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안전하고 값싼 백신이 있음에도 2017년 한 해 동안 세계에서 11만 명이 홍역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들 대다수는 5살 미만의 아이들’이라고 개탄했다. 올겨울 전국 각지에서 홍역 환자가 신고되면서, 한반도도 ‘홍역 안전지대’가 아님이 확인됐다. 오래전 ‘정복’된 것으로 여겨진 홍역은, 왜 지금 다시 괴물이 돼 인류를 공격하고 있을까.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이 1월 29일 서울 도렴동 정부서울청사 별관 브리핑룸에서 홍역 등 국내외 감염병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시스]
그런데 뜻밖의 요인이 하나 있다. 바로 ‘백신 접종 거부’다. 에볼라나 에이즈는 백신이 없어서, 독감은 백신이 불완전해서(바이러스가 변신의 귀재이다 보니) 여전히 인류를 괴롭히는 질병이다. 그런데 효과적인 백신이 이미 개발돼 있어 예방이 가능한 질병들이 백신 접종 거부로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이게 ‘세계인 건강을 위협하는 10대 요인’ 중 하나로 뽑혔다니 어이없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번 겨울 여기저기서 홍역 환자가 발생해 2월 6일 현재 50명에 이르렀는데, 이 중 대다수는 홍역 백신을 접종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살아난 ‘최악의 전염병’
매년 수백만 명의 사망자를 내던 홍역이 급격히 퇴조한 건 1963년 백신이 개발되면서부터다. 여전히 백신이 널리 보급되지 못한 1980년에는 사망자가 세계적으로 260만 명이나 됐지만 2000년 54만5000명으로 줄었고, 2014년 7만3000명까지 급감했다. 그러나 그 뒤 사망자가 다시 증가세로 돌아서 2017년 11만 명에 이르렀다. 효과적인 백신이 개발된 질병 가운데 사망자가 가장 많은 게 바로 홍역이다.
이처럼 홍역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건 지구촌의 홍역 백신 접종률(1차)이 수년째 85%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집단면역(herd immunity)이 형성되지 않아 여전히 많은 지역에서 홍역이 유행한다.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저개발국가에서 환자가 많이 발생하고 사망자의 95% 이상도 이들 지역에서 나온다.
집단면역은 어떤 인구집단에서 충분히 많은 사람이 백신을 접종해 한 사람이 감염되더라도 병원체가 면역력 없는 사람에게 옮겨가지 못해 전염병이 퍼지지 못하는 현상을 일컫는 용어다. 홍역은 전염성이 워낙 강해 집단면역에 이르는 문턱이 높다. 우리나라는 최근 홍역 백신 접종률이 98%에 이른다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집단면역을 확보한 상태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특히 20, 30대의 백신 접종률이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홍역 사태만 봐도 젊은 사람들이 베트남 등 유행 지역에 여행을 갔다가 현지에서 감염되고 귀국해 주변 사람에게 퍼뜨린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홍역 백신 접종률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저개발국가들처럼 아직 의료체계가 덜 갖춰진 나라에서만 낮은 게 아니다.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등 의료 선진국 중에도 지역에 따라 접종률이 낮은 곳이 적잖다. 그 결과 홍역 환자가 무더기로 발생하는 사태가 심심찮게 보고되고 있다. 지난해 프랑스에서는 홍역 환자가 2902명 발생했고, 미국 뉴욕주에서는 지난가을부터 지금까지 200명이 넘는 환자가 나왔다.
현대 의학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홍역은 여전히 심각한 질병으로 환자가 꽤 고생을 한다. 의료 인프라가 갖춰진 나라에서도 사망률이 0.2%에 이른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완쾌된 뒤에도 한동안 면역력이 약해져 다른 감염질환에 걸려 사망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왜 일부 부모들은 자녀에게 홍역 백신을 맞히지 않으려고 할까. 심지어 모든 백신을 맞히기를 거부하는 부모들까지 있을까. 사실 백신 접종 거부의 역사는 곧 백신의 역사라고 할 정도로 뿌리가 깊다. 접종을 거부하는 이유도 여러 가지다.
종교적 믿음과 음모론
먼저 종교적인 이유로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질병은 사람이 저지른 죄를 벌하고자 신이 내린 것으로 믿으며, 백신으로 이를 예방하는 것은 ‘악마적인 행위’라고 해석한다. 실제 이런 믿음을 지닌 종교인이 모인 공동체에서 홍역 집단 발생이 종종 일어난다.1999년 네덜란드의 한 기독교 종파 공동체에서 발생한 홍역으로 3000명 가까운 환자가 나왔고 이 가운데 3명이 사망했다. 훗날 이들을 조사한 결과 95%가 백신을 맞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 미국 뉴욕주에서도 백신 접종률이 낮은 초정통파(ultra-Orthodox) 유대교도 거주지에서 홍역 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백신 접종 거부의 또 다른 원인으로 음모론이 있다. WHO가 백신 접종에 매달리는 건 배후 세력인 서구 사회의 조종을 받은 결과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음모론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서구인이 비서구인을 몰살하고자 백신을 이용한다는 주장이다. 주로 아프리카에서 이런 음모론이 퍼져 있다. 특히 나이지리아 상황이 꽤 심각하다. 2000년대 들어 나이지리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백신을 맞으면 불임이 돼 결국은 민족 전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이 퍼졌다. 이에 따라 WHO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소아마비 백신과 홍역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그 결과로 2005년 홍역이 유행해 환자가 2만 명 넘게 발생했고 사망자도 600명에 육박했다. 2007년에도 홍역이 발생해 200명 넘는 아이들이 또 목숨을 잃었다. 소아마비 역시 여러 차례 발생했는데, 2006년의 경우 세계에서 보고된 환자의 절반 이상이 나이지리아에서 나왔다.
음모론의 다른 한 가지는 경제적 측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WHO가 서구의 거대 제약회사와 결탁해 이들이 만든 백신을 지구촌 수십억 명이 맞게 함으로써 엄청난 이익을 거둬들인다는 내용이다. 2009년 신종플루 대유행 때 이런 음모론이 널리 퍼졌다. 감염성이 좀 높을 뿐 별것도 아닌 독감의 위험성을 과장해 서둘러 백신을 개발해 지구촌에 뿌렸다는 것이다.
벌써 10년 전 얘기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겠지만 당시 상황은 정말 긴박했다. 신종플루 전파력이 워낙 높은 데다 의료 선진국인 미국에서 사망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물론 상황이 종료된 뒤 집계한 결과 사망률은 당초 예상보다 훨씬 낮아 전형적인 계절성 독감 수준인 걸로 나왔지만(15만 명에서 57만5000명 사이로 추정) 내용을 들여다보면 차이가 있다. 즉 기존 독감에는 면역력이 약한 노인들이나 중환자들이 주로 희생된 반면, 신종플루의 경우는 어린이와 면역력이 왕성한 젊은이들의 사망 사례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면역계가 바이러스에 지나치게 반응해 오히려 인체 조직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사이토카인 폭풍’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WHO가 앞장서 신종플루 백신을 널리 보급하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은 어린이와 젊은이가 희생됐을 수 있다. 그 뒤 신종플루의 변종으로 보이는 바이러스가 종종 돌면서 비슷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2017~2018년 겨울 미국에서 어린이 185명이 독감으로 사망했다. 이 가운데 80%는 독감 백신 접종을 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 음모론의 또 다른 허점은 백신이 의약품 가운데 수익률이 가장 낮은 항목으로 알려져 있다는 데 있다. 백신이 비싸면 널리 보급될 수 없어서다. 그 결과 백신 사업에서 손을 떼는 제약회사가 잇달아 나오는 게 현실이다.
논문 한 편이 증폭시킨 백신 공포
물론 이런 불안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과거 몇 차례 백신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악의 사례로 1955년 미국에서 발생한 소아마비 백신 사고를 들 수 있다. 당시 실수로 병독성을 약화시키지 않은 바이러스를 쓰는 바람에 백신을 맞은 12만 명 가운데 4만 명이 발병해 53명이 장애를 갖게 되고 5명이 사망했다. 지금이야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알레르기나 자가면역질환, 자폐증 같은 후유증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이걸 백신의 본질적인 위험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특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백신은 접종을 거부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이런 이유로 백신을 거부하는 비율이 고학력자일수록 높다. 정부 발표보다 자신의 지식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MMR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내용의 논문. 1998년 의학저널 ‘랜싯’에 게재됐다가 추후 철회됐다. [사진제공·랜싯]
2001년 웨이크필드는 일본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장 질환과 자폐증이 있는 아이들의 백혈구에서 홍역 바이러스(백신에서 유래했을 거라는 말이다)가 있음을 확인했다는 논문을 다시 발표했다. 이때부터 영국에서 본격적인 백신 접종 반대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언론도 그 열기에 기름을 부었다. 아기를 건강하게 키우려고 백신을 맞혔는데 오히려 자폐증에 걸려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부모들의 사연은 가독성 높은 뉴스거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해 12월 당시 총리 토니 블레어가 늦둥이 레오에게 MMR 백신을 접종했느냐는 질문에 ‘사생활’이라며 답을 회피했다. 이로써 홍역 백신에 대한 영국인의 불안이 더욱 고조됐다. 영국의 홍역 백신 접종률은 1996년 92%에서 2008년 73%까지 급감했다. 특히 학력 수준이 높은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일수록 접종률이 더 낮아 60%까지 떨어졌다. 그 결과 홍역이 다시 돌아 2006년 740건, 2007년 971건에 이르렀고 사망자도 나왔다.
나쁜 과학을 넘어
MMR 백신.
영국 의사이자 과학저술가인 벤 골드에이커는 2008년 출간한 ‘배드 사이언스(Bad Science)’에서 홍역 백신 논란을 ‘나쁜 과학’의 마지막 사례로 들면서 “일단 공포가 퍼져나가면 무슨 반박을 하더라도 오히려 공포에 대한 관심을 높여 공포를 시인하는 꼴이 된다”고 지적했다. 돈에 눈이 먼 한 의사가 쓴 엉터리 논문에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언론인들이 놀아났고 그 결과 많은 사람이 큰 피해를 보게 된 과정을 개탄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개개인은 몰라도 백신 접종 거부 운동 같은 집단적인 행동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다. 홍역 백신 접종률도 98% 수준으로 90% 초반인 유럽이나 미국보다 높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약을 쓰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것을 표방하는 웹 커뮤니티 회원 수가 6만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모임 골수 회원들은 자녀의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미국 대선을 계기로 세계는 가짜 뉴스 몸살을 앓고 있다. 백신 공포야말로 가짜 뉴스의 손쉬운 먹잇감일 것이다. WHO가 백신 접종 거부를 ‘2019년 세계인 건강을 위협하는 10대 요인’의 하나로 꼽은 걸 보면 이런 생각이 괜한 걱정은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