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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에펠탑의 기억 왜곡과 실학의 허구성

학문적 착시현상의 주범 ‘시대착오’의 오류

  • 오항녕│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에펠탑의 기억 왜곡과 실학의 허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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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공부를 하고 있다”고 나를 소개하면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재미있는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 한동안 그게 싫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역사학자가 무슨 옛날얘기나 해주는 사람인 줄 아느냐,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 귀여운 자부심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니 재미있는 얘기를 해달라는 분들의 말이 타당했다.
에펠탑의 기억 왜곡과 실학의 허구성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 기념작 에펠탑. 당시 에펠탑보다 관심을 끌었던 것은 식민지 인종을 전시하던 식민지관이었다. 시대의 야만이 부끄러웠던지 어딘가로 몸을 숨겼고, 에펠탑만 기억을 왜곡하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역사를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무엇보다 안타까워할 수 있는 이야기. 조금 철이 들고 나서는 그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어졌다. 역사학자 폴 벤느는 “역사는 첫째 진실의 축적이고, 둘째 줄거리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역사는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다. 나머지는 모두 여기서부터 나온다. 역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야기이기 때문에, 역사가 재생된다 해도 그것은 그저 소설 정도일 것이다. 역사가의 손에서 나온 체험은 행위자들의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서사(敍事·narration)이다.”(‘역사를 어떻게 쓰는가’ 폴 벤느, 이상길·김현경 옮김, 새물결, 2004, 21쪽)

남아 있는 사실들은 원인, 목적, 기회, 우연, 구실 등의 역할을 한다. 사실은 있는 그대로 뭔가 조직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변화시킬 수 없는 조직, 구조다. 역사는 ‘실측도(實測圖)’처럼 존재하지 않지만, 상대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렇게 역사적 진실은 존재한다. 그리고 ‘줄거리’가 있음으로 해서 이야기가 있다.

역사가 대부분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좋은 역사가는 진실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위대한 역사가는 그가 가진 관심 주제나 과제 안에서 가장 진실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다. 이야기(서사)는 역사가가 사실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가장 일반적이고 특징적인 역사 형식 중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가 ‘역사’ 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벤느는 역사는 우리가 ‘줄거리’라고 부르는, 물질적(=객관적) 원인(≒조건)과 목적(=자유의지)과 우연의 매우 인간적인 혼합체라고 정의했다.

복습 : 세 요소



에펠탑의 기억 왜곡과 실학의 허구성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낮았다면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한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가 여자였다는 것, 이집트 여왕이었다는 사실이 상황을 어떻게 만들어갔는지부터 이해했어야 한다.

‘역사란 객관적 조건, 자유의지, 그리고 우연의 매우 인간적인 혼합체’라는 말을 본 연재에서 한 적이 있다. 복습 삼아 다시 상기하자.

인간은 맨땅에 태어나지 않는다. 타고 나면서 주어진 조건이 있다. 벗어나기 어렵다. 어려운 게 아니라 아예 바꿀 수 없다. 남자/여자라는 것, 왕이라는 것, 학자라는 것, 농민이라는 것…. 때론 뼈대 있는 집안이라는 것, 협잡꾼 집안이라는 것, 이도저도 아닌 집안이라는 것…. 충청도에서 태어났다는 것, 전라도에서 태어났다는 것,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것, 얼굴이 누렇다는 것,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 무엇보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물학적, 경제학적 조건 등. 이는 모두 객관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주어진 조건대로 살지 않는다.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때론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으면서 뭔가 비전을 만들고 추구하고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실천한다. 이런 자유의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왕의 지위도 버릴 수 있고, 개천에서 용이 날 수도 있다. 이것이 역사의 둘째 동력인 자유의지이며, 목적의식을 가진 존재로서의 삶이다.

셋째, 우연이라는 변수가 있다. 우연이란 콩 심은 데서 팥이 난다든지, 주사위를 던졌을 때 앞서 던져 나온 숫자와 뒤에 던져 나온 숫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과 같은 임의성과는 다르다. 최근에 내가 내린 정의에 따르면, 우연이란 서로 원인이 다른 여러 사건의 만남이다.

객관적 조건은 역사를 해석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함에도 환원론의 우려가 있다. 어떤 하나의 이유로 역사 전개를 설명하려고 한다. 경제결정론, 지리결정론, 환경결정론이 그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사람들은 반도(半島) 근성이 있어서 누구를 섬기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고 선전했던 것이 하나의 사례다. ‘여자(남자)는 원래 그래!’ 하는 식의 발언도 객관적 조건을 절대화하는 사유방식에서 나온다. 객관적 조건만 고려하면 설명이 됐다고 위안을 받을지는 몰라도, 그 위안 뒤끝은 허전하다. 그리고 그 사건과 관련해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앞으로 그런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질 수도 없다.

객관적 조건의 맞은편에 의지만 강조하는 목적론이 있다. 마음만 먹으면 된다는 신념이 그것이다. 흥미롭게도 뭔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자유의지의 강조는 ‘하면 된다’는 구호에 담긴 무조건성과 통한다. 무조건성은 말 그대로 객관적 조건의 무시다. 이 자유의지의 극단에는 신이 있다. 신의 뜻대로, 목적의식만 강조하면 도덕적 요구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건이나 사태를 설명할 때 빈곤해지고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취약하다.

우연이라는 숨구멍

객관적 조건과 자유의지는 역사를 설명할 때 동시에 고려할 요소이지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막상 역사의 사건을 설명할 때는 곧장 둘 중 어느 하나에만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유혹이다. 쉽게 설명하려는 유혹. 역사학의 독약 같은.

여기에 우연이라는 요인까지 끼어들면 어떨까. ‘클레오파트라의 코’라는 것이 있다. 역사란 전체적으로 우연의 연속이라는, 우연의 일치에 의해서 결정되고 가장 뜻밖의 원인에서만 유래하는 사건의 연속이라는 생각이다(‘역사란 무엇인가’, E H 카, 김택현 역, 까치, 1997, 149~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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