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기소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날 최 회장은 법정구속됐다.
우리 중에 ‘자신의 사무’만 처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회인 대다수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면서 살아간다. 사무를 위임하는 이는 자연인일 수 있고, 회사나 기타 조직일 수도 있다. 사무처리를 위임받은 사람이 그 업무를 처리하면서 위임인이나 기업 등 조직에 손해가 발생하는 행위를 고의로 하면 민사상 손해배상책임 외에도 형사상 처벌을 받는다. 예를 들어 고의로 어떤 업무를 집행하지 않아서(부작위) 위임인에게 손해가 생기면 처벌받을 수 있고, 일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위임인에게 손해를 가했을 경우에도 배임죄의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배임죄는 중세 독일의 카롤리나 형법전에서 최초로 입법됐다. 당시 봉건영주가 신하의 대리권 남용을 막기 위해서 만든 것이었다. 독일 나치 시대에는 사회기강을 잡는다는 명분 아래 적용범위가 확대됐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을 거쳐 도입됐다.
배임죄에 대한 처벌이 과거 우리나라에서 건전한 사회 정착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만약 우리 형법에 배임죄는 없고 사기죄만 있었다면 사회가 몹시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보통 사기범의 고의를 증명하기가 어려워 사기죄로 기소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가조작, 자금조달을 위한 신주발행과 사채발행, 허위공시, 대표이사 또는 제1대 주주의 잦은 교체, 분식회계 및 횡령…. 경제계에서는 기묘한 방법을 이용한 사기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간 이런 기업범죄에 대해 철퇴를 내릴 수 있었던 것도 배임죄 덕분이다.
광범위한 ‘임무위배’
그런데 배임죄의 구성요건 표지가 되는 ‘임무위배’는 너무 광범위하고 의미가 모호하다. 오늘날 기업을 경영하는 것 자체가 대규모의 위험을 수반한다. 이 때문에 기업인에게는 배임죄가 기업 활동을 제한하는 요인이 된다. 배임죄는 고의를 요건으로 하나, 판례는 미필적 고의도 포함된다고 한다. 미필적 고의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런 결과가 발생해도 좋다’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한겨울에 사람을 폭행해 그가 길에 쓰러졌다고 해보자. 그대로 두면 얼어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죽어도 할 수 없지’ 하고 생각하고는 그를 버려두고 현장을 떠났다. 그 결과 이 사람이 얼어 죽었다면 살인죄가 성립한다. 은행 임원이 어떤 회사에 거액의 대출을 해주면서, 이 회사가 망할 가능성이 있고 망하면 대출금 회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출을 감행하고, 결국 이 회사가 망해 대출금 회수가 어렵게 되면 이 임원은 미필적 고의로 배임죄가 성립된다.
그런데 고의도 그렇지만 미필적 고의는 내심(內心)의 의사이기 때문에 확인이 불가능하다. 고의가 있는지 여부는 당시의 객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결정할 수밖에 없다. 판례를 보면 반드시 손해가 발생하지 않고 손해 발생의 위험만 있어도 처벌한다. 위임자에게 이익이 된 경우에도 처벌 가능하고, 수임인이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이득을 취한 바 없어도 처벌된다. 바로 여기서 무리가 생기는데, 대개는 투자 등으로 손해를 보게 되면 위임인은 물론이고 채권자나 경영권 쟁취를 노리는 적대적 주주, 모회사 또는 자회사의 주주, 심지어 노조에 의해서도 배임죄로 고발당할 수 있다.
배임은 민사로 해결해야
고발이 있는 이상 수사기관은 수사하지 않을 수 없다. 2011년 대법원 통계를 보면 그해 총 5716건의 횡령·배임죄 사건이 접수됐다. 이 중 무죄가 258건, 형 면죄가 4건, 면소가 9건, 선고유예가 116건, 공소기각이 12건이었다.
일단 피의자로 몰린 기업인은 판결 전 개인생활이 파괴되는 것은 물론, 해당 기업과 종업원 및 주주까지 일시에 공황 상태에 빠진다. 가정은 파탄 나기 쉽고 기업은 주가가 폭락하고 거래가 끊긴다. 배임죄는 너무나 쉽게 성립할 수 있고 수임인은 너무나 쉽게 전과자가 될 수 있다. 기업인은 자신의 행동이 아무리 사심 없는 것이고 또 개인적 이득을 취한 적이 없다 해도 나중에 배임죄로 처벌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늘 불안 속에 경영 일선에 나선다. 주로 기업인에게 적용되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특경가법)은 인신을 구속하는 징역 등 자유형만 인정되고 벌금형을 인정하지 않는다.
최근 새누리당 이명수 의원이 상법상 특별배임죄를 개정하는 법률안을 발의했다. 그 골자는 기업인이 ‘경영상 판단’을 한 경우에는 배임죄로 처벌하지 않는 방향으로 상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배임죄는 형법, 상법, 특경가법에 규정돼 있다. 이 의원은 이 중 상법상의 특별배임죄 규정을 경영상의 판단을 한 경우에 한정해 개정하자고 발의했다. 즉, 이 개정안은 우리 상법에는 없지만 미국의 판례 및 독일 주식법에서 인정하고 우리 판례에서도 간혹 인정하는 경영 판단의 개념을 법률에 명문화하자는 것이다. 경영상의 판단으로 인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 하더라도 형사처벌을 면해줘야 한다는 논리다.
실제로 최근의 판례를 보면 검찰과 법원이 배임죄에 대해 예전과 달리 상당히 신중하게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경영 판단을 이유로 배임죄 처벌을 면하게 하는 판결이 점점 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본질적인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배임의 본질은 배신이다. 배신은 윤리적인 문제이고 손해배상 등 민사적으로 해결돼야 할 문제다. 배임죄는 민사적 수단에 의해 해결해야 할 분쟁을 국가가 나서서 형사범으로 처벌하는 것과 같다. 이는 형벌권의 과도한 개입이며,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위험이 있다.
사실 본질적으로는 형법상 배임죄 자체가 문제다. 그러므로 일각에서는 형법상의 배임죄를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배임죄를 다루는 형법에 ‘경영자의 경영 행위를 면책하자’는 단서를 두긴 어렵다. 게다가 기본법인 형법의 개정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고 단시일 내에 개정되길 기대할 수도 없다. 경영 판단에는 죄를 묻지 않는 방향으로 상법을 개정하면, 이 논리가 형법 및 특경가법에 적용될 수 있어 형법이 개정되기 전에도 경영자의 경영 행위에 대해 형사적 면책이 가능해지므로 이 의원이 제시한 개정 방향은 옳다고 본다.
본래 ‘경영 판단의 원칙’은 과실로 경영 판단을 잘못한 경우 민사상 손해배상책임을 면하기 위한 이론이다. 그러므로 고의를 요건으로 하는 배임죄에 경영 판단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배임죄의 고의는 미필적 고의까지 포함하고, 미필적 고의는 과실 또는 중과실과 구별이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결국은 과실 또는 중과실의 경우에도 배임죄가 적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또 한 가지, 경영 판단의 원칙 자체도 개념 정립이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이 부분은 미국과 독일의 판례를 참고해 차차 정립해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이사회가 독립적인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점, 민사적 배상제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형사벌로 강하게 처벌해야 기업범죄를 막을 수 있다는 점 등의 이유로 개정에 반대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사회를 거쳤다고 해서 반드시 경영 판단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사회 또는 주주총회를 거쳤는지 여부와 배임죄의 성립은 관계가 없다. 그러나 민사적 구제수단이 불충분하다는 점에서는 공감이 가는 면이 있다. 따라서 배임죄의 구성요건 재검토와 함께 민사적 배상제도를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