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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3·1만세운동 100주년의 함의

1920년대 동아일보에 비친 3·1운동과 임시정부

총독부 검열에도 독립운동 관련 기사 끝없이 나와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presskr@empas.com

1920년대 동아일보에 비친 3·1운동과 임시정부

  • ● 캄캄한 죽음 앞에서도 독립운동 끊임없이 이어져
    ● 3·1운동은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등 민간신문의 모태
    ● 동아일보, 민족대표 48인 얼굴 거의 한 페이지에 과감히 실어
    ● 대통령 이승만, 총리 이동휘 등 임시정부 동정 지속 보도
1920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는 거의 한 페이지에 걸쳐 민족대표의 사진을 실었다.

1920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는 거의 한 페이지에 걸쳐 민족대표의 사진을 실었다.

3·1운동은 일제강점기에 창간된 민간신문의 모태(母胎)였다. 총독부는 한일 강제합병 후 10년간 강압적인 무단정치를 실시해오다가 3·1운동 후에는 조선 통치의 방식을 ‘문화정치’로 전환하면서 종래의 헌병경찰 대신에 보통경찰제도를 시행하는 등 몇 가지 변화를 보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한국인에게도 제한적인 숫자의 일간지 발행을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3·1운동이 거둔 가시적인 성과였다.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때로부터 서울과 지방에서 여러 종류의 항일 지하신문이 비밀리에 배포됐다. 해외에서도 독립을 갈망하는 다양한 유인물이 발행되는 가운데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계 아래 ‘독립신문’(사장 이광수, 1919.8.21)이 창간돼 국내로도 유입되고 있었다. 한일합방 후 10년 동안 조선인에게는 신문 발행이 허용되지 않았고, 언론의 자유가 철저히 억압당했던 데 대한 불만도 컸다.


총독부, 민간신문 3개 허용

총독부는 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을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고등경찰이 작성한 극비 문건은 3·1운동 당일과 그 이후의 전개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총독부는 하루 전인 2월 28일에 이미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인쇄한 사실을 탐지했다.(‘독립선언서 발견의 건’, 3월 1일, 高 제5288호), 선언문에 서명한 33인의 명단, 독립만세를 부르는 시위 장면, 조선독립신문이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교장 윤익선(尹益善)을 사장으로 발행됐다는 점 등도 보고됐다.(‘독립운동에 관한 건’, 3월 1일, 제2보, 高 제5410호). 3월 1일에 발행된 조선독립신문 첫 호는 천도교 출판사 보성사에서 활판으로 인쇄된 빈약한 지면이었다. 하지만 윤익선을 비롯한 관련자가 체포되자 다른 사람들이 장소를 바꾸어가며 프린트판으로 발행을 계속했고, 제호를 달리한 지하신문이 여러 종류 발행됐다.

3·1운동 이후의 이 같은 상황 전개는 일제가 조선인의 신문 발행을 허가하지 않을 수 없도록 압박하는 요인이었다. 이리하여 1920년 초에 3개의 민간지가 창간되고, 1922년에는 잡지 4개도 신문지법에 의해 허가를 받았다.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된 동아일보는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의 재판과 법정투쟁을 알리고,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동정적으로 보도해 항일 여론을 조성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3·1운동으로 투옥된 48인 가운데는 언론인으로 활동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종일(李鍾一)은 한말에 한글전용 뎨국신문(1898.8.10)을 창간해 근 10년 동안 자력으로 운영했던 인물이다. 3·1운동 당시에는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 과장으로 조선독립신문 발행을 주도했다. 송진우(宋鎭禹: 3·1운동 당시는 중앙학교장)는 투옥됐다가 1년 7개월 만인 1920년 10월 30일 석방된 뒤 1921년 9월 15일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해 세 차례나 사장을 역임한다.




동아일보, 민족 대변지 자처

민족대표 48인에 대한 공판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동아일보 1920년 7월 12일자 3면 하단.

민족대표 48인에 대한 공판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동아일보 1920년 7월 12일자 3면 하단.

총독부가 조선인의 신문 발행을 허용할 방침을 정하자 10건이 넘는 신문 발행 신청이 있었다. 조선인들에게 신문 발행이 그만큼 절실했음을 말해준다. 총독부는 1920년 1월 6일자로 여러 신청자 가운데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의 발행을 허용해 조선일보는 1920년 3월 5일, 동아일보와 시사신문은 4월 1일에 창간됐다. 세 민간지가 창간되면서 이전부터 총독부의 어용지로 발행되고 있던 매일신보를 합해 4개의 한국어 일간지가 나오게 됐다. 이때 창간된 3개의 일간지를 ‘민간지’라 부른 것은 매일신보가 총독부의 기관지(또는 어용지)였기 때문에 이에 대칭되는 개념이었다. 이들 세 민간지 가운데 시사신문은 창간 1년이 채 못 돼 1921년 2월에 폐간됐다. 뒤를 이어 나타난 신문이 시대일보였다.

시대일보는 최남선이 발행한 시사주간지 ‘동명’의 후신이었다. 최남선은 48인의 한 사람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가 감형돼 1921년 10월 18일 출옥한 뒤 1922년 9월 3일 시사주보 ‘동명(東明)’을 창간했다. 동명은 후에 시대일보(1924.3.31 창간), 중외일보(1926.11.15), 중앙일보(1931.11.27), 조선중앙일보(1933.3.7)로 제호와 판권을 바꾸면서 발행을 계속했다. 따라서 1920~193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인이 발행하는 민간지는 세 개가 유지됐다. 3대 민간지의 창간 이후에 언론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총독부의 본격적인 언론탄압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조선인에게 제한된 숫자의 신문 발행을 허용했지만 언론의 자유를 허용할 목적은 아니었기에 신문 잡지 출판물에 대한 검열과 통제는 날이 갈수록 더욱 강화돼 언론인들이 투옥되는 경우도 있었다.


동아일보는 항일 독립운동 관련 기사를 지속적으로 보도하면서 총독부 검열에 걸려 기사 압수와 삭제를 자주 당했다. 위부터 복역자 편지, 철원애국단사건, 독립자유민보사건.

동아일보는 항일 독립운동 관련 기사를 지속적으로 보도하면서 총독부 검열에 걸려 기사 압수와 삭제를 자주 당했다. 위부터 복역자 편지, 철원애국단사건, 독립자유민보사건.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기사를 보도하다가 총독부 경무국 검열에 걸리고, 기사 압수와 삭제를 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창간 첫해인 1920년에는 동아, 조선 두 신문이 모두 정간처분으로 신문이 발행되지 못한 적도 있었다. 동아는 민족대표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구속, 재판 기사를 파격적인 비중으로 다루었다. 3·1운동의 결실로 탄생한 민족의 대변지를 자처해 독립운동 정신을 지면에 강력히 반영한 것이다. 첫 호부터 ‘47인의 공판, 세 길이 넘는 기록을 조사하기에 판검사 아홉 명이 매달려 있다. 늦어도 금년 말에나 결말이 날 듯’이라는 제목으로 3·1운동 관련 기사를 크게 실었다. 6일부터 13일까지는 48인의 예심결정서를 8회에 걸쳐 보도했다. 체포된 민족대표가 48인에서 47인으로 한 사람이 줄어든 것은 양한묵(梁漢默: 천도교)이 1919년 5월 16일에 옥사했기 때문이다.


3·1운동 관련자는 사면 제외

동아일보 창간 한 달이 되기 전인 4월 28일, 총독부는 전국 감옥에 수감된 정치범 5000여 명에 대해 대대적인 감형 조치를 취했다. 왕세자 이은(李垠)의 결혼을 경축한다는 명목이었지만 3·1운동 이후의 민심을 수습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경성감옥과 서대문감옥에서 출옥한 사람은 540여 명에 달했지만 3·1운동 관련 48인은 감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하루 전인 4월 27일 오후 10시경 서대문 뒷산에서는 수십 명 군중이 모여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고, 감옥 안에서도 호응해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튿날 서대문감옥에서 540여 명의 정치범이 출옥하자 근처 의주로에서 감옥까지 이르는 길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동아일보는 100원의 구호금을 ‘경성구호회(京城救護會)’에 기증했다. 예상치 못한 때에 갑자기 출옥은 했으나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가 없는 사람이 많았고, 이들이 처한 곤경을 벗어나도록 돕기 위해 경성구호회가 약간의 보조금을 마련했지만 충분하지 못하다는 사정을 안 동아일보가 성금을 낸 것이다. 경찰은 석방된 정치범 가운데 지방 출신들은 서울에 머물지 말고 빨리 시골로 내려가라고 독촉했다. 동아일보는 이날의 정경을 사회면 거의 전면을 할애해 보도했다.

1919년 9월 2일 총독 사이토가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해 마차를 탈 때 수류탄을 던진 우국지사 강우규(姜宇奎)는 감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1920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는 강우규의 장남 강중건(姜重健)이 전하는 옥바라지의 어려움을 보도했다. ‘아 캄캄한 죽음의 손(暗黑한 死의 手)! 아 참혹한 굶주림의 귀신(慘酷한 飢의 鬼)! 강우규의 말로(末路), 찌는 여름 철창 아래에 사형 우에 주림까지도’라는 제목으로 사형 집행의 날을 기다리는 강우규와 그를 옥바라지하는 가족의 비참한 정황을 묘사했다. 강우규는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대동단사건에 연루됐던 강매(姜邁)를 비롯한 4명은 면소(免訴)돼 6월 29일에 서대문감옥에서 출옥했다. 동아일보는 1920년 6월 30일자에 ‘대동단사건 관계자, 강매씨 외 4인 출옥’을 보도했고, 같은 지면에 ‘서대문감옥 후산(後山)에서 야반에 만세성’ 제목으로 “수십 명 군중이 모여 크게 만세를 부르짖어”라고 보도했다. 강매는 당시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였는데 1931년 11월 중앙일보의 편집국장이 되는 사람이다. 강매가 석방되던 때에 옥중의 손병희는 병이 약간 회복되고 있다고 보도됐다.


독립운동의 제1막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의 공판은 1920년 7월 12일부터 정동의 경성지방법원 특별법정에서 열렸다. 이날 동아일보 지면은 ‘금일이 대공판(大公判)/ 만인의 시선이 모이는 곳에/ 당국의 처치는 어떠할지’라는 제목으로 민족대표 48인의 사진을 거의 1페이지에 게재해 3·1운동 주인공들을 영웅으로 묘사하는 파격적인 편집을 보여주었다.

14일자는 ‘전개된 독립운동의 제1막’이라는 제목으로 최린, 최남선, 송진우, 현상윤, 김도태의 심문 내용을 전체 지면에 상세히 실었다. 동아일보는 그 후에도 7월 15일자, 16일자, 공판이 진행된 7월, 8월, 9월까지 연달아 사회면 거의 전체를 공판기사로 채우는 편집을 보였다. 48인의 옥중 생활도 상세히 보도해 일반의 관심을 끌도록 했다.

1921년 3월 1일엔 독립운동 3주년을 맞이해 사회면 전체를 여러 건의 항일 독립운동 기사로 채웠다. 수감 중인 독립운동가들의 옥중 생활을 상세히 보도했다. 수감자들은 아침 7시에 일어나서 30분 후에 식사, 8시부터 감방 안에서 대개 그물을 뜨는 작업을 시작했다. 12시까지 오전 작업을 마치면 1시간은 점심시간이었다. 오후 1시에서 4시까지 작업을 하고 난 후에는 운동도 하고 책도 읽다가 저녁 7시부터 취침시간에 들어갔다. 식사는 보통 수감자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형무소 측은 밝혔는데 콩 60%, 조 20%, 쌀 20%의 비율이었고, 반찬은 아침에는 된장국, 점심에는 김치와 장국, 저녁은 삶은 나물이었다. 열흘에 한 번은 생선이 공급됐다.(동아일보, 1921.3.1, ‘만 2개년의 春을 迎하는 독립선언사건 囚人의 생활’) 이날자 동아일보는 옥중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도 공개했다. 이 밖에도 같은 지면에 항일 독립운동 관련 기사를 보도했다.

특별히 형무소의 한 동 같은 방에 독립운동가 세 사람이 수용됐다.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은 독립선언서를 집필한 육당 최남선이었다.


임시정부 보도도 꾸준히

옥중의 최남선은 조선인은 물론이고 외국인들 사이에도 존경받는 학자요 문인이자 언론인이었다. 1920년 6월 21일,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사장이던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가 서대문감옥에 가서 최남선을 면회했다. 그 이전에도 아베는 조선에 오자마자 최남선을 면회했기 때문에 두 번째 면회였는데, 아베는 이때 최린과 오세창도 면회했다. 아베는 일본 국민신문(國民新聞) 사장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 본명 德富猪一郞, 1863~1957)의 심복으로 국민신문 부사장으로 있었는데, 도쿠토미가 경성일보의 ‘감독’에 취임했을 때 경성일보 사장에 임명됐다가 도쿠토미와 같이 물러난 인물이다. 아베가 최남선을 방문했을 때에는 일본 국민신문 부사장으로 재임 중이었다. 미국 시카고대학 인류학 교수 스타 박사는 1921년 4월 25일 최남선을 면회했다. 스타 박사는 몇 년 전 방한했을 때 최남선이 발행하는 ‘청춘’에 기고해줄 것을 요청받은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921.4.26, ‘춘광(春光)을 등진 옥중에서 학자와 학자의 대면’)

최남선은 옥중에서 동아일보에 ‘아름다운 가정’이라는 글도 실었다. 동아일보의 편집인 겸 발행인이자 편집국장이던 하몽(何夢) 이상협(李相協)은 글의 머리에 최남선과 자신이 여성잡지를 발행하려고 준비하던 중에 3·1운동으로 형무소에 들어갔기 때문에 잡지 발간이 무산됐다고 썼다. 이 글은 공판이 열린 직후인 7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다.

동아일보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관한 보도도 꾸준히 비중 있게 다루었다. 1921년 2월 27일자는 임시정부의 대통령 이승만 사진과 함께 이동휘(李東輝) 국무총리 등 각부 장관에 해당하는 ‘총장’들의 명단을 실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3·1운동 투쟁으로 신문 발행의 권리를 쟁취한 언론기관이다. 3·1운동은 한국 신문의 역사에 획기적인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신문이기에 1920년대에 항일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민족대표 48인을 비롯해 독립만세운동, 또는 그 후의 항일투쟁으로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의 옥중 동정을 소상하게 보도하고 동정적인 기사를 많이 보도했다.

언론탄압의 주무 부서였던 총독부 경무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조선민족의 독립사상 또는 독립운동을 선전 고취하거나 선동 또는 찬양하는 기사”를 실었다(저촉된 기사의 구체적인 예는 정진석, ‘극비, 조선총독부 언론검열과 탄압’(커뮤니케이션북스, 2007)에 실린 ‘부록’ 참고).


1078쪽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동아일보는 광복 후 1969년에 B5(4·6배판) 용지 1078쪽에 달하는 방대한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을 엮어냈고, 70주년인 1989년에는 ‘3·1운동과 민족통일’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해 책으로 발간했다. 앞의 논집에는 무려 76명의 학자와 연구자들이 대규모로 참여했다. 당시 국내의 근현대사 연구자들이 망라된 논문집이었다. 1989년에 출간된 책에는 7명의 전문학자가 발표한 주제에 14명의 학자가 토론에 참여했다. 이는 동아일보가 3·1운동의 결실로 창간됐으며 그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역사 인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아일보는 이렇게 말했다.

“동아일보로서는 3·1운동으로서 일제의 극악한 무단통치를 물리치면서 특히 언론·출판 등에 있어서 최소의 자유나마 한민족이 쟁취했다는 점을 항상 명심하고 있다. 3·1운동의 여파로 그 만세의 기운이 충만해 있던 시점에서 민족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하며 동아일보는 창간됐기 때문이다. 이 같은 역사적 인연과 사명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동아일보는 창간 이래 민족정신 함양과 문화창달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쳐온 바 있다. 3·1운동과 관련해서는 그 의의를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전국의 3·1운동 유적지를 찾아 12곳에 기념비를 세웠고, 이 운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동아일보사, ‘3·1운동과 민족통일’, 머리말)




신동아 201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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