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딸은 ‘키티’를, 아들은 ‘뽀로로’를 좋아합니다. 양국 관계도 아이들처럼 서로의 문화를 고정관념 없이 존중하는 순수한 관계가 됐으면 합니다.”
한일 수교 50주년을 기념한 제47회 한일경제인회의. 조 사장은 양국 정·재계 인사 500여 명 앞에서 ‘미래세대가 본 한일 미래상과 협력 방안’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9년간 한일경제인협회장을 맡아 온 아버지 조석래 회장에 이어 지난 3월 부회장을 맡았다.
조 사장은 일본 만화 ‘시마 과장’과 한국 드라마 ‘미생’, 양국 회식문화 등을 소개한 뒤 “제가 두 나라에서 직장생활을 해보니 조직문화가 비슷하더라”며 “문화적 공감대가 강한 청년들의 교차취업 등 일자리 교류 방안을 찾자”고 제안했다.
일본어를 못하는 후배가 일본인 친구와 ‘라인 번역기’를 통해 저녁약속을 잡는 사연을 소개할 때는 박수와 폭소가 터져 나왔다. 경북 구미에 탄소섬유 생산시설을 지은 일본 도레이사의 성공 스토리를 전한 뒤 전국 17개 창조경제혁신센터를 하나하나 소개하기도 했다.
“한국은 창조경제를 위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일본 기업이) 투자 의사만 있다면 원스톱 서비스를 통해 성공적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 수 있습니다.”
미국&일본通
조 사장은 미국 세인트폴 고교와 예일대 정치학과(학사), 일본 게이오대 정치학부(석사)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미쓰비시 상사와 모건스탠리 법인영업부에 근무한 ‘미국·일본통’. 1997년 효성 T·C 경영기획팀 부장으로 입사한 뒤 전략본부 부사장(2003년)과 섬유PG장 겸 무역PG장(2007년)을 거쳐 2011년부터 섬유·정보통신PG장 겸 전략본부장(사장)을 맡고 있다.
효성은 고(故) 조홍제 회장이 ‘산업입국(産業立國)’ 정신을 바탕으로 1966년 창업해 스판덱스(의류에 들어가는 신축성 원사), 타이어코드(타이어 내구성을 높이는 섬유 보강재), 에어백 원단 GST 등 세계시장 1위 제품을 다수 만들어내며 급성장했다. 창립 50년 만에 27개국 70여 개 법인·지점에서 2만5000여 명이 근무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변신했다. 변신의 중심에는 화학공학도인 조석래 회장과 정치학도 조현준 사장이 자리한다.
조 사장이 입사한 1997년은 외환위기로 기업들이 살얼음판을 걸을 때였다. 효성도 대대적 조직개편을 포함한 경영혁신에 나서야 했다. 효성 T·C, 효성생활산업, 효성물산, 효성중공업 등 4개 회사를 (주)효성으로 합병하고, 사업조직을 섬유, 화학, 중공업, 정보통신, 무역부문 사업그룹(Performance Group, PG)으로 나눴으며, 그 아래에 사업부(Performance Unit, PU)를 둬 책임경영 체제를 확립했다.
“4개 회사를 합치다보니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지고 의사소통에 혼선이 생겨 사업구역을 정해야 했다. 당시 기업들은 대개 사업부문 개념인 BU(Business Unit) 체제였지만, 나는 업무 성과(Performance)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조직을 유연하게 만들어야 돌발상황 대처와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홈쇼핑 TV 보여주며 설득
조 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인 조석래 회장은 조직개편을 단행한 뒤 ‘선택과 집중’ 전략을 구사했다. 스판덱스와 타이어코드 등 핵심 산업에 집중 투자한 것. 비주력 사업은 매각하거나 통·폐합하는 등 구조조정을 이어갔다. 효성의 한 임원은 이렇게 당시를 떠올렸다.
“조직개편이 끝나자 조 사장은 곧장 스판덱스를 들고 세계시장 공략에 나섰다. 1999년 ‘C(China) 프로젝트팀’을 구성해 중국 시장에 뛰어들었고, 섬유PG장을 맡은 2007년 이후에는 베트남에 세계 최대 공급능력을 갖춘 생산시설을 갖췄다. 아시아 시장 공략을 위한 거점기지를 만든 것이다. 2008년에는 유럽 시장을 겨냥해 터키에, 2011년에는 남미 시장을 노리고 브라질에 공장을 세웠다. 브라질에서는 생산체제 구축 2년 만에 시장점유율 50%를 차지했다. 효성이 올해 상반기 최대 실적을 낸 것도 그때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은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