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인(匠人) 댈럼은 선입관에 따라 솔직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고, 상류층 지식인 샌디스는 지식을 총동원해 터키의 여러 측면을 객관적으로 보려 했다. 자의식이 강한 리스고는 기독교인의 자존심 때문에 터키를 경직된 태도로 대했다.
- 몬태규 부인은 여성의 처지에서 터키를 바라보며 이국적 면모를 자신감 있게 ‘소비’했다.
샌디스의 여행기 속표지(왼쪽)와 여행기의 앞부분에 실린 지도.
그때의 유럽 여행객들은 십자군전쟁을 기억하고 있었다. 인문주의 전통이 강해 그리스 로마 고전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터키 지역을 익숙해하면서도 낯설어했다. 기이하게 보면서도 혐오했다. 17, 18세기 터키 지역을 여행한 영국인들의 기록을 통해 근대 유럽인의 눈에 비친 터키를 살펴보자.
근대에 열린 ‘적대지역’ 여행
사전 작업으로 근대의 여행과 여행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대해 알아본다. 중세 사람들에게 가장 먼 여행은 성지 순례였다. 이 때문에 13세기의 마르코 폴로나 중세 최고의 여행기 작가인 존 맨드빌이 실제로 여행을 했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항해기술이 급작스럽게 발전한 덕분에 근대 유럽인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세계 각지를 여행하게 됐다.
근대 초 적지 않은 유럽인이 미 대륙과 인도, 중국을 가볼 수 있었다. 상업적, 정치적, 외교적 목적의 여행도 있었지만 견문을 넓히고 즐기기 위한 여행도 있었다. 그들은 목격한 경치와 인종적, 문화적 차이에 대해 다양한 기록을 남겨놓았다. 그에 따라 여행기를 출판하고 출판된 여행기를 번역하는 사업이 성황을 이뤘다. 이에 대해 어느 학자는 “근대 유럽의 여행기는 가장 인기 좋고 융통성 있는 장르였다. 다양한 형식으로 독자층을 교육시키고 즐겁게 해줬으며 국가적 자존심과 상업투자를 고취했다”고 평가했다.
슐레이만 1세 삽화(리처드 놀스의 ‘터키사 개론’ 중).
영국인들은 중세 이래 이슬람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유지했다. 동양 세계(이슬람권)에서는 폭정이 빚어지고 무절제한 욕망과 관능이 가득 차 있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다른 유럽 국가보다 늦지 않은 시기에 오스만 투르크와 통상조약을 맺었다.
오스만 제국 처지에선 영국이 유럽의 서쪽 끝에 있고 유럽 대륙에 있는 나라들과는 경쟁관계에 있으니, 오스만 제국과 가까워 오스만을 위협할 수 있는 유럽 가톨릭 국가를 견제해줄 유익한 이웃이라고 봤을 수도 있다. 1592년 영국에서 레반트 상사가 수립된 후, 레반트(아나톨리아 지방을 가리킴)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수가 대폭 늘어났다. 영국인들이 보는 연극에 터키의 술탄이 등장했다. 터키 역사를 소개한 책이나 쿠란의 번역본도 활발하게 출판됐다.
영국에서는 여러 편의 여행기가 출판됐는데, 터키 지역 여행기도 상당수 있었다. 토머스 댈럼(Thomas Dallam)과 조지 샌디스(George Sandys), 윌리엄 리스고(William Lithgow), 몬태규 부인(Lady Wortley Montague) 등 4명의 영국인이 쓴 터키 지역 여행기를 보자. 댈럼, 샌디스, 리스고는 사회적 신분과 관심사는 각기 달랐어도 1600년대 초 터키 지역을 여행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몬태규 부인은 1700년대 터키를 방문했으므로 시기상 세 사람과의 차이점과 함께 여성 여행자의 시각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몰랐던 만큼 느낀 여행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방문지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고 있으면 여행은 분명 달라진다. 보잘것없는 돌덩어리조차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발자취임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17세기 초 오스만 투르크를 방문한 댈럼과 샌디스는 신분과 터키에 대한 지식의 정도가 극명하게 달랐다. 그런 만큼 그들이 기록한 터키의 모습도 사뭇 다르다. 랭커셔 출신의 시계 오르간 제작공인 댈럼은 4명 가운데 신분이 가장 미천했다. 그는 일지(journal)의 형태로 자신의 여행을 기록했을 뿐 출판은 하지 않았다.
여행이 급격히 활발해진 시기라 해도 터키까지 가는 장거리 여행은 아무래도 상인이나 선원 혹은 상류층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댈럼은 그런 계층에 속한 이가 아니었다. 그는 영국의 군주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오스만의 메흐메트 3세 즉위 선물로 보내는 시계 오르간을 재조립하라는 명을 받아 1598년 터키를 여행하게 됐다.
메흐메트 3세의 초상(왼쪽). 오른쪽은 시계 오르간의 한 형태.
그는 여행 중에 발생한 통역과 지역 주민과의 갈등에 대해 소박한 불평을 털어놓았다. 지중해의 풍광에 대해서는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토프카피 궁전에 들어간 후에도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대한 이해는 안중에 없고, 재조립해야 할 오르간의 상태와 자신이 경험한 터키에 대해서만 꾸밈없는 말투로 기술한다.
고향과 런던밖에 몰랐던 댈럼이 경험한 오스만 투르크는 풍요로운 자연과 화려한 궁전이 여행객을 감동시키는 곳이었다. 토프카피 궁전과 술탄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장관 앞에 복잡한 자의식이 없었던 댈럼은 질투심이나 불편함을 표현하는 일 없이 그저 경탄했다. 그의 기록은 평범한 유럽인들이 터키를 방문했을 때 느꼈을 감탄을 짐작하게 해준다.
하지만 그가 순수한 눈으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그도 보통의 유럽인들처럼 터키나 터키인에 대한 편견과 불신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다. 오르간이 마음에 든 술탄이 아랫사람들을 통해 댈럼에게 터키 정착을 강권한 일화를 소개하면서, 터키에 대한 유럽인들의 판타지에 부합하는 이야기도 한다.
그는 문지기가, 자신이 터키에 정착하면 술탄이 아름다운 부인을 두 명이나 줄 것이라고 유혹했고 공놀이를 하고 있는 첩들을 하렘으로 난 틈을 통해 엿보게 해줬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지 형태로 기록했고 출판을 의도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기록물이니 댈럼이 허구와 사실을 얼마나 섞어놓았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댈럼이 대단한 지식 없이 터키에서 경험한 것과 느낀 것을 여과 없이 썼다면, 1610~1611년 터키와 예루살렘 등을 방문하고 1615년 여행기를 출판한 샌디스는 그 대척점에서 기록을 남겼다. 샌디스는 귀족이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과 성경의 시편(詩篇)을 번역한 인문학자였다. 유럽의 정세와 문화를 두루 알고 있었고 종교적 관용이라는 문제에도 관심이 있었던 듯하다.
아는 만큼 본 여행자
샌디스는 당시 식자층이 그러했듯이 그리스·로마의 고전, 성경의 배경 지역을 본다는 생각으로 터키와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이 때문에 그의 여행기는 고전 작품에 대한 소개와 번역, 현장 답사를 통한 고전의 재평가, 현재의 터키에 대한 감상과 분석을 덧붙인 인문학적, 민속학적 탐구이자 백과사전이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아이네이스’ 같은 고전의 배경이 되는 지역에서는 그 작품과 관련된 원문을 싣고 그가 운문으로 번역한 것을 제시하며, 그 지역을 고전 텍스트와 함께 탐험할 수 있게 해준다. 오스만 투르크의 역사와 정치를 소개할 때는 당시 출판된 터키 관련 서적에 실린 정도의 정보를 가져왔다. 그리고 상세한 분석을 덧붙여 영양가 있는 읽을거리를 만들었다.
교양 있는 상류 식자층을 위한 샌디스의 여행기는 보통 여행기보다 큰 판형인 4절판 형태다. 정교한 이미지와 지도가 많이 삽입돼 있어 공을 들인 고급 여행기란 인상을 준다. 그 덕분에 여러 번 재판됐고 번역도 됐다.
샌디스는 그리스·로마 고전에 대한 지식이 넘치도록 풍부했다.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지식과 목격한 바를 조합하려는 학자적 노력도 기울였다. 경험의 한계에 매몰되지 않고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터키를 소개하고자 하는 냉철한 시선을 유지했다. 샌디스는 열린 마음으로 이스탄불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도 오스만 투르크의 정치적 특성을 날카롭게 평가한다. 거의 모든 이스탄불 방문자가 언급했던, 성소피아 사원에 대한 묘사를 보자.
샌디스는 예술적인 감동을 표현하면서 종교적인 관점으로 개입하려는 욕망을 잘 억제했다. 기독교인에게 콘스탄티노플 실함(失陷)은 뼈아픈 상처다. 이교도의 성전이 된 성소피아 사원은 현재의 굴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샌디스는 모스크가 이스탄불의 일곱 언덕을 장식하고 있는 모습을 장관이라고 묘사했다. 성소피아 사원의 현재 모습에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터키의 쇠락도 예측
1632년 출판본에 실린 삽화. 리스고는 터키 터번을 두른 채 트로이 왕의 것이었다는 지팡이를 들고 있다.
후반부에 나오는 오스만 투르크의 역사와 정치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다. 그는 터키에 대한 총체적인 상을 제시하며 오스만 제국의 미래를 냉철히 전망한다. 당시 술탄이었던 아흐메드 1세의 평판과 투르크족 시대부터 오스만 투르크에 이르는 터키 역사도 소개한다. 오스만이 현재 가장 큰 제국임을 인정하지만, 노예적인 신민(臣民)과 공포로 통치하는 군주로 구성된 불건전한 정치체제를 지닌 나라로 평가한다.
샌디스는 터키가 곧 쇠락할 것이라고 예측하며 그 까닭을 ‘터키의 몸은 머리에 비해 너무 커졌다. 머리인 술탄은 전쟁에 익숙하지 않아서 무력에는 관심이 없다. 군대는 나태와 방만으로 부패해 있다’라고 평가했는데 이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샌디스의 여행기는 댈럼의 일지처럼 생기 있고 인간미 넘치는 맛은 부족하다. 그러나 그 시기 유럽 지식인들이 터키에 대해 알고 있던 지식과 실제 경험을 총집합시킨 것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유럽 여행객들이 갖는 한계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여행객들이나 지식인들에 비해서는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제시하려 했다는 점도 높이 살 만하다.
댈럼과 샌디스는 이슬람교 문화권인 터키에 대해 일차적이지 않은 태도를 취했다. 마찬가지로 다른 유럽의 여행객들도 이슬람교 문화권인 터키에 대해서는 양가적인 태도를 취했다. 종교적 인종적으로 타자인 오스만 투르크는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지만, 터키 지역의 빼어난 문화와 자연이 유럽인들의 눈길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여행기를 남긴 이들은 보고 경험한 것이 흥미로웠다고 하니 종교적인 이유로는 비난해도, 터키 지역의 매력은 무시하지 못한 것이다.
편견에 갇힌 여행자
시간이 흘러 오스만 제국이 더 이상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고,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으로 터키와 이슬람 문화권을 바라보는 태도가 형성되자 오스만 투르크의 이국적인 면모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려는 태도가 나타났다. 리스고와 몬태규 부인은 앞의 두 사람과는 대조되는 태도로 터키를 바라봤다.
리스고는 4명 중 유일하게 여행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그는 1610~1613년 터키 근방을 여행했다. 1614년 첫 여행기를 출판한 후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자신의 여행기를 수차 개정 증보했다. 1632년에는 그동안의 여행담을 모아 ‘긴 여행과 신기한 모험에 관한 이야기’라는 책을 출판했다. 스코틀랜드 출신답게 말투는 무뚝뚝해도 경험을 소상하게 늘어놓은 그는 거의 모든 여행을 도보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목격자’였다는 사실에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독자를 그다지 의식하지 않은 것 같은 댈럼이나 자신을 억제하며 객관화하려 애썼던 샌디스와 달리 리스고는 시종일관 자신을 영웅적인 경험을 한 주인공으로 묘사한다. 자신의 여정이 고통과 놀라운 일들로 가득했음을 강조했다. 이런 까닭에 리스고 여행기에는 그의 주관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터키에서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공존하는 것을 목격한 리스고는 개신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를 경계하고 경멸하며 비판한다. 어느 곳을 가든지 문제가 생기면 가톨릭 국가 출신의 일행을 먼저 의심했다. 터키와 터키인들에 대해서도 종교적인 이유로 맹렬하게 비판했다.
리스고는 오스만 투르크의 윤리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게 설명했다. 터키인들은 기독교 여인을 강간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며, 해가 뜨기 전에 남쪽으로 흐르는 샘에 몸만 씻으면 죄가 사해졌다고 여긴다고 과장해 써놓았다. 성소피아 사원에 대한 리스고의 다음과 같은 감회를 보면 그가 개신교인으로서 자신을 얼마나 강조하는지 알 수 있다.
유럽 기독교인의 자랑거리였던 성소피아 사원을 오스만 제국의 정예병인 ‘예니체리’의 감시하에 들어가야 한다고 언급하는 것에서 기독교인 리스고가 입은 자존심의 상처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개신교도들이 가톨릭 세력을 비난할 때 쓰던 ‘분칠한 창부’나 ‘썩어버린 속을 가리는 가면’을 거론한 것도 터키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교도들이 만든 문화를 비판한 리스고는 그 직후 음식과 기후, 풍경을 갑자기 칭찬한다.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모습이다. 이는 리스고가 감각적으로 경험한 것과 종교적 입지 사이의 괴리를 원만하게 조율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몬태규 부인의 터키 여행기에 실린 목욕탕 일화 부분 삽화.
몬태규 부인은 리스고가 여행한 지 100여 년 후 오스만 투르크에 갔으니 오스만을 덜 위협적으로 보고 유연하게 대할 수 있었을 할 것이다. 그 시기 여성이 터키 지역을 여행하고 기록을 남긴 것이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도 이 기록은 주목할 만하다.
터키에 매혹된 여행자
몬태규 부인의 터키 여행기는, 그가 여행 중에 쓴 편지를 모아 1763년 지인이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편지 중 다수는 여성을 수신인으로 하고 있다. 터키에 머무는 동안 출산을 경험한 몬태규 부인은 그가 관찰한 터키가 이전 남성 작가들이 목격한 터키와 다르다는 사실을 부각했다. 이렇게 자신감을 보인 것은 오스만 제국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공간이 뚜렷하게 분리돼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래 머물지 않는 외국인 여행객들은 여행지 이성(異性)의 삶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몬태규 부인은 이전의 남성 작가들이 간과하거나 오해한 이슬람 여성들을 봤다. 그들도 기독교인 여성들처럼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보통 인간이며 그 나름의 권리도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남성 작가들이 문란한 성적(性的) 공간으로 언급한 터키 목욕탕을 방문한 일화도 있다. 그는 터키 여성들이 옷을 입고 있지 않았을 뿐 영국 시인 밀턴이 ‘실낙원’에서 묘사한 인류의 조상 이브처럼 우아하고 품위 있다고 칭찬한다. 터키 여성과 목욕탕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음적 시선과 섣부른 욕망 투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일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옷을 벗으라는 터키 여성의 재촉에 몬태규 부인이 겉옷을 벗고 코르셋을 보여줬을 때 보인 터키 여성들의 반응이다. 터키 여성들은 갑갑한 옷에 갇힌 몬태규 부인을 보고 그가 남편의 강요로 코르셋을 입었고 스스로는 벗을 용기조차 내지 못한다고 추측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유럽 여성의 종속 상태를 불쌍히 여기는 이들의 모습은 남성에게 억압받는 터키 여성들의 모습에 대한 기대를 역전시킨다. 유럽인 독자들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스만 제국의 상류층 부인 방문을 추억할 때도 터키 여성들이 절제된 종교생활과 즐거운 휴식으로 이뤄진 일상을 누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긋한 나이의 재상 부인은 자선에 관심이 많고 도덕적으로도 청렴한 것으로 묘사돼 있다.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장군의 젊은 부인은 이국의 미녀답게 더없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세련된 취향의 소유자이고 기분 좋게 손님을 대접하는 매력을 지녔다.
몬태규 부인은 오스만 제국의 호사스러운 문화를 묘사하고, 감각적으로 경험한 즐거움을 거리낌 없이 자랑한다. 오스만 투르크의 이질성은 호기심과 매혹의 대상이고 그가 적극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무함마드의 낙원’은 유럽인들이 무함마드가 여색을 탐하는 사기꾼이었기에 이슬람교의 천국도 쾌락의 장소로 설명된다고 비판할 때 사용하던 표현이었다. 몬태규 부인은 이 말을 비난의 색채 없이, 즐거움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했다.
17~18세기 4명의 영국인은 종교적으로 적대시한 오스만 투르크를 각기 다른 선입관과 지식, 자의식을 가지고 관찰했다. 장인(匠人)인 댈럼은 선입관에 따라솔직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상류층 지식인 샌디스는 지식을 총동원해 터키의 여러 측면을 객관적으로 보려 했다. 자의식이 강한 리스고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터키를 경직된 태도로 대했다. 몬태규 부인은 여성의 처지에서 터키를 바라보며 터키의 이국적 면모를 자신감 있는 태도로 ‘소비’했다.
이들의 여행기는 개인이 처한 사회적 위치와 문화적, 종교적 관심사에 따라 관찰하는 것과 묘사하는 것이 사뭇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유럽의 제국주의가 팽창하며 오리엔탈리즘 담론이 변모했다. 그러자 유럽인들은 일말의 모호함과 긴장이 남아 있는 복합적인 태도를 버리고 터키를 이국적이고 문명적인 존재로 대상화했다. 유럽이 세련됐고 문화적, 인종적, 종교적 우월성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