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호

윤채근 SF 소설

차원이동자(The Mover)_2

세월을 베어버린 칼 왕국의 변절자 정중부

  • 윤채근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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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2019-11-14 14: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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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팩션 ‘고전환담’을 통해 ‘신동아’ 독자의 큰 사랑을 받은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들며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집자 주>

    1

    김부식은 아들 김돈중을 의심했다. 내시로서 왕을 지척에서 보필하던 아들은 어느 날 갑자기 미친 것처럼 보였고 그건 가문의 재앙이었다. 부식은 개경 덕산방 저택으로 돈중을 불러들였다. 수많은 정적을 숙청하고 문벌귀족 중심의 고려 정치체제를 만들어낸 그였다. 아들이라고 봐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아버지의 다급한 호출을 받았음에도 김돈중은 느긋했다. 인종이 베푼 중광전 연회에서 진탕 술을 퍼마신 그는 새벽녘에야 본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부축하려 다가오는 노복들을 밀어제치고 중문을 지나던 그는 집안에 감도는 스산한 기운을 느꼈다. 겨울 추위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2

    부식은 정원 연못가에 중갑으로 무장한 채 서 있었다. 오른손에 쥔 장검의 날이 달빛을 반사해 돈중의 시야를 잠시 교란했다. 언제든 내리칠 자세로 칼을 들어 올린 부식이 말했다. 

    “무릎 꿇고 목을 내놓거라.” 

    빙그레 미소 지은 돈중이 뒷짐을 지며 물었다. 



    “부식아. 얼마 전 섣달 그믐날 일 때문이냐?” 

    경악한 부식은 온몸을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살얼음이 된 연못물 표면을 주먹으로 부수고 손바닥에 물을 담아 자신의 얼굴을 적신 돈중이 천천히 말했다. 

    “술기운이 가시질 않네. 어서 말을 해보래두. 그믐날 나례 때 벌어진 일 때문이냐 물었는데? 고작 그런 일로 아들을 죽여?” 

    부식이 칼을 놓치자 검신이 바닥 전돌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방한용 담비털 두건을 벗은 돈중이 부식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부자지간은 천륜인데 넌 가문 지킬 욕심으로 천륜까지 버리려는 것이냐?” 

    전율하던 부식이 급히 칼을 들어 돈중의 목을 겨눴다. 

    “실성했구나, 네 이놈. 그믐 나례 때부터 넌…넌….” 

    “다른 사람 같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부식이 칼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아들의 눈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단순한 광증이라면 약으로 고쳐볼 일이었지만 돈중의 눈동자는 오히려 예전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건 아들이면서도 아들이 아닌, 기괴하게 중첩된 인격체였다. 부식이 신음처럼 속삭였다. 

    “누구냐, 넌?”

    3

    정확히 보름 전인 1144년 섣달 그믐날, 음주가무 좋아하는 인종은 액을 쫓는다는 핑계로 강안전에서 종일 나례를 벌였다. 모든 궁중 의례가 그러했듯 나례의 마지막은 곡예꾼인 재예들의 공연과 군신(君臣)이 뒤섞인 광취난무로 이어졌다. 흥이 오른 인종은 측근인 젊은 내시들에게 불붙은 봉을 돌리는 재주를 부리도록 명했다. 

    문벌가 출신 자제들로 그러잖아도 안하무인이던 내시부 소속 젊은 문신들은 술기운을 빌려 주변 호위 무신들을 놀리기 시작했다. 행사장 곳곳에 무장한 채 시립해 있던 무신들은 울화통이 터졌지만 참고 또 참았다. 왕과 문신들이 시 짓고 춤출 때마다 옆에 서서 경호하며 남은 안주에 술 몇 잔 얻어 마시는 데 이골이 난 그들이었다. 하지만 돈중이 비틀대며 정중부에게 다가갔을 때 상황이 심각해졌다. 품계 높은 장군에게 혀 꼬부라진 말로 하대하던 돈중은 들고 있던 불붙은 봉을 상대 수염에 가져다댔다. 

    수염 타는 냄새가 조금씩 번져가자 당황한 인종이 돈중을 말리기 위해 옥좌 아래로 내려섰다. 낄낄대며 웃는 돈중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중부가 말했다. 

    “어린 놈이 무례하다. 네 부친 얼굴을 봐서 한 번 용서하마.” 

    만약 돈중이 즉시 물러섰다면 사건은 그럭저럭 무마됐을 것이다. 하지만 돈중의 희롱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열기로 뺨에 화상을 입으려는 순간 중부의 오른손이 크게 회전해 돈중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목뼈가 부러지지 않은 게 신기한 일이었다. 구석 기둥 아래 처박힌 돈중은 기절했고 치욕과 분노로 평정심을 잃은 중부는 상대의 목숨을 끊기 위해 의장용 검을 뽑아 들었다. 

    “정 장군. 멈추시오!” 

    인종이 둘 사이로 뛰어들자 이번엔 시립해 있던 무장들이 검을 뽑고 중부를 옹위했다. 정신이 번쩍 든 인종이 주변을 둘러봤지만 자신을 보호해줄 친위대인 응양군은 대내 지역 밖 황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오합지졸인 내시들로 중부에 맞서는 건 불가능했다. 허리를 굽힌 인종이 타이르듯 말했다. 

    “정 장군. 오늘은 나례하는 길일이오. 자, 지금부터 다 같이 합석해 술이나 마십시다.” 

    악공 중 한 명이 당비파를 희미하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칼을 도로 집어넣은 중부는 왕이 하사하는 잔을 연거푸 마셨고, 특별히 착석이 허락된 다른 무신들도 말없이 쌓인 분을 삭였다. 찰나 사이의 결심이었지만 그건 옳은 선택이었다. 궁궐에서 휴대하는 의장용 검엔 날이 없었고 강안전의 소동을 보고받은 상주국(上柱國) 김부식이 응양군을 몰고 곧바로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김부식은 정중부를 꿇리고 매질하려 했다. 그의 기세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았지만 인종이 완강히 반대했다. 이윽고 돈중의 만행을 전해 들은 부식은 체모가 크게 깎인 채 오히려 중부에게 사과해야 했다. 

    집으로 퇴청한 부식은 밤새 잠들지 못했다. 왕과 무신들 앞에서 망신당한 건 그렇다 쳐도 여전히 조정에 남아 있는 정적들에게 탄핵의 빌미를 줬으며 무신들의 영수 정중부와 척까지 졌으니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었다. 특히 천하의 상주국 아들을 두들겨 패 위세가 한껏 오른 정중부의 경우는 내 사람으로 만들지 못할 바엔 차라리 빨리 제거해버려야 했다. 울화로 부글부글 끓던 그는 아들 돈중이 미쳤거나 왕의 신임을 믿고 딴사람이 됐다고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4

    “내가 누구라고 말해주면 알아듣기는 하고?” 

    돈중은 빈정대는 말투로 속삭이며 부식이 겨눈 칼에 목을 갖다 댔다. 살짝 닿았지만 선혈이 배어났다. 돈중이 다시 말했다. 

    “베어. 어서 베어버려. 이딴 몸뚱이 이젠 흥미 잃었어.” 

    칼을 거둔 부식이 장탄식한 뒤 대청마루로 이동해 털썩 걸터앉았다. 

    “내 너를 잘못 키웠구나. 모진 풍파 다 이기고 애지중지 길렀건만 고작 아비에게 패악질이더냐?” 

    “누가 키워달랬나? 아니지. 뭐 하러 이딴 시시한 자식을 낳았나?” 

    “네 이놈! 그 입 다물고 썩 꺼지거라! 다시는 이 집 중문을 넘지 말거라!” 

    팔짱을 낀 돈중이 입맛을 크게 다시고 연못가로 가 담비털 두건을 집어 들었다. 

    “이보오, 늙은이. 사람은 바뀌는 거야. 내가 아직 예전 김돈중으로 보이나?” 

    부식은 그제야 상대의 얼굴을 다시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들 표정에선 혈연이 주는 온기라곤 찾아볼 길이 없었다. 

    “넌 내 아들 아니로구나. 그렇지? 언제 바뀐 것이냐?” 

    “언제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상주국 나으리.” 

    “그럼 뭐가 중하더냐?” 

    “어떻게! 어떻게가 중요하지. 육신이란 말이지. 말하자면 사다리 계단 같은 거거든. 밟고 지나가는 물건. 물건에 집착하면 어찌 될까? 똑같은 물건이 된다 이 말씀이야. 물건엔 쓸모가 있고 쓸모가 끝나면…그냥 사라져. 영생할 수 없지.” 

    “네 이놈. 무슨 허튼 소리를 지껄이느냐?” 

    “너희들이 그리 좋아하는 성불을 말한 거야. 성불? 그깟 거 별것 아니야. 몸뚱이를 벗어난 영혼으로 이 광막한 대우주를 떠돈다고 생각해봐. 하긴 너희가 깨달을 순 없겠지. 그냥 그런 게 있어.” 

    두건을 깊이 눌러쓴 돈중은 중문을 벗어나 대문을 향해 멀어져갔다. 아들이 사라진 정원에서 칼을 짚은 채 오래도록 묵상에 잠겨 있던 부식이 천천히 일어나 후원의 불당 쪽으로 걸었다. 왕이 대궐 안에 여러 채의 불전을 소유하듯 문신귀족 역시 각자 자기 집안에 불상을 모신 당실을 두고 있었다. 

    석가모니 불상을 마주한 부식은 저주받은 아들을 위해 기도했다. 평소 불심이 깊던 아들은 성불에 이르려다 실족해 마도(魔道)로 떨어진 수도승처럼 타락한 게 틀림없었다. 선업과 악업, 부처와 마군(魔君)의 차이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하기에 득도에 실패한 많은 승려가 요승으로 화해 민심을 해치기 일쑤였다. 바닥에 얼굴을 조아린 그가 속삭였다. 

    “부처시여. 소생이 저질러온 살생이 악업이 되었음을 이제 알았나이다. 부디 나머지 가족들만은 실성하지 않기를 간구하나이다.”

    5

    처음 블랙홀 이동에 성공했던 존재는 무한에 가까운 질량이 만들어낸 중력 지옥을 이겨내기 위해 육체성을 포기해야 했다. 마침내 음파와 유사한 파동 기억체로 변형돼 시공간을 자유롭게 차원 이동할 수 있게 된 그들은 불멸의 존재가 됐다. 시작도 끝도 없이 영겁의 시공을 떠돌던 그들 대부분은 기억으로만 구성된 영적인 삶에 안주했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았다. 일부는 영생과 더불어 육체까지 원했다. 

    육체적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자들은 자신의 파동을 가속시켜 작은 블랙홀을 만들어냄으로써 차원 이동자가 돼 전 우주로 퍼져나갔다. 파장 형태의 기억에 불과한 이동자가 다시 육체를 얻으려면 다른 행성 생명체의 몸을 숙주 삼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생명체에 잠입해 상대의 사유 파동을 자기에 맞춰 바꿔버리는 방식으로 육화했다. 

    차원 이동자들은 시간대를 옮겨 다니며 육체를 획득해 마음껏 새 삶을 향유했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미련 없이 다른 시간대나 행성으로 떠나버렸다. 문제는 그들의 지나친 쾌락주의가 우주의 생명 질서를 근원적으로 교란시킨다는 점이었다. 

    이동자들은 건강한 행성계를 망가뜨림으로써 종 다양성을 파괴했고 자신들이 들른 지역마다 에너지 쓰레기를 남김으로써 엔트로피를 증가시켜 은하계의 종말을 앞당겼다. 그들 중 일부는 죄의식 없이 핵전쟁을 일으키거나 운석을 행성에 충돌시킨 뒤 유유히 다른 별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6

    1151년 의종 5년, 사망 직전의 김부식은 자신이 지은 원찰인 관란사에 머물고 있었다. 개경 궁궐에서 말을 타고 한 식경이면 닿을 거리였지만 그는 절에서 홀로 죽고자 자식들을 부르지 않았다. 말년의 깨달음을 통해 불교에 더욱 침잠한 그는 부처가 만든 아늑한 별천지로 어서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육신에서 해방돼 적멸의 경지에 들 생각만 하면 부식의 가슴은 무상의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그의 희망이 송두리째 날아간 건 평소 말조차 섞지 않던 김돈중의 갑작스러운 출현 때문이었다. 돈중은 아무 예고 없이 절로 찾아와 부식이 몸져누워 있던 승방 문을 열어젖혔다. 

    “이런 쯧쯧. 마지막 인사는 나눠야지.” 

    머리맡에 앉은 돈중은 부식의 이마를 짚고 한참 뜸을 들이더니 속삭였다. 

    “오늘은 내 김돈중으로 온 것이니 염려하진 마셔. 그 정도 도리는 지킬 줄 안다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은 부식은 아들의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아들 얼굴을 제대로 바라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흐릿했다. 돈중의 눈빛 속에선 오래된 기억의 희미한 흔적, 자신이 업어 길렀던 아들의 자취가 어른거렸다. 기이한 노릇이었다. 분명 악귀의 삶을 살 것으로 예상됐던 돈중은 큰 탈 없이 궁궐 생활을 유지했고 새 임금과도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곤 자신이 임종을 앞둔 시점에 등장해 예전의 애틋했던 아들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 

    “무슨 꿍꿍이냐? 내 너의 정체를 이미 알아버린 것을.” 

    노여움 섞인 부식의 물음에 어깨를 움찔한 돈중이 대답했다. 

    “나의 정체라. 그래 뭐 알았다고 칩시다. 여기 온 건 아들을 잠깐 보여주고 싶었어. 봤나? 내가 조금 느슨하게 풀어줬었는데.” 

    “마도에 빠진 놈이 헛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또 성불 어쩌고 떠들 셈이냐? 난 이미 해탈의 묘경을 깨달았느니라. 곧 부처께서 장엄해놓으신 무염정토로 떠날 것이다.” 

    “정토? 부처가 설한 극락 말인가?” 

    “그러하다. 지옥과 천당의 갈림길에서 난 온 힘으로 발원해왔다. 거적 같은 사바세계의 육신을 버리고 영생하고자 불굴의 불심으로 이 절을 지었느니라.” 

    “영생이라…당신들은 영생 못 해. 아직도 모르겠나? 불멸은 복잡한 문제야. 육신을 소멸시키고 파동체가 돼야 하는데 너흰 아직 그 단계에 진입하지 못했어.”
     
    “필사의 불심으로 발원해 극락왕생을 못 한단 말이더냐?”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은 돈중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극락왕생은 그냥 비유야. 너희들은 단순한 윤회도 불가능해. 그 모든 것은 아주 먼 훗날에나 벌어질 일들이라고.” 

    “그럼 부처께서 거짓을 설하셨단 말이냐?” 

    “아니. 그건 아니지. 너무 성급하게 빨리 말한 거지. 너흰 아직 준비가 안 됐어.” 

    몸을 비스듬히 모로 눕힌 부식이 절망적인 음성으로 물었다. 

    “난 쉬지 않고 질문해왔다. 너란 놈의 진짜 정체가 뭔지. 악귀인 야차나 나찰인지 아니면 날 깨우쳐주려 몰래 찾아온 관음보살인지. 도대체 넌 뭐냐?” 

    부식의 눈을 살며시 감기며 돈중이 대답했다. 

    “난 머나먼 별에서 태어나 육합(六合) 대우주를 떠도는 나그네야. 너희들 말로 진인이나 도사 같은 거지. 그냥 그렇게 알고 편히 떠나셔. 그래도 진리를 깨닫고 삶을 끝내는 넌 행복한 거야.” 

    부식은 절명했고 그의 영혼의 파동은 잔잔히 물결치다 힘을 잃더니 이내 사라졌다.

    7

    무분별한 차원 이동은 우주 생태계를 교란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동자들이 방출하는 파동 에너지가 누적되며 기존 시공간에 위험한 섭동 현상을 초래했다. 고요한 영적 상태로 살던 무리들은 이 껄끄러운 간섭 파동들을 무시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불규칙적이고 돌발적인 작은 파동 에너지가 서로 부딪치며 만들어낸 섭동파는 주변 시공간과 공진(共振)될 경우 거대한 너울이 돼 쓰나미와 흡사한 재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영적 존재들은 육화를 통한 행성 간 차원 이동을 금지했다. 하지만 이미 전 우주로 퍼져나간 기존 차원 이동자 모두를 통제할 순 없었다. 그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복귀시켜야 했다. 대부분의 이동자는 순순히 복귀했지만 일부는 자기가 머물던 행성에 남아 생을 마치길 원했다. 그들은 영생을 포기하고 행성과 운명을 함께함으로써 자멸을 선택했다. 

    문제는 행성의 일부로 소멸되지 않고 끝내 복귀를 거부하는 자들이었다. 이들 이탈자는 은하들 사이로 끝없이 이동해가며 도주했다. 이들을 찾아내 복귀시키거나 아예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추격자가 등장한 게 그 무렵이었다. 추격자들은 이탈자들과 마찬가지로 행성 사이를 차원 이동하며 육화를 거듭했는데 그 과정에서 변절해 저 자신이 이탈자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이탈자와 추격자는 서로 뒤엉켜 혼전을 이루며 적대와 공생을 반복했고 덕분에 불모의 혹성에 문명이 꽃피기도 하고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행성이 하루아침에 산산조각나기도 했다.

    8

    1170년 경인년 8월, 음주가무에 빠져 살던 의종은 가까운 문무신료를 몰고 연복정에 행차했다. 연복정은 개경 동문인 광화문 밖 산대암 아래 만들어진 왕의 놀이터였다. 인공 연못에 배를 띄운 왕은 그날따라 유난히 취해 주변에 모질게 굴었고, 호위 무신들을 연못가에 정렬하게 한 뒤 화살을 쏘는 만행을 저질렀다. 만취해서 떨리는 손을 떠난 화살에 다친 무신은 없었지만 잔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날이 저물어도 환궁하지 않고 남쪽 흥왕사로 자리를 옮긴 의종은 밤을 새워가며 술판을 이어갔다. 본전 앞뜰에 나란히 세워진 두 황금탑은 타오르는 횃불 빛을 반사해 눈부시게 번쩍거렸고, 환관 왕광취가 주선한 산해진미가 탁자 위에 가득 채워졌다. 새벽녘 괴이하게 흥분한 왕은 평소답지 않게 호기를 부려 정중부에게 팔씨름을 제안했다. 정중히 거절한 중부는 대신 응양군 산원인 이고와 이의방을 불러 수박희를 시켰다. 왕 앞에서 날랜 발차기와 주먹 지르기를 시연한 두 하급 무관은 멧돼지 넓적다리를 상으로 받았다. 

    날이 밝아올 무렵 꾸벅꾸벅 조는 왕을 임시 침전으로 옮긴 환관들이 응양군 호위대를 주변에 배치하고 저마다 잠자리에 들었다. 김돈중이 도착한 건 그때였다. 집안일로 서경에 다녀온 돈중은 왕이 벌이는 좋은 잔치가 있다는 소식에 잠도 마다하고 단숨에 흥왕사로 말을 몰아온 참이었다. 이미 파장한 썰렁한 잔치자리를 둘러보던 그의 앞으로 중부가 다가왔다. 

    “김시랑께서 어인 일로 늦으셨소? 이런 자리엔 빠지지 않던 분이.” 

    중부의 기척에서 끼쳐오는 살기에 바싹 긴장한 돈중이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섰다. 그건 육화된 추격자가 내뿜는 불길한 조짐과 흡사했다. 평정을 되찾은 돈중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뭐 오랜만에 말도 타고 싶었고. 그런데 그거 아시오? 말을 타듯 사람 육신을 갈아타는 신마(神魔)가 개경에 산다던데?” 

    돈중은 상대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꼼꼼히 살피며 호신용 검에 손을 가져갔다. 말없이 돈중을 노려보던 중부가 대답했다. 

    “졸리면 승사로 들어가 주무시는 게 좋겠소. 내 지켜드리지.” 

    방향을 틀어 무신 숙소로 들어가는 상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돈중은 다시 말에 올라 절 인근의 역사로 내달렸다. 아무래도 흥왕사는 잠을 청할 자리가 아니었다.

    9

    해가 중천에 뜰 무렵 기상한 돈중은 왕이 파견한 군졸로부터 빨리 유흥에 합류하라는 명을 전달받았다. 이미 흥왕사를 출발한 의종은 더 남쪽인 경기 장단의 보현원을 향하고 있었다. 사찰인 보현원은 고려 왕의 은밀한 휴양지였고 의종은 그곳에서 기한을 두지 않고 유락의 끝을 볼 작정인 듯했다. 

    돈중은 망설였다. 정중부로부터 감지됐던 서늘한 살기가 몹시 께름칙했다. 그건 지구 생명체가 위험 앞에 직면해 느끼는 통상적 반응일 수 있었지만 추격자의 등장을 알리는 징후일 가능성도 있었다. 숙주의 육체가 위험에 직면해 보내오는 본능적 신호와 추격자의 진동파가 유발하는 미묘한 온도 변화는 서로 닮아 쉽게 분간키 어려웠다. 

    왕명을 거역할 수 없어 보현원을 향해 말을 몰던 돈중은 최대한 속도를 늦췄다. 당장 육체를 버리고 이동할 수 있었지만 지나친 예단일 수도 있었다. 김씨 문중을 향해 오랜 세월 발효된 정중부의 깊이를 가늠할 길 없는 적개심이 문제라면 더 머물며 즐겨보고도 싶었다. 그가 키득거리며 말 위에서 중얼거렸다. 

    “그래. 재미있겠어.”

    10

    보현원 인근에 도착한 의종은 술도 깰 겸 들판에 천막을 설치하고 휴식을 취했다. 더운 바람에 갈증이 일어난 왕이 술동이를 가져오게 했다. 눈치 빠른 내시 한뢰가 잔칫상을 준비하다 왕의 귓전에 속삭였다. 

    “무신들을 저리 놀려두시면 무예가 녹슬어버립니다요. 어제 했던 수박희를 시켜보시면 어떨지요?” 

    심심하던 의종은 응양위 시위대를 불러 수박희를 거행하라 명했다. 가뜩이나 더운 데다 갑주까지 걸치고 행군하던 무장들은 불만으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대장군 이소응이 부하들을 대신해 대결에 나섰다. 비쩍 마른 데다 나이도 꽤 있던 그는 젊은 장교의 발차기를 피하려다 뒤로 넘어졌고 지친 김에 기권하려 등을 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의종이 혀를 끌끌 찼다. 맥 빠진 경기에 부화가 난 한뢰가 왕을 대신해 소리쳤다. 

    “이 장군 지금 어딜 가나?” 

    어린 문신의 외침에 슬쩍 뒤돌아본 소응이 이를 무시하고 계속 걷자 한뢰가 뛰쳐나갔다. 소응은 무방비 상태로 한뢰의 발차기에 쓰러졌다. 한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일어나려는 상대의 뺨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소응은 한뢰에게 아버지뻘이었다. 치욕으로 어쩔 줄 모르는 그의 몸 위에 걸터앉아 한뢰가 외쳤다. 

    “이리 나약하니 식읍도 녹봉도 문신만 못한 거요. 자, 다시 제대로 싸워보시오.” 

    다시 일어난 소응은 젊은 장교와 재대결해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았다. 때리던 장교마저 눈물을 삼키며 그만 쓰러지시라 만류했지만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맞고 또 맞았다. 그건 대참극의 도화선이었다. 

    머리끝까지 격분한 산원 이고와 이의방은 반역이 일어났다는 거짓 밀지를 장단에 띄워 일대 치안을 담당하던 순검군을 소집했다. 호위대 군영을 몰래 이탈한 이고가 순검군을 인수해 보현원 입구에서 미리 잠복했고, 행렬에 남아 있던 이의방은 응양군 일부를 회유해 포섭했다. 문제는 정중부였다. 평소 온건하던 정중부가 나머지 정예병으로 자신들을 진압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다. 

    들판의 연회가 마무리될 무렵 이의방이 정중부를 찾아가 사실을 털어놓았다. 행군을 준비하던 중부는 한동안 말없이 이의방을 바라보기만 했다. 마침내 입을 연 그는 이상한 말을 했다. 

    “그대들 뜻에 따르겠지만 왕이 보현원에 들어갈 때까지만 기다려라. 김돈중이 오고 있다.”

    11

    보현원 입구에 이를 무렵 의종은 예정에 없던 순검군의 출현에 놀랐다. 그건 응양군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대열에 소란이 일었다. 선두에 있던 정중부가 말에서 내려 왕이 탄 가마 쪽을 뒤돌아봤다. 그의 시선은 행렬에 합류하려 가마 뒤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던 김돈중으로 옮겨갔다. 

    중부가 깃발을 들어 올리자 응양군 일부가 동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이 모습을 목격한 순검군들의 눈에 그것은 영락없는 반역 상황이었다. 순검군을 이끌고 곧바로 돌진해온 이고는 이의방의 반군에 가담해 응양군 정예병들을 차례로 베어나갔다. 피비린내 나는 학살의 와중에 의종은 한뢰의 호위를 받으며 보현원 안으로 도주했다. 

    막 말에서 내리려던 돈중은 아차 싶었다. 미끄러지듯 말에서 떨어져 내려와 바닥을 기기 시작한 그는 자신을 추적해오는 중부를 힐끗 확인했다. 때마침 방어진을 만들어 퇴각하는 응양군 무리를 만난 돈중은 그들 속에 휩쓸려 정신없이 죽을 자리를 벗어났다. 

    의종은 보현원 본당에 좌정하고 이고와 이의방을 맞이했다. 왕은 두 사람을 각각 응양군과 용호군의 중랑장에 제수하겠다고 제안했다. 파격적인 승급이었지만 둘의 야심은 그보다 훨씬 컸다. 왕이 앉은 좌석 밑에 숨어 있던 한뢰를 끌어낸 이고가 보란 듯이 목을 쳐 바닥에 집어던지자 비로소 사태가 명확해졌다. 벌벌 떨던 의종이 물었다. 

    “설마 역심을 품은 게냐? 난 왕이다. 과인이 있어야 너희도 있다.” 

    그때 당 안으로 들어서던 중부가 외쳤다. 

    “왕은 내가 포박해 개경으로 압송하겠다. 너희들은 어서 궁궐로 복귀해 문신들부터 제압하라!”

    12

    경인년 개경에서 무신들이 벌인 살육은 유례없는 것이었다. 궁성 남문인 승평문에서 도성의 중심지인 십자가(十字街)에 이르도록 주륙당한 시신이 산처럼 쌓였다. 그중 상당수는 문신이 아니라 평소 무신들과 사적으로 척을 졌던 애꿎은 사람들이었다. 많은 문신은 유력 무신에게 뇌물을 바쳐 목숨을 구하거나 절에 투탁해 중이 됐다. 의미 없는 살육은 그렇게 한동안 계속됐다. 

    난이 진정될 무렵, 살아남은 문신들은 김돈중의 이해할 수 없는 마지막 행적 때문에 깊은 의혹에 휩싸였다. 난이 벌어진 당일 그가 만약 경기 적성의 감악산으로 바로 도망치지 않고 개경으로 환궁해 태자를 앞세워 토벌군을 구성했다면 의종의 옥체를 보전함은 물론 아직 조직화되지 않았던 정중부의 반군을 손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 돈중은 그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렸다. 토벌군을 염려해 개경에 선뜻 진입하지 못하던 반군들은 돈중의 도주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오합지졸에서 순식간에 대군으로 불어나 궁궐을 점령할 수 있었다. 

    감악산으로 도피한 돈중의 마지막 삶 역시 매우 기이했다. 개경의 종자들을 불러들여 토굴집까지 지은 그는 추적해온 정중부에 의해 참수되기 직전까지 태연스레 산수 유람을 즐겼다. 더욱 희한한 건 정중부가 지척에 이르렀을 때 그가 보인 비굴한 태도였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돌변해 목숨을 구걸하던 그는 한낱 졸부로 생을 마쳤다. 

    정중부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난을 전후해 단호하고 용맹해 보였던 그는 자신의 칼에 묻은 돈중의 피를 닦은 직후 다른 사람이 됐다. 얼빠진 눈빛으로 부하들을 돌아본 그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냐? 김시랑은 왜 죽어 있느냐? 무슨 일이냐?”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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