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과 같은 공개 코미디는 1999년 시작됐다. 젊은 개그맨들에게 ‘대모’ 대접을 받는 김미화가 KBS 임원들을 설득해 대학로 스타일의 개콘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방청객의 웃음을 즉각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2000년대 전성기 시절 개콘은 모든 예능 프로그램을 합쳐 시청률 1위에 오른 효자 프로그램이었다.
“아이고, 의미 없다”
이런 성공은 타 방송사를 자극해 SBS도 2003년 동일한 형식의 웃찾사를 시작했다. MBC도 공개 코미디 형식을 여러 번 시도했다. 요즘 방송에서 맹렬히 활동하는 젊은 개그맨 상당수가 개콘과 웃찾사 출신이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공개 코미디의 하락세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웃찾사는 2010년 폐지됐다가 2013년 부활했다. 개콘도 전성기 때 30%대에 달하던 시청률이 거의 3분의 1토막 났다. 올 봄 개편에서 두 프로그램은 강도 높은 쇄신으로 영광의 회복을 시도했다.
웃찾사는 개콘과 같은 시간대로 옮겨 정면승부를 걸었다. 개콘도 PD를 교체하고 새로운 코너를 마련했다. 시청률에선 간신히 두 자리 숫자를 유지한 개콘의 승리. 그러나 “아이고, 의미 없다”라는 유행어가 절로 나온다. 위기론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다. 새로운 스타도 없고, 화제만발 코너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코미디 프로그램의 인기가 하락했다고 웃음에 대한 국민적 수요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코미디 이외 장르에서 웃음을 소비하게 된 것이 주된 이유라 할 수 있다. 이는 고대 그리스 시대 ‘학문의 왕’이던 철학이 이후 각 개별 학문에 영지를 내주고 쇠락한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한국 코미디 역사는 서영춘, 구봉서, 배삼룡, 송해 같은 유랑극단 출신이 브라운관에 등장한 데서 시작한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를 풍미한 대표적 프로그램이 ‘웃으면 복이 와요’다.
1980년대 코미디계에 큰 변화가 닥쳤다.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원로 코미디언들이 방송가를 떠난 것이다. 당시 최고권력자를 닮았다는 이유로 방송출연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개그맨’이라는 새로운 희극인 집단이 방송사 공채를 통해 본격 등장한다.
우리 코미디계에는 배삼룡, 이주일로부터 이어지는 ‘바보 캐릭터’ 계보가 있다. 이들은 표현의 자유가 제약받던 시절 슬랩스틱 코미디를 통해 웃음을 줬다. 식자층으로부터 저질이라고 손가락질 받았지만 그들이 활동할 때는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국민 코미디언의 시대였다.
바보 캐릭터 → 언어유희
그런데 개그맨 등장 이후 ‘언어유희’가 바보 캐릭터를 대체했다. 이들은 ‘영 일레븐’ ‘젊음의 행진’ 같은 젊은이들 대상 프로그램에서 스탠딩 코미디를 했다. 이때부터 세대 간에 웃음의 분화현상이 나타났다.
1988년 6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우리 코미디는 또 다른 단계로 접어든다. 그동안 금기시되던 정치풍자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1노3김 성대모사가 주특기인 최병서와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코너를 진행한 김형곤은 정치풍자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다.
토크쇼 성격의 코미디도 이때 시작됐다. 1988년 올림픽을 치른 후 우리 국민의 정서는 급격히 세계화했다. 토크쇼는 미국에서 발달한 장르로, 우리나라엔 접목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1989년 최초의 토크쇼인 ‘자니윤쇼’가 시작된다. 자니윤은 느끼한 ‘버터 발음’에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섹드립’(야한 농담)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초기에 코미디언들이 주도한 ‘일요일 일요일밤에’ 같은 버라이어티 쇼는 결국 코미디언들에게 자충수가 됐다. 이 프로그램은 김흥국, 조형기, 노사연 같은 비희극인들을 주연으로 만들었다.
‘일밤’의 히트 코너인 ‘몰래카메라’ 역시 비희극인들을 웃음의 주연으로 만들었다. 근엄한 연예인들이 조작된 방송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일 때 시청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때부터 한국인들의 웃음 코드는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가 닥쳐오면서 ‘공익적이고 따뜻한 웃음’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이경규의 ‘양심냉장고’, 신동엽의 ‘신장개업’, ‘러브하우스’ 등이 이런 요구에 부응했다. 단순히 웃기기만 하면 되던 시대에서 웃음과 감동을 함께 줘야 하는 고난도 코미디 시대가 열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