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의 타작(왼쪽)과 논갈이. [국립중앙박물관]
자로(子路)가 왜 호랑이를 피해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느냐고 묻자, 여인은 “그래도 이곳에 있으면 세금을 혹독하게 징수당하거나, 못된 벼슬아치에게 재물을 빼앗기는 일은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공자가 제자들에게 한 말이 바로 ‘가정맹어호’다.
이 고사성어에서 알 수 있듯이, 가혹한 정치의 선봉에는 늘 세금 수탈이 있었다.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종 4년(1663) 1월 4일에 있었던 현종과 신하들의 대화를 살펴보자.
원임 대신 이경석(李景奭) : 선왕 때 호남에서 대동미(大同米)를 13말씩 거두기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어보니 13말은 너무 많아 필요한 곳에 다 쓰고도 남는다고 합니다. 적절한 수준으로 대동미를 줄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난번에 관찰사도 대동미를 줄여달라고 청했는데, 묘당에서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 몹시 잘못된 일입니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 : 호남의 선비도 상소하여 줄여줄 것을 청하였고 관찰사도 줄여달라고 청했지만, 모두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어보니 여러 고을에서는 조정의 명만 기다리면서 아직까지 대동미를 거두어들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현종 : 그렇다면 결코 줄여줄 수 없다. 쓰고 남은 것이 있을 때 줄여달라고 청하는 것이야 관찰사의 직분이지만, 줄이라는 명만 기다리며 아직까지도 거두어들이지 않는 것은 안 될 일이다.
<현종실록 4년 1월 4일>
현종이 즉위한 뒤 몇 년 동안 극심한 흉년이 이어져 백성은 처참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현종 3년(1662) 2월에는 흉년으로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사람이 경상도에만 8만 명이 넘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담양에 사는 백성 이정일(李廷一)은 자식들이 굶주리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스스로 목을 매기도 했다.
이렇게 심한 흉년이 들면 피해 정도에 따라 부세(賦稅)를 일시적으로 줄여주거나 아예 면제해주었다. 당시 호남에서는 전지(田地) 1결당 쌀 13말을 대동미로 거두고 있었는데, 필요한 곳에 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던 것 같다. 이경석은 다 쓰지도 못할 대동미를 원칙대로 거두느니 필요한 만큼만 걷고 나머지는 감면해서 계속된 흉년에 시달린 백성의 숨통을 조금이나마 틔워주자고 청했다. 상식적이고 적절한 의견이었다.
그러나 현종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현종에게는 곤경에 처한 백성을 구제하는 것보다 국가재정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던 듯하다. 이에 대해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이경석의 이 의견은 실로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주는 도리에 부합한 것이었다. 그런데 원두표는 정승의 신분으로 함께 어전에 나왔으면서도 말 한 마디 거들지 않아, 백성을 보살피는 정책이 시행되지 못하게 되었다. 너무도 애석한 일이다.
<현종실록 4년 1월 4일>
겉으로는 원두표를 비판하지만, 그 안에는 현종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결국 임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동미 감면은 없었던 일이 되는 듯했지만, 한 달여가 지난 2월 12일,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우의정 정유성 : 호남에서 거두는 대동미를 줄여줄 것인지 여부를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조판서 홍명하(洪命夏) : 어떤 이는 줄여주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줄여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영의정은 줄여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현종 : 나는 호남에서 거두는 13말이 경기에서 거두는 16말보다는 부담이 적다고 생각한다.
우의정 정유성 : 해마다 계속 흉년이 들어 백성이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데, 어찌 급히 필요하지도 않은 곡식을 바치라고 재촉하여 백성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현종실록 4년 2월 12일>
정유성은 이경석과 마찬가지로 어차피 대동미가 남을 것이니 백성의 부담을 줄여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현종은 호남에서 거두는 대동미의 양이 경기보다 상대적으로 적으니 원래대로 거두어도 문제 될 것이 없다며 결국 현상 유지를 택했다. 이에 대해 사관은 다소 과격한 어조로 논평했다.
지금 원두표는 대동미를 줄여주면 안 된다고 힘껏 주장했고, 홍명하도 좇아서 맞장구를 쳤다. 무거운 세금을 마구 거두어들이는데도 백성들이 곤경에 빠지지 않고 나라가 위태로워지지 않은 적은 없었다. 정자는‘변변찮은 지위의 관리라도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원두표는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 이 점은 생각지도 않은 채 주상의 뜻에 영합하여 총애를 유지하려고만 하고,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은 개의치 않았으니, 너무도 모질다.
<현종실록 4년 2월 12일>
신하들만 비판하는 듯하지만 논평의 강도가 더 세졌다. 대신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오히려 임금에게 영합해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백성에게 세금을 걷는 것은 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재정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이고, 이는 결국 백성의 삶을 안전하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바탕이 된다. 따라서 세금을 얼마나 어떻게 거둘지 결정하는 기준은 늘 백성의 삶이어야 한다. 원칙은 그렇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이 대원칙을 곧잘 망각한다. 법을 무기로 백성을 수탈할 뿐 그들의 고통은 돌아보지 않는다.
과거 한 TV 뉴스 진행자는 여론을 들끓게 한 세금 인상에 대해 논평하면서 ‘가정맹어호’를 언급했다. 공자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가혹한 정치는 죽음보다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