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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3·1만세운동 100주년의 함의

독립의 마중물 된 100년 민족기업8

  • 김유림 기자 mupmup@donga.com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독립의 마중물 된 100년 민족기업8

  • 경방(경성방직) : 민족자본 상장기업 1호
    교보생명 : 무학소년 민족기업가를 꿈꾸다
    동화약품(동화약방) : 임시정부의 숨은 심장부
    두산그룹(박승직 상점) : 애족거상(愛族巨商)의 발자취
    신한은행(한성은행) : 조선 최초의 민족은행
    LG그룹(구인상회) :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 쾌척
    우리은행(대한천일은행) : 고종황제 설립 민족자본 은행
    유한양행 : 한·미 오가며 국권 회복 운동 앞장
1919년 3월 1일 전국에서 동시에 일어난 ‘만세운동’의 성공에는 민족자본가, 민족기업의 헌신이 밑거름이 됐다. 임시정부 비밀결사 조직에 투신해 옥고를 치른 기업가부터, 멀리 타국에서 특수공작요원으로 활동하며 조국의 독립을 일군 이도 있다.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진 않았지만 일제의 눈을 피해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건네고, 사재를 털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이들 모두 진정한 민족기업가다. 일제강점기 조선 상인을 보호한 민족금융, 국민교육 진흥에 앞장선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꺼지지 않았다. ‘신동아’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일제에 항거하며 경제 독립의 기틀을 마련한 ‘100년 민족기업’ 8곳의 태동 과정과 발전사를 재조명했다.(가나다순)


경방(경성방직)
독립의 마중물 된 100년 민족기업8
일제강점기 때 경성방직 직공들이 일하는 모습. [동아DB]

일제강점기 때 경성방직 직공들이 일하는 모습. [동아DB]

경성방직주식회사는 1919년 10월, ‘우리 옷감은 우리 손으로’라는 독립정신을 바탕으로 창립됐다. 창업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은 기업인, 교육자, 언론인, 정치인으로 각 분야에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경방은 민족기업 중에서도 국내 상장기업 1호로 유명하다. 인촌 선생은 처음부터 경방을 민족기업으로 성장시키고자 우리 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이 경방의 주식 1주라도 소유할 수 있도록 ‘1인1주 운동’을 펼쳤다. 그는 이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각 지방의 유지를 만나 경방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 결과 총 주식 2만 주 모두 188명에게 발행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인촌 선생은 창립총회 자리에서 철종의 사위이자 갑신정변의 주역인 박영효를 초대 사장으로 선임하고, 자신은 취체역(이사)을 맡았다. 공장은 서울 영등포(현 타임스퀘어)의 5000평 부지에 세우고 1922년 직기 100대를 일본에서 들여왔다. 창업 후 얼마 안 돼 ‘삼품(三品) 사건(면화·면사·면포로 이뤄진 ‘삼품’을 선물거래방식으로 대량 구입했다가 가격 폭락으로 막대한 자금 손실을 본 사건)’으로 회사가 문을 닫게 될 위험에 처하자 인촌 선생은 모든 주주를 대신해 자신의 사재를 털어 회사를 살렸다.


남몰래 독립투사 지원한 인촌 김성수

또한 그는 해외로 망명해 독립투쟁을 하던 독립운동가들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다. 백야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강훈 전 광복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인촌 선생은 1929년 말 상하이 임시정부에 들러 큰돈을 기부해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인촌 선생은 1920년 4월 동아일보를 창간한 후인 1922년 동생인 수당 김연수(제2대 사장) 선생을 경성방직의 상무 겸 지배인으로 임명해 경영을 맡겼다. 이후에도 회사가 어려움에 처할 때만 도움을 주다 1928년에는 이사직조차 그만두면서 경성방직의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1935년 2대 사장에 오른 김연수 선생은 경방의 다른 이사들과 함께 인촌의 ‘공선사후(公先私後)’ 정신을 이어받아 경방을 일본 자본에 대적할 수 있는 민족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김연수 사장은 1939년 6월 자신의 사재 34만 원을 별도로 출연해 우리나라 기업재단의 효시인 ‘양영회’를 설립하고 직원 복지 및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또한 그는 1958년,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공장을 재건하고 회사를 살린 경성방직 임직원 전원을 대상으로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경방 주식 30% 전체를 발행 당시(1919)의 액면가로 매각했다.

무엇보다 경방은 일제강점기 방직·방적기술이 전무한 상태에서 일제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당 기술을 익히는 도전정신을 보여줬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섬유산업 수출 주도 기업으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1990년대 섬유산업이 사양길에 들자 경방은 경방필백화점을 설립해 유통업을 시작하고, 한강케이블TV·우리홈쇼핑을 개국하는 등 사업 다각화에 힘썼다.


교보생명
독립의 마중물 된 100년 민족기업8
대산(大山)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는 1917년 전남 영암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병마와 싸우느라 초등학교 문턱도 넘지 못했다. 하지만 독서로 배움의 열망을 채워나갔다.

1937년 중국으로 건너간 청년 대산은 다롄, 베이징 등지에서 양곡사업을 펼치며 큰돈을 벌었다. 또 이육사 등 애국지사와 교류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대산은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베이징에 모인 동포 3만 명을 보살폈다. 창고에 쌓아둔 쌀을 전부 나눠주고, 가지고 있던 돈으로 그들을 먹이고 재우며 ‘교민보’라는 임시 신문을 발간하는 일에 전부 썼다.

귀국한 대산은 민족자본가의 꿈을 안고 출판 사업, 직물 사업, 제철 사업 등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육이 민족의 미래’라는 신념으로 교육보험회사 설립에 착수했다. 창립이념은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형성’이었다. 1958년 8월 7일 종로에서 ‘대한교육보험 주식회사’가 문을 열었다. 창립과 동시에 ‘진학보험’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한 교육보험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독창적인 보험 상품이었다. 이 상품은 국민들에게 매일 담배 한 갑 살 돈만 아끼면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며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출시 후 30년간 약 300만 명의 학생이 학자금을 받아 학업을 이어갔다.

대산은 1983년 세계보험협회(IIS)로부터 보험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세계보험대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했다. 1996년에는 ‘세계보험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1997년 세계보험협회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신용호 세계보험 학술대상’을 제정했다.


교육이 민족의 미래

1958년 대한교육보험 창립 당시 종로 사옥. [제공·교보생명]

1958년 대한교육보험 창립 당시 종로 사옥. [제공·교보생명]

책을 통해 지혜를 깨친 대산에게 책은 스승이자 인생의 나침반이었다. 학력(學歷)이 아닌 학력(學力)의 힘을 믿은 그는 학교만큼 중요한 것이 사회교육이란 신념을 갖고 있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그의 신념은 ‘교보문고’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대산은 “사통발달 제일의 목에 청소년을 위한 멍석을 깔아줍시다. 와서 사람과 만나고, 책과 만나고, 지혜와 만나고, 희망과 만나게 합시다. 책을 읽은 청소년들이 작가나 대학교수, 사업가, 대통령이 되고 노벨상도 탄다면 그 이상 나라를 위하는 일이 어디 있으며, 얼마나 보람 있는 사업입니까”라며 서점 설립을 밀어붙였다. 1981년 6월 교보문고가 문을 열었다. 단일면적으로 세계 최대 규모로, 서가 길이가 24.7km에 달했다.

생전의 대산은 “이윤 추구는 기업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지론을 강조했다. 그는 농촌을 살리기 위한 ‘대산농촌재단’, 한국문학 발전과 세계화를 후원하는 ‘대산문화재단’, 교육의 공익적 가치 실현을 위한 ‘교보교육재단’을 설립했다. 일생을 민족교육에 헌신한 대산은 2003년 10월 19일 별세했다.


동화약품(동화약방)
독립의 마중물 된 100년 민족기업8
서울시 중구 순화동 5번지 옛 동화약품 사옥. [동아DB]

서울시 중구 순화동 5번지 옛 동화약품 사옥. [동아DB]

동화약품은 1897년 창업 이래 한자리에서 ‘활명수’라는 동일 제품을 100년 이상 생산해온 국내 유일의 제약기업이다. 동화약품은 2014년 5월 12일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후암로 98(남대문로5가 631)로 옮기기 전까지 117년간 서울시 중구 순화동 5번지에 있었다. 

옛 본사 자리는 조선 19대 왕 숙종의 왕비 인현황후의 생가 터이자 일제강점기에 상해 임시정부와의 비밀연락기관인 ‘서울 연통부’ 자리이기도 하다. 초대 민강 사장은 동화약방 내에 연통부를 설치하고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서울시는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이 터를 항일 의거 유적지로 선정하고 ‘서울 연통부 기념비’를 건립했다. 

전국에 186개소의 특약판매소를 설치하고 만주에까지 진출한 동화약방은 민 사장의 독립운동으로 사세가 기울었다. 민 사장은 1919년 3·1운동 이후 한성임시정부수립운동에 관여했다. 비밀결사조직인 대동단에도 가입해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탈출시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시키려는 거사를 계획했다. 거사는 수포로 끝나고 민 사장은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수차례 옥고로 건강이 악화돼 1931년 11월 4일 별세했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고, 그의 시신은 현재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독립을 위해 합심(同和)하다

1937년 민씨 일가는 동화약품을 민족기업가이자 독립운동가이던 보당(保堂) 윤창식 선생에게 넘겼다. 1890년 경기 고양에서 태어난 보당은 1915년 3월 국산품 애용과 민족경제 자립을 목적으로 둔 항일비밀결사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를 조직했다. 총무로 활동하던 보당은 일본 경찰에 발각돼 옥고를 치른다.

동화약방은 1909년 통감부에 ‘부채표’ 및 ‘활명수’를 상표 등록했다. 지금껏 ‘국민 소화제’로 불리는 부채표 활명수는 기네스북에도 기록된 최고(最古)의 브랜드다. 1938년 만주국 안동시에 동화약방 지점이 문을 열었다. 이후 활명수는 고속 성장을 거듭한다. 하지만 광복 후 동화약방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국 시장을 잃었다. 이어 전쟁으로 순화동 공장이 완전 파괴돼 위기에 처한다.

보당은 시련에 굴하지 않고 약품을 팔아 남긴 이윤을 전부 사업에 재투자하는 방식으로 회사를 일으켰다. 이후 1962년 동화약품공업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한 뒤 본사와 순화동 공장을 신축하고 1972년에는 안양공장을 준공했다.

안양공장 준공 이듬해 사장으로 취임한 보당의 아들 가송 윤광렬 전 회장도 광복군 출신이다. 가송이 사장 취임과 동시에 내린 결정도 인상적이다. 그는 1973년 ‘약을 구하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신념으로 국내 유일의 희귀약품센터를 설립했다. 당시는 진단을 받아도 의약품을 구하는 것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가송은 이 점에 착안해 기업의 사회 공헌을 실천한 셈이다.


두산그룹(박승직 상점)
독립의 마중물 된 100년 민족기업8
박승직 상점.

박승직 상점.

두산그룹 창업주 매헌 박승직은 1864년 경기도 광주군 탄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889년 광주 일대와 서울 청계천 부근을 전전하며 생활용품 장사를 하고 있던 맏형 승완과 힘을 합해 배오개(종로 4가 90~92번지)에 집 두 채를 마련했다. 그러다 1896년 8월 1일, 종로 4가 15번지에 ‘박승직 상점’을 창업했다. 지리상 한반도 동북방의 상품과 삼남 지방의 상품이 교류하는 통로의 교차지였다.

‘배오개의 거상’이라는 별칭을 얻은 매헌은 금세 한인상계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매헌은 1905년 7월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최초의 주식회사인 광장주식회사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 회사는 일본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종로 및 동대문 상인의 저항의식을 대변했다. 매헌은 설립 초부터 1943년까지 광장주식회사의 취체역(이사)으로 활약했다.

1931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는 ‘경성의 조선상공업자들을 총망라하여 조직된 경성상공협회에서 불경기 대책을 토론하기 위해 은행, 회사, 신문사 등 각 분야의 인사를 초청하여 5월 28일 오후 4시 은행집회소에서 제1회 좌담회를 열 것’이라고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좌담회는 회장 매헌의 사회로 각계 인사 40여 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금융 문제와 조선 물산 애용에 관한 문제, 운임과 세금에 관한 각종 문제 등 조선인 상공업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운 상황에 대한 타개책이 매헌의 주도하에 논의됐다.


종로에서 조선 상인 대변

매헌의 활동 반경은 넓었다. 그는 1906년 1월부터 1911년까지 한성상업회의소(대한상공회의소의 전신) 상의원으로 재임했다. 그러면서 1907년 거족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매헌은 70여 원을 모금해 당시 이 운동을 주도하던 대구 광문사에 기부했다. 이때의 기부로 두산은 94년 후인 2001년 2월 서상돈상을 받았다. 이 상은 국채보상운동 주창자인 서상돈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매헌은 1919년 고종 인산일(임금의 장례) 당시 자신이 조합장으로 있던 경성포목조합을 중심으로 조선상민봉도단을 결성해 국상에 여사군(轝士軍·인산 때에 대여, 소여를 메던 사람)으로 참여했다. 매헌은 여사군으로 1025명을 보냈고 10만 원의 성금을 국상 경비로 썼다. 1926년 순종 인산일 때도 상인들을 설득해 국장을 무사히 치르는 데 일조했다. 당시 조선 정부 재정은 취약해 상인들의 참여가 없었다면 국상을 제대로 치르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광복 이듬해, 매헌은 휴업 중이던 박승직 상점을 두산상회로 재개업해 두산의 여명기를 열었다. 6·25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1950년 12월 20일에 86세로 타계했다.


신한은행(한성은행)
독립의 마중물 된 100년 민족기업8
1897년 설립된 한성은행 사옥. [동아DB]

1897년 설립된 한성은행 사옥. [동아DB]

신한은행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1897년 설립된 최초의 민족자본은행 한성은행이 나온다. 1897년 1월 8일 한성은행은 우리나라 최초로 정부의 설립인가를 받았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1909년 설립)보다 12년 앞선 것. 한성은행은 1897년 2월 19일 ‘한성 중서 광토교 북천변 전 교환소’(현 종로구 서린동 33번지 영풍빌딩 자리)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1918년 일본이 ‘공통법’을 제정·시행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은행도 일본 내에 은행 점포를 개설할 수 있게 됐다. 한성은행은 같은 해 5월 도쿄 진출을 결정하고 7개월 후 도쿄지점을 개설했다. 한성은행은 왜 일본에 진출했을까.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일본에 진출해 사업에 나선 사람들이 늘었다. 한성은행의 많은 예금·대출 거래처가 도쿄에 거래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에 한성은행 도쿄지점은 현지에서 많은 거래처를 유치해나갔다. 이에 고무된 한성은행은 1922년 3월 오사카지점 설치 인가를 받고 4월부터 영업을 개시했다. 금융 한류의 효시가 한성은행인 셈이다.


최고(最古)에서 최고(最高)로 도약한 122년

한성은행은 같은 민족계 은행 동일은행과 합병해 1943년 10월 1일 조흥은행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조흥은 ‘조선을 부흥한다’는 뜻이다. 당시 조흥은행은 본점 영업부 포함 66개 지점과 6개 출장소 등 총 71개 점포망을 갖췄다. 조흥은행의 출범은 일제의 전시 통제 경제체제로 인한 강제 통합에 의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는 민족계 은행의 통합으로 이어졌다.

당시 금융 수요는 급증했다. 철강, 경금속 등 군수물자의 급속한 증산과 공출미의 단기 매상 촉진에 따라 은행 대출이 치솟았다. 조흥은행의 대출금과 예금 실적도 꾸준히 늘었다. 1945년 조흥은행은 의성지점과 의정부지점을 신설해 66개 지점과 8개 출장소 등 총 74개 점포망을 갖췄다. 이에 광복 후 자주 금융체제를 구축할 기반을 마련했다.

광복 후에도 조흥은행은 2000여 명의 직원 중 일본인 직원이 193명에 불과해 혼란 없이 경영을 이어나갔다. 또 미군정이 일본 소유 재산을 국내로 귀속하는 과정에서 조흥은행은 일본 자본 침투가 가장 적은 민족은행으로 인정받았다. 덕분에 귀속재산 관리 수납을 대행하는 은행으로 단독계약을 맺었다.

1962년 2월 조흥은행은 재무부로부터 외국환업무 취급인가를 받았다. 이어 11월에는 신탁 업무를 시작했고, 1965년 9월 총 예금 100억 원을 돌파했다. 이듬해에 총 예금 160억 원을 넘어서면서 시중은행 중 수신액 최상위권을 기록했다.

조흥은행은 1974년 11월 일본 도쿄에 사무소를 개소했다. 1976년 2월에는 두 번째 해외 네트워크로 뉴욕사무소를 개설해 금융의 국제화에 부응하는 태세를 정비했다. 1980년대에 금융 부문에서는 시중은행의 민영화, 경영에 대한 규제 완화, 금융업 진입제한 완화, 업무 영역 확대 등이 추진됐다. 이후 조흥은행의 경영진은 금융 자율화 기조에 따라 사업 다각화에 나섰고, 한편에서는 금융자율화 기조를 이어갔다.

2006년 조흥은행은 신한은행과 합병했다. 통합은행명을 ‘신한’으로 하는 대신 존속법인은 ‘조흥’으로 해 양행의 통합을 꾀했다. 통합 후 신한은행은 ‘리딩뱅크’로서 성장담을 써왔다. 2018년 신한은행의 순이익은 2조2790억 원으로 2017년보다 33.2% 증가했다.


LG그룹(구인상회)
독립의 마중물 된 100년 민족기업8
1958년 설립된 금성사 공장 내부. [동아DB]

1958년 설립된 금성사 공장 내부. [동아DB]

LG그룹의 모태는 1931년 연암(蓮庵) 고(故) 구인회 LG창업주가 동생 구회철 LG창업 고문과 세운 ‘구인상회’다. 두 사람은 자본금 2000만 원으로 경남 진주에서 포목상을 개업했다. 

일제의 감시가 심하던 1942년, 구인회 창업주에게 멀리서 손님이 찾아왔다. 당시 유림 사회에서 몇 손가락에 꼽히던 ‘백산 안희제’ 선생이었다. 백산 선생은 과거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하며 상해임시정부를 후원하던 독립운동계의 거물이었다. 1927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업했지만, 백산상회는 당시 국내 최대의 독립운동 비밀자금 루트로 구 창업주의 사돈이자 GS그룹의 뿌리인 허만정 옹이 설립 주주로 참여하기도 했다. 

신병 치료차 잠시 귀국했던 백산 선생이 만주로 돌아가기 전 구 창업주를 찾아온 이유는 독립군 양성을 위한 자금 마련에 동참해주길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구 창업주에게 1만 원은 결코 만만치 않은 돈이었다. 80kg짜리 쌀 1가마니가 약 20원이었으니 쌀 500가마니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무엇보다 일제로부터 지명수배를 받고 있는 이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하다 들키기라도 하면 사업 기반은 물론 집안까지 풍비박산 날 것을 각오해야 했다.


목숨 걸고 구국의 청에 응답

하지만 구 창업주는 ‘당할 때 당하더라도, 나라를 되찾고 겨레를 살리려는 구국의 청에 힘을 보태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돕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독립자금을 희사했다. 이후 구 창업주는 지난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LG화학)를 설립해 ‘럭키크림’을 개발했다. 이때 구 창업주 장인(허만식 씨)의 재종(6촌)인 고 허만정 씨가 3남인 준구(작고) 씨의 ‘경영수업’을 부탁하며 구 창업주에게 사업자금을 내놓으면서 구씨(LG家)와 허씨(GS家)의 동업이 시작됐다. 락희화학공업은 플라스틱 빗과 비닐원단, 플라스틱 제품 등을 만들며 기업의 성장을 도모했고, ‘럭키치약’ 출시로 제조업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이를 발판으로 지난 1958년 금성사(LG전자)를 설립해 우리나라 대표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특히 세탁기,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개발해 국민 삶의 질을 높였고, 화학 분야에서도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GS그룹은 지난 2005년 LG그룹에서 분리됐다. 

LG는 구인회 창업주의 뜻을 이어받아 2015년부터 사회공헌사업의 일환으로 ‘LG의인상’을 수여하고 있다. LG의인상은 “국가와 사회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의인에게 기업이 사회적 책임으로 보답한다”는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뜻에 따라 제정됐다. 올해는 17년간 한국 응급의료 발전을 위해 헌신하다 순직한 윤한덕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과 ‘베이비박스’를 10년째 운영하며 버려지는 아기 1519명의 생명을 구한 이종락 목사, 부산 동구 화재 현장에서 방범창을 뜯고 이웃 노인을 구한 장원갑 씨가 LG의인상을 받았다.


우리은행(대한천일은행)
독립의 마중물 된 100년 민족기업8
1899년 설립된 대한천일은행 본점 건물. [제공·우리은행]

1899년 설립된 대한천일은행 본점 건물. [제공·우리은행]

우리은행은 1899년 1월 30일, 대한제국의 황실 자본과 조선 상인이 중심이 돼 ‘대한천일은행’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했다. 당시 조선 사람 외에는 대한천일은행의 주식을 사고팔 수 없게 해 외세로부터 우리 금융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또한 우리은행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무역 증가로 외국계 은행들이 대거 조선으로 진출하자 이들의 공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민족금융의 자존심을 지켰다. 특히 일본 제일은행(다이이치)의 진출은 조선 금융계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대한천일은행은 조선 상인들에게 저리로 자금을 지원하며 조선인 상권 보호에 힘썼다. 또한 조세금 취급 업무에 국한하지 않고 삼국(조선·청·일본) 상인들을 대상으로 대출 및 예금 업무를 하며 영업 범위를 확대해나갔다.


창립 120주년, 금융지주사로 발돋움

1950년대 후반에는 미국·일본·유럽 등 금융 선진국으로 직원을 파견해 새로운 금융 업무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후 회계기· 출납기 등을 들여와 업무기계화를 추진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정부의 경공업 육성정책에 부응하고자 중소기업금융부를 신설해 시중은행 최초로 외국환 업무를 시작했다. 1968년에는 은행 최초로 일본 동경에 해외지점을 개설해 국내 수출 기업 지원에 앞장섰고, 1977년 서울-부산 간 온라인 서비스를 실시해 은행 업무의 효율성을 높였다. 2002년에는 국내 최초로 BPR(후선업무집중화)을 도입해 금융 시스템을 고도화했다. 2015년 업계 처음으로 해외 상장 은행을 인수해 인도네시아 우리소다라은행을 설립했고 지난해에는 캄보디아에서 전국 네트워크를 보유한 현지 금융사를 인수해 WB파이낸스를 출범시키는 등 글로벌 금융시장 개척에 적극 나서고 있다. 

올해 우리은행은 창립 120주년을 맞았다. 동시에 우리은행이 금융지주사로 다시금 태어난 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우리금융지주 출범식에서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은 “지주회사 출범을 통해 다른 금융그룹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게 됐다”며 “적극적인 사업 포트폴리오 재구축과 글로벌 전략 추진을 통해 세계가 주목하는 글로벌 강자로 나아가자”고 밝혔다.


유한양행
독립의 마중물 된 100년 민족기업8
유한양행의 창업주인 유일한 박사는 미국 유학 후 한국으로 돌아와 제약사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에도 적극 뛰어들었다. 1894년 평양에서 태어난 유 박사는 11세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 네브래스카주 커니에 정착했다. 1909년 박용만이 미주 지역에서 최초로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에 입교해 농장에서 학비를 벌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헤스팅스 고교를 거쳐 미시간주립대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유 박사는 ‘한인자유대회’에 대의원 자격으로 서재필, 이승만, 조병옥, 임병직 등과 함께 참가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미국에서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해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일제 치하에 고생하는 민족을 구하고자 1926년 귀국해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건강한 국민만이 잃어버린 주권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수공작원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유일한 박사

유일한 박사는 1942년 8월 미국 LA시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현기식에 참석했다. [제공·유한양행]

유일한 박사는 1942년 8월 미국 LA시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현기식에 참석했다. [제공·유한양행]

1930년대 들어 일제의 만주 침략과 중일전쟁 등으로 국내외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유 박사는 미국에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 한족대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 대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대일 민족통일 전선의 일환으로 구상된 것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일제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유 박사는 미군 전략정보처 OSS(CIA의 전신)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했다. 

조국 광복에 대한 유 박사의 투철한 의지는 1945년 ‘냅코(NAPKO) 작전계획’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OSS가 수립한 이 계획은 반일 민족의식이 투철한 재미한인을 선발해 특수공작훈련을 시킨 뒤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적 후방을 교란하려는 작전이었다. 1945년 1월 이 작전계획의 핵심요원으로 선발된 유 박사는 제1조 조장으로 임명돼 명령을 기다리던 중 일제의 항복으로 작전을 실행하지는 못했다. 

유 박사는 1946년 7월 미국에서 귀국한 뒤 유한양행을 재정비해 회장과 사장,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경제 발전에 이바지했다. 아울러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 유한공고 등을 설립했고 개인 소유 주식을 각종 장학기금으로 출연하는 등 사회 공헌에 힘썼다. 1995년 정부는 이러한 유 박사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과 독립훈장을 수여했다. 유한양행 역시 유 박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지금까지도 헌혈, 연탄 나눔, 학술 연구 지원, 국가유공자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신동아 2019년 3월호

김유림 기자 mupmup@donga.com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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