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폐허가 된 바그다드의 한 마을에 사는 어린이들. 기자가 카메라를 꺼내 들자 뭔가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렌즈를 응시했다.
“아내, 아들이 시장에 감자를 사러 간다고 집을 나섰습니다. 잠시 후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큰일 났다는 걸 직감했어요. 달려가보니 수십 명의 몸이 조각나 있었습니다. 아내의 머리만 찾을 수 있었죠. 아들의 흔적은 찾지 못했고요. 아내의 머리칼과 눈빛이 생각나 도저히 멀리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당에 아내를 묻었어요.”
괜히 물어본 걸까. 그는 터진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히잡 쓴 기독교인
3월 20일로 이라크전쟁이 발발한 지 10년이 됐다. 이날 바그다드에선 20여 차례의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식당, 은행, 시장, 주차장 등에서 폭탄이 잇달아 터졌다. 57명이 사망하고 190명이 부상했다. 폭탄이 터져도 이라크인은 배후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밝혀지지도 않고, 밝혀진다 한들 달라지는 것도 없다. 알라의 은총으로 폭탄이 자신과 가족을 비켜가기만 빌 뿐이다. 5월 1일이 미국의 종전선언 10주년이건만, 전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하이다르 만수르(18)는 바그다드 아라사트가(街)에 터 잡은 옷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한다. 월급은 한국 돈 10만 원가량.
“친구 중 일자리를 구해 돈 버는 사람이 드물어요. 저처럼 학교를 다니지 못한 이들은 돈 벌 곳을 찾기가 더 어렵고요.”
하이다르의 부모는 10년 전 죽었다. 전쟁 초기 집이 폭격을 맞아 부모와 형 둘, 여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마침 삼촌 집에 놀러가 있던 그와 또 다른 여동생 나디아(16), 남동생 아하마드(14)는 목숨을 부지했다.
“미군의 폭격은 정말 무서웠습니다. 부모님 시신은 찾지 못했다고 해요. 신기하게도 아버지 구두 한 짝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고아에게 닥친 현실은 냉혹했다.
“어른들은 제가 동생들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거리 행상부터 시작했어요. 어느덧 10년이 지나 어른이 됐네요. 이따금 악몽을 꿔요. 폭격 맞은 집에서 부모님이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우리 집이 왜 희생됐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집을 폭격한 미군이 미울 뿐이죠.”

폭격으로 파괴된 바그다드의 옛 상점가. 고철 덩어리로 변한 차량이 나뒹굴고 있다.
“여자가 거리를 쏘다니기엔…아직도 위험해요. 여동생이 학교를 다니면 좋겠지만, 혹시 사고라도 당하면….”
그는 옷가게에서 자동차로 30분쯤 떨어진 알도라에 산다. 삼촌이 살던 집. 외과 의사이던 삼촌 가족은 내전이 한창이던 2006년 요르단으로 피난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나디아는 오빠를 기다리면서 집안일을 하거나 친척 아주머니가 맡긴 바느질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바깥에는 잘 나가지 않아요. 학교도 다니고 싶고, 친구도 사귀고 싶은데, 폭탄 테러가 겁나서 거리에 나갈 자신이 없어요.”
나디아는 이라크를 철권통치한 사담 후세인을 잘 모른다.
“외국인들은 사담 탓에 전쟁이 났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미국이 석유를 노리고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나디아는 위성방송을 보면서 세계를 익히고 있다고 했다. 아랍어 방송은 물론 미국 방송, 심지어 한국의 아리랑TV도 나온다.
“TV를 보고 있으면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아요. 예쁜 옷을 입은 유럽 여자들이 부럽기도 하고요.”
칼다니안족(族)인 하이다르의 가족은 이라크 인구의 10% 정도를 차지하는 기독교 신자다. 부모의 고향은 북부 모술 지역의 틸카이프. 하이다르가 태어나기 전에 바그다드로 이주해왔다. 기독교 여성은 무슬림과 다르게 히잡(이슬람식 머리수건)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나디아는 집안에서도 히잡을 쓰고 있었다. 나디아에게 기독교인이 왜 이슬람 복장을 하느냐고 물었다.
“오빠가 히잡을 쓰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