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룡, 방하남, 서승환, 문형표, 최수현…
- “학연, 지연 안 따지면 입각할 인재 더 많다”
- 서울중 폐교로 전국 수재들 몰려
- 법조, 공직보다 의사, 교수, 연구원 선호
현재 박근혜 정부에서 서울고 27회는 장관급만 5명에 달한다. 서울고 선배 전체(3명)보다도 많고, 경기고 출신 전체보다도 많은 숫자다. 가히 ‘서울고 27회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삼성 사장단에도 4명 포진
서울고 27회가 이렇게 잘나가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한 동기생은 “우리도 모르지” 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는 “한 학교의 특정 기수가 이 정도로 요직을 차지하며 국가를 이끌어가는 것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며 “그렇다고 이들이 서로 연줄로 연결돼 그 자리에 올랐다고 보지 않는다. 박 대통령이 앞으로도 학연, 지연을 따지지 않고 전문성만으로 인재를 기용한다면 우리 동기들 중에서 더 많은 숫자가 입각할 수 있다고 본다. 그만큼 능력 있는 인재들이 사회 곳곳에 포진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의 말처럼 이들은 서울고 27회 동기라는 점 이외의 공통점을 찾기 힘들다. 출신지역도 유진룡 장관과 서승환 장관, 문형표 장관후보자(이하 ‘장관’으로 표기)는 서울이지만 방하남 장관은 전남, 최수현 원장은 충남이다. 고교시절에도 문 장관과 최 원장은 제2 외국어로 독일어를, 나머지 3명은 불어를 선택해 반이 달랐다. 대학도 유 장관과 최 원장은 서울대 무역학과와 생물학과, 서 장관과 문 장관은 연세대 경제학과, 방 장관은 한국외대 영어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에도 유 장관과 최 원장은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의 길에 들어섰고, 나머지 3명은 학계로 진출했다.
유 장관과 최 원장은 오랜 공직생활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은 경우이며, 학계로 진출했던 서 장관, 방 장관, 문 장관은 아이디어와 소신을 인정받아 박근혜 대선캠프에 발탁됐다.
박정희 대통령 때 국방장관을 지낸 서종철 씨가 부친인 서 장관은 시장주의 경제학자로 박근혜 당선인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대선캠프에서 주택부동산정책 TF(태스크포스) 단장을 맡았다. ‘행복주택 프로젝트’와 ‘목돈 안 드는 전세 대책’ 등 박 대통령 부동산 공약이 그의 작품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학계에서도 손꼽히는 도시 및 주택 전문가다. 방 장관은 2011년 고용복지정책 세미나에서 노동연구원 측 토론자로 참석해 ‘고용-복지 벽 허물어야 한다’는 아이디어로 박 대통령의 눈에 띄어 입각하게 됐다는 후문이다. 문 장관 역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 대통령이 대선 준비를 위해 꾸린 국민연금 TF에 참여해 현재 기초연금 정부안의 토대인 국민연금 기초연금 연계 아이디어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학연의 힘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다. 그러고 보면 삼성그룹에서도 서울고 27기의 약진이 눈에 띈다. 윤용암 삼성자산운용 사장, 김재권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글로벌운영실장(사장), 정유성 삼성석유화학 사장, 변승완 삼성탈레스 대표, 유홍렬 삼성물산 화학본부장(전무), 정방환 삼성전기 미주법인장 등이 서울고 27회다. 우리 기업 CEO 전체를 보면 경기고 출신이 많지만 삼성엔 유독 서울고 출신이 많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학연 지연보다 실무 인재를 선호하는 삼성의 조직문화가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전국구’의 힘
1974년 서울지역 고등학교가 평준화하기 전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수재 학교는 경기고였다.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가 명문고의 자존심을 걸고 경쟁하긴 했지만 서울대 합격자 수나 사법고시 합격자 수에서 경기고와 서울고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였다. 1946년 개교한 신흥 공립학교인 서울고가 일제강점기 경성제1고등보통학교에서부터 이어진 오랜 전통의 경기고를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다. 경복고는 일제강점기 경성제2고등보통학교가 전신이다. 당시 ‘경기고는 공부만 아주 잘하는 학생, 서울고는 공부도 잘하면서 세련되게 잘 노는 학생, 경복고는 촌스럽지만 우직하며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라고 세 학교를 비교하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줄곧 2위에 머물던 서울고에서 어떻게 27기 같은 ‘돌연변이’ 집단이 나온 것일까. 서울고 27회 동기회 총무를 10년 넘게 맡고 있는 강승문 한강농수산 사장은 “27기는 평준화 이후 후배들과는 물론, 위 선배들과 비교해도 우수한 학생들이 모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27기는 1972년 3월 입학해 1975년 2월 졸업했다.
“우리 1957년생은 선배 세대에 비해 인구가 급증하던 시기에 태어났다. 그만큼 입시경쟁도 치열했다. 더구나 우리 바로 위 선배들까지만 해도 서울중학교에 입학하면 서울고까지 무시험으로 진학했다. 그런데 1970년 중학교가 평준화하면서 서울중학교가 폐교했다. 바로 우리 기수부터 100% 입학시험으로 신입생을 선발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서울뿐 아니라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방 장관도 전남에서 올라왔고, 최 원장도 충청도에서 올라왔다. 그러니 학교는 서울에 있어도 동문회는 제주도 지부까지 전국적으로 다 만들어져 있을 정도다. 전국의 수재들이 경쟁했으니 당연히 입학 성적도 좋았다. 합격 커트라인이 경기고와 1점밖에 차이가 안 났다. 만점 합격자도 경기고만큼 수두룩했다. 우리 다음 기수인 28회까지 전국적으로 선발했다가 29회부터 고교평준화가 이뤄졌다.”
그는 27기가 졸업할 때 서울대 합격자가 경기고보다도 더 많았다고 자랑했다. 그런데 당시 입시전문지 ‘진학’에 따르면 1975년 서울대 합격자수는 경기고 512명, 서울고 435명으로 차이가 있었다. 물론 서울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숫자는 아니고 해당 학교별 발표 자료를 추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 강 총무는 “그건 재수생, 삼수생까지 포함한 숫자다. 고3에서 바로 입학한 숫자는 380명 정도로 우리가 경기고보다 더 많았다. 당시 우리가 직접 확인했기 때문에 내 기억이 정확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27회 때문에 후배인 28회가 손해를 많이 봤다고 했다.
“28회도 전국에서 인재들이 올라왔다. 그런데 교수나 연구원 쪽으로 진로를 선택하려 해도 바로 1년 선배인 우리가 선점하고 있으니까 길이 막혔다. 그래서 학계나 연구기관보다는 기업 쪽으로 간 후배가 많다.”
교수·의사·연구원 300명 넘어
서울고 27회 동기회에서는 졸업생 730여 명 중 작고하거나 이민 등으로 근황 파악이 안 된 경우를 제외하고 600여 명의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 졸업생들의 직업을 분류해보니 의사만 100명이 넘었다. 대학교수 또한 100명이 넘었다. 연구기관 등에 몸담고 있는 경우도 50명이 넘었다. 지금은 이직이나 이민 등으로 줄어서 그렇지 처음엔 교수와 의사 숫자가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법조계는 의외로 적어 12명에 불과했다. 공인회계사 등 전문직도 10명 안팎이었고, 언론인도 10여 명에 불과했다. 경기고는 법대 등 인문계에 강해 ‘엘리트형 인재’가 많고 서울고는 이공계에 강해 ‘전문가형 인재’가 많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 듯하다. 서울고 27회 출신 교수와 연구원들을 분석한 결과도 이공계 쪽 비율이 훨씬 높았다. 특히 CEO의 경우 이공계 출신이 적은 국내 기업 풍토에서도 서울고 출신 사장들은 자연계열 출신이 많았다.
법조계는 물론 행정고시나 외무고시 등을 통해 직업공무원으로 진출하는 숫자가 적은 이유에 대해 한 동기는 “서울고 교풍 때문”이라고 했다. 서울고 교훈은 ‘깨끗하자 부지런하자 책임 지키자’다.
“서울고 출신은 연줄을 만들고, 로비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하지 않고도 내가 잘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우린 1학년 때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 남 눈치 안 보고 깨끗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데 가장 적합한 직업이 의사, 교수, 연구원이다. 사실 법조계란 곳이 혼자 깨끗하다고 살아남는 사회는 아니지 않은가.”
법조계로 진출한 인사들은 그렇게 빛을 보진 못했다. 박삼봉 대전고등법원장 겸 특허법원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부장판사 때 일찌감치 옷을 벗었다.
“법조계 쪽이 약하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다들 잘나갔다. 조관행 변호사만 해도 판사 시절 그 기수에선 선두였고, 정병욱 변호사도 공안검사로 이름을 날렸다. 먼저 잘나가면 견제가 심하지 않나. 좀 억울하게 옷을 벗은 감이 없지 않다. 일찍 옷을 벗은 이유란 게 현실과 타협하고 싶지 않은 성격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전문직이 많은 이유
27회 동기생들은 “곁눈을 팔지 않고 순수하게 자기 일에 몰두하다보니 전문직이 많고,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가 많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 연구 분야, 특히 이공계에서 이름을 빛낸 이가 많다. 송홍규 강원대 생명과학부 교수가 미국에서 발행되는 세계적 인명사전 ‘마르퀴스 후즈후’에 등재된 것을 비롯해, 이종수 포항공대 신소재공학과 교수, 박종문 포항공대 화학공학과 교수, 구본철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윤태양 포항산업과학연구원 강구조연구소장 등은 이공계 최고의 명예인 한림원 정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최인표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면역치료제연구센터장은 노화를 억제하는 유전자와 그 기능을 세계 최초로 규명해 한국을 빛냈으며, 최용경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의학연구소장은 OECD 생명공학작업반 부의장에 3년 연속 선임됐을 정도로 세계적인 생명공학자로 명성이 높다.
벤처업계에도 포진해 있다. 변재용 한솔교육 대표가 교육시장에 새바람을 일으켰는가 하면, 이명근 씨는 네트워크 통합(NI) 전문업체인 인터링크시스템을 창립해 초창기 벤처붐을 주도했다. 김병규 (주)아모텍 대표는 척박한 국내 전자 부품·소재 분야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고, 어호선 코모바일 대표는 무전기 앱 티티톡을 개발해 글로벌 벤처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세명기독병원 에스포항병원 에스서울병원을 보유한 의료법인 한성재단 한동선 이사장도 의료사업가로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김정호 전 자유기업원 원장도 서울고 27회다.
건축계에서도 민경식 민경식건축디자인 대표와 이은영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가 눈에 띈다. 공간건축사무소 대표를 지낸 민 대표는 세계적인 건축 디자이너로 이름이 알려져 있고, 이 교수 역시 독일 슈투트가르트 시립중앙도서관을 설계하며 주목을 받고 있다. 석궁테러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부러진 화살’의 실제 주인공인 김영호 전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도 서울고 27회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암세포를 수학적인 알고리즘으로 풀어내며 세계로부터 주목을 받은 천재 수학자였다고 한다.
한 동문은 서울고 27회가 주목받은 것에 대해 우려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주목을 받을수록 그 사회에서 견제가 심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기업체 같은 경우 전문성이 있음에도 학교 편중이 아니냐는 견제 심리가 작용해 승진에서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다는 것. 실제 몇몇 기업 임원은 자기 이름이 거론되는 걸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3년 내리 수석
1946년 개교한 서울고는 1980년 지금의 서초구 부지로 이전할 때까지 서대문 옆에 있는 경희궁 자리에 있었다. 27회는 이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원래는 일제강점기에 경희궁을 허물고 세운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있었다. 3만4000평(약 11만2200㎡) 규모의 경희궁 전체가 캠퍼스였던 만큼 다른 학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강 총무는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학교였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학교가 넓다고 해도 학생들의 일과는 똑같았다. 집, 학교, 도서관 오가기를 반복했다. 밤 11시까지 모두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그래도 남자들만 모여 있다보니 사건 사고가 많았다. 그런 이야기는 할 수 없고(웃음)…. 아무래도 사춘기다보니 이성에 관심이 있을 때 아닌가. 인근에 있는 이화여고, 경기여고와 함께 구락부(연합동아리) 활동을 많이 했다. 그때 영자신문반을 했던 방 장관이 주위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외에도 학교 축제나 문화제를 하면 우리도 보러 가고 여학생들도 보러 오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눈이 맞고, 그게 대학까지 이어져 결혼까지 한 경우가 많았다. 우리 동기들의 배우자 출신 고교를 조사해보면 경기여고, 이화여고가 압도적으로 많을 거다(웃음).”
당시 이과에서는 전교 1등을 놓고 경쟁이 치열했지만 인문계에서는 박삼봉 대전고등법원장이 3년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장관들은 다들 성실한 친구들이었다. 방 장관은 뒤늦게 유학까지 가서 성공한 케이스다. 서 장관은 다리가 약간 불편했는데, 그래도 위축되는 일 없이 활달하고 성격이 좋았다. 문 장관은 공부만 하는 학구파였다. 유 장관은 동문회 OB음악회에서 테너로 활동할 정도로 노래를 잘한다. 공부는 최 원장이 제일 잘했나?”
내후년인 2015년은 이들이 서울고를 졸업한 지 40년이 되는 해다. 동기회는 벌써부터 행사를 기획하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라고. “입각한 친구들이 국민의 지탄을 받지 않고 좋은 결실을 얻어 40주년 기념행사를 자랑스럽게 했으면 좋겠다.”
그건 국민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