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반기 들어 각국 통화는 미국 출구전략의 향방에 따라 크게 출렁였다. 양적완화 축소 예상으로 미 달러화에 대해 큰 폭의 약세를 보이던 각국 통화는 9월 중순 이후 상당 부분 회복세를 나타냈다. 9월 통화정책회의에서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가 양적완화 축소에 나서지 않고 10월에는 미국 정부 폐쇄 사태의 여파로 양적완화 축소 시행 시기가 늦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확산된 때문이다.
원화는 하반기 중 지속적으로 강세를 보이면서 주요 통화 중 가장 큰 폭으로 절상됐다. 6월 말 대비 10월 말 원화의 절상 폭은 8.3%에 달했다. 최근 경제가 회복되고 있는 유럽 지역의 통화가 대부분 상승세지만 원화의 절상 폭이 더 크다.
주요 교역상대국 통화에 대해 교역량을 가중치로 평균한 종합적 환율 수준을 나타내는 명목실효환율 기준으로도 원화의 강세 폭은 큰 편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추계한 국가별 명목실효환율 자료에 의하면 원화는 3분기 중 절상 폭이 5.4%로 61개 통화 중 절상 폭이 가장 크다. 소비자물가 변화까지 고려한 실질실효환율 기준으로는 원화의 절상 폭이 6~9월 중 5.2%로 베네수엘라(10.3%)를 제외하면 가장 큰 폭으로 절상됐다.
원화가 강세를 보이는 기본 원인은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로 외화 공급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9월까지 경상수지 흑자는 488억 달러에 달해 이미 지난해 전체 흑자 431억 달러를 넘어섰다. 연간으로는 66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상GDP 대비로는 5%를 넘어 2000년대 이후 최대 규모다. 올 들어 지난 9월까지 통관 기준 수출이 1.3% 늘고 수입은 1.9% 줄어 상품수지는 418억 달러의 대규모 흑자를 기록했다.
불황형 흑자
만성 적자 상태이던 서비스 수지가 지난해에 이어 흑자를 보이는 것도 경상수지 흑자를 늘리는 요인이다. 서비스 수지는 9월까지 흑자 규모가 46억 달러로 지난해의 27억 달러를 웃돌고 있다. 대규모 건설 서비스 흑자가 유지되고 있는 데다, 사업 서비스 적자 폭도 지난해 153억 달러에서 올해는 9월까지 50억 달러로 크게 줄었다. 이전소득수지는 9월까지 7억 달러가량 적자이지만, 본원소득수지는 30억 달러의 흑자를 유지하고 있다. 해외투자 증가에 따른 배당이나 이자수입이 늘어난 데 기인한다.
지난해 이후 지속되고 있는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는 수출입이 동반 부진하면서 나타나는 불황형 흑자 성격이 짙다. 원자재 가격 안정도 수입 억제를 통해 경상수지 흑자 확대에 기여한 요인이다. 최근 수출과 더불어 수입도 점차 회복세를 보이고 있으나 단기간 내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크게 줄어들기는 어려워 보인다. 내년에도 400억 달러 이상의 흑자가 예상된다.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이미 나타난 현상이다. 그럼에도 원화의 절상 추세는 뚜렷하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1.7% 절하되기도 했다. 경상수지가 대규모 흑자를 보이는데도 원화 환율 조정이 빠르게 진행되지 않은 것은 최근 몇 년간 미국과 유럽의 금융불안 등의 요인으로 자본 유출입이 불안정했기 때문. 유럽에서 재정위기가 주기적으로 발생할 때마다 해외 자본이 급격히 유출되면서 원화 절상 추세에 제동이 걸리고 일시적으로 대폭 절하되기도 했다.
2011년 이후 자본의 유입보다 유출 규모가 더 크게 나타나면서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에 따른 원화 절상 압력이 상당 부분 상쇄된 것으로 보인다. 2011년 자본 순유출 규모는 128억 달러에 달했으며 2012년에는 317억 달러로 커졌다. 올해도 9월까지 자본 순유출 규모가 432억 달러에 달한다.
자본의 순유출 추세가 이어진 것은 해외 자본의 국내 투자는 억제된 반면 국내 자본의 해외투자 규모는 점차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 자본 유입 규모는 2009년 527억 달러를 기록한 이후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지난해 345억 달러에 이어 올 들어 9월까지는 157억 달러를 유지하고 있다. 3종 세트로 불리는 선물환 포지션 규제, 외국인 채권투자 과세, 단기 외화 차입에 대한 부담금 부과 등의 정책이 해외 자본의 국내 유입을 억제한 듯하다.
반면에 국내 자본의 해외투자는 2009년 156억 달러에서 점차 늘어나 2012년 693억 달러를 기록했고, 올 들어 9월까지는 614억 달러에 달한다. 해외증권 투자와 기타 투자가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상반기 중 원화가 절하 추세를 보인 것은 연초 불거진 북핵 리스크, 3월의 키프러스 사태와 더불어 뱅가드펀드의 벤치마크 지수 변경에 따른 영향 등으로 외국인 자금이 유출됐기 때문이다. 5~6월에는 양적완화 축소 움직임이 가시화하면서 자금 유출이 크게 늘었다. 하지만 7월부터 외국인 투자자금의 흐름이 크게 바뀌었다. 상반기 중 국내 주식 매도에 나섰던 외국인 투자자들이 7월 이후 4개월째 대규모 순매수 추세를 유지했다.
양적완화 축소 움직임이 오히려 국내 주식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늘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양적완화 축소는 미국의 경기회복을 반영하는 것이어서 우리 수출 여건에 개선 요인이 될 수 있고, 여타 신흥국의 경제 불안으로 우리나라가 상대적 혜택을 본 측면도 있다. 다른 신흥국들은 구조적인 성장세 둔화와 함께 경상수지 적자, 고물가 등에 시달리면서 금융 불안 우려가 높은 데 비해 국내 경제는 점진적인 회복세를 보이고 있고 외환부문의 안정성도 높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