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업은 국민의 주거를 담당하는 중요한 산업이다.
최근 부동산 경기침체로 주택 건설이 부진하고 정부의 사회간접자본 투자도 예전만 못해 국내 건설 수주량은 지속적으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2012년 건설 수주액은 101조5000억 원으로 2005년 이후 7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특히 정부가 대형 공사에 최저가 낙찰제를 시행하고, 건설자재 원가와 건설노동자 임금 상승으로 건설 현장의 여건은 날로 악화하고 있다.
건설사들이 전반적으로 수주물량 축소와 채산성 악화라는 이중고를 겪는 가운데 종합건설사로부터 하도급을 받아 실제 시공을 담당하는 전문건설사들은 여기에 불공정한 하도급 거래 관행까지 더해져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전문건설업은 종합건설업에 비해 시장 규모가 작을 뿐 아니라 업체 규모도 평균 6분의 1수준으로 영세하지만, 종합건설사보다 업체 수는 4배, 종사자 수는 2배 이상 많다. 종합건설사 실적의 절반은 전문건설사들이 하도급을 받아 시공한 것이다. 이 때문에 불공정 하도급으로 전문건설사들이 생존 위기에 내몰리면 전문건설사들의 부실에 그치지 않고 사회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더욱이 건설업에 종사하는 일용직 근로자가 많아 전문건설업계의 위기는 곧 서민의 위기라 할 수 있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힘입어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올 한 해 건설업계에 만연해 있던 불공정 하도급 거래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개정하는 등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다. 국회도 이와 관련된 다양한 입법활동을 벌였다. 전문건설업계 종사자들은 “올해는 어느 때보다 불공정 하도급 관행 개선 성과가 많은 한 해였다”고 평가했다.
‘악마의 손’ 부당특약
전문건설업계 관계자들은 그동안 ‘악마의 손’처럼 전문건설사들의 목을 죄어온 부당특약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게 됐다는 점을 가장 높이 평가한다. 지난 6월 27일 부당특약 무효화를 담은 건설산업기본법(건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전에는 원청사와 하도급사가 하도급 계약을 체결할 때 원청사가 표준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갖가지 특약조항을 계약서에 담아 비용과 부담을 전가했다. 원청사는 설계변경이나 경제상황 변동에 따른 계약금액 조정을 거부하고, 공사 내용 변경에 따른 계약기간 변경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도급사는 이런 특약에 발목이 잡혀 늘어난 비용과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건산법 개정안은 부당한 특약을 무효화할 수 있도록 했다. 계약 체결 당시 예상하기 어려운 내용에 대한 책임을 하도급사에 일방적으로 전가하거나, 계약 내용을 원청사가 일방적으로 정해 이익을 침해하는 경우, 또는 계약 불이행 책임을 과도하게 책정하거나 민법 등이 인정한 권리를 배제하거나 제한하는 등의 부당특약을 무효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7월 2일에는 부당한 특약을 무효화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부당특약 자체를 설정하지 못하도록 한 하도급 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개정안도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에 따르면 계약서에 기재되지 않은 비용을 부담시키는 약정을 못하게 막고, 원사업자가 부담해야 할 민원처리나 산업재해 등과 같은 비용을 하도급사에 부담시키는 약정 등 부당특약을 설정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이는 계약 단계에서부터 상하 수직관계에 따른 일방적 갑의 횡포를 막기 위한 조치로 대다수 전문건설사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시행령 개정으로 하도급대금 지급보증 면제대상을 기존 4000만 원에서 1000만 원으로 축소한 것도 전문건설사들의 숨통을 틔워줬다. 또한 원사업자의 당좌거래 정지, 부도, 파산, 회생절차 개시 등으로 하도급대금을 지급할 수 없거나 하도급대금을 2회 이상 지급하지 않을 경우 보증기관이 보증금을 30일 이내에 지급하도록 의무화하는 등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개정돼 하도급사들은 공사를 해주고도 대금을 받지 못하는 억울한 일을 면하게 됐다.
건설업계는 수주물량 감소와 채산성 악화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강화한 것 역시 불공정 하도급 행위를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원청사가 지위를 이용해 기술탈취 행위는 물론 부당한 단가 인하, 부당한 발주 취소와 부당 반품행위 등에 대해 하도급업체가 본 피해액의 3배까지 배상하게 한 것으로 지난 4월 30일 국회에서 관련 법이 통과됐다.
“수평적 생산체계로 가야”
앞에서 살펴본 여러 성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전문건설 관계자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와 국회가 내놓은 처방은 불공정 하도급에 대한 개별적 대책이나 불공정 행위에 대한 사후 감시와 처벌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전문건설 관계자들은 지금까지의 성과만으로는 건설업계에 만연한 불공정 하도급 거래 관행을 뿌리 뽑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한 전문건설 관계자는 “다양한 제도 개선에도 불구하고 불공정한 하도급 거래가 생기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지는 못했다”며 “표준계약서 작성 의무화나 분리발주 법제화 등 하도급 계약 단계에서부터 불공정 거래가 싹트지 못하도록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상 전문건설공제조합 이사장은 “건설공사 전체로 보면 발주자가 갑, 원도급자가 을이지만, 수직적 다단계 생산체계를 거치면서 원도급자가 새로운 갑이 됨으로써 많은 전문건설업체가 경제적 약자인 하도급자로 전락하고 있다”며 “분리발주와 주계약자 공동 도급제와 같은 수평적 발주생산체계를 활성화해 종합·전문건설업체가 수직적 갑을관계가 아닌 수평적 협력관계가 되도록 바꿔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계약자 공동 도급제란 종합건설업체가 주계약자로 종합적인 공사의 계획과 관리·조정 역할을 맡고, 전문건설업체는 부계약자로 해당 공사를 직접 시공하는 방식을 뜻한다. 공동 도급제를 시행하면 전문건설업체는 하도급 계약이 아닌 부계약자로 발주자와 직접 계약을 맺게 된다.
건설업계에 공정한 거래 질서를 뿌리 내리게 하려면 무엇보다 계약 단계에서부터 공정성이 확보되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부당특약 설정 금지, 부당특약 무효화 등은 사후적 조치의 성격이 강해 하도급 계약 체결 때부터 공정성이 확립되도록 표준계약서 사용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 전문건설사 대표는 “가뜩이나 일감이 줄어든 상황에서 일감을 주겠다는 원청사에 을의 처지에서 표준계약서 작성을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하도급 계약 때 부당특약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표준계약서 작성을 의무화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고 말했다.
이종상 이사장도 “표준하도급 계약서 사용은 공정한 하도급 거래 질서 확립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자 시작점”이라며 “현실적으로 전체 건설공사에 대해 표준계약서 사용 의무화가 어렵다면 우선 공공 공사만이라도 표준계약서 사용을 의무화하고, 민간 공사의 경우 표준계약서 사용 업체에 대한 인센티브를 강화해나가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전문건설 관계자들은 표준계약서 작성과 함께 하도급 입찰제도를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하는 것도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원청사가 재입찰을 반복해 입찰 가격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리지 못하도록 해야 일한 만큼 제값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입찰제도 투명화가 관건
Y건설 K대표는 “하도급사들이 일한 만큼 제값을 못 받는 것은 불투명한 하도급 입찰제도 때문인 경우가 많다”며 “하도급 입찰 때 낙찰이 이뤄졌는데도 뚜렷한 사유 없이 재입찰을 되풀이해 공사가액을 떨어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전했다.
전문건설업계는 원도급사가 경쟁입찰로 하도급사를 선정하게 되면 입찰 종료 즉시 입찰 참가자에게 하도급계약의 예정가격과 최저가 입찰금액, 낙찰가격과 낙찰자를 공개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누가 얼마를 써내 낙찰받았는지 공개되면 부당하게 재입찰을 반복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하도급 입찰의 투명성만 제고해도 하도급 입찰의 공정성은 자연히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전문건설업계는 불공정행위를 유발하는 환경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일례로 건설업체가 법정관리 등 회생절차에 들어갔을 때 하도급공사 노임을 공익채권에 포함시키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 현재는 원도급 건설업체가 기업회생 절차에 들어가면 하도급업체의 공사대금은 최장 10년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쳐 상환받게 된다. 이 때문에 하도급업체는 원청사가 법정관리 등에 들어가면 받을 돈은 못 받으면서 줄 돈은 줘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이종광 연구위원은 “회생절차를 규정한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은 회생 기업의 근로자 임금과 퇴직금을 우선 변제가 가능한 공익채권으로 분류해 근로자를 보호하는데, 이보다 열악한 상황에 놓인 하도급업체의 현장근로자는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며 “하도급업체 현장근로자의 임금도 우선 변제가 가능한 공익채권에 포함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해 현장근로자를 보호하고 하도급업체의 자금난을 완화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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