 테러활동은 외국인이 아닌 시아파를 향한 공격에 집중돼 있다. 수니파 과격집단은 시아파와의 대립을 통해 수니파의 결속을 다지고자 한다. 시아파 축제 때마다 수니파에 의한 테러가 벌어진다. 전문가 다수는 이라크의 현재 상황을 ‘비대칭 전쟁’이 마무리되는 단계라고 분석한다. 비대칭 전쟁은 국가 간 전쟁보다 강도는 약하지만 살상 수법이 잔혹하다. 테러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2006~2007년 내전 때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은 사라졌지만 종파 및 정파 간 대립은 아직도 거칠다.
3월 말 바그다드 알 사드르 지역의 시장은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수니파 무장세력이 시장을 폭파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아서다. 시아파 거주지인 시이테에서 하루 동안 20여 차례 폭탄이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의 일이다. 정육점을 운영하는 압달라(44)는 이렇게 말했다.
“시아, 수니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정치권이 자기네끼리 다투는 거예요. 우리야 양고기나 잘 팔리면 그만이죠. 시아, 수니의 정치인 탓에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겁니다.”
양고기를 사러 들른 주부 메르와(29)는 “미군은 나 몰라라 하고 떠나버렸습니다. 정치인은 국민이 아니라 종파를 위해 일합니다. 시신 처리하는 장의사들만 신났죠. 시아건 수니건 물, 전기나 제대로 공급해주면 좋겠어요. 물과 전기를 누가 더 많이 제공할 수 있느냐는 주제로 다툰다면 그건 대환영입니다.”
전쟁 초기 미군의 정밀 타격은 발전소, 하수시설, 수도시설, 통신시설에 집중됐다. 그 결과 이라크의 사회간접자본(SOC)은 재앙 수준으로 파괴됐다. 이라크인의 생활환경은 사담 후세인 시절보다 후퇴해 있다. 바그다드 수도국의 하심 하산 부국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는 매일 250만 입방리터(리터의 1000배)의 물을 생산하고 있지만 매일 100만 입방리터가 부족한 상황”이라면서 “바그다드 주민 700만 명이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유엔은 이라크 전체 가구 중 5분의 1이 안전하지 않은 물을 마시고 있다고 발표했다. 정육점에서 양고기를 사던 메르와는 이렇게 말했다.
“뇌물 안 주면 되는 일 없다”
바그다드의 한 아파트. 전기가 하루 4~8시간만 공급된다.
바그다드는 발전 및 송전시설이 부족해 하루 4~8시간만 전기가 공급된다. 지방도시는 사정이 더욱 열악하다. 키르쿠크에 사는 경찰관 살라디(33)의 하소연이다.
“전기가 부족해 냉장고는커녕 전등도 밝히지 못할 때가 많아요. 여름철에 더욱 심각해요. 에어컨을 켤 수 없어 노인들과 아이들이 폭염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곤 합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뒤집어놓은 후 수십억 달러가 재건에 쓰였다고 하는데 우리 생활은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어요. 그 돈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이라크 정부가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알 말리키 총리는 재건사업에서 가시적 성과를 거둬 2014년 총선 때 국민의 신망을 얻으려고 한다. 이라크 정부는 2013년부터 5년간 2500억 달러를 재건사업에 투자하는 동시에, 2030년까지 에너지 분야에 5000억 달러를 투입할 계획을 세웠다. 또 “2025년까지 주택 200만 호를 짓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다. 1단계로 500억 달러를 투입해 100만 호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현실로 나타날지는 미지수다. 정치권의 갈등이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부패가 심해 허투루 날아가는 예산이 많다. 알 말라키 총리도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나라가 초토화하고 민초의 삶은 피폐하지만, 이라크 정부는 가난하지 않다. 연간 330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해 2500만 배럴을 수출한다. 원유 수출로 월 80억 달러를 벌어들인다. 수출의 95%, 재정수입의 90%가 원유 수출에서 나온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라크의 원유 생산능력이 2020년 6100만 배럴, 2035년 8300만 배럴로 늘어나리라 예측한다. 재건사업에 쓸 돈은 부족하지 않으나 부정부패와 종파 및 정파 간 갈등이 재건의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
살람 하킴은 2003년 전쟁이 발발하기 전 바그다드 소재 건물 10여 채를 소유한 재력가였다. 그의 가족은 전쟁 발발 직후 요르단을 거쳐 독일로 피난 갔다가 3년 뒤 귀국했다.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의 재건축 허가를 받기 위해 시청에 들른 그는 깜짝 놀랐다.
“공무원들이 후세인 시절에 발급한 건물 소유 증명서는 휴지나 다름없다고 하더군요.”
그는 문제를 가볍게 해결했다. 시청 고위간부들에게 뇌물을 주자 새로 들어선 정부 명의의 증명서가 곧바로 발급됐다. 마당에 잔디를 깔 때도, 거실에 달 전등을 수입할 때도 관리에게 뇌물을 줘야 했다.
민간 경비업체 직원들. 테러가 빈발해 경비업이 활황이다.
전쟁 전에는 이라크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사담 후세인이라는 강력한 독재자가 버티고 있어 시위 조짐만 보여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아랍의 봄’ 여파도 시위에 영향을 미쳤다. 이라크인들도 이웃 나라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이집트, 튀니지에서 시민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는 소식에 고무돼 이라크인들도 알 말리키 정부에 저항하고자 거리로 나오고 있다.
저주받고 버림받은 세대
시민들이 거리에 나오는 이유 중 하나는 열악한 경제 상황에 있다. 이라크 중앙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실업률이 46%에 달한다.
알카비(49)는 바그다드 중심가에서 자동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비스마야의 신도시 건설현장에서 일한다. 외국계 기업에서 번역 일 등을 한다. 바그다드 동남쪽 10km 지점에 위치한 이곳에 60만 명이 거주하는 신도시가 들어선다. 알 말리키 이라크 총리가 밀어붙이는 100만 가구 건설의 첫 사업. 그는 중동 명문이던 바그다드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우리는 저주받은 세대라고 할 수 있어요. 27세 때 걸프전이 일어났습니다. 1991년부터 서방의 경제제재가 시작됐고요. 한창 일할 나이에 국가경제가 엉망이 됐고, 이윽고 미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사담을 좋아하는 이라크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는 폭정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요. 이라크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나쁜 사람이에요. 사담이 이끄는 이라크가 싫어 리비아로 떠났더랬습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그곳에서 영어교사로 일했어요. 사담이 권좌에서 쫓겨난 후 희망을 품고 이라크에 돌아왔지만 나라 꼴이…. 미국이요? 사담만큼 미워요.”
여론조사기관 ‘조그비’의 2011년 조사에 따르면 이라크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일자리다. 청년 실업이 특히 심각하다. 생활전선에 나설 수밖에 없는 10대들의 상황도 열악하기 그지없다. 청소년들은 후세인을 잘 알지 못했다. 어른들에게 들어 이름은 익숙하지만 TV를 통해서도 그를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중위 연령은 20.9세(2011년 기준)다. 인구의 절반이 10대 이하다. 10대, 20대가 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입은 전쟁의 상처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알카비가 ‘저주받은 세대’라면 10대, 20대 초반은 ‘버림받은 세대’다.
바그다드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알리(22)는 졸업 후 취직할 곳이 없었다. 관리에게 뇌물을 줄 돈이 있었다면 공무원, 연구원으로 일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라크에서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은 없었다.
“불만을 어떻게 표출해야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통해 미국, 유럽에서는 청년들이 시위를 통해 정부에 하고픈 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런 게 민주주의 아닌가요?”
알리는 수니파가 아니지만 매주 금요일마다 시위에 참여한다. ‘금요시위’에 참석하는 또 다른 청년 하디(20)는 이렇게 말했다.
“사담이 죽은 후 ‘또 다른 사담’ 미국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미군이 떠나자 사담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또 다른 사담의 무리’가 정부를 차지했고요. 그들은 사리사욕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청년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지 않아요. 이렇게라도 목소리를 내야 듣는 시늉이라도 할 것 아닙니까.”
끝나지 않은 전쟁
이라크는 아직도 독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알 말리키 총리는 후세인에 버금가는 독재 성향을 가졌다는 비난을 듣는다. 알 말리키 정부는 후세인 시절에 만든 법을 그대로 이용해 노동조합을 금지하고 정치적 반대자를 수감하고 있다. 언론 탄압도 심하다. 전쟁 발발 이후 피살된 언론인이 355명에 달한다. 2011년 9월, 언론인 하디 알 마흐디가 바그다드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는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을 맡아 정부의 부정부패, 뇌물수수를 고발하고 정파 대립을 비판한 언론인.
그의 직장 동료인 무스타파는 “누가 그를 죽였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누가 그랬는지 말조차 할 수 없다. 사담 시절과 달라진 것은 없다. 그저 사담의 자리에 알 말라키가 앉아 국민에게 재갈을 물리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라크 언론자유수호사회의 의장 오다이 하템은 ‘알 자지라’ 인터뷰에서 “정부기관으로부터 수차 위협을 당했다. 2008년 이후 여러 차례 주소를 바꿨고, 딸이 납치된 적도 있다. 알 말리키 정권이 후세인 시절보다 더 심하게 언론을 통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라크전 개전 40일 만인 2003년 5월 1일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의 항공모함으로 날아가 갑판 위에서 이라크전 임무 완수와 함께 사실상 종전을 선언했다. 이라크에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세계에 알린 것이다. 그 후 10년이 지났건만 이라크인의 삶은 후세인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거나 오히려 악화했다. 게다가 후세인이 죽으면서 시아-수니파 갈등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쟁의 상처 또한 오랫동안 아물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