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박용인
내 텐트로 건너온 아파 셰르파(Sherpa)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 에베레스트 등반을 계속할 수 없다고. 두꺼운 우모(牛毛)복을 입은 채 침낭 속에 들어가 번데기처럼 웅크리고 있어도 이미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든 지 오래다. 몇 마디 말을 나누느라 산소 마스크를 잠시 벗었을 뿐인데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다.
여기까지가 나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이곳은 신들의 영역이라는 해발 8000m의 사우스콜 아닌가. 산소도 지상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죽음의 지대. 인공산소를 마시고 있다 해도 평지와 같을 순 없다.
이곳 마지막 4캠프에서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가파르게 이어지는 동남릉은 네팔과 티베트를 가르는 경계다. 동시에 삶과 죽음의 경계이기도 하다. 고산(高山)에서 무리한 욕심은 죽음을 낳는다. 이미 많은 경험과 자료를 통해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이곳까지 어떻게 왔는가. 첨단 과학이 동원된 점보비행기가 날 수 있는 고도를 순전히 내 발로 올라왔다. 눈앞의 에베레스트 정상을 포기하기엔 억울하다.
내가 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시아 변방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네팔까지는 물리적인 거리도 멀지만, 그것만이 억울한 마음이 들게 한 전부가 아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기 위해 지난 10년간 지독한 훈련을 해왔다. 마라톤 풀코스를 수십 번 완주했고, 주말 훈련 산행을 빼먹지 않았다. 이 산에 오기 직전,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고소증에 대비하려고 LA에서 가까운 멕시코 최고봉에도 올랐다. 내가 정상에서 보낼 무전을 베이스캠프에서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을 동료 이정현과 함께.
이번 등반의 목적에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개인 기록 경신도 포함돼 있다. 훈련 기간을 뺀 지난 6년 동안 여섯 대륙 최고봉을 모조리 올랐다. 1999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963m)에서 시작해 남미 아콩카과(6959m), 유럽 엘부르즈(5642m), 북미 매킨리(6194m), 남극 빈슨매시프(4897m), 오세아니아 칼스텐츠(4884m)를 차례로 올랐다. 이제 아시아의 에베레스트만 남았다. 이 산을 오르기만 한다면, 7대륙 최고봉 등정의 긴 여정이 비로소 끝난다.
세븐 서미터
이곳 8000m 최종 캠프에 닿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던가. 베이스캠프에서 1캠프, 2캠프, 3캠프를 오르내리며 한 달 넘게 전투처럼 등반해왔다. 정말이지 너무도 안타까운 희생도 있었다. 악마의 입 같았던 얼음폭포 아이스폴에서 일어난 사고. 얼음기둥이 무너지는 바람에 우리 팀 셰르파 두 명을 잃었다. 그런 희생과 고생을 감내하며 겨우 오른 마지막 캠프에서 그만 멈춰야 한다니.
오르고 싶다. 7대륙 최고봉을 모조리 오르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세븐 서밋(Seven Summit)’이라고 한다. 나 역시 ‘세븐 서미터(Seven Summiter)’가 되기 위해 에베레스트의 위험과 맞설 의지와 준비가 충분하다. 하지만 히말라야 등반은 하늘이 도와줘야 한다. 준비가 아무리 철저하더라도 오늘처럼 일기가 나쁘면 등반은 끝이다. 눈보라가 계속되면 오르는 것뿐만 아니라 하산도 위험천만한 일이된다.
억울하지만, 신뢰하는 파트너 아파 셰르파의 경험과 판단을 믿어야 한다. 그는 이미 에베레스트를 15번이나 올랐고, 네팔에서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셰르파니까. 고산 등반에서 욕심은 죽음과 항상 붙어 다닌다. 네팔에서 불어와 이 고개를 넘어 티베트로 달리는 바람은 쇳소리를 낸다. 물어뜯고 할퀴고 모든 걸 날려버리려는 바람 탓에 꽁꽁 얼어붙은 텐트는 쉬지 않고 서걱거린다.
두꺼운 침낭 속에 웅크리고 있지만 파고드는 추위는 어쩔 수 없다. 텐트 안을 온통 코팅시켜버린 성애가 내 헤드랜턴 불빛을 받아 별처럼 반짝인다. 따뜻한 차 한 잔이 간절히 그립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하루 종일 굶었다. 낮은 기압 때문에 밥맛도 없지만, 입술이 터져 음식을 먹기가 힘들다. 달콤한 사탕을 먹어도 쓴맛이 난다.
내 나이 예순넷. 체력엔 자신 있으나 성공 여부는 모를 일이다. 날이 좋아 예정대로 출발하더라도 밤새워 위험천만한 고공의 칼날 능선을 가야 한다. 12시간쯤 실수 없이 형극의 길을 올라야 정상이다. 정상에 무사히 오른다는 보장도 없으니 억울해하지 말자. 셰르파의 등반 포기 선언은, 나를 살리려는 어떤 운명의 계시인지도 모른다.
내가 4캠프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1시였던가. 내가 어떻게 이곳 8000m까지 올라왔지? 불과 몇 시간 전의 기억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나와 함께 오른 셰르파들이 드넓은 사우스콜에 두 동의 텐트를 치느라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바람을 피한다며 바위에 쪼그리고 앉아 그저 멀거니 그들을 바라만 봤다. 티베트로 넘어가는 미친 바람이 텐트를 빼앗아가려는 듯 세차게 불었다. 텐트는 잔뜩 부풀기만 할 뿐 도무지 작업에 진척이 없었다.
텐트가 겨우 완성됐고 셰르파들은 내게 그 속에 들어가 쉬라고 손짓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침낭 속에서 잠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무중력 속을 헤매는 중이다.
베이스캠프가 그립다. 지금쯤 더그는 베이스캠프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곳을 떠난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사람 좋은 그가 무척 보고 싶다.
제한 없는 팀(Team No Limits)
사람은 어떤 만남에서 영감을 얻는다. 그것이 설사 작은 계기라도 운명적으로 작용할 때가 있다. 나는 2002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 봉을 오를 때 미국 산악인 한 명을 만났다.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더그 투미넬로다.
더그는 지금 우리 팀 리더다.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장교로 한국에서 근무하다 변호사로 진로를 바꿨다고 한다. 그는 등반 잘하는 변호사로 미국에서 잘 알려진 산악인이다. 그런 더그와 나는 같은 날 함께 정상에 올랐다. 더그 역시 7대륙 최고봉 등정을 추진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등반은 무상의 행위다. 산에서는 경쟁이 없기 때문에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서로 동지애마저 느낀다. 매킨리 등반은 힘들었다. 나는 빙하가 갈라진 크레바스에 빠졌다가 두 시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구조되기도 했다. 고산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처음으로 엿본 때가 바로 이때였다. 우리 둘은 거기서 허물없이 친해졌고, 일상으로 복귀한 뒤로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어느 날 더그가 놀라운 제안을 했다. 에베레스트에 가자고.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만들었는데, 나도 동참하라는 것이었다. 더그가 만든 원정대 이름이 재미있었다. ‘제한 없는 팀(Team No Limits).’ 제한이 없다는 것은 극한의 모험과 등반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자기 능력껏 해보라는 뜻도 내포돼 있었다. 능력이 있어 정상을 올라야겠다면 도전하는 것이고, 한계치까지 노력하다 안 되면 그만둬도 좋다는 팀. 흥미로웠다.
LA에서 내가 소속된 재미한인산악회도 오래전부터 에베레스트 원정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나는 2001년 에베레스트 근처에 있는 해발 6201m의 아일랜드 피크에 올랐다. 그리고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정찰했다. 히말라야 원정은 등반보다 오히려 그 준비 과정과 행정처리가 더 힘들다는 걸 그때 알았다.
원정 경비도 문제였다. 에베레스트 입산료는 원정대당 5만 달러였고, 대원 수는 5명으로 제한됐다. 1명이 추가되면 1만 달러를 더 내야 한다. 나 혼자 등반해도 팀으로 간주돼 5만 달러를 내야 한다. 세계 산악인들은 폭리에 가까운 입산료에 항의했지만 네팔 정부는 꿈쩍도 안 했다. 비싼 입산료 때문에 에베레스트를 찾는 산악인 수가 대폭 줄어들 것이란 말이 나돌았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인간이 꿈꿀 수 있는 가장 높은 산, 제3의 극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는 단 하나였기 때문이다.
더그도 경제적인 점에 착안해 콜로라도 산악인 3명과 함께 팀을 꾸려 나를 부른 것이다. 경제적으로 에베레스트 입산 허가를 받고, 셰르파나 주방장 같은 고용인 경비는 공동으로 부담하자는 제안이었다. 또한 변호사답게 행정처리도 대행해주겠다고 했다. 이미 덴마크인 두 명과 캐나다인 한 명이 동참 의사를 밝혔다고 했다.
나는 같은 산악회원이자 오랜 친구인 정현과 상의했다. 정현은 에베레스트는 너무 높으니 자신은 세계 4위봉 로체봉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에베레스트와 로체는 직선거리가 3km밖에 안 된다. 3캠프까지 등반 루트도 같다. 나는 더그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제한 없는 팀’ 원정대에 행정상 합류는 하되, ‘재미한인산악회 원정대’로 참여하겠다고 했다. 더그는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2005년 10월, LA에서 열린 산악회 정기총회에서 2006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파견을 결의했다. 그리하여 미주 한인 산악인들이 해외동포 최초로 단일팀을 만들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서게 됐다.
1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06년 3월 원정대 발대식이 열렸다. 대장은 내가 맡았다. 대원은 총 9명. 나와 정현이 에베레스트와 로체 등반에 참여하고, 나머지는 5300m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만 오르고 하산하기로 했다. 발대식장엔 많은 사람이 찾아와 해외교민 사회에서 처음 시도되는 에베레스트 원정을 축하했다.
그리고 같은 달 28일 우리는 LA를 떠나 네팔로 향했다. 이제 대장정의 시작이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면 우리는 얼굴도 본 적 없는 ‘제한 없는 팀’ 대원들을 만날 것이다.
우리는 서울과 홍콩을 경유해 3월 30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네팔 공산당 마오이스트들 때문에 도시는 계엄 상황에 있었고, 산발적인 데모가 그치지 않았다. 상가도 철시되고 생필품 품귀 현상도 나타났다. 도로 곳곳에는 군경이 설치한 바리케이드도 보였다. 그러나 관광이 주 수입원인 까닭에 정부군도, ‘마오바디’라 불리는 반군도 외국인들에게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다.
다시 찾은 카트만두
혼란스러운 카트만두를 빨리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한국 산악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김치를 사고, 재래시장에서 쌀과 채소, 그릇을 구입했다. 경비행기로 쿰부 계곡 들머리 루크라까지 이동했다. 40분간 낡은 비행기 창밖으로 장엄한 히말라야 산맥을 보았다. 오랫동안 고대했던 에베레스트를, 나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히말라야 산맥은 양쪽에서 달려와 에베레스트를 정점으로 밀어 올리고 있었다. 저 산이 세븐 서밋의 마지막 봉우리라고 생각하니 투지가 솟아올랐다.
경비행기는 굉음을 내며 루크라에 착륙했다. 히말라야 산자락을 휘감아 도는 두드코시 강이 보였다. 깊은 계곡 분지에 자리한 루크라는 해발고도가 높아 벌써 서늘했다. 우리는 쿰부 히말라야를 관통하는 두드코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카라반에 나섰다. 이 강은 우리가 가야 할 에베레스트 쿰부 빙하에서 발원하니, 강이 시작되는 곳에 베이스캠프가 있을 터였다.
4캠프까지의 위험 구간은 빙설벽으로 된 200여m뿐이었고 그곳엔 고정 로프가 설치돼 있었다. 셰르파가 하산하자 남은 둘도 서로 로프를 묶지 않았다. 곽 대원은 고정 로프를 따라 움직였으나 이 대장은 다른 로프를 따라갔다. 장비나 산소통을 걸어놓기 위해 고정 로프에 묶어놓은 다른 로프였다. 노련한 이 대장이 그런 실수를 한 건 그만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곽 대원은 멀어져가는 이 대장을 향해 그 줄이 아니라고 몇 차례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이 대장의 상황이 나빴던 건지, 바람 속에 목소리가 묻혀 그랬는지 그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날씨가 더욱 나빠지자 곽 대원은 홀로 하산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 4시경 곽 대원은 사우스콜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빙판과 눈이 혼합된 지점에 도착했다. 사우스콜에서 남동릉 초입부에 있던 200여m의 빙설벽이었다. 만약 여기서 미끄러진다면 수천m 아래 빙하로 추락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는 4캠프가 빤히 눈앞에 보였다. 그녀는 이제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았고, 그제야 정상부터 캠코더를 목에 걸고 내려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중한 영상이 들어 있는 캠코더였다.
곽 대원은 빙판 상단에서 고정 로프를 놓고 젖은 장갑을 벗었다. 캠코더를 배낭에 넣고 그 속에 있는 예비 장갑을 꺼내 갈아 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배낭을 벗는 순간, 균형이 흐트러져 몸이 빙판 위로 미끄러졌다. 평소 같으면 충분히 균형을 잡을 수 있고, 또 미끄러지더라도 고정 로프를 잡아 자기 제동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몹시 지쳤고, 정신 역시 또렷하지 않았기에 작은 흔들림에 속절없이 추락하고 말았다.
고결한 결단
100여m쯤 미끄러졌을까.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몸이 자연스레 멈췄다. 곽 대원은 운이 좋았다. 그러나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편해지면서 눈이 감겼다. 눈을 감으니 아주 안온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그녀는 장갑이 없는 손을 양쪽 겨드랑이에 꼈다. 동상을 방지하겠다는 본능이 시킨 일이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그녀의 친구가 찾아왔다. 어린 시절 헤어진 이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친구였다고 했다. 그것도 해발 8000m가 넘는 곳에서 두 번씩이나.
비몽사몽간에 곽 대원은 바로 이것이 말로만 듣던 저승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겁이 나진 않았다. 시간이 더 흘러 밤이 찾아왔다.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날 밤 8시 30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침낭 속에서 등반을 포기할 것인가 강행할 것인가를 두고 헷갈리는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곽 대원은 4캠프에서 불과 수백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누구도 바람과 어둠 속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1차 등정에 성공한 중동고 원정대는 2차 등정을 위해 3명의 대원이 4캠프를 떠났다. 이명호, 최인수, 박재우 대원이었다. 젊은 세 사람은 그토록 갈망해왔던 세계 최고봉 등정이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좋지 않은 날씨에도 정상을 항해 출발했다.
어둠 속을 한참 걷는데, 앞서 가던 셰르파가 헤드랜턴으로 눈에 덮여 있는 ‘물체’를 가리켰다. 가까이 접근해 보니 사람이었다. 얼어붙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고 있었다. 여자였다. 곽 대원이 확실했다. 몸을 흔들어도 눈은 뜨지 않았고, 그저 “콜드(cold)”라는 신음만 냈다. 중동고 원정대는 즉각 이 사실을 베이스캠프에 알렸다.
지금까지 이 대장과 교신할 수 없었던 베이스캠프는 그제야 이들이 조난 상황에 처했음을 알게 됐다. 하지만 발견한 사람이나 베이스캠프 모두 갈등에 빠졌다. 에베레스트에 오기 위해 몇 년을 훈련하고 큰 경비를 들였다. 박재우 대원은 직장까지 그만뒀다. 대장은 단호하게 구조를 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잔인한 명령이라는 걸 대장도, 대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곽 대원을 두고 갈 수는 없다. 설혹 등정에 성공하더라도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지현구 대장은 결단을 내렸다. 이명호 대원만 등정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조난자를 수습하라고 명령했다.
곽 대원은 눈과 얼음이 뒤섞인 곳에서 이미 다섯 시간 가까이 누워 있었다. 장갑이 없는 손을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지만 겨드랑이에서 빠져 나온 손은 혹한의 대기에 노출돼 있었다. 중동고 원정대는 시커멓게 죽어 있는 곽 대원의 손에 장갑을 끼워 부축해 오르던 길을 돌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를 발견한 것은 천운이었다.
완전히 정신이 풀린 상태로 두 대원의 부축을 받으며 곽 대원이 중동고 원정대 텐트에 들어섰다. 중동고 원정대는 그의 얼어붙은 옷을 갈아입히고 즉시 침낭에 집어넣었다. 이미 곽 대원의 손가락과 발가락은 돌이킬 수없이 깊은 동상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대원들은 버너를 켜고 물을 끓여 응급처치에 나섰다.
베이스캠프는 무전을 통해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모두 숨죽이고 8000m 이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면밀히 관찰했다. 정현도 애를 태웠다. 베이스캠프에 의사들이 있으니 어떻게든 베이스캠프까지만 내려오라고 무전을 했다. 중동고 원정대 주도로 천안팀, 클린팀이 모여 조난자 구조와 환자 후송 대책에 대해 논의했다.
천안팀도 로체 봉에 오르기 위해 4캠프에 있던 등정조에게 구조에 나설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상황이 종료된 게 아니었다. 아직도 저 위에는 이 대장이 남아 있다. 곽 대원과 헤어진 그는 자신이 잡고 가던 로프가 끝나버리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앉아 있다가는 죽는다는 걸 깨닫고 힘겹게 본래의 등산로로 돌아왔다. 하지만 어둠이 닥치고 있었다. 기다시피 사우스콜 쪽으로 내려와 빙판에 설치된 고정 로프를 만났지만 로프는 이미 얼어버린 상태였다. 조심하며 로프를 잡은 순간 몸이 휘청하더니 빙판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곽 대원이 추락한 바로 그 빙판이었다.
몸이 뒤집어지면서 이 대장은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대장 역시 죽음이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미끄러지다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속도가 줄더니 멈춰 섰다. 추락의 충격으로 고글과 헤드랜턴은 사라져버렸다. 여기가 어딘지도 알 수 없고, 고통도 잊을 만큼 의식이 흐려졌다. 그때 불빛이 보였다. 그 불빛을 향해 조금씩 기어갔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나를 저승으로 데려가려는 불빛이구나.
그 불빛은 정상을 향해 가던 중동고 원정대 이명호 대원과 셰르파였다. 이 둘은 이 대장을 부축하며 하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천안팀 무전을 받고 구조차 올라오는 2명의 셰르파를 만났다. 그들에게 이 대장을 인계한 뒤 이 대원은 정상을 향해 다시 돌아섰다. 곽 대원을 발견한 뒤 40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대장과 곽 대원은 정말 운이 좋았다. 만약 이들이 등산로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면 구조가 불가능해 4캠프에서 불과 수백m 떨어진 곳에서 죽어갔을 것이다. 겨우 의식을 찾고 누운 채 동상 치료를 받고 있던 곽 대원은, 부축을 받으며 텐트로 들어서는 이 대장을 알아보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동상이 중증이라 빨리 베이스캠프로 돌아가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튿날 베이스캠프에서 클린팀이 2명의 셰르파를 2캠프로 올려 보냈다. 중동팀과 천안팀은 곽 대원을 로프로 묶은 후 앞뒤에서 잡아가며 가파른 로체 페이스를 내려갔다. 곽 대원은 무사히 2캠프에 도착했다. 거기서 교대한 클린팀의 다른 셰르파들이 그녀를 들것에 실어 베이스캠프로 무사히 데려갔다.
이 일로 중동고 원정대의 에베레스트 2차 등정조 2명과 천안팀 로체 등정조 5명은 정상을 앞둔 마지막 4캠프에서 등정을 포기했다. 해발 8000m가 넘어가면 신발끈 매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자기 몸 하나 가누기가 어렵다. 다른 사람을 구조할 엄두를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이들 두 팀은 산악인의 빛나는 의리를 보여줬다. 그날 이명호 대원은 등정에 성공했고, 나머지 두 사람은 곽 대원을 살리는 데 성공했다. 정상을 포기한 대가로 그들은 죽음에 직면한 한 사람의 고귀한 생명을 구해냈다. 어느 성공이 더 고귀한 것일까.
“하늘이 열리고 있다”
불과 수백m 밖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도 모르고 나는 가물거리는 생각과 싸우고 있었다. 밤 11시쯤이었을 것이다. 아파 셰르파가 내 텐트에 고개를 밀어 넣었다.
“엠제이, 하늘이 열리고 있다. 날이 좋아지고 있다. 이제 출발하자.”
이게 무슨 말인가! 오락가락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포기하고 있었는데, 출발이라니. 순간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도 느꼈으나 어느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꼼지락거리며 장비를 찾았다. 안전벨트, 이중화, 아이젠을 착용했다. 예비 장갑과 산소통, 보온물통과 비상식량도 챙겼다.
응급시 사용할 주사기도 배낭에 넣었다. 산악영화 ‘버티컬 리미트’에서 히말라야 산꼭대기에 고립된 산악인들을 구했던 스테로이드제 계열의 덱사메타손이라는 주사다. 체내 대사 작용이 순간적으로 강해지기 때문에 바짝 힘이 솟는다. 그러나 부작용도 많다. 이 주사는 두꺼운 옷을 입은 채 엉덩이에 그냥 찔러 넣으면 된다. 앙 파상 셰르파에게 하나를 건네며 사용법을 일러주었다.
“이건 비상시에만 사용하는 거다. 일종의 환각제로 이 주사를 맞으면 두세 시간 힘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 시간이 끝나면 후유증으로 더 힘들어진다. 그러므로 오를 때는 절대 사용하면 안 되고, 하산 때 내가 탈진하면 사용해달라.”
앙 파상 셰르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텐트 밖으로 나섰다. 볼을 할퀴는 것 같은 싸늘한 공기가 정신을 깨웠다. 바람은 거셌지만 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아파 셰르파의 말대로 날이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다.
어둠의 장막은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로체도, 남봉도, 그리고 내가 올라야 할 루트도 보이지 않는다. 내 헤드랜턴에서 나오는 동그란 불빛이 내가 볼 수 있는 전부다. 그러나 헤드랜턴 불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는 걸 보니, 4캠프에 모인 원정 대원들 모두가 등반에 나서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동남릉 등반로에도 이미 많은 수의 헤드랜턴 불빛이 보였다. 날씨가 좋지 않았을 때부터 일부는 정상으로 등반을 시작한 것이다.
슬며시 투지가 타올랐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다음 기회란 없다. 경험 많은 아파 셰르파는 날씨가 좋아질 거라고 확신했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등반이 종결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4캠프에 같이 있던 덴마크인 둘도 자신들의 셰르파와 함께 우리를 따라나섰다.
나는 앙 파상 셰르파와 줄을 묶고 정상을 향하는 첫발을 내디뎠다. 이제는 실패하더라도 억울한 감정은 없을 터였다. 강풍에 몸이 휘청거렸다. 새삼스레 이를 악물었다. 앞사람의 발자국만 보며 가는데, 그 흔적이 바람에 곧 지워진다. 내 이마 등의 불빛만이 살아있는 듯했다. 몇 시가 됐는지, 얼마나 걸었는지 시공간의 개념도 없다. 무조건 걸을 뿐이다.
등반로는 생각보다 경사가 급했다. 좁은 외길에서 로프에 의존한 채 그저 한발 한발 떼었다. 두려움은 없었다. 무념무상으로 그저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운명이라고만 생각했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너무 춥다. 너무 추워서 따뜻한 생각만 하기로 맘먹으며 빙벽에 설치된 고정 로프에 의지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바람과 싸우고 있는데, 앞서가던 불빛 몇 개가 돌아 내려온다. 추위와 강풍, 그리고 체력이 떨어진 탓에 등정을 포기하는 것이다.
드디어 동남릉의 어려운 루트가 시작되는 발코니 바위에 올라섰다. 동녘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붉은빛만으로도 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서서히 히말라야 산군(山群)이 깨어났고, 정상으로 이어진 날카로운 칼날 능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을 잘못 디디면 눈 처마가 무너져 내릴 만큼 위험한 루트.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양쪽의 천길 낭떠러지와 아찔한 고도감이 눈앞에 펼쳐지자 두려웠다. 피켈로 눈 처마를 찍으면 구멍이 뚫리는 곳도 많았다. 그 구멍 사이로 티베트 갈색 대지가 눈에 들어오곤 했다.
위험한 릿지가 시작됐다. 암릉과 설릉이 교대로 나타나는 혼합 구간인데, 오른쪽으로 떨어지면 티베트 캉슝 빙하, 왼쪽은 네팔 쪽 남서벽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양쪽의 국경을 넘나들며 가파르게 솟구친 암릉 위를 번갈아 오르고 있는 것이다.
세상 전체가 발밑으로
어느새 동남릉의 검푸른 하늘 위로 태양이 둥실 떠올랐다. 더불어 세상이 하얘졌다. 서둘러 고글을 꺼내 썼다. 영하 30도 이하가 분명할 추위도 좀 누그러진 것 같았다. 뒤돌아보니 세계 4위봉 로체와 5위봉 마칼루가 구름 위로 깨끗하게 솟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 아래 무수히 솟구친 하얀 산들이 모두 구름바다 위의 섬이 되어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그토록 거칠고, 경이롭고, 장엄한 광경을 또 어디서 보겠는가. 허방다리를 짚는 것처럼 몸은 힘들었으나 풍경은 황홀했다.
발코니에서 본 8516m의 험악한 로체 봉 정상이 서서히 눈높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밤새 많이 올라온 것이다. 호흡 때문에 산소 마스크에 생기는 고드름을 떼어가며 좁은 릿지를 계속 이어가자 에베레스트의 전위봉이라고 불리는 8760m의 남봉이 나타났다.
남봉에 올라선 덴마크인들은 거기서 등반 포기를 선언했다. 정상이 지척인데 얼마나 힘들면 그럴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곳을 지나 더 올라가다 하산을 결정한다면 상당히 위험하다. 그 앞으로는 고정 로프가 없기 때문이다. 에베레스트 등반은 냉정한 판단을 필요로 한다. 정상은 반환점에 불과하다. 사고는 거의 하산 길에서 일어난다. 그들은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덴마크인들은 하산하고 우리는 다시 위쪽을 향해 발을 떼었다. 남봉을 지나고부터는 네팔 쪽 사면으로 등반해야 한다. 함께 로프를 묶은 앙 파상 셰르파가 가끔 줄을 당겨 내가 정신이 있는지 살핀다. 그가 내 뒤에서 로프를 잡고 있다지만, 만약 내가 추락한다면 그는 버틸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역시 체력이 이미 소진됐을 것이니 동반 추락이 확실하다.
정말 힘들었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쉬지 않고 열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고작 몇 걸음 옮기고 피켈에 의지해 한참을 쉬어야 했다. 힘들다고 중단하면 버릇이 된다. 마라톤도 고비를 넘겨야 완주할 수 있다. 인생도 그렇다.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할 게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 너무도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다. 드디어 최대 난관이라는 힐러리 스텝이 나타났다. 양쪽이 까마득한 절벽인 이곳은 에베레스트 등반에서 자물쇠 구실을 한다. 힐러리 스텝 바위를 통과해야만 정상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만년설이 뒤엉켜 있는 바위에는 낡은 로프가 많이 걸려 있다. 그만큼 위험한 구간이라는 말인데, 감각이 둔해져서 그런지 별로 두렵지 않았다. 다만 여기를 통과하면 정상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했다. 힐러리 스텝을 넘어서자 정상부가 보였다. 제트 기류가 부는지 정상에서부터 설연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었다. 저것은 얼어붙은 눈을 파내는 바람이다. 그러나 몸이 날아가더라도 저 바람 속에 서고 싶다.
지구의 끝
피켈에 의지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뒤돌아보니 남봉도 이제는 발아래에 펼쳐져 있다. 정상으로 향하는 실 같은 등반로 좌우로는 세상 전체가 보였다. 서쪽으로 쿰부 빙하, 동쪽으로 롱북 빙하. 엄청난 풍경이다. 허리를 꺾고 숨을 골랐다. 로체가 보였다. 8516m의 로체 정상보다 더 높은 곳을 나는 지금 걷고 있다. 믿어지지 않는다. 2캠프에서 바라본, 거칠고 아득했던 로체 정상을 지금은 내려다보고 있다니. 고통스럽지만 꾸준하게 고도를 올리고 있다는 확실한 신호였다.
앞쪽으로는 검게 보이는 하늘 아래 솟은 설봉이 겹쳐 있다. 그곳을 기어오르면 또 다른 정상이 보인다. 이 짓을 얼마나 반복해야 정상이 나타날까.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까. 이젠 포기할 수 없다. 정상이려니 믿고 힘겹게 올라선 봉우리는 번번이 허탕이었다. 또 다른 봉우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다리가 꼬이기 시작했다. 도무지 끝이 없다. 울고 싶다. 하지만 이 봉우리가 정상이라고 거듭 주문을 외우며 안간힘을 쓴다.
바로 저기다. 셰르파들이 정상에 꽂아놓은 오색 룽따가 보인다. 이제 정상은 내 눈높이와 같은 높이에 있다. 그런데 아무리 용을 써도 정상까지의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멈추지 마. 서면 안 돼. 굼벵이 걸음이라도 무조건 걸어.
과연 끝은 있었다. 반대쪽 티베트 대지가 보인다. 360도의 파노라마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아름답다. 이런 풍광이 존재할 수 있다니. 무언가 가슴속 저 아래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정수리를 관통한다. 왜 이곳에 오려고 그리 애썼는가. 운명이다. 4캠프를 출발해 밤새 오르면서 나는 이 길을 멈출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것 말고는 이 짓을 설명할 길이 없으므로.
드디어 나는 8848m의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다. 에베레스트의 완만한 설사면 끝이 눈 처마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두려움도 없이 그곳까지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 티베트 쪽으로는 아득한 절벽이다. 정신이 없어 그랬겠지만, 나는 그만 그 설벽 끝에 주저앉았다. 세계의 꼭대기에서 티베트의 황량하고 누런 고원을 내려다보았다.
2006년 5월 19일 오전 10시 50분. 4캠프를 떠나 11시간 만에 오랜 꿈을 이뤘다. 이 지상에서 단 하나뿐인 장소에 주저앉아 무전기로 베이스캠프를 호출했다. 즉각 정현이 받았다. 전날 밤부터 정상에서 들려올 내 소식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쉰 목소리로 “여기는 정상”이라고 했을 뿐이다. 정현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환호하는 소리가 이명처럼 들렸다.
무전을 끊자 아파 셰르파가 포옹을 해온다. 이로써 나의 7대륙 최고봉 순례 대장정이 끝났다. 함께한 아파 셰르파도 전무후무한 에베레스트 16회 등정이라는 위대한 기록을 창조했다. 우리는 말없이 끌어안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마치 물속에 있는 느낌이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세상은 이곳과 너무 멀었다. 지구별에서 가장 먼저 하늘에 닿는 대지의 끝이지만, 사람들이 상상하는 세계 최고봉에 오른 희열과 감동은 사치였다. 그럴 겨를도 없었다. 성취감도 들지 않았다. 추위와 피로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제 더는 지겨운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만 들었다.
정신은 몽롱한 상태에서도 다만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동쪽으로 캉첸중가 봉이 보이고 남동쪽에 마칼루 봉과 로체가 솟아 있다. 서쪽으로 초오유와 시샤팡마 봉이 보인다. 그레이트 히말라야의 위대한 봉우리들이 모두 내 발 아래 있다. 우리는 세계의 정상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아파, 파상, 템바 등 세 명의 셰르파와 번갈아 어깨동무를 하고 기록을 남기고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정상에선 채 20분도 머물지 않았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등반이 끝난 게 아니다. 베이스캠프로 안전하게 귀환해야 등반이 종결된다.
에베레스트의 작별인사
낡은 것부터 새것까지 수많은 로프 중 어느 것도 믿을 수 없었다. 어떤 것은 암각에 쓸려 끊어지기 직전처럼 보였다. 혹시 우회할 수 없을까 싶어 주변을 살펴봤지만 불가능했다.
무사히 힐러리 스텝을 내려섰다. 하지만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 다시 남봉을 넘어 암릉이 끝나는 발코니로 내려왔을 무렵 해가 지기 시작했다. 간밤에 어두워서 볼 수 없었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가 지난밤 떠나온 4캠프의 형형색색 텐트들이 장난감처럼 보였다. 여기서 보는 사우스콜은 말안장처럼 평평했다. 모든 텐트는 네팔 쪽으로 치우쳐 눈 없는 곳에 모여 있었다. 지난밤에는 저 텐트 속에서도 지옥을 경험했지만, 지금은 저곳이 목표다.
하지만 내 몸은 풀기 빠진 옥양목처럼 힘이 모두 빠졌다. 이를 눈치 챈 셰르파들이 나를 중간에 놓고 앞뒤로 줄을 묶고 하산했다. 주저앉으면 일어서기 싫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졸렸다. 마지막으로 가파른 빙판을 고정 로프를 타고 내려섰다. 바로 이 대장 팀의 사고 현장이다. 4캠프에서 도착해 이중화를 벗지도 않고 텐트에 들어가 뜨거운 물 한 잔을 마시고는 그대로 뻗어버렸다.
이튿날. 다행히 날씨는 좋았으나 이젠 다리가 풀려 내려갈 길이 걱정이었다. 휘청거리는 나와 줄을 묶은 앙 파상 셰르파가 가끔 로프를 당겨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눈밭에 앉아 내려다보는 풍경이 낯설었다. 쿰부 빙하와 침묵의 바다가 저렇게 작았던가. 제비둥지 같은 3캠프는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긴장해야 한다. 2캠프로 가기 위해서는 가파른 빙설벽을 내려서야 하니까. 고정 로프에 안전장치를 걸고 발에 힘을 주어 빙벽을 찍는다. 그러나 힘이 풀렸는지 아이젠 쇠발톱에 밟히는 느낌과 소리가 영 불안하다. 겨우 경사가 완만한 설원에 내려서서는 한참을 눈밭에 들어가 누운 채 쉬었다.
2캠프에 도착하니 그곳에 모여 있던 대원들이 나의 등정을 축하해줬다. 그제야 내가 성공했다는 느낌이 들어 밥맛이 돌았다. 그만큼 내 몸이 고소에 충실히 적응됐다는 증거다. 2캠프에서 하루를 쉰 뒤 5월 21일 오전 11시 베이스캠프에 무사 귀환했다. 정현이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 마중 나와 있었다. 한국팀 대원들이 모두 모여 나의 세븐 서밋 완등을 축하하는 뜨거운 악수를 청했다.
베이스캠프에서 곽 대원의 사고와 극적인 구조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곽 대원은 양손에 붕대를 친친 감은 채 간이침대에 누워 있었다. “좀 어때?” 그녀의 초췌한 모습에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귀여운 얼굴은 까맣게 타버렸고 작은 몸은 더 작아진 것 같았다. 끼니 때마다 음식을 챙겨주던 붙임성 좋은 곽 대원은 정말 죽었다가 살아났다. 손가락 동상은 분명 후유증이 있을 것이다. 안타까워하는 내게 그녀는 웃으며 “괜찮아요. 선배님, 세븐 서밋 성공을 정말 축하드려요” 한다. 코가 매워왔다.
이튿날 곽 대원을 후송할 헬리콥터가 베이스캠프에 내렸다. 그녀를 실은 헬리콥터는 베이스캠프를 빙빙 돌며 고도를 높여갔다. 나는 헬리콥터가 쿰부 계곡 아래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에게 아무 일 없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베이스캠프는 파장 분위기가 완연했다. 나도 그렇지만 정현도 살이 많이 빠졌다. 몸무게가 10kg 이상 줄었다. LA를 떠난 지 거의 두 달이 다 됐다. 5월 24일 우리는 베이스캠프를 떠났다.
6년에 걸쳐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올랐다. 숙제를 끝낸 홀가분한 마음이다. 얼굴에는 벗겨지다 만 껍질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몸은 가볍고 하산 길은 즐거웠다. 고락셉으로 넘어가는 빙탑 위에 앉아 베이스캠프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이제 이 빙탑을 내려서면 베이스캠프는 사라지고 사람 사는 동네로 가게 된다. 생각해보면 해발 5300m의 베이스캠프는 정을 붙이기엔 너무 높고 황량하다.
그러나 고소 캠프를 오르내리며 바라보던 베이스캠프는 언제나 희망이었고, 오아시스였다. 국적은 달라도 목적이 같은 산악인들이 모여 드라마틱한 영광과 좌절을 만들어냈던 곳.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한 열정 속에 존재했던 저곳은, 누구나 여기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해보았을 피안의 세계였다.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이제 슬픔과 감동을 함께했던 베이스캠프도 영원히 이별이다. 그때, 잘 가라는 듯 로체 사면에서 커다란 눈사태가 일어났다.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눈보라가 하얗게 에베레스트를 지웠다.
마지막 작별인사 역시 에베레스트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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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르파 부족들의 정신적 고향 남체바잘(해발 3400m)은 쿰부 계곡에서 가장 큰 시장이 서는 곳이다. 가파른 사면을 깎아 만든 마을에 서는 장엔 카트만두나 티베트에서 온 물건들로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 히말라야 깊은 계곡에 샹그릴라와 같은 마을이 존재한다는 게 놀라웠다.
셰르파는 원래 티베트 사람들이다. 500여 년 전 내전을 피해 히말라야 고개를 넘어 쿰부 지역에 정착했고 비탈 밭을 일구고 야크를 키우며 생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다 히말라야를 찾는 원정대에게 발탁돼 짐꾼과 가이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고산족답게 고소증에 강하고 성실함과 체력이 강해 서양인의 눈에 띈 것이다. 그런 셰르파들의 활약으로 1953년 영국 팀은 에베레스트 첫 등반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다.
에드먼드 힐러리와 함께 첫 등반 기록을 세운 텐징 셰르파도 이곳 쿰부 출신이다. ‘제한 없는 팀’의 사다도 같은 마을 출신인 아파 셰르파다. 사다란 네팔 스태프 중 리더를 가리키는데, 아파는 이미 네팔에서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하는 인물이다. 내가 더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데도 아파 셰르파에 대한 신뢰가 큰 영향을 미쳤다.
남체를 떠나 풍기텡카라는 마을을 지나고 탕보체에 올랐을 때, 그동안 계곡에 숨어 있던 에베레스트 정상부가 빠끔하게 보였다. 한동안 그곳에 앉아 삼각형으로 검게 솟은 아득한 에베레스트를 바라보았다. 이제 이곳을 지나면 다른 산에 가려져 더는 에베레스트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해서도 1캠프에 올라야만 정상부를 볼 수 있다. 비현실적으로 솟은 저 삼각 피라미드의 정점에 올라야 한다는 생각에 공연히 숙연해졌다.
뎅보체라는 마을에서 두드코시 강을 건너는 첫 번째 출렁다리를 만났다. 아슬아슬한 현수교에는 티베트 불경이 적힌 오색 룽따가 무수하게 걸려 있고, 밑으로는 뿌연 물이 기세 좋게 흘렀다. 빙하로부터 발원하기에 물빛이 뿌연 것이다. 그래서 셰르파들은 이 강을 두드, 즉 ‘우유’ 빛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룽따의 ‘룽’은 바람, ‘따’는 말(馬)을 뜻한다. 셰르파들은 불경이 빼곡히 적힌 오색 룽따를 어느 곳에나 걸어놓는다. 바람이 불면 깃발이 흔들리고, 그러면 그 자체가 불경을 읽는 것이라고 믿는다.
다리를 건너자 쿰부 계곡의 상징처럼 알려진 아름다운 봉우리, 아마다블람이 나타났다.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만년설 면사포를 쓴 듯한 아마다블람은 정말 아름다웠다. 아마는 ‘엄마’, 다블람은 ‘목걸이’라는 뜻이다. 어머니의 목걸이처럼 주봉과 연결된 작은 봉이 있다. 쿰부 히말라야는 산만 높은 게 아니라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수림이 우거진 깊은 정글이 나오는가 하면, 에베레스트에서 발원한 우윳빛 강이 아득한 깊이로 계곡을 만든다. 누추하지만 따뜻하고 아늑한 롯지가 곳곳에 있어 가끔 그곳에서 전통차를 마시곤 했다. 열심히 걷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야크 똥을 태워 열을 내는 난로에 몸을 녹이면서 하루를 마감할 수 있어 행복했다. 쿰부 계곡 카라반은 즐거운 여정이었다.
점차 고도를 올려 4200m의 페리체 마을에 도착할 무렵 우리는 수목한계선을 넘고 있었다. 대원들 중 몇 명은 고소증을 호소했고, 나 역시 경미한 두통에 시달렸다. 지금부터 고소증과의 싸움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긴장됐다. 키 작은 관목류만 듬성듬성 있는 페리체 벌판에 야크떼가 줄지어 걷고 있다. 볼이 빨간 셰르파 소녀가 휘파람을 불며 야크떼를 몬다. 야크는 등에 원정대에 가져다 줄 보급물품을 잔뜩 싣고 있다. 포터들은 1인당 30kg의 짐을 운송하는데, 야크는 한 마리가 60kg을 나른다. 야크 목에 걸린 쇠방울이 딸랑거리며 느릿한 걸음에 박자를 맞춘다.
페리체 마을 너른 평원을 관통하고 나니 4600m의 투클라 언덕이 나타났다. 이곳부터는 에베레스트 등반 중 사고를 당한 산악인을 추모하기 위해 돌로 만들어놓은, 메모리얼 캐른이 심심찮게 보인다. 필시 나처럼 활력과 생기 넘치는 등반가들이 걸어 올라갔을 텐데, 그중 많은 이가 이제 돌탑으로만 남아 있다. 투클라 마을을 지나 언덕으로 올라서자 원뿔 모양의 푸모리 봉(7165m)을 배경으로 이들의 넋을 기리는 메모리얼 캐른이 무수히 도열해 있었다.
돌탑으로 남은 산악인들
이곳에는 미국의 산악인 작가 존 크라카우어가 저서 ‘희박한 공기 속으로(Into Thin Air)’에서 언급한 많은 등반가가 비석으로 남아 있다. 일본 여성 산악인 야스코 남바 캐른 앞에는 깨끗한 컬러 사진 한 장과 시든 꽃이 놓여 있었다. 얼마 전에 가족이나 지인이 다녀간 흔적이리라. 사진 속 젊은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
1996년 5월 에베레스트에서 대참사가 일어났다. 등반대가 에베레스트 정상을 오른 후 하산 길에 폭풍설이 불어닥쳤다. 그때 사우스콜 4캠프에서 불과 300m 떨어진 곳에서 텐트를 찾지 못해 죽어간 여성이 야스코 남바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존 크라카우어는 그해에 12명의 산악인이 차례차례 죽어간 사고의 전말을 기록했다.
에베레스트를 꿈꾸는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전율에 휩싸였다. 저자 자신이 직접 대원으로 참여해 목격한 절절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대원들의 직업은 다양했다. 참가비를 벌기 위해 몇 년씩 투 잡을 뛴 미국인 우체부가 있었고, 야스코 남바 같은 동양인도 있었다. 등반 초기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성층권에 가까운 8000m 이상은 의지만 갖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정상에 오른 5명 중 리더를 포함한 4명이 예고 없이 닥친 눈 폭풍 속에서 사망했다. 존 크라카우어가 베이스캠프로 귀환할 즈음 4개 팀의 9명이 눈을 감았다. 등반이 마감되기 직전에 또 3명의 사망자가 추가됐다. 이렇게 16명이 눈 폭풍과 희박한 공기 속에서 공포에 미쳐가며 서서히 죽어간 1996년의 에베레스트. 등반가들의 정상을 향한 집착이 부른 대참사를, 작가는 살아남은 자의 회환으로 고통스러울 만큼 생생하게 복원해냈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이 봉우리를 밟는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은 소수 산악인에 불과하다. 그들이 매년 에베레스트를 찾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에베레스트는 산악인의 영원한 로망이니까. 8000m가 넘는 에베레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날씨다. 눈과 폭풍이라는 재앙을 만나면 베테랑 산악인이라도 살아남기 어렵다는 걸, 나는 다시 한번 상기했다. 존 크라카우어 역시 이 점을 언급했다.
1921년에서 1996년 5월 사이 630명이 정상을 밟았는데 그중 144명이 사망했다. 정상에 오른 네 명 중 한 명꼴로 사망한 셈이다. 그런데 지난봄에는 정상을 밟은 총인원이 84명, 사망자는 12명이었다. 일곱 명에 한 명꼴로 사망한 셈이다.
1996년의 대참사도 통계적으로 보면 적은 숫자라는 말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투클라 메모리얼 캐른은 앞으로 더 늘어갈 것이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과연 나는 등반을 끝낸 후 하산 길에 이곳을 다시 통과할 수 있을까.
투클라를 지나 도착한 로부체는 5000m의 고도에 임박해 있었다. 대원 대다수가 하품과 졸림, 두통 같은 고소 증세를 호소했다. 나도 고소증에 시달렸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생각에 견뎠다. 여기서부터는 두드코시의 시원인 쿰부 빙하가 보이기 시작했다. 빙하를 덮고 있는 자갈과 흙투성이 모레인 길을 따라가다보니 등반 시즌에만 문을 여는 마지막 마을, 고락셉이 나타났다.
베이스캠프의 만남과 이별
고락셉부터 쿰부 빙하의 모레인 길을 따라 지겹게 걷다가 빙탑 하나를 넘어서자 멀리 5300m의 베이스캠프가 홀연히 나타났다. 날카로운 연봉(連峰)들이 더는 갈 수 없다며 막아서서 굳게 빗장을 지른 것이 쿰부 빙하였고, 바로 그 위치에 베이스캠프가 꽃처럼 피어나 있었다. 베이스캠프 앞쪽으로는 얼음폭포인 아이스폴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쿰부 빙하를 출발시키고 있었다. 8501m의 로체도 보이고, 바로 건너편에는 7861m의 눕체가 칼날 능선 끝에 서 있었다.
베이스캠프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원정대들이 형형색색의 거대한 텐트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번 시즌에는 모두 25개 팀이 왔다는데 대원과 셰르파, 네팔인 스태프들로 베이스캠프는 몹시 북적였다.
베이스캠프로 입성하는 우리를 한 사내가 막아섰다. 바로 아파 셰르파다. 통화를 몇 번 한 적은 있으나 얼굴을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아파 셰르파는 생각보다 체격이 작고 호리호리한 몸집이었다.
“엠제이 킴(MJ Kim),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것을 환영한다.”
아파 셰르파는 독실한 티베트 불교도답게 두 손 모아 합장하며 나를 반겨주었다. 잘 훈련된 등반가라도 오르지 못한 채 사고만 당하는 일이 다반사인 곳이 에베레스트다. 하지만 그는 에베레스트를 무려 15번이나 올랐다. 그는 선한 미소를 띤 얼굴에 의사소통에 문제없을 정도로 영어를 구사했다.
베이스캠프는 텐트의 도시다. 각 팀의 주방뿐만 아니라 대원들의 식당, 지휘부가 사용하는 본부까지 모두 텐트로 만들어졌다. 미국인 의사들이 상주하는 자원봉사 병원 텐트도 있다. 또 팀마다 위성통신 장비를 갖추고 있다. 필리핀 팀은 국가 차원의 원정대라며 국영 TV방송국 카메라까지 따라왔다. 불모의 땅에 한철에만 존재하는 헝겊도시. 가끔 천지를 울리는 눈사태 소리와 그 위력으로 피어올랐다가 뭉게구름처럼 쏟아지는 굉음만이 적막을 깨곤 한다.
우리는 ‘제한 없는 팀’ 캠프에서 리더인 더그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우리 캠프 역시 모레인 지대 위에 있는 터라 돌과 얼음 천지였고, 내가 배정받은 개인 텐트도 빙하 위 돌밭에 세워져 있었다. 우리 팀은 애초에 이곳에서 이틀을 묵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대원 몇 명이 극심한 고소증을 호소했다. 하루라도 빨리 내려가는 것이 옳다. 무조건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 고소증의 유일한 특효약이기 때문이다. 이튿날 우리 팀은 하산을 서둘렀다. 굳은 악수 속에 대원들과 헤어지고 이제 나와 정현만 남았다. 다른 대원들처럼 목표가 여기까지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쿰부 빙하는 과연 거대했다. 황량한 돌무더기가 쌓인 너른 빙하엔 시냇물도 흐르고 빙설벽 언덕도 많았다. 이 시냇물이 우리가 카라반으로 9일을 따라온 두드코시의 시원(始原)일 것이다. 눈으로 보기엔 가까워 보여도 넘어서야 할 아이스폴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국적은 달라도 목표는 같다
저녁에 식당 텐트에서 ‘제한 없는 팀’ 대원들과 첫 인사를 나눴다. 더그는 ‘이번 시즌 베이스캠프에 들어온 산악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뱅커(Banker)’라고 나를 소개했다. 당시 나는 LA의 새한은행 이사장을 맡고 있었다. 주력 사업은 따로 있지만 대원들은 내 직업을 은행가로 알고 있었다. 대원들은 내 나이가 예순넷이라는 데 놀라고, 에베레스트가 내 세븐 서밋의 마지막 산이라는 데 한 번 더 놀랐다.
나처럼 세븐 서밋을 꿈꾸며 온 사람도 몇몇 있었다. 로널드 릭스비 박사가 그랬다. 그는 미국에서 온 54세의 내과의사였는데, 세븐 서밋에 관심이 많아 나와 대화가 잘 통했다. 릭스비는 2004년 티베트 쪽에서 에베레스트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고 했다. 의학자답게 고소의학에 관심이 컸고, 관련 논문도 몇 편 발표했다.
매트 트레디웨이는 콜로라도 출신으로 공립학교 수학교사였다. 낙천주의자 로저 커피는 테네시 출신으로 베이스캠프 매니저였다. 유쾌한 로저는 등반은 하지 않고 대원들의 보금자리인 베이스캠프를 지키러 이곳에 왔다고 했다. 윌 크로스는 세 번째로 에베레스트에 도전하러 왔다. 그는 전문적인 등반가이자 탐험가였다. 하지만 에베레스트가 받아주지 않아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다는 줄리 스미스는 우리 팀에서 유일한 여자였다. 무엇이 그녀를 모든 게 얼어붙은 히말라야로 이끌었을까. 놀라운 용기였다. 캐나다인 제프 웰던은 조난구조대원이자 비행조종사였다.
더그는 덴마크인 두 명도 소개해주었다. 딕은 덴마크에서 개업의사로 활동하는 산악인으로 그 역시 이번이 세 번째 에베레스트 도전이라고 했다. 항공기 조종사 카런스는 두 번째 도전이라고 했다. 대원들 중 절반 정도가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도전이었다. 나보다 신체 조건이 훨씬 좋은 그들도 실패했는데, 나의 첫 번째 도전이 과연 성공할지 은근히 걱정됐다. 10명의 대원 소개가 끝나고 이제 스태프 차례였다. 모두가 존경하는 아파 셰르파가 소개에 나섰다. 그는 내게 배정된 두 명의 셰르파를 불렀다.
“엠제이, 당신과 함께 등반할 앙 파상과 파상 템바다. 앙 파상은 나의 처남인데 믿어도 좋을 만큼 아주 강한 자이다. 템바 역시 훌륭한 인물이다. 행운을 빈다.”
다부진 체격에 까만 얼굴의 앙 파상이 활짝 웃어 보였다. 셰르파들은 모두 선한 얼굴을 하고 있다. 모두 나와 같은 몽골리안이라 그런지 왠지 친근감이 간다. 이들의 얼굴을 익히라면서 더그는 즉석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식당 텐트에 붙여놓았다. 이제부터 등반은 각자가 알아서 한다. 빨리 올라가거나 늦게 가거나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포기하더라도 눈치 볼 일은 없다. 나는 장비를 따로 준비해 왔고, 사용할 산소도 따로 준비해뒀다.
우리 팀의 본부 텐트에는 위성전화와 컴퓨터가 있다. 여기서 날씨를 알 수 있는데, 한국 일기예보도 받아볼 수 있었다. 식사와 회의 때는 모두 모이지만 나머지 시간은 자기 마음대로다.
우리가 오를 루트는 8000m 사우스콜을 경유하는 동남릉 루트다. 이 루트는 에베레스트 초등의 위업을 이룬 힐러리와 텐징 셰르파가 개척한 코스다. 나는 고소 적응을 위해 가끔 푸모리 베이스캠프까지 오르내렸다. 그리고 고도를 더 높여 5800m의 푸모리 1캠프까지 오르며 고소에 적응해갔다.
며칠간의 고소 적응과 베이스캠프 정비를 마친 우리는 4월 14일 라마제(Lama祭)를 지냈다. 대부분의 등반대는 베이스캠프에서 등반 성공과 무사귀환을 위해 일종의 입산 신고인 라마제를 지낸다. 이는 셰르파들이 믿는 부처님에게 산에 오르겠다고 신고하면서 안전 등반을 기원하는 전통적인 티베트 불교 의식이다. 대원 다수는 기독교인이지만, 라마제를 지내는 모습은 진지했다.
셰르파들이 미리 공들여 돌로 쌓아놓은 높은 제단에는 오색 룽따가 사방으로 길게 걸려 있었다. 나도 제단에 태극기와 ‘서울고 13회 산악회’ 깃발을 걸었다. 제단에는 우리가 사용할 등반장비도 올려놓았다. 생명을 담보하는 장비에 축복이 내리길 기원하는 마음에서다. 제사는 보리의 일종인 짬바 가루를 허공에 뿌리고 서로의 얼굴에 바르면서 마무리됐다. 이제부터 저 제단의 향불은 등반이 모두 끝날 때까지 꺼지지 않을 것이다.
4월 15일, 첫 등반이 시작되고 나는 1캠프 직전까지 다녀왔다. 컨디션은 좋았지만 힘이 들고 공기가 차가웠는지 그만 목이 쉬어버렸다. 카라반 내내 시달렸던 두통도 여전했다.
릭스비 박사는 고산의학에 대해 논문을 쓴 의학자답게 내가 모르는 것을 많이 설명해줬다. 해발 4000m 고지에는 산소가 평지의 66%밖에 되지 않고, 해발 8000m가 넘으면 33%뿐이라고 했다. 이것이 내가 베이스캠프에 올라온 이래 심한 두통으로 잠을 설친 이유였다. 겨우 잠이 들어도 금방 깨서는 새벽까지 한잠도 못 자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고산증세를 완화시키기 위해 약을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경험상 결국 시간이 답이다. 약이 어느 정도 효과는 있겠지만, 몸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시간만한 약은 없다.
얼굴 없는 복병, 고소증
베이스캠프에 머물 때면 나는 한국팀을 찾아 나섰다. 이번 시즌에 한국에서 5개 팀이 왔다. 중동고 원정대 지현구 대장은 나에 대해 들었다며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다른 팀으로는 황순관 대장과 이세중 등반대장이 리드하는 천안시 원정대가 있었다. 그리고 경남 양산시에서 온 이상배 대장의 팀도 있었다. 이 대장의 팀에는 26세 여성인 곽정혜 대원도 있었다. 밀양대 산악부 출신으로 3학년 휴학 중이라고 했다. 곽 대원은 이미 아마다블람(6856m), 메라피크(6461m)를 오른 히말리스트였다. 내 막내딸보다 나이가 어린 그녀는 산악계의 관례대로 나를 ‘선배님’이라고 불렀다. 붙임성 있는 그녀와 함께 어울려 사진도 찍으며 스스럼없이 친해졌다.
한국에서 온 마지막 팀은 이색적인 원정대였다. 히말라야를 청소하는 ‘클린원정대’. 유명한 한왕용 대장이 이끄는 팀이다. 그는 엄홍길, 박영석 대장의 뒤를 이어 2003년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로 히말라야 8000m급 14개 봉우리를 완등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아무 사고 없이 받아준 히말라야에 보답하고자 히말라야 청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입맛이 없을 때마다 한국팀을 찾아가 한식을 얻어먹었다. 그들을 통해 에베레스트 반대편 티베트에서 박영석 대장팀이 등반 중이라는 소식도 들었다. 놀라운 것은 박 대장이 에베레스트 정상을 넘어 우리가 있는 네팔 쪽으로 하산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점이다. 예기치 못한 변수가 많은 에베레스트에서 과연 그게 가능할까.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네팔 쪽에서 등반하는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 모두 박 대장을 만나게 될 것이었다.
악명 높은 아이스폴은 매일 ‘세락’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얼음기둥을 예고 없이 무너뜨렸다. 세락의 무너짐은 아이스폴이 빙하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빙하는 눈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지속적으로 흘러내리는 운동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빙하의 균열에 해당하는 커다란 크레바스가 생기는가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히든(hidden) 크레바스를 생성해낸다. 아이스폴은 살아 움직인다.
얼음 함정을 건너서
6000m 지점에 만들 1캠프로 가려면 누구든 이 위험한 아이스폴 지대를 넘어서야 한다. 빌딩처럼 솟은 세락 사이를 구불거리며 오르다가, 폭이 넓은 크레바스가 나타나면 알루미늄 사다리로 다리를 만들었다. 폭이 좁은 곳은 한 개로도 건널 수 있지만, 폭이 넓으면 두 개를 잇대어 설치했다. 이중 등산화와 아이젠을 착용했으므로 균형 잡기가 여간 까다롭지가 않았다. 사다리에서 넘어지는 아찔한 순간도 겪었다.
알루미늄 사다리에 아이젠이 마찰하며 내는 금속성 소음은 언제나 소름을 돋게 한다. 체중이 실려 출렁이는 다리 밑으로는 끝없는 심연처럼 파랗게 입을 벌린 얼음 함정이 보인다. 극도의 긴장 속에 한 명씩 차례로 함정을 횡단하는 사다리를 건넜다. 이것도 힘들었지만, 이보다 더 두려운 건 언제 붕괴할지 모를 세락 지대를 지나가는 일이었다.
고소 캠프로의 이동은 어둠이 가시지 않은 첫새벽에 시작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동 트기 전이 가장 춥다는 말이 있듯, 이때가 기온이 가장 낮기 때문이다. 날이 추워야 세락 얼음덩어리들이 얼어붙어 안정적이다. 어두운 새벽, 헤드랜턴을 켜고 베이스캠프를 출발하는 산악인들로 긴 줄이 형성된다. 날이 좋으면 모두가 함께 움직이고, 기상이 악화되면 모두가 베이스캠프에서 쉰다.
온통 눈과 얼음뿐인 하얀 세상도 해가 뜨면 기온이 상당히 올라간다. 등반 중에는 강력한 자외선 때문에 매일 선크림을 바르게 된다. 한낮에 이동하다보면 새하얀 빙하와 눈에 반사되는 복사열로 땀이 날 지경이다. 이때부터는 고산 선글라스인 고글을 써야 한다. 눈과 얼음의 복사광 때문에 눈동자가 화상을 입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를 설맹(雪盲)이라고 한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등반은 당연히 끝이다.
1캠프는 아이스폴이 끝나고 넓은 눈 평원이 시작되는 6000m 높이에 있다. 처음 몇 번 오르내릴 때는 1캠프까지 가는 것이 몹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몸이 점차 고소에 적응해가자 베이스캠프에서 1캠프까지 가는 시간이 단축되기 시작했다. 머리가 깨질 듯하던 두통도 사라져갔다. 생존을 위해 환경에 맞춰가는 인체의 적응력이 신비롭기만 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아 보였던 푸모리 봉이 1캠프에서는 눈높이에 정면으로 들어온다. 하얀 설원에 알록달록하게 쳐진 텐트는 흡사 눈 속에 핀 꽃처럼 보였다. 그동안 아이스폴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가파른 로체 페이스가 눈앞 정면에 우뚝 서 있다. 우리가 앞으로 넘어야 할, 각이 서 있는 설빙벽이다. 여기서부터 2캠프까지는 작은 세락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가없이 평평한 설원이 이어진다.
生과 死는 한 걸음 차이
등반이 모든 면에서 순조롭게 진행되던 4월 21일이었다. 이날 우리는 1캠프로 진출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파 셰르파가 1캠프에 식량이 없어 하루만 등반을 미루자며 “쏘리”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래서 대원들은 모두 베이스캠프에 머물고, 셰르파들은 새벽에 식량을 메고 1캠프로 올라갔다.
내 개인 텐트 옆에 아파 셰르파의 텐트가 있었는데, 다급하게 무전통화를 하는 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파 셰르파는 흥분한 채 텐트 밖으로 뛰쳐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엠제이, 큰일났다! 세락이 붕괴돼 우리 셰르파들이 당했다!”
사고를 알리는 무전. 그것도 대형사고가 났다는 연락이었다. 이른 새벽, 셰르파들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안전한 등반로를 따라 1캠프로 가고 있었다. 미로처럼 얽힌 세락을 빙빙 돌아가는 그 루트에서 갑자기 얼음기둥이 붕괴해 우리 셰르파들을 덮쳤다. 이 사고로 우리 팀 락파와 레다 템파 셰르파, 그리고 다른 팀 셰르파 한 명이 얼음더미에 묻혀 실종됐다. 또 우리 팀 셰르파 두 명은 중상을 입고 구조됐다.
모든 팀에 비상이 걸렸다. 평소답지 않게 당황한 아파 셰르파는 1캠프로 뛰어올라갔다. 리더 더그는 다른 팀 대장들의 협조를 구해가며 기민하게 움직였다. 다른 팀 셰르파들 합세해 편성한 구조대를 올려 보내고 헬리콥터 착륙장을 다듬었다. 실종된 셰르파들을 구조했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수백t에 달하는 얼음기둥은 기존 등반 루트를 완전히 뒤덮었다. 세 명의 셰르파가 묻힌 방향은 알지만 얼음의 두께와 넓이는 가늠하기조차 힘들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사고 당시 정황이 속속 밝혀졌다. 우리 셰르파들은 다른 원정대 셰르파들과 함께 어두운 새벽에 베이스캠프를 떠났다. 사고는 해가 뜬 오전 7시 30분경 일어났다. 셰르파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사고지점을 통과하는데 갑자기 얼음기둥이 무너진 것이다. 근처에 있던 10여 명의 셰르파가 천둥 치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빌딩만한 세락이 덮치는 현장을 목격했다. 우리 셰르파들은 눈 깜박할 사이 얼음과 눈가루 속으로 사라졌다. 가까운 곳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셰르파들은 즉시 구조에 나섰다.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매몰을 피해 부상당한 파상 누루, 밍마 텐징 셰르파를 끄집어냈다. 거기까지였다. 조난자 3명을 덮고 있는 얼음의 양을 볼 때 그들을 구출하기란 불가능했다.
베이스캠프에서 급히 올라간 아파 셰르파가 합류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구조에 참여한 모든 셰르파 의견이 하나로 모아졌다. 이미 세 명은 얼음에 깔려 사망했으리라. 어마어마한 얼음의 양으로 볼 때, 시신을 찾을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오전 10시 30분경 구조작업이 중지됐다. 아파 셰르파는 사다로서 최종적으로 세 셰르파의 사망을 선언했고, 구조된 두 명만 데리고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다.
베이스캠프는 무거운 침묵에 싸였다. 우리 셰르파들은 운이 없었다. 조금 더 일찍, 혹은 조금만 늦게 그 지점을 통과했더라면 살았을 것이다. 나도 그 길을 여러 번 오르내렸고,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 내가 오르고 있어야 했다. 내가 등반할 때 세락이 무너졌다면 나도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에베레스트에서 생(生)과 사(死)는 이렇게 한 발걸음 차이밖에 없었다.
이후 이틀간 베이스캠프의 모든 원정대는 사망한 셰르파를 위한 추모의 날을 보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이 아려왔다. 죽은 락파 셰르파는 서른두 살이다. 그에겐 세 자녀가 있다. 레다 템바 셰르파는 스물두 살이다. 갓 결혼한 신랑이었다. 레다 템바는 아파 셰르파와 같은 타메 마을 출신인데, 그의 아내는 첫아이를 임신 중이라고 했다. 내 기억에 그들은 신중하고 겸손한 사람들이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복사광 자외선에 얼굴이 까맣게 그을어 하얀 이만 드러내며 웃던 그들이 이젠 어디에도 없다니.
집안의 기둥인 남편을 잃은 가족은 이 비극을 어떻게 견뎌낼까. 식당 텐트에 붙여 놓은 두 사람의 사진이 보였다. 부끄러운 듯 웃고 있는 락파와 레다 템바. 둘 다 너무 젊은 나이였기에 눈물이 났다. 뭔가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 모두가 하루 종일 침묵에 잠겨 있었다.
침묵의 계곡, 침묵의 바다
릭스비 박사는 부상을 당하고 귀환한 파상 누루와 밍마 텐징 셰르파를 헌신적으로 치료했다. 파상 누루의 부상이 더 심했다. 그들은 등반이 불가능했다. 더그는 부상자들을 이틀간 치료받게 한 후 사람을 붙여 그들을 하산시켰다. 셰르파는 생계를 위해 등반 안내자로 나선다. 이들은 의무적으로 보험에 가입하지만, 사망 보험금은 몇 천 달러에 불과하다. 그나마 네팔의 비효율적인 행정 때문에 언제 지급될 지도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아파 셰르파는 히말라야에서 죽은 자는 그 자리에 그냥 두는 것이 자기 부족의 전통이라고 했다. 빙하는 움직인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베이스캠프 근처로 죽은 셰르파들의 시신이 밀려와 나타날 수도 있다. 실제로 아파 셰르파는 그런 시신 몇 구를 거두어 화장한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비상금을 제외한 돈을 모두 털어 사망한 셰르파 가족에게 전해달라며 아파 셰르파에게 건넸다.
이틀간 애도의 시간을 보낸 뒤 등반이 속개됐다. 새벽마다 길 떠나기에 앞서 대원들과 셰르파들은 라마제단에서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죽은 사람들을 위한 기도였지만, 나 자신을 위한 간절한 기원이기도 했다. 등반로는 외길이므로 우리는 싫어도 사고지점을 지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 어딘가에 사람 좋은 그들이 묻혀 있다는 생각에 그쪽으로 눈길을 주기가 싫었다. 나는 불교의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을 외웠다.
사고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등반을 포기하지 않았다. 험상궂게 서 있는 세락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에 아이스폴은 가능한 한 빨리 지나가야 했다. 인간의 집념은 무서웠다. 사고가 난 거대한 얼음더미를 우회하는 새로운 루트가 뚫렸다.
시간이 갈수록 등반은 격렬하게 진행됐다. 내 몸은 고소에 제대로 적응하고 있었다. 이제 1캠프는 내게 잠시 쉬어가는 용도로 바뀌었다. 베이스캠프에서 2캠프로 하루에 갈 수 있을 만큼 적응됐다.
그렇게 등반이 진행되던 5월 2일, 릭스비 박사가 돌연 하산을 결정했다. 의학박사인 그도 고소증을 이겨내지 못했다. 호흡 곤란이 계속되자 의학자답게 자신이 적응에 실패했음을 깨닫고 스스로 하산을 결정했다. 2004년에 이어 그의 두 번째 에베레스트 도전이 좌절로 돌아간 것이다. 릭스비 박사는 정상을 오를 때 사용하려던 산소통과 장비를 다른 원정대에 팔았다. 산소통을 베이스캠프까지 올리려면 많은 시간과 인력이 필요하다. 물론 네팔에서 만들지 못하니까 산소는 프랑스제나 러시아제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베이스캠프에서 산소통은 귀한 대접을 받았고 꽤 고가였다.
하산 길에 릭스비 박사는 사고를 당한 셰르파의 고향 타메 마을로 갔고, 산소와 장비를 판 돈을 모두 유가족에게 기증했다. 고마웠다. 우정과 신의란 잃은 지 오래된 줄 알았는데 등반가들에게는 아직 그런 세계가 남아 있었다. 큰 감동이었고, 그래서 내가 산의 매력에 더 깊게 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1캠프에서 2캠프까지는 경사도가 거의 없이 평지를 이루는, 눈 쌓인 고원 플라토(Plateau) 지역이다. 이 설원을 가다보면 원근법이 무색해진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광활한 공간의 길. 누가 이곳을 ‘침묵의 계곡(Valley of Silence)’이라고 이름 붙였던가. 절대 정적, 절대 고요란 이런 느낌일까. 높은 봉우리로 둘러싸인 침묵의 계곡은, 그 엄청난 넓이로 볼 때 차라리 침묵의 바다라고 불러야 더 어울릴 듯싶었다. 그렇게 1캠프를 생략한 채 2캠프로 가는 설원 횡단은 진 빠지게 멀었다.
시각은 믿을 게 못된다. 바로 눈앞에 보여도 한참을 가야 도착할 수 있었으니까.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는 이 눈밭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너무 멀리 왔다. 갑자기 외로워졌다. 등반과 인생의 공통점은 외롭다는 것이다. 셰르파와 함께 가더라도 어깨동무를 할 수 없으니 어차피 혼자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짓을 하게 하는가. 그러나 불평을 하느냐, 즐기느냐의 차이라면 견뎌보자. 스스로 위무하지만 너무 멀리 왔고 너무 힘들었다.
왜 오르려 하는가?
만년설 속의 외로운 등반가라도, 그 순간을 행복해한다면 그곳이 천국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나는 믿었던가. 막신일호(莫神一好). 하나의 일에 몰입해서 성취하는 것보다 신명나는 일이 없다는 이유로, 지금 내 행위의 정당성을 표현할 수 있을까. 지루한 눈길을 걸으며, 나는 나에게 묻고 스스로 답했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설원이 언젠가 꼭 한 번은 본 것 같다. 물론 초행길이니 그럴 리는 없다. 그 이유를 알았다. 등반가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원정을 앞두면 안 하던 공부에 빠진다. 내가 오를 산에 대한 정보 찾기에 최선을 다한다. 사진 등 각종 자료, 소소한 정보도 빼놓지 않고 꼼꼼히 찾아 읽고 본다. 비록 책상 앞에서지만 내가 오를 산을 상상 속에서 몇 번이고 오르내린다. 산악인들은 이것을 ‘인도어 클라이밍(Indoor Climbing)’이라고 한다. 예비 등산인 셈이다. 그렇게 자료를 들여다보며 준비했기 때문에 언젠가 와본 듯한 기시감(旣視感)이 드는 것 같다. 2캠프로 가는 루트에서 본 풍경이 그렇게 느껴졌다.
복사광 더위 때문인지 다리는 무기력증에 빠졌다. 머릿속도 풍경처럼 하얘진다. 그저 주저앉고 싶다. 지금쯤 아내는 무얼 하고 있을까. 고령의 어머니는 오늘도 절에 가서 내 안전을 기원하고 계시겠지. 이게 뭐하는 짓이지? 가족들 걱정시키면서 나 스스로도 겁이 나는 이 짓을 하는 나는, 미친 게 아닌가.
해마다 수백 명이 히말라야에 도전하고 그중 몇은 목숨을 잃는다. 산악인들은 죽음과 마주하는 체험을 하면서도 왜 다시 산에 오르려는 걸까. ‘인간은 꿈과 목숨을 맞바꿀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산이 거기 있어 오른다(Because it is there)’는 유명한 표현도 있다. 이는 20세기의 위대한 등반가 조지 맬러리가 등반의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답한 말이다. 그도 결국 이 산에 묻혔다.
그렇다면 나는 왜 오르려 하는가. 모르겠다. 이게 솔직한 답이다. 다만 나는 산을 오를 때 행복하다. 힘든 등반을 끝내고 일상에 복귀하면, 세상은 정말 살 만한 곳이라는 느낌이 강렬하다. 그렇더라도 성취감 때문에 주변에서 그렇게 말리는 등반을 계속한다는 건 지나친 이기주의 아닌가. 모르겠다. 그저 좋아서 한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그래도 너무 힘들다. 입술이 불어터지고 얼굴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그만둘까. 환갑을 훌쩍 넘은 내 나이. 이번 시즌 최고령자이다. 그만둬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 정말 돌아설까. 그런데 하나만 묻자. 너는 지금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가. 남은 한 방울의 에너지까지 몽땅 길어 올려 이 등반에 최선을 다했는가. 아니다. 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42.195km의 마라톤 풀코스 완주. 신발끈조차 풀기 어려울 정도로 피로가 쌓여도 매번 해내지 않았나.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엔 아이스하키 선수로 뛰면서 모든 훈련 과정을 감내해왔다. 마라톤 피니시 지점을 심장 터질 것처럼 통과했듯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곳엔 경쟁자도 심판도 없다. 나 자신이 경쟁자이고 심판이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당장 그만둬도 좋다.
자문자답하며 정신없이 걷다보니 어느덧 해발 6400m에 구축된 2캠프에 도착했다. 베이스캠프에서 출발한 지 11시간 만에 도착한, 정말 먼 코스였다. 2캠프는 정면에 로체 봉을 마주하고 있는, 돌밭 위에 만들어놓은 텐트촌이다. 캠프에는 밤엔 결빙되어 없어졌다가 낮에는 녹아 흐르는 개울도 있다. 낙석과 눈사태 위험도 없고 식수도 근처에 있는, 캠프 위치로는 축복받은 명당이다.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이곳을 제2의 베이스캠프 구실을 하는 전진 캠프로 쓰기도 한다. 내가 가야 할 루트를 올려다보니 로체 봉 급경사 중간에 무언가가 보인다. 작년 등반 때 철거하지 않은 텐트가 분명하다. 가파른 사면에 제비둥지처럼 자리 잡은 3캠프는 해발 7350m 지점에있다. 수학교사 매트가 고소증 때문에 헬기편으로 카트만두로 후송됐다는 무전을 들었다. 체력도 좋고 제자들 응원 때문에라도 꼭 등정에 성공하겠다며 집념이 대단했는데 안타까웠다.
2캠프에서 하룻밤을 자고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다. 이것도 고소 적응 훈련의 일종이다. 고소를 올릴수록 다시 그 고도에 맞는 적응이 필요하다. 5월 8일 또 한 명의 탈락자가 생겼다. 우리 팀의 젊은 캐나다인 제프였다. 그도 결국 고소 적응에 실패했다. 3캠프 다음에는 최종 캠프인 8000m 사우스콜에 4캠프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 캠프에 오를 수 있다면, 잠시 휴식했다가 밤새워 등정에 나서야 한다. 이제 등반은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하루 쉬는 날 내 개인 텐트를 보수했다. 바닥 얼음이 내 체온에 녹아 울퉁불퉁해졌기 때문이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그렇게 계획대로 고소 캠프가 만들어지던 5월 11일. 고소 캠프를 오르내리다가 휴식차 베이스캠프에 머물고 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티베트 쪽에서 에베레스트 등반에 착수한 박영석 대장이 등정 성공 후 우리가 있는 남동릉 루트로 하산한다는 소식이었다.
깊은 눈 때문에 우리 셰르파들은 이제 겨우 3캠프를 만들어놓았을 뿐이었다. 3캠프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 위로는 뚫리지 않았던 길이기에, 박 대장의 횡단은 무모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박 대장의 하산은, 내가 올라야 할 루트를 확인시키는 일도 되기 때문에 등정 가능성을 높여주는 희소식이었다. 박 대장의 횡단 소식이 반갑기도 했지만, 무사히 내려올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그런 우려스러운 상황에서 박 대장은 이튿날인 12일 새벽 2시경, 무전으로 3캠프까지 무사히 내려왔다고 알려왔다. 3캠프엔 고맙게도 빈 텐트가 있었다. 우리 팀 셰르파들이 쳐놓은 것이었다. 티베트 쪽 마지막 캠프를 출발해 23시간 30분 만에 3캠프를 만났고, 박 대장은 무작정 빈 텐트에 들어가 하룻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이튿날 10시경 하산을 시작해 오후에 베이스캠프에 도착, 우리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한국 팀은 물론 외국 팀들도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뻐했다. 남극점, 북극점, 에베레스트 정상 3극점과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모두 올라 산악 그랜드슬램에 이어 에베레스트 횡단 등반 성공. 정말 대단한 쾌거다.
기력이 다 빠진 박 대장은 헬기편으로 카트만두로 이동했다. 고산은 어디 한 곳 편히 발붙이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곳은 몸과 정신의 임계점을 넘나드는 시험장이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억세게 움켜쥐었기에 좌절할 수 없다. 박 대장의 좌우명은 ‘절대 포기하지 말라!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 주저앉지 말라’라고 한다.
나는 마지막 고소 적응을 위해 3캠프에 올라가 하룻밤 잔 뒤 베이스캠프로 하산하기로 했다. 지겨운 설원을 횡단해 2캠프에 도착해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새벽 3캠프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로체 봉 급사면까지는 완만한 경사의 설원이다. 몇 개의 크레바스를 피해 1시간 정도 오르니 그때부터 경사각이 급해졌다. 이곳부터는 등강기를 사용해 고정 로프를 따라 올라야 한다. 등강기는 톱니가 있어 전진은 되지만 후진은 안 된다. 등강기를 내 허리에 찬 안전벨트에 슬링끈으로 연결한 후 고정 로프에 물렸다.
이렇게 하면 이론적으로는 내가 추락할 때 등강기가 나를 잡아준다. 하지만 이게 불변의 이치가 되지 못한다. 이렇게 오르는 것을 ‘주마링’이라고 하는데, 이 등반 기법으로는 가파른 사면을 자벌레처럼 한 발 한 발 기다시피 올라가야 한다.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면서 가슴에 통증이 느껴진다. 산소를 달라는 신호다. 한 걸음에 한 번 쉬는 일이 잦아졌다. 피켈을 꽂아 의지한 채 붕어처럼 심호흡을 하지만 대기 중에 산소가 워낙 희박하다보니 산소가 폐 안으로 들어올 리가 없다.
40도의 경사부터 70도가 넘는 가파른 빙벽까지 나타났다. 3캠프로 오르는 구간은 위험하기도 하지만 엄청난 체력도 요구한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으니 가야 한다. 6시간 동안 팔에 쥐가 날 정도로 강행군의 오름짓을 끝내고나니 설벽에 제비집처럼 쳐놓은 3캠프가 나타났다. 우리 캠프는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빙설벽 끝에 자리 잡았다. 4캠프까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려는 생각에서다.
설벽을 깎아 스노바로 텐트를 고정해 놓아 자칫하면 텐트째 아래로 굴러떨어질 듯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대로 2캠프까지 순식간에 날아 갈 것이다. 생리적 해결도 위험할 정도다. 볼일을 보려면 피켈로 자기 확보를 하고 로프를 잡은 후에 시도해야 한다.
베이스캠프보다 2000m 정도 높은 3캠프의 밤은 또 다른 지옥이었다. 이미 목은 쉬어 말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모자라는 산소를 한 모금이라도 더 요구하는 심장은 쿵쿵 북소리를 냈다. 낮은 기압과 해가 지자마자 급전직하하는 기온 때문에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깜빡 잠이 들면 온갖 환영이 보이곤 했다. 자는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기나긴 시간이었다. 그런 밤을 보내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3캠프에 비해 베이스캠프는 천국이었다. 처음엔 불면의 밤을 보내던 베이스캠프가 이제는 안락한 집처럼 느껴진다.
정상으로 가는 길
정상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으로 이틀간의 달콤한 휴식을 취했다. 이 휴식이 끝나고 베이스캠프를 떠나면 성공이든 실패든 둘 중 하나의 결과를 만날 터였다. 날이 더워졌는지, 아이스폴 곳곳이 붕괴되고 있었다. 확실히 기온이 올라갔다. 낮이면 빙하에서 생기는 시냇물 소리가 요란하다. 히말라야에 여름이 찾아오면서 기온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는 증거다. 한 번의 도전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다는 조바심이 났다.
히말라야는 6월이면 몬순이 온다. 장맛비는 이곳에서 눈폭풍이 된다. 눈보라를 뚫고 등반할 수 없기에, 몬순이 오기 전인 5월 중순 이내에 정상에 도전해야 성공할 확률이 높다. 베이스캠프에 모인 우리 팀 대원들의 얼굴은 그동안 많이 변했다. 하나같이 수척해졌고, 까맣게 탄 얼굴에 고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흡사 판다 곰을 보는 듯했다. 입술이 터져 음식을 먹을 때마다 핏물이 배어나오곤 했다. 처음 베이스캠프에 왔을 때의 북적거리던 분위기는 이제 많이 사라졌다. 시즌이 끝나가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등반을 포기하고 하산했다. 우리 팀도 이름대로 제한이 없어 오고가는 것이 자유로웠기에 썰렁해졌다.
베이스캠프 컴퓨터를 통해 매일 에베레스트 기상정보를 살폈다. 그런데 덴마크의 예보와 미국의 예보, 한국의 예보가 다 달랐다. 적어도 정상에서 하산까지 며칠은 날이 계속 좋아야 한다. 하루이틀 좋아서는 안 된다. 계속 예보를 주시하고 있는데, 날씨가 나빠지는 조짐이 보였다. 더 기다리다간 정상 등정을 시도도 못 해보는 것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남은 대원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각자 자기 나라 예보를 믿는 눈치다. 나도 한국 예보만 믿기로 작정했다. 한국 기상청 장기예보를 살펴보니, 지금 날씨는 좋지 않지만 앞으로 5일간은 날씨가 좋아진다고 했다. 고심 끝에 나 나름대로 등반을 결정했다. 마음 속으로 등반 동선을 그렸다. 5월 15일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2캠프에서 마지막 휴식 겸 이틀을 보낸다. 17일은 3캠프까지 진출해 하루를 보낸다. 18일은 3캠프를 출발해 오후에 마지막인 4캠프에 도착한다. 그리고 몇 시간 휴식을 취한 후 저녁 8시경 정상을 향해 출발한다. 그리하여 5월 19일 오전 중에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다.
베이스캠프에서 정상 왕복까지 6박7일이 걸린다. 그동안 2캠프를 제외하면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할 것이다. 나와 함께 오를 앙 파상 셰르파는 2캠프에 체류 중이었다. 15일 새벽, 홀로 베이스캠프를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동트기 전이었는데, 정현이 아침을 챙겨왔다. 하루 종일 2캠프까지 올라가려면 어찌 됐든 먹어야 한다. 리더 더그를 비롯해 우리 팀 대원들이 모두 자기 텐트에서 나와 내 주변에 섰다. 그들은 날씨가 나빠 오늘 등반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좋지 않은 날씨에도 길 떠나는 나를 격려하기 위해 일찍 일어난 것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먹히지도 않는 아침상을 받으니,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식사가 될 수도 있겠다는 비장한 생각이 들었다.
대원들이 내 등반장비를 점검하며 빠진 게 없는지 챙겨줬다. 자폭하러 가는 일본군 가미카제 특공대가 불현듯 떠올랐다. 정현과 악수를 나눈 후 길을 나섰다. 미명에 혼자 아이스폴을 오르다보니 마치 죽으러 가는 것 같은 공포심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성공이든 실패든 이제 끝이 보인다. 그리고 등반을 시작한 이상, 절망의 반대쪽인 희망을 믿기로 했다. 지금부터 나는 희망의 끈을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다.
2캠프에서 함께 오를 앙 파상과 파상 템바 셰르파와 합류했다. 그런데 이튿날 덴마크인 두 명이 2캠프로 올라왔다. 덴마크 기상대의 일기예보를 믿고 등반을 미뤘으나 내가 베이스캠프를 출발하니까 그들 역시 조바심이 난 듯했다. 덴마크 쪽 셰르파는 따로 있었고, 아파 셰르파는 전체 팀 리더를 맡아 함께 오르기로 했다.
17일 2캠프를 떠나며 베이스캠프에 있는 정현과 무전통화를 했다. 반갑게도 그날 중동고 원정대 신장섭 등반대장이 정상에 올랐다고 알려줬다. 그가 무사히 4캠프로 하산을 마친 17일 밤, 교대하듯 10시에 4캠프를 떠나 정상으로 향한 한국인들이 있었다. 모두 5명이었다. 천안팀 이세중 등반대장과 고동재, 박주열 대원. 그리고 경남팀 이 대장과 곽 대원이었다. 그들 역시 밤새워 정상에 오를 것이다. 한국 팀 중 첫 번째로 정상에 올라 미리 숙제를 끝낸 신 대장이 부러웠다.
내가 먼저 2캠프를 출발해 3캠프 급경사까지 이어지는 설원을 가고 있는데, 덴마크인 두 명이 나를 추월했다. 두세 번 실패를 맛본 사람들이었기에 이번만큼은 꼭 정상에 오르겠다는 의지가 강렬했다. 그들의 체력은 대단했다. 운행에 나서면 늘 나와 두 시간 이상 차이가 났다. 나는 묵묵히 내 페이스를 지킬 뿐이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
지옥 같은 3캠프에 도착해 하룻밤을 지새운 후 사우스콜을 향해 출발했다. 내가 4캠프로 향하는 18일 낮 12시 즈음, 천안팀 두 명과 곽 대원이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이 대장의 등정 소식은 없었다. 마지막 캠프를 출발할 때부터 이 대장의 컨디션은 좋지 않았다. 자신의 상황을 알고 이 대장은 곽 대원과 텐디 셰르파에게 먼저 가라고 했다. 꼬박 14시간을 걸은 끝에 곽 대원은 한국 여성 산악인 중 다섯 번째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그녀는 배낭에서 캠코더를 꺼내 파노라마 영상을 찍고 목에 걸었다.
천안팀 등정자 두 명은 앞서 내려갔고, 곽 대원과 텐디 셰르파는 조금 뒤처져 하산을 시작했다. 그들은 오후 1시 30분경 8760m 남봉에 도착했는데, 놀랍게도 상태가 좋지 않아 하산한 줄 알았던 이 대장이 거기 있었다. 이 대장은 혼자였다. 그와 함께 있어야 할 도르지 셰르파는 간 곳 없었다. 산소통을 점검해보니 산소도 떨어졌다. 산소도 없고 도와줄 셰르파도 없으니 거기서 곽 대원과 함께 하산하는 게 맞다. 그러나 이 대장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로서는 눈앞에 빤히 보이는 정상을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이 두 번째 도전이었으니까.
무전기 주파수를 공유하기 때문에 베이스캠프는 이런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한국팀 대장들은 이 대장에게 하산할 것을 간곡히 종용했다. 그 후 무전교신은 두절됐다. 이 대장은 산소가 떨어져 고통을 겪으면서도, 설동을 파고 비박한 후 이튿날 정상에 오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8500m 이상의 높이에서는 설동을 팔 수도 없거니와 산소와 침낭도 없이 비박한다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이 대장의 고집을 꺾기 위해 곽 대원은 셰르파와 함께 1시간 가까이 그를 설득했다. 결국 함께 내려오기로 했지만, 이번에는 눈발이 날리면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그런 사투를 벌이고 있는지 모른 채, 나는 가파른 로체 페이스를 기어오르기에 바빴다. 그때 눈밭에 무언가 보였다. 붉은 등산복이었다. 고정 로프 곁에 한 사람이 죽어 있었다. 5월 10일, 로체 봉 등반 중 사망한 체코슬로바키아 산악인 파벨이었다. 불과 8일 전에 로체를 오르다 이곳에서 멈춘 파벨의 몸은 눈에 반쯤 묻혀 있었다.
이곳을 통과한 모든 산악인이 나처럼 이 시신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던 길을 멈출 수 없었던 것처럼 나도 그랬다. 우리는 이 산에서의 위험을 충분히 이해했고, 한발 곁에 있는 생과 사를 알고 있었다. 그때 3캠프로 하산하는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중동고 원정대 신 대장이었다. 그는 나에게 “선배님 힘내세요, 해낼 수 있어요”라며 힘을 북돋워 주었다.
노란색 석회암층으로 띠처럼 길게 형성된 옐로밴드 오른쪽으로 로체 봉이 더 험상궂게 보였다. 에베레스트가 있는 왼쪽으로는 암벽 돌출부 제네바 스퍼(Geneva spur)가 무너질 듯 서 있었다. 한발 한발 고정 로프에 의지해 옐로밴드를 넘다보니 긴 설연을 티베트 쪽으로 날리며 위압적으로 버티고 선 에베레스트 남봉이 보였다. 정상은 남봉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잠시 쉬며 올라온 길을 돌아보았다. 제비둥지 같던 3캠프가 콩알만하게 보였다. 오래전 등반가들이 설치했을 수많은 고정 로프가 있지만 어느 것도 믿을 게 못 됐다. 삭았을 수도 있고, 절단됐을 수도 있었다. 제네바 스퍼를 왼쪽으로 횡단했다. 드디어 말안장처럼 고개를 이룬 아이스폴이 보였다. 여기서 보면 눈높이가 같지만 얼마나 더 가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8000m 4캠프
체력이 고갈되면서 몸은 지옥이지만 가끔 광활한 히말라야 산군을 내려다보는 내 눈은 천국이다. 어떤 절대자가 이런 풍광을 만들었을까. 만년설이 쌓인 히말라야 산맥 과 파란 대지가 극명하게 나뉘었다. 과연 이곳은 절대 정적이 내려앉은 고요한 산들의 나라였다. 이제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어쨌든 저 아래 푸른 대지로 내려갈 것이다. 하산하는 카라반 길에서 ‘그때 좀 더 노력했더라면’ 하는 후회를 하지 않으려면 힘을 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리가 풀릴 정도로 힘을 다 쏟고 사우스콜 4캠프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쯤이었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나는 바위에 쪼그리고 앉아 셰르파들이 텐트를 치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때쯤 이 대장팀이 남봉을 내려서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실을 모른 채 겨우 설치된 텐트에 들어가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렇게 저녁 8시경 정상으로 출발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정된 8시가 지나 한참 후 내 텐트로 온 아파 셰르파는 “노 굿 웨더. 위 캔 낫 클라이밍”이라고 말했다. 등반할 수 없다는 통보. 그게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각오했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른 무엇인가를 생각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제트 기류가 흐르는지 텐트 밖으론 쇳소리가 났다. 먹으려 했지만 입맛이 없었다. 지난 사흘간 먹은 것이라고는 수프 한 공기와 비스킷 몇 조각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걸 억지로 삼켰다. 기침을 해대서인지 이제는 숨 한 번 쉴 때마다 양쪽 갈비뼈 부근에 격렬한 통증이 몰리곤 했다. 4캠프부터 산소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지만 수면을 위한 아주 적은 양이기에 호흡 곤란은 여전했다.
LA를 출발한 지 벌써 50일이 훌쩍 지났다. 나는 번데기처럼 침낭 속에 누워 고통스러웠던 지난 등반을 복기했다. 잠을 잘 수도 없는 기묘한 공간이 이곳 4캠프다. 어둠의 장막이 시나브로 모든 산을 지웠다. 그래, 내일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려 하산하는 거다. 내 에베레스트 등반은 여기까지다.
두서없는 여러 생각이 깨진 사금파리처럼 뒤죽박죽 떠올랐다. 내일은 날이 좋아질 거다. 그럼 천국 같은 베이스캠프로 가는 거다. 언제 기회가 또 온다면 다시 도전하자. 하지만 내 나이 예순넷. 내게 또 기회가 올까. 아니다. 다신 안 온다. 기회가 있더라도 이젠 싫다. 춥고, 황량하고, 공기조차 인색한 이곳엔 아무래도 정을 붙일 수가 없다. 이런 고도까지 오른 것도 대단한 일을 해낸 거야. 나는 스스로에게 후한 점수를 주며 등반 포기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에베레스트 등정은 전날 밤 12시 전에 시작해야 한다. 밤새 올라 정상에 설 때까지 대략 12시간 이상이 걸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출발하지 않는다면 아침에 날씨가 좋아도 정상에 갈 수 없다. 한밤중에 정상에 설 순 없다. 살기 위해서라도 하산해야 한다.
에베레스트는 언제나 영광과 비극이 공존하는 산이다. 내가 8000m의 4캠프로 겨우 올라와 침낭 속에서 무중력 상황을 겪고 있던 그 시각, 이 대장과 곽 대원은 8500m 이상의 고도에서 살아 내려오려고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내가 비록 몽롱한 상태였어도, 그들보다 500m쯤 아래이니 훨씬 안락한 상황이었던 게 틀림없다.
이 대장과 곽 대원, 그리고 텐디 셰르파는 추락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함께 로프를 묶고 한발 한발 내려섰다. 다들 기진맥진했지만 이 대장의 상태가 가장 안 좋았다. 그렇게 오후에 겨우 4캠프가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 도착했다. 이 대장이 텐디 셰르파에게 잠깐 쉬었다 가자고 했다. 텐디 셰르파 역시 산소가 떨어졌고 두 명을 챙기느라 몹시 힘들었다. 텐디 셰르파는 눈앞에 보이는 4캠프를 가리키며 거의 다 왔고 이제 별 위험 없다며, 연결된 로프를 풀고 혼자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