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복원식 직후부터 단청이 벗겨져 떨어지는 현상이 발견된 숭례문. 2 2008년 2월 10일 방화로 불타 무너지는 숭례문.
그리고 여름 한 철을 지내고 가을을 맞은 지난 10월 숭례문이 ‘앓고’ 있는 것이 발견됐다. 숭례문의 서까래를 빛내주는 단청이 벗겨져 떨어지더니(박락·剝落), 기와가 변색됐다고 하고, 누각 기둥이 갈라져 터져나갔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숭례문 부실 복구는 물론 문화재 행정 전반을 철저히 조사해 엄중히 책임을 물으라고 지시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들은 사색이 됐고, 국민은 숭례문이 불탔을 때만큼이나 속이 타들어갔다.
숭례문이 일찍 앓아눕는 바람에 더 큰 낭패를 피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올 연말 정부는 복원에 참여한 이들에게 훈·포장을 줄 예정이었다. 대상자 선발과 공적 조사를 마친 상태에서 부실 복원의 실상이 드러난 것이다. 훈·포장 수여 후 이 사태를 맞았다면 더 큰 소동이 일었을 것이다.
이번 사태는 우리의 문화재 관리·운영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면이다. 국민과 정부는 문화재를 중시해야 한다는 ‘원칙’만 알았지, 그 원칙을 지키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게 드러났다. 여기에 ‘문화재 정치학’도 개입했다.
숭례문 부실 복원은 한마디로 ‘전통대로’와 ‘잘해보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화재 발생 3개월 뒤인 2008년 5월 문화재청이 ‘숭례문 복구 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중요무형문화재 등 기술자들이 참여해 전통기법과 도구를 사용해 복원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 화근이었다. 전통대로 한다고 해서 꼭 ‘잘하는 것’은 아닌데, ‘잘하는 것’으로 꾸민 것이 문제였다.
처음 문제가 된 단청을 살펴보자. 조선시대 단청공들은 전통 안료와 아교를 사용했다. 아교는 단청색을 붙여주는 기능을 한다. 전통안료가 자연에서 추출한 천연안료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화학안료를 만들어 사용했다.
조선시대에도 화학안료 써

5월 4일 숭례문 복원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그는 문화재 행정 경험이 적은 변영섭 교수를 문화재청장에 ‘전격적으로’ 지명했다가 ‘전격적으로’ 경질했다.
화학식으로 정리된 본격적인 화학안료는 1885년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색깔이 좋고 오래갔기에 이 안료는 곧장 세계로 퍼져나갔다. 1901년 조선은 덕수궁 중화전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때 서양의 화학안료로 추정되는 ‘양록’과 ‘양청’을 구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몇 년 후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됐고 이후 화학안료가 빠르게 보급됐다. 그러나 일제는 우리 문화재 보수와 관련된 기록을 남기지 않아 전통안료가 어떻게 단절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우리의 문화재 정책은 1971년 충남 공주에서 백제 무령왕릉을 우연히 발굴하면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민족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 신라의 능을 발굴하고 문화재를 적극 복원했다. 이 바람에 단청장(匠)을 비롯한 문화재 기술자들이 바빠졌다. 그 무렵 국내 최고의 단청공으로 활약한 이가 2006년 세속 나이 94세로 입적한 태고종의 만봉 스님이었다. 스님은 단청보다는 불화(탱화)에 더 능했는데, 1971년 정부는 스님을 중요무형문화재 48호로 지정했다.
숭례문 단청 작업을 한 홍창원 씨는 15세이던 1970년 만봉 스님 밑에 들어가 잔심부름을 하며 일을 배웠다. 그는 “스님의 뒤를 이어 인간문화재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은 없었고, 그저 입에 풀칠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따라다녔다”고 회고했다. 당시는 시멘트를 써서 석조 문화재를 복원하던 시절이라 누구도 전통 안료를 찾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색을 내고 그 색이 오랫동안 가게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