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패망 교민 354명 구출… 최초·최대 교민 보호 작전
외교 갈등 우려 ‘군사기밀’ 분류…軍史에서도 묻혀
1973년 3월 23일까지만 파병 인정… 유공자 지정 못 받아
국회 ‘참전 인정’ 법률개정안 발의는 했지만…
그로부터 25년 후 대한민국 국민을 구한 또 하나의 대규모 철수 작전이 있었다. 19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하며 공산 치하에 들어가게 됐을 때, 우리 해군이 교민 354명을 포함해 총 1902명의 피난민을 구출한 ‘십자성구출작전’이 그것이다. ‘베트남판 흥남철수작전’이라 할 만하다.
현지 교민을 철수시켜라
1973년 1월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은 파리평화협정을 맺는다. 이 협정에 의해 남베트남을 돕던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했지만, 남베트남 지역에서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 의한 국지적 도발이 이어졌다. 북베트남은 1975년 1월 프윽롱성을 함락한 데 이어 4월 2일부터 사이공 함락을 위한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미국은 남베트남을 포기하고 자국민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우리 정부도 1973년부터 교포들에게 철수를 권유했지만 삶의 터전을 이곳으로 옮긴 1000여 명이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남베트남 패망이 가까워졌다고 판단한 외무부는 주월 한국대사관에 철수를 지시했다. 일반 기업체 직원과 공무원 및 일부 교민들을 항공편으로 철수시키고, 항공편을 이용해 출국할 수 없는 교민들을 철수시키기 위한 계획에 들어갔다. 마침 남베트남 정부에서 구호물자와 베트남 피난민을 위한 수송 지원을 요청해왔다. 이에 정부는 4월 5일 인도적 고려에 의한 구호물자 지원과 피난민 구호를 표면에 내세우면서 실제적으로는 교민 철수를 지원하기로 하고, 해군 LST선 2척과 해군(해병대 포함) 269명을 파견했다.
4월 7일 부산을 출발한 북한함과 덕봉함이 붕따우항에 도착한 21일, 남베트남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했다. 남베트남 정부는 구호물자를 붕따우항에 하역하고 이곳에 있던 베트남 난민을 실어 푸꾸옥섬에 철수시킬 것을 요청했지만, 해군은 사이공 뉴포트항에서 구호물자 전달식을 하고 구호물자를 내려놓겠다고 버텼다. 대사관을 통해 교민들을 사이공 뉴포트항에 모이도록 했기 때문이다.
22일 붕따우항을 출발해 뉴포트항에 입항한 해군은 구호물자 전달식을 거행하고, 25일까지 물자를 하역한 후 26일 이곳에 있던 베트남 피난민과 우리 교민을 승선시킬 수 있었다. 이미 메콩강 일대가 북베트남군에게 장악된 상태였기 때문에 적이 배 밑에 폭발물을 설치할 가능성이 있어 낮에는 잠수부를 동원해 순찰하고 밤에는 수류탄을 터뜨려 적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함을 보호했다. 당초 27일 출항할 예정이었으나 인근에 북베트남군이 배치됐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26일 밤에 출항을 결정했다.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외국 군함
뉴포트항에서 붕따우항까지 50마일은 협수로가 뱀처럼 구불구불하고 폭이 좁아 밤에 항해하는 건 극히 위험했다. 그나마 먼저 출발한 배는 남베트남 피난민을 수송한다는 명목으로 불을 밝히고 이동할 수 있었지만, 나중에 출발한 배는 불을 끈 채 어둠 속에서 물 빛깔의 차이로 강줄기를 확인하며 항해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인 27일 아침 뉴포트항에 남아 있던 미 용역선 LST선 2척이 피격됐다는 UPI 보도가 나왔다. 북베트남군이 우리 해군 LST선으로 오인해 공격한 것이다.29일 푸꾸옥항에 입항한 해군은 일부 피난민과 물자를 하역했다. 그런데 다음 날인 4월 30일 아침 10시, 북베트남군의 총공세에 남베트남 대통령이 항복을 선언했다. 그와 동시에 남베트남 소속이던 해군 7척이 북베트남기로 국기를 바꿔 달더니 우리 해군 LST선으로 접근했다. 이에 우리 해군은 드럼통 500여 개를 폭탄인 것처럼 투하하며 접근을 막고 외해로 탈출했다. 우리 정부와 군이 시행한 최초, 최대의 해외 난민구호 및 교민철수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우리 해군 LST선 2척은 남베트남을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외국 군함이었다. 이 배에 타지 못한 교포들은 미군이 헬기로 탈출시킨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몇 년간 공산 치하에서 지내다 추방돼 겨우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국 교민 354명을 포함해 총 1902명의 피난민을 태운 해군 LST선이 부산에 도착한 1975년 5월 13일, 동아일보를 비롯한 많은 언론이 ‘목숨을 건 결사적 항해’라는 기사를 내보내며 이 작전에 주목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십자성구출작전은 이후 군사(軍史)에서조차 지워졌다. 1981년 해군이 발행한 ‘해군사’에만 관련 기록이 있을 뿐,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자료에서는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
군에서 십자성구출작전을 내세우지 못한 것은 구출작전 이후의 외교 상황 때문이었다. 당시 탈출하지 못한 공관원 3명이 ‘반혁명’ 죄목으로 수감되어 있었고, 나머지 교민들도 1981년 5월 30일까지 억류돼 있었다. 정부는 이들의 안전을 위해 이 작전을 비밀에 부쳤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비전투소개작전
베트남을 빠져나온 교포와 피난민들이 해군 LST선 갑판에 천막을 치고 생활하고 있다. [십자성구출작전동지회 제공]
정부는 1994년 1월 1일부터 발효된 ‘참전유공자 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참전유공자법)’에 의해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참전자에 대해 그 공로를 인정하고 예우해오고 있다. 그런데 법에서 베트남전쟁 기간을 첫 파병이 이뤄진 1964년 9월부터 한국군이 공식적으로 철수한 1973년 3월 26일까지로 규정하고 있다. 1975년 이뤄진 십자성구출작전은 이 기간에 해당하지 않는다.
2014년 19대 국회에서 김성찬 자유한국당 의원이 십자성구출작전을 베트남전 참전 기간으로 인정하는 것을 골자로 한 참전유공자법 일부개정 법률안을 발의했지만 논의가 진척되지 못한 채 폐기됐다. 20대 국회 들어 김 의원이 다시 발의해놓은 상태.
십자성구출작전을 베트남 참전 기간에 포함하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 의견은 엇갈린다. 19대 국회 당시 작성된 ‘전문위원 검토보고서’엔 2가지 이유를 들어 부정적 의견을 내놓은 바 있다. ‘적과의 직접적인 교전 및 전투행위가 없었다’는 점과, ‘참전 기간을 확대할 경우 파리 평화협정을 위반하게 돼 해당국과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신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도 “십자성작전은 남베트남 패망 당시 한국 정부가 인도주의 차원에서 실시한 교민 구출 및 해외난민구호활동으로, 전투가 아닌 인원과 물자 수송이기 때문에 참전이라 보기 힘들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에 대해 장성수 십자성구출작전동지회 사무총장은 “십자성작전은 비전투소개작전으로, 군인이 국가의 명령을 받고 수행한 작전”이라고 항변했다. 비전투소개작전은 외무부가 군대의 도움을 받아 자연적 재해 또는 인위적 재해(내전, 테러, 전쟁과 같은 상황)로 인해 해외에서 위험에 처한 자국인, 제3국인, 자국에 우호적인 현지인 등 비전투요원을 철수시키는 활동을 말한다.
조동준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참전유공자법의 입법 의도를 보면 국회의 동의를 받은 파병인지 여부, 전투 행위를 전제한 파병인지 여부 등에 상관없이 현역 군인이 베트남에서 근무했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십자성작전에 참여한 군인들에게도 베트남전 참전군인의 지위가 부여된다고 본다”며 “미국이 비전투소개작전들을 베트남전 주요 사건으로 기억하고 평가하듯 십자성계획도 적정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십자성구출작전을 세상에 알리는 데 노력해온 장정옥 충남동부보훈지청 이동보훈팀장은 “통상 전쟁에서 실제 교전행위가 없었다 하더라도 군수물자수송, 의료지원업무를 비롯한 육상경비, 해상경비, 공중경비작전 등에 참전한 자도 참전자로 인정하고 있다. 심지어 6·25전쟁 참전유공자 대상에는 군인, 경찰뿐 아니라 종군예술단원, 종군기자까지 폭넓게 인정하고 있고,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대상에도 이동외과병원진, 태권도교관단 등도 포함되어 있다. 교전행위 유무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인도적, 비전투 행위라 할지라도 군인들은 국가의 명령으로 전쟁터에 가서 목숨을 무릅쓰고 작전을 수행한다. 미국은 4월 29일부터 4월 30일까지 헬기를 활용해 2098명을 해상으로 피신시키는 것을 비롯해 베트남전쟁 막바지에 이뤄진 비전투소개작전을 당연히 참전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십자성구출작전을 수행한 병사들의 군 경력증명서(해군참모총장 발행)엔 1975년 4월 7일부터 5월 16일까지 특수지원부대로 베트남에 파견되었다고 기재돼 있다. 또한 정부는 십자성작전을 이끈 영관급 간부 5명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여했다. 보국훈장은 국가 안전 보장에 뚜렷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는 것으로, 인도주의적 공로를 세운 이에게 주는 훈장과는 수여 기준 자체가 다르다.
‘파리 평화협정 위반 우려’는 기우
베트남에서 교민을 구한 십자성구출작전 참여 해군들.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십자성구출작전 동지회 제공]
베트남전쟁 기간 규정과 관련해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참전유공자법은 처음 제정됐을 땐 6·25전쟁 참전 인정 시기를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로 규정했지만, 이후 2003년과 2005년 개정을 통해 ‘남북한 국지전이 있었던 1948년 8월 15일부터 공비토벌작전이 종료된 1955년 6월 30일까지’로 확대했다.
이와 관련해 국제보훈학자인 유영옥 경기대 명예교수는 “참전유공자법을 제정하던 1993년엔 십자성구출작전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외교 관련 문서도 2006년에야 비밀 해제되어 일반에 공개됐기에 참전유공자법 입법 과정에서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알았더라면 당연히 누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사유가 발생하면 개정해야 한다. 십자성구출작전에 참여한 사람들은 국가의 부름을 받고 목숨을 걸고 국민의 생명을 구한 사람들이다. 이런 경우 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개정법안을 발의한 김성찬 의원은 “해군 출신(해군참모총장 역임)이기 때문에 현역 시절부터 십자성구출작전에 대해 알고 있었고, 당연히 참전유공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 개정법안을 발의했다”며 “비록 지금 소관 상임위에 있지는 않지만 보훈처 등 정부가 법 개정에 동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주영 국회부의장도 “장병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노력한 부분에 대해서는 온당한 대우가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상정된 법안을 관심을 갖고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interview | 장성수 십자성구출작전동지회 사무총장
“‘국가와 국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인정받고 싶을 뿐”
장성수 십자성구출작전동지회 사무총장(오른쪽)과 회원 지혁 씨.
-작전에 투입될 때 처음부터 내용을 알고 있었나.
“사전에 전혀 듣지 못했다. 그냥 훈련을 가는 줄만 알았다. 당시 참모총장도 사복을 입은 채 와서 우릴 배웅했다. 제주도를 지날 때에야 작전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베트남 현지에서 긴박했던 상황은.
“들어갈 때부터 탈출할 때까지 긴장의 연속이었다. 뱀처럼 심하게 구불구불하고 수역이 좁은 메콩강을 한밤중에 불빛 없이 빠져나올 때도 초긴장 상태였고, 푸꾸옥항에서 월맹함정을 따돌리고 탈출할 때도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었다. 군 통신은 무조건 암호화해서 전송하게 돼 있다. 그런데 워낙 급박한 상황이 이어지다 보니까 암호를 조립할 시간이 없어 평문으로 주고받았을 정도였다.”
-십자성구출작전동지회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전부터 우리도 월남에 갔다왔는데,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2006년 우리가 한 십자성구출작전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알음알음 참전용사들이 모였다. 현재 46명이 참여해 참전법 개정 운동을 하고 있다. 국방부에 269명 대원 전체 명단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줄 수 없다고 하더라. 장정옥 충남동부보훈지청 이동보훈팀장이 큰 힘이 돼주고 있다.”
-바라는 게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건 보상금이 아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목숨 걸고 일했다는 걸 인정받고 싶다. 우리가 인정을 못 받는다면 앞으로 어느 군인이 목숨 걸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하려 하겠는가. 참전용사법 개정안이 20대 국회에서 꼭 통과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