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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번역청을 설립하라’ 박상익 우석대 교수

“모국어 망치는 대열에 서길 거부한다”

  • | 최창근 객원기자 caesare21@hanmail.net

‘번역청을 설립하라’ 박상익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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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책이 팔리지 않는 세상이다. ‘단군 이래 최대 불황’ ‘출판 경기가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갔다’는 말이 출판계에 회자된 지 10년 가까이 됐다. 지난해 국민 1인당 연평균 독서량은 9.5권. ‘독서인구’ 1인당 평균 독서권수도 연 17.3권에 그친다. 출판계 불황은 필연이다. ‘책의 시대’는 종언을 고한 것인가. 

이러한 시대에 152쪽짜리 작은 문고판 책 한 권이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1월 출간된 ‘번역청을 설립하라’(유유刊). 책 출간과 동시에 청와대 국민소통 광장에서는 책 제목과 같은 ‘번역청을 설립하라’는 국민청원운동이 개시됐다. 2월 7일 종료된 이 청원에는 9417명이 동참했다. 

책을 펴내고 번역청 설립 운동을 주창한 이는 박상익(64)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다. 그는 30년간 저술·번역 활동을 통해 ‘한글 콘텐츠’ 확충에 매진해 왔다. 그간 펴낸 저서와 역서는 총 26권에 달한다. 그는 ‘반체제’ 지식인으로 통한다. 타성에 젖어 틀 안에 안주하는 학계 풍토에 반기를 들어온 까닭이다. 

박 교수가 번역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6년 ‘번역은 반역인가’란 책으로 우리 사회에 도발적인 화두(話頭)를 던졌다. 그 후 12년. 상황은 더 나빠졌다. 책이 팔리지 않는데 번역이 더 나은 대접을 받을 리 없다. 한글 콘텐츠 확충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그를 만났다. 

왜 ‘번역청’을 설립해야 합니까. 



“번역을 시장에만 맡겨둬서는 손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출판 및 번역 시장은 죽었습니다. 일본의 출판 시장은 한국의 10 배 정도 됩니다. 책을 통한 지식 생산-재생산의 ‘선순환’ 구조가 확립돼 있습니다. 책에서 인용한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이야기를 봅시다. 그와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하세가와 마리코(長谷川眞理子) 와세다대 교수가 교양서 두 권의 인세로 도쿄의 아파트를 구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베스트셀러 작가인 최 교수의 경우엔 인세가 지인들에게 밥을 한두 번 사면 없어지는 수준이라고 해요.

학문 못 하는 반쪽짜리 ‘한글’

이런 상황이기에 출판·번역 분야에 정부가 개입해야 합니다. 철도, 도로, 항만처럼 번역도 사회간접자본(SOC)이라는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한글 콘텐츠만 읽고서도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학문적 수준에 도달한다는 원대한 비전을 가져야 해요. 일본은 19세기 말 메이지(明治)유신 무렵 번역국을 두고 정부 차원에서 서양 고전 수만 종을 번역했습니다. 유럽은 그보다 앞서 16,17세기 각국 정부 주도로 그리스어, 라틴어 문헌을 각국어로 옮겼어요. 

한국은 이른바 고전 반열에 오른 책 중에도 번역되지 않은 책이 부지기수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죠. 훗날 후손들에게 ‘못난 조상’이라 손가락질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라도 대오 각성해야 합니다. 지금 시작해 빨라야 한 세기가 지나 열매를 볼 수 있어요.” 

박 교수의 말대로 일본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지향한 메이지유신을 전후해 국가 주도로 대대적인 번역 사업을 벌였다. 도쿠가와(德川) 막부 시대 난학(蘭學)을 맹아(萌芽)로 한 번역 사업은 일본 근대화의 근본 힘으로 작용했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토 슈이치(加藤周一)가 쓴 ‘번역과 일본의 근대’에는 당시 일본 지식인들이 낯선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일본적 개념으로 재정립해 일본화한 과정이 묘사돼 있다. 이들은 번역이란 단순 어학 차원의 문제가 아닌, 언어로 된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이라는 점 또한 환기시킨다. 

일본에 비춰볼 때 한국은 ‘근대국가’ 반열에 들지 못했다는 것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한국의 역사는 단군왕검부터 헤아리면 5000년, 실증 사학론으로 접근해도 2000년은 됩니다. 문제는 한국의 문자 역사도 그만큼 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엄청난 착각이에요. ‘역사만큼 우리의 문자 역사도 장구하다’는 허위의식에 빠져 있는 겁니다. 

‘한글’에만 국한해보면 우리의 문자 역사는 100년도 채 안 됩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반포했지만, 20세기 초까지 한문을 사용해왔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어가 한문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성인 문맹률이 77%였습니다. 다섯 중 한 명만 한글을 읽을 수 있었던 셈입니다. 1970년대 들어서야 문맹률이 0%에 가까워졌습니다. 한글이 중심이 된 문자 생활의 역사가 반세기 남짓, 길게 봐야 1세기가 안 됩니다. 아프리카 신생국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에요. 

한편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도 100년 전 조상들이 쓴 글을 해독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번역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문, 옛 한글 텍스트를 현대 한국어로 옮겨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우리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선진국의 학문과 지식을 우리말로 번역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한글 콘텐츠를 풍부하게 해야 합니다.” 

한글은 반쪽이다? 

“한글이 일상의 언어는 될 수 있지만, 학문은 할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에 저는 한글을 ‘반쪽짜리’라고 말합니다. 한글 콘텐츠만 가지고는 석사 논문도 제대로 쓸 수가 없어요. 우리말과 글을 갈고닦고 나아가 한글 콘텐츠를 확충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한글을 방기(放棄)해온 겁니다. 모국어에 못할 짓을 하면서도 이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번역도 하도급에 재하도급?!

박 교수는 학계에서 번역이 홀대받게 만든 가장 큰 원인 제공자로 “국내 학계의 주류인 영미권 유학파, 그중에서도 미국 유학파”를 든다. 

미국 유학파가 주범이다? 

“그들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한국인으로서의 자각 혹은 정체성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그저 유학 시절에 보고 배운 미국인 교수가 하던 것을 답습해 국내 대학에서 한국인 학생들을 상대로 흉내 내고 있어요. 원 텍스트를 번역해 국내 학계와 공유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안 하느냐고 물으면 ‘영어 텍스트를 읽으면 되지, 뭐 하러 번역하느냐’고 반문합니다. 반면 서구 학자들은 동양학을 연구할 때 번역 텍스트가 없을 경우 연구 대상 고전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여깁니다. 

학계가 번역의 중요성을 모르니까 연구 실적 평가에서 번역은 논외로 칩니다. 실제로 각 대학에서 번역물은 교수의 연구 실적 평가에 반영하지 않아요. 현실적인 문제도 있어요. 번역의 대가는 논문 한 편에 주어지는 연구비의 10분의 1 수준이에요. 전문 연구자가 학술서적 한 권을 10년 걸려 번역해도 손에 쥐는 인세는 300만 원 남짓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야 ‘열정페이’를 받고서라도 번역하지만, 이를 모두에게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죠.” 

대학부터 바뀌어야 한다? 

“우선은 연구 번역 결과물을 석·박사 논문으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미 선진국은 물론 중국, 일본 등의 대학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서구 국가의 동양학 석·박사 논문의 절반가량은 해당 분야의 ‘연구 번역’이 차지합니다. 나아가 번역을 교수 임용·승진·재임용 실적 평가에도 포함해야 합니다.” 

박 교수는 미국 유학파를 ‘난민의식에 젖은 엘리트 집단’ ‘기지촌 지식인’이라고 가차 없이 비판한다. “올림푸스산의 신(神)들인 양 고고한 척하며 세상과는 소통하지 않으려 한다”고도 일침을 놓았다. 인문학 교수라면서 제대로 된 저·역서 한 권 쓰지 않고 세미나나 콜로키움 등 ‘그들만의 리그’에서 공허한 담론만 늘어놓는 것에 대해서도 못마땅한 시선을 보낸다. 서양사 전공인 그는 학회 활동과 담을 쌓은 채 저술 및 번역에만 집중한 지 20년이 넘었다고 한다. 

그는 열악한 번역 현실을 타개하려면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나서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도급을 거듭하다가 품질이 낮아지는 고질적인 문제가 산업계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기관 등이 발주하는 번역 사업은 번역료로 원고지 1매당 1만 원가량을 줍니다. 정상적인 가격이라고 봐요. 문제는 실력은 없지만 정치력은 뛰어난 교수가 이런 사업을 따와서 하도급, 재하도급을 주면서 발생하고 있어요. 하도급을 내려보낼 때마다 번역료가 반 토막, 반의반 토막이 나면서 번역 품질이 낮아지는 건 필연이지요. 번역 시장에서도 ‘재하도급 금지’ 등 제재가 필요합니다.” 

그는 ‘번역 하도급’ 관행에 대해 책에서 “자신이 번역하지 않은 책에 버젓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출판하는 것은 위조 상표를 붙인 짝퉁 상품과 마찬가지”라며 “돈벌이, 장사 다 좋지만 ‘사기’는 치지 말아야 한다”고 썼다.

“모국어로 사고할 때 가장 창의적”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을 방법은? 

“정부가 중소기업 직원이나 인턴의 임금을 일정 부분 보조해주는 방식을 차용할 수 있다고 봐요. 하지만 공무원들의 생각은 미국 유학파 교수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 보니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협정문도 잘못된 번역 166건, 잘못된 맞춤법 9건, 번역 누락 65건, 번역 첨가 18건, 문장 일관성 결여 25건, 고유명사 표기 오류 13건 등 총 296건의 번역 오류가 발생했죠. 부끄러운 일입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번역전문기관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곧 흐지부지됐습니다. 국격을 위해서라도 주요 협정문이나 외교 문서는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제대로 번역해야 하는데….” 

참고로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분야 명저번역지원사업’의 2018년 총예산은 9억 4200만 원이다. 2017년 총예산(10억 6300만 원)과 비교해 1억 2100만 원이 줄어들었다. 

영어 공용화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요. 

“영어 공용화는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영어를 구사하는 국민은 소수일 수밖에 없고,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절대다수의 국민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소외됩니다. 이 문제에서 한국과 일본은 비슷한 운명이에요. 영어를 위시한 서양어와 한국어, 일본어는 문법 차이가 큽니다. 언어에 소질 있는 소수는 서양어를 쉽게 배우지만 절대다수에겐 어려워요. 

한편 번역은 모국어를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합니다. 우리 문화의 발전 관점에서도 영어 공용화보다는 번역을 활성화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반론도 있겠지만 저는 번역을 활성화하는 게 최선이라고 봅니다.” 

영어로 하는 대학 강의는 늘고 있습니다. 

“한국어 콘텐츠가 없으니까 그러는 것이라고 봅니다. 일본 수준으로 자국어 콘텐츠가 있다면 굳이 영어 강의를 하지 않아도 되겠죠. 연구나 학문 활동은 모국어로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2008년 ‘세계 언어학자 대회’ 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모국어로 사고할 때 가장 창의적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일본 물리학자 마스카와 도시히데(益川敏英)를 예로 들었다.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그는 일본어 자료만으로 공부해 2008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박 교수는 “번역은 헌법 제2장에서 명시한 ‘국민의 기본권’ 문제”라고도 했다. 외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국민도 한글 번역물을 통해 세계 각국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마땅히 보장받아야 한다는 취지다. 

인공지능(AI) 시대에도 번역가가 생존할 수 있을까요. 

“펌프질을 할 때 ‘마중물’이 필요합니다. 번역 텍스트는 AI에 마중물 역할을 합니다. ‘인풋’이 풍부해야 좋은 ‘아웃풋’을 얻을 수 있어요. 풍부한 번역 예문이 확보된 언어일수록 AI를 통해 정확하고 미려한 번역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알파고가 학습한 기보가 수백만 개라고 하죠? 정교한 번역을 위해서는 수백억 개의 예문이 필요합니다. 이걸 생략하고 자동번역의 단계로 간다? 역사에는 ‘월반(越班)’이 없습니다.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는 게 아니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계단씩 밟아 올라가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못났어도

번역청 설립 운동이 성공할까요? 

“잘 안 될 것이라 봐요. 서명한 사람도 20만 명에 턱없이 못 미치죠. 이게 한국 사회의 수준입니다. 정치적 이슈도 아니고, 제가 대단한 존재도 아닌데 성사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렇게 외치는 것은 ‘역사적 알리바이’를 남기고 싶어서입니다. 후손들이 모국어 콘텐츠 발전의 중요성을 역설한 사람이 있긴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어요. 제 주장이 현재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지라도 후과(後果)에 대한 책임은 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에게 있다고도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번역청이 설립돼도 문제”라고도 했다. 염불(저술·번역)보다 잿밥(연구비)에 눈먼 학자들을 염려해서다. 이는 ‘신동아’ 1월호가 공개한 ‘이국종 비망록’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이국종 아주대 교수는 “학회 장사꾼들과 예산 따먹기 프로들로 인해 중증외상센터 관련 예산이 증액돼도 막상 현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격정적으로 토로했다. 

박 교수는 책의 마지막 글 ‘역사적 알리바이 만들기’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적어도 이 시대에 모국어를 저주하고 망치는 자들의 대열에 서기를 거부한 사람이 있었다는 물증 하나는 후대에 남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못났어도 100년 뒤 후손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꼴은 면해야 할 것 아닌가. 어쭙잖지만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역사의식이다.


어느 곳에서든지 당신들을 반갑게 맞이하지 않고,
당신들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바닥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 ‘신약성서’ 마르코(마가) 복음 6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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