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키우던 동네에 생긴 사유의 공간
폐교의 뼈대, 그대로 남겨 완성한 미학
도시 안의 빈터, 학교 운동장을 정원으로
인문, 철학, 사회과학 892권이 말하는 것
통제된 공간 아닌, 사람 믿고 열어둔 공간

수원시 평생학습관 일부를 개조해 만든 수원 지관서가는 이제 많은 시민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서울 광화문에서 수원행 광역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가면 우만동(牛滿洞)이라는 동네가 나온다. 한자 뜻 그대로 소를 많이 키웠던 마을이다. 소가 있던 들판은 조선 정조가 팔달산 동쪽에 화성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그 남쪽 외곽의 배후 생활권이 됐다. 화려한 신도시의 중심부가 아니라, 그 가장자리에 붙어 있던 평범한 동네다.
그 평범하디평범한 동네가 요즘 수원 시민들과 젊은이들이 매일 100명 이상 찾아드는 핫플레이스가 되고 있다. 지난해 4월 문을 연 수원 지관서가 덕분이다. 지관(止觀), 멈춰 바라본다는 의미의 이 공간은 도서관도 아니고 카페도 아니고 강연장도 아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가 모두 있다. 서가에 비치된 책을 꺼내 읽어도 되고,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눠도 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이 공간에 들어서면 ‘멈춤’이라는 사유적 언어가 실제 건물로 구현됐다는 인상을 받는다. 폐교된 중학교의 콘크리트 기둥을 중심으로 자갈 정원과 서가와 곡선형 소파들이 놓여 있다. 낡음과 새것, 거칢과 따뜻함이 하나의 공간 안에 있다.

수원 지관서가 외부.
폐교의 뼈대, 그대로 남기다
건물 외관은 거칠다. 굵은 노출콘크리트 기둥들이 투박하게 서 있고, 그 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손바닥을 대면 거친 돌 표면이 느껴진다.흔히 건물을 리모델링할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새 마감재로 덮어 감추는 것인데, 이 공간은 거꾸로 했다. 골격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드러낸 것이다. 콘크리트 기둥과 보(梁)가 실내에도 그대로 남아 있고, 천장은 마감재 없이 구조물이 드러나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연무중학교 교사(校舍)였다. 전성기에는 36학급이 들어찼을 정도로 큰 학교였다. 수원 원도심이 팽창하던 시절이었다. 그땐 골목마다 아이들이 넘쳤고, 운동장에는 늘 까까머리 중학생들의 함성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시는 변했다. 사람들은 신도시로 빠져나갔고, 원 도심은 비어갔다. 학생 수가 급감한 연무중학교는 2008년 2월 26회 졸업생을 끝으로 문을 닫고 광교신도시로 자리를 옮겼다.
학교가 떠난 뒤 건물은 한동안 도심 속 골칫거리였다. 수원시는 폐교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기로 했다. 지자체가 폐교를 매입해 활용한 전국 최초 사례였다. 평생학습관으로 이름을 바꾼 교실들은 어르신들의 강의실이 됐다. 공간은 살아남았지만 뭔가 허전했다. 배움의 공간이 되기는 했어도, 머무는 공간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 4월 이 건물 1층 일부에 지관서가가 들어오면서 달라졌다.
수원시 양용준 평생학습과장은 “주로 어르신들만 드나들던 공간에 젊은이들이 모이고, 시민들이 여기저기 앉아 책을 읽고 차를 마시며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건물에 활기가 생겼다”고 했다. 한때 학교였던 공간이 평생학습관이 됐다가, 이제는 누구나 잠시 멈출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이 됐다. 한 건물이 시대마다 다른 쓸모를 얻으며 천천히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폐교 운동장을 시민이 함께 누릴 수 있는 정원으로 바꿨다.
도시 안의 빈터, 학교 운동장을 정원으로
건물 밖으로 나오면 뜻밖의 풍경이 펼쳐진다. 콘크리트 기둥들이 격자로 나눠놓은 바닥에 자갈과 돌로 꾸며진 작은 공원이 있다. 학교 운동장이었던 자리를 공원으로 만든 것이다. 작은 나무들이 삼각 버팀목에 받쳐져 서 있고, 회색 자갈 위에는 이끼류 식물과 바위가 놓여 있다.정원에는 흰 의자들이 놓여 있다. 몇몇 사람이 커피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다. 대화를 나누는 이도 있고, 혼자 나무를 바라보는 이도 있다. 도심 한복판인데도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도시 안에 이런 빈터가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내부로 들어서면 공간이 여러 겹으로 나뉜다. 입구 쪽 1층은 소파형 좌석이 놓인 라운지다. 회색·청록·분홍·베이지 색의 곡선 패브릭 소파가 흩어져 있고, 사람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앉아 있다. 정면 통유리 너머로 야외 정원이 보인다. 총면적 954.78㎡의 복층 구조다. 라운지에서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면 긴 바 형식으로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는 열람 공간이 나온다.
옛날에 교실들이 줄지어 있었을 복도 공간은 묘한 긴장감을 준다. 천장은 낮고 조명은 따뜻한 원목 색조다. 창이 없는데도 답답하지 않다. 오히려 좁아서 집중하게 만든다는 느낌이다.
서가는 입구 쪽과 내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총 892권. 한칸 한칸 조명이 들어온 서랍장형 서가에 책들이 꽂혀 있다. 인문학·철학·문학·사회과학이 섞여 있고, ‘지혜의 나무(Tree of Wisdom’s Collection)’라는 큐레이션 섹션도 따로 있다. 재단법인 지관이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와 협력해 ‘행복’을 테마로 책을 골랐다고 한다.
책장을 들여다보면 의외의 조합이 보인다. 유발 하라리 옆에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있고, ‘감각자본주의론’ 옆에 BTS 관련 서적과 한국 소설, 시집이 꽂혀 있다. 니체와 공자가 있고, 빅터 프랭클과 알랭 드 보통이 있다. 행복이라는 키워드 아래 동서양 사유의 기록이 한 서가에 모인 것이다.
독자는 자유롭게 아무 책이나 골라 읽을 수 있는데 카운터에는 파손되거나 분실된 책을 신고해 달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고, 그 옆에 책에 낙서하지 말아달라는 문구도 이어진다. 공공 서가를 운영하는 일의 현실적 어려움이 담담하게 적혀 있다.
수원 지관서가는 대기업인 SK케미칼이 리모델링 비용 12억 원을 전액 기부하고, 수원시가 내준 공간에 재단법인 지관이 콘텐츠를 기획한 복합 협력 모델이다.

지관서가 2층은 시민이 외부 정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길 기회를 제공한다.
빠른 것이 선(善)이 된 시대, 멈춤 허락하는 공간
SK케미칼은 현재 SK그룹의 모태라고 할 수 있으며, 수원은 그 모태가 만들어진 땅이다. 1953년,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창업주 최종건이 수원 평동의 선경직물 공장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직물을 짜려면 원사가 필요했고, 원사 부족을 해결하려고 수원 정자동 논밭을 사들여 1966년 선경화섬을 세웠다. 아세테이트 실을 뽑던 그 공장이 훗날 화학소재 회사로, 다시 바이오제약 회사로 변신해 오늘의 SK케미칼이 됐다. 수원은 그 시작이었다.SK는 이곳에서 출발해 서울로, 울산으로, 세계로 뻗어나갔다는 점에서 수원은 SK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70년이 지나 이번엔 공장이 아니라 서가를 들고 시민을 찾은 셈이다.
SK그룹은 수원뿐 아니라 전국에 지관서가를 설치 운영하고 있다. 울산에 6곳, 안동·여주·울진에 각 1곳, 수원이 10번째다. 돈을 벌었던 자리에 사유의 공간을 돌려주는 방식으로 지역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지관서가 백서는 이렇게 밝힌다. “빠른 것이 선(善)이 되어버린 시대에, 멈추는 일을 허락하는 공간”.
AI가 모든 것을 빠르게 처리하는 시대일수록 멈추는 훈련이 더 절실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AI시대에 대기업이 ‘멈춤’을 사회 공헌의 주제로 선택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빠름을 파는 기업이 느림의 공간을 짓는 역설이야말로 지관서가라는 공간이 지닌 가장 현대적인 면 아닐까.
전국 10개 지관서가 중 규모가 가장 큰 수원 지관서가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사유의 방식과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 온라인 강의는 무려 1만1796명이 수강했다. 일주일 내내 시민 독서회, 인문학 강좌, 명상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한때 학교였던 이 공간은 이제 모두를 위한 배움과 쉼의 공간으로 한때 도심의 골칫거리였던 폐교가 사유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은 학령인구 감소로 문을 닫는 학교를 가진 전국의 지자체들이 참고로 할 만한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도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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