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월한 이야기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 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차원 이동자’ 이야기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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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밖으로 나온 이토는 코코체프의 인도를 받으며 러시아 의장대 앞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평소보다 굼뜬 데다 조슈번 출신 사무라이 특유의 조심성마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긴장의 끈을 놓은 그는 혼잡한 역사 주변을 한 차례 빙 둘러보았다. 예정대로라면 조선인 암살자 한 명이 체포되고 나서 그는 안전한 러시아 군부대로 피신하게 될 터였다. 그게 정해진 역사의 각본이었다.2
대합실 구내 찻집에서 일어선 안중근은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고 있는 역사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엄할 줄 알았던 러시아군 경호 태세는 예정보다 늦어진 이토의 하차 탓에 느슨해져 있었다. 그는 최대한 느긋한 보폭을 유지하며 환영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 마침내 중근의 시야에 러시아군 사열단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일본 관료 무리가 포착됐다.환영 인파 행렬에서 슬쩍 빠져나온 중근은 일본인 행세를 하며 최대한 경호대 턱밑까지 다가가 자리 잡았다. 키가 큰 러시아 경호대 요원들은 바로 앞의 그를 무시한 채 물결치듯 일장기를 흔드는 군중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후 중근이 품 안에서 브라우닝 권총을 뽑아 들었을 때 그를 제지하는 러시아군은 없었다.
중근은 총알처럼 뛰쳐나갔다. 누가 이토인지 특정할 수 없었기에 그는 요인처럼 보이는 일본 관료 모두에게 총알 한 발씩을 발사했다. 가장 신속히, 가장 많은 인원의 경호를 받는 인물이 이토일 것이었다. 경호대가 중앙의 한 노신사를 에워싼 순간 중근은 달려드는 러시아군을 뿌리치고 몇 걸음 더 뛰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노신사 몸통을 향해 남은 두 발을 더 발사했다. 명사수인 그로서는 얼마든지 이토의 머리를 겨냥할 수 있었지만 실수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도 열어두고 싶지 않았다.
본디 그날은 이토가 죽는 날이 아니었다. 이토는 살아남아 일본제국 번영에 조금 더 기여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었다. 그 운명을 바꾼 건 이토의 몸으로 너무 성급히 육화해 들어갔던 이탈자였다. 이토는 그 당시 동북아에서 가장 안전한 숙주였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숙주이기도 했다. 이탈자가 열차 안 이토에게 숨어든 순간 하차 일정이 꽤 지연됐고, 그 정도 공백이면 추격자가 조선 최고의 저격수에게 육화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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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의 공격으로 거의 소멸당할 뻔한 이탈자는 부상한 이토 몸에서 튕겨져 나와 하얼빈 시내로 착지한 뒤 차원 이동했다. 숙주인 안중근으로부터 벗어나 곧바로 상대에게 따라붙은 추격자는 하얼빈 상공을 여러 차례 선회하다 파동흔이 남아 있는 지점에 내려앉았다.4
서울시청 앞 광장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성난 군중으로 넘쳐났다. 인파에 휩쓸려 다니며 구호를 외치던 대학생 공지훈은 갑자기 엄습한 두통에 비틀대다 대오를 이탈했다. 우연히 그를 발견한 대학 선배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훈아. 어디 아파?”
고개를 저은 지훈이 상대를 올려다보자 1987년 서울의 맑은 하늘이 눈부시게 시야 속으로 퍼져들었다. 무리 지어 움직이는 평범한 젊은이는 이탈자에게 가장 안전한 숙주였고, 군중의 물결로 혼란한 광장은 제법 훌륭한 은신처였다. 빨리 가속 능력을 회복해야 했던 이탈자는 숙주의 의식을 켜둔 채 당분간 상대가 움직이는 대로 놔두리라 결심했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천재들’ ‘논어 감각’‘매일같이 명심보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