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호

한 글자로 본 중국 | 허베이성

베이징을 위한 베이징에 의한

冀 - ‘800년 수도권’의 비애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입력2016-08-23 10:17:34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허베이(河北)성은 중원의 젖줄 황하의 북쪽임을 뜻한다. 남부엔 드넓은 기중(冀中)평원이 펼쳐지고 북부의 산과 고원은 내몽골의 고원과 이어진다. 중원과 북방이 만나는 땅 허베이는 수도 베이징을 위해 존재하는 슬픈 운명을 살았다.
    “외국인은 우리 숙소에 머물 수 없어요.”

    “이름이 ‘국제’인데 외국인이 머물 수 없다니요?”

    “개업한 지 얼마 안 돼 아직 정부의 외국인 체류 허용 허가가 안 났어요.”

    허베이 산해관 ‘국제’ 숙소의 주인은 ‘국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황당한 소리를 했다. 외국인과 내국인 요금에 차등을 둬 관광수입을 올리려는 꼼수는 아닌 듯했다. 같은 중국인이라도 티베트, 신장, 홍콩, 마카오, 대만 사람 역시 머물 수 없단다. 수도 베이징이 지척이라 베이징에 잠입하려는 불순분자(?)를 막으려는 의도로 읽혔다.

    명나라 관료 기순이 산해관에 남긴 글을 보고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구나’ 싶어 쓴웃음이 났다.



    “산해관은 베이징에서 가까운 동북지역의 중진(重鎭)이며 화이(華夷)를 구분하는 곳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을 살펴 간사하고 포악한 자를 막고 강역을 굳게 하는 곳이다.”

    수도 베이징을 지키고 보필하는 수도권 도시답다.

    허베이(河北)성의 약자는 바랄 ‘기(冀)’자다. 허베이는 중원의 젖줄 황하의 북쪽임을 뜻한다. 허베이의 남부엔 드넓은 기중(冀中)평원이 펼쳐지고, 북부의 산과 고원은 내몽골의 고원과 이어진다.

    허베이는 이렇게 중원과 북방이 만나는 땅이다. 허베이의 약칭인 ‘기(冀)’를 풀어보면 ‘북방 유목민족과 중원 농경민족이 함께(共) 살아가는 북녘(北) 땅(田)’이 된다. 중국어로 기방(冀方)은 중국 북방을 뜻하니, ‘기(冀)’ 자를 이 ‘이민족(異)이 사는 북방(北)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리라.  



    三祖聖地

    중원의 농경민과 북방의 유목민이 부딪치는 곳이다 보니, 허베이에는 예부터 전쟁이 많았다. 중국의 고대 신화에서 황제는 판천(阪泉)에서 염제를 격파하고, 탁록(涿鹿)에서 치우를 꺾었다. 두 격전의 현장인 탁록현은 중국의 세 시조, 황제·염제·치우의 자취가 깃들었다 해서 삼조성지(三祖聖地)로 불린다.

    우임금은 치수 사업을 하며 천하를 아홉 주(九州)로 나눴다. 이때 기주(冀州)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당시 기주는 주로 산시(山西)성의 영역이라 오늘의 영역과는 크게 달랐고, 한나라 이후 허베이의 비중이 높아졌다.

    춘추전국시대 허베이 남부는 북방의 강자 진(晉)나라의 영역이었고, 북부는 연(燕)나라 영역이었다. 진이 셋으로 쪼개졌을 때 조(趙)나라는 허베이의 한단(邯鄲)을 수도로 삼았다. 촌사람이 한단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어설프게 따라 하다 걷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고사성어 ‘한단지보(邯鄲之步)’는 한단이 얼마나 풍요롭고 세련된 문화의 중심지였는지를 짐작게 한다.

    진(晉)·조(趙)부터 중원에 비해 이민족의 색채가 짙었으니 그보다 더 북쪽에 있던 연나라는 더더욱 이질적이었다. 먼 훗날 연의 자객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암살하려 할 때, 조수인 진무양이 겁을 먹고 벌벌 떠는 바람에 산통을 깼다. 형가는 진시황의 의심을 풀기 위해 이렇게 변명했다.  

    “북방 오랑캐 땅의 천한 사람인지라 천자를 뵌 적이 없어서 떨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연이 전국시대 말기까지 오랑캐 취급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起伏의 역사

    연의 역사는 기복이 심했다. 연의 명군 소왕(昭王)이 즉위하기 전 연의 정치는 한 편의 막장 드라마였다. 오죽하면 반전주의자인 맹자마저 제나라 선왕에게 연을 쳐 연의 백성들을 구하라고 했을까. 제나라 선왕은 과연 두 달도 안 되는 사이 연을 정복했지만 연의 피폐한 상황을 구제하지는 않았다. 연의 백성들이 반기를 들었을 때 제 선왕이 ‘한 사람도 죽인 적 없는데 왜 반란을 일으키는지 모르겠다’며 분노하자, 신하 순우곤은 제 선왕의 정치가 실패했음을 일깨워줬다.

    “왕께서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시나, 사람이란 굶어도 죽고 얼어도 죽으니 굳이 칼날로만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토록 혼란한 상황에서 즉위한 소왕은 널리 인재를 등용하고 힘을 기른 후 제(齊)를 쳤다. 이때, 연의 명장 악의는 제의 70여 개 성을 함락시켰다. 동방의 강대국 제는 단 2개의 성만 남긴 채 5년간 사실상 멸망 상태를 유지했다. 연 소왕이 등용한 또 한 명의 명장 진개(秦開)는 동호(東胡)를 공격해 만주의 1000여 리 영토를 얻었다.

    그러나 소왕이 죽자마자 연의 전성기는 거짓말처럼 끝난다. 악의를 시기한 혜왕이 악의를 몰아내자 제는 순식간에 전 영토를 수복하고, 연은 다시 약소국이 됐다. 이후 연의 행보는 한심했다.

    진(秦)이 장평대전에서 조(趙)의 40만 대군을 몰살하자 연은 조에 사신을 보내 위로하는 한편 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사신이 “조의 장정들은 모두 장평에서 죽었고, 그 고아들은 아직 자라지 않았으니 칠 수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연은 이익에 눈이 멀어 조를 침공했다. 조는 이미 장정의 대부분을 잃은 데다 5대 1의 전력으로 위태롭게 싸워야 했지만, 조의 명장 염파는 연을 격파하고 수도 계(薊, 베이징)를 포위했다. 연은 5개 성을 내주고서야 휴전할 수 있었다.

    나중에 염파가 실각하고 방난이 후임자가 되자, 연의 장수 극신은 “방난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다”고 큰소리치다가 방난에게 전사하고 2만 군사를 빼앗겼다. 연은 신의를 잃었고, 이익은커녕 손해만 보며 나라가 기울어갔다.

    참새가 죽어도 짹한다던가. 연은 멸망의 위기 앞에서 진시황 암살을 꾀했다. 진(秦)이 본격적으로 사방을 정복하며 천하통일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 ‘진이 연을 치는 것은 화로의 숯불이 가벼운 기러기 깃털 하나를 태우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연의 태자 단이 호걸 형가에게 진시황 암살을 의뢰하자 형가는 비장하게 노래하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바람소리는 소슬하고 역수는 차갑구나! 사나이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협객의 아이콘

    형가는 안타깝게도 진시황 암살에 실패하고 역사를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형가는 칼 한 자루로 강포한 권력과 맞서는 ‘협객(俠客)의 아이콘’이 됐고, 그의 노래는 ‘비분강개의 노래’로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최약체로서 최강의 심장을 대담하게 노린 허베이는 ‘비분강개하는 장사의 고향’으로 명성을 떨쳤다.

    허베이 협객은 후한 말 난세에 빛을 발했다. 일세의 효웅(梟雄)인 유비와 연인(燕人) 장비는 탁현 출신이고, 조운은 상산(常山) 출신이다. 굳센 의리로 똘똘 뭉친 이들은 맨 몸으로 당대의 군웅과 치열히 싸웠고 끝내는 나라를 연다.

    다만 ‘흙수저’이던 이들이 명성을 떨치게 되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고, 허베이를 지배한 영웅은 ‘금수저’인 원소였다. 원소는 후한 말 최고의 명문인 원씨 가문의 수장인 데다 자신의 능력도 뛰어나 당대 군웅 중 으뜸이었다. 그런 원소가 근거지로 삼은 곳이 허베이다. 청년 원소는 절친한 친구인 조조에게 자신의 야망을 밝혔다.

    “나는 허베이를 근거로 하여, 연(燕)과 대(代)로 울타리를 삼고, 북으로 사막에 흩어져 사는 무리까지 아우른 뒤에 다시 남쪽으로 천하를 다툴 작정이네.”

    그러자 조조는 당차게 말했다.

    “나는 천하의 슬기와 힘을 모아 도리에 맞게 다스려 가면 안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네. 하필 땅의 위치나 넓이겠는가.”

    말은 통쾌했지만, 원소는 확실히 당대 최강의 군벌이었다. 기주에서 착실히 힘을 기른 원소는 물량과 보급에서 조조군을 압도했다. 그러나 원소의 참모 허유의 기밀 정보 덕분에 조조는 원소의 보급을 끊고 승리한다. 승전 후 원소 진영에서 조조의 부하들이 원소와 내통한 문건함이 나오자 조조는 문서함을 열어보지도 않고 태워버리며 말했다.

    “원소가 강성할 때에는 나조차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마음이 흔들렸거늘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겠느냐?”

    그만큼 조조의 승리는 본인도 믿기 힘든 기적이었다. 삼국지 3대 대전 중 하나인 관도대전에서 이긴 조조는 원소 대신 중국의 최강자로 자리를 굳혔다.



    안에서 무너진 산해관

    중국의 역사는 중원 중심의 역사다. 난세가 끝나자 허베이는 동북 변방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북방 이민족이 강성해지면 중원을 뒤흔들 거라던 곽가의 예측은 5호16국과 요·금·원 등 유목민족의 제국을 통해 실현된다.

    북방 이민족들이 패권을 잡자 허베이는 매우 중요해진다. 허베이가 유목민족의 근거지인 북방과 가깝고, 한족문화권으로서 경제와 문화가 발달했으며, 남방 공략의 전초기지였기 때문이다. 원나라 이후 현재까지 800년 동안 줄곧 베이징은 천하의 중심이 됐고, 자연스레 허베이는 ‘800년 수도권’이었다.

    수도는 나라의 심장이다. 단 한순간도 기능이 멎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수도권 허베이는 수도 베이징의 방패가 돼야 했다. 산과 바다를 연결하며 북방 유목민으로부터 베이징을 보호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였던 천하제일관 산해관(天下第一關 山海關)이 단적인 예다. 산해관은 동쪽으로는 태양을 맞이하고(旭迎), 서쪽으로 베이징에 조배를 드리며(京朝), 남쪽으로 바다와 통하며(通海), 북으로 첩첩이 이어진 산을 바라보는(巒觀) 요충지다. 연암 박지원은 산해관을 보며 찬탄했다.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는 중국 크기를 모르고, 산해관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제도를 모르며, 산해관 밖의 장대(將臺)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과 높음을 모른다.”

    한창 떠오르는 태양 같던 기세의 청나라도 자력으로 산해관을 뚫지 못했다. 산해관이 청의 맹공을 버티는 동안, 산시(陝西)의 풍운아 이자성은 민란을 일으키고 베이징을 함락시켰다. 어이없게도 이자성은 베이징을 불 지르고 약탈해 민심을 잃었다.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는 관문을 열고 청군을 맞아들인 후 이자성에게 패배를 안겼다. 산해관을 넘은 청군은 중국 전역을 석권한다. ‘위엄이 중국과 오랑캐를 누른다(威鎭華夷)’던 산해관은 허무하게도 내부에서 무너졌다.

    청이 중국을 지배하자 신하들은 장성을 수리해 베이징을 보호하자고 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반대했다.

    “역대 중국 왕조 모두 백성을 고생시켜가며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결국 내란이 일어나 망했으니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모두가 합심하면 견고한 성과 같이 허물어지지 않는다(衆志成城))는 말처럼 덕을 쌓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바로 국토 수호라는 주장이었다. 영명한 황제 강희제는 아름다운 대의명분과 실질적인 대안을 조화시켰다.

    박지원이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남겨 우리에게도 친숙한 열하의 피서산장(避暑山莊)이 바로 강희제의 만리장성이다. 피서산장은 청나라 황제들이 시원한 산바람을 쐬며 피서를 즐기던 곳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초기 피서산장은 국제외교와 합동 군사훈련의 중심지였다. 박지원은 피서산장을 보며 말했다.


    다민족 연합국

    “지형적으로 험하고 중요한 곳을 차지해 몽골의 숨통을 죌 수 있는 변방 북쪽의 깊숙한 곳이므로, 이름은 비록 피서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천자 자신이 나서서 오랑캐를 막으려는 속셈이다.”

    강희제는 48번이나 몸소 사냥에 참가했다. 이때의 사냥은 유희가 아닌 군사훈련이라 규율을 강조했다.

    “1년에 두 차례 사냥을 하는 것은 오로지 무술을 연마하기 위함이니 병력 동원과 다를 바 없으며, 사냥터의 규율 또한 엄정해야 한다.”

    비록 황족이라도 규율을 지키지 않고 멋대로 움직이면 처벌을 내렸다. 강희제가 움직이면 수많은 왕공대신이 함께 움직였고, 몽골족 회족 티베트족 등 다양한 민족 역시 함께 사냥에 참가했다. 170개 천막은 내성이 되고, 250개 천막은 외성이 되는 장관이 펼쳐졌다. 사냥은 북방 유목민족에게 청나라의 국력을 과시하는 다국적 합동 군사훈련인 동시에 이곳으로 찾아온 북방인들과 교분을 나누는 친선 외교 무대였다.

    강희제는 청에 충성하는 한 타민족의 다양한 문화를 존중했다. 현판에 만주어, 중국어, 몽골어, 티베트어 등 4개 국어를 병기해 청이 다민족 연합국임을 알렸고, 라마교를 존중해 몽골족과 티베트족의 환심을 샀다. 피서산장엔 중국식 별궁·원림(苑林)과 유목민족의 천막이 공존했으며, 산장 주변에 티베트의 포탈라궁을 본뜬 보타종승지묘 등 외팔묘(外八廟)를 세우고 라마승을 국사(國師)로 대접했다.

    이처럼 피서산장은 정치, 군사, 외교, 종교, 문화의 총화였다. 그러나 중국의 화려함 이면에는 항상 민초의 고통이 있다. 열하가 흐르는 청더(承德)는 원래 산골짜기 작은 마을인데 이 곳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피서산장이 차지했다. 황제의 산장행이 잦아지자 산장 주변에는 황제를 모시는 귀족, 관료, 몽골의 왕공 귀족이 살 저택이 들어섰다. 자연스레 현지 주민들은 마을 중심에서 밀려나 좁고 복작복작한 빈민굴에서 살아야 했다.



    直隸의 서글픈 운명

    건륭제는 총명하긴 했지만 사치향락을 좋아했고, 강희제만큼 민초의 고통을 헤아리지는 않았다. 더욱이 청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의 황제라 자만심이 지나쳤다. 산업혁명에 성공하고 세계 최강을 향해 달려가던 영국의 대사 매카트니가 1793년 건륭제를 만난 후 통상교역을 요청하자 건륭제는 “천조(天朝)에는 없는 것이 없어 교역 따위를 할 필요가 없다”며 거절했다.

    매카트니는 청에 대해 날카로운 비평을 남겼다.

    “청 제국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일류 전함에 비유할 수 있다. 과거 150여 년 동안 이 전함이 침몰하지 않은 것은 능력 있고 경각심이 강한 일부 군관들이 지탱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갑판 위에서 지휘를 맡을 인재가 사라진다면 더 이상 기율과 안전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매카트니의 예언은 50년도 안 돼 1840년 아편전쟁으로 실현됐고, 다시 20년도 안 돼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킨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베이징을 점령한다. 이때 함풍제는 피서산장으로 도망쳤다. 게다가 외교와 전쟁을 잊고 음악과 연극에 빠져들며 현실도피를 하다가 피서산장에서 생을 마감한다. 1912년 청은 멸망했고, 1933년 3만의 일본군은 열하를 접수해 피서산장을 일본군의 대본영으로 사용했다.

    수도는 국가의 중심이다. 따라서 수도권이라는 말은 제법 영예롭게 들린다. 허베이는 명나라 이후 ‘수도 베이징에 직접 예속된다’는 의미로 ‘직예(直隸)’라고 불렸다. 직예. 그 말 속에는 아픔이 배어 있다. 필자가 잘 아는 허베이 친구는 ‘허베이는 가난하다’고 말한다. 나는 허베이 친구의 말에 의아해 질문했다.

    “허베이는 중국의 4대 직할시 중 2개를 품고 있어. 게다가 그 2개는 중국의 수도 베이징, 1인당 GDP가 중국에서 가장 높은 톈진이야. 그런데 왜 허베이는 가난한 거지?”

    “허베이는 그 2개의 도시에 너무 많은 걸 줬거든.”



    허베이 중부 도시 바오딩(保定)은 ‘베이징을 보호해 천하를 안정시키는 곳’이라는 뜻이다. 천하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인 산해관은 북방 유목민으로부터 베이징을 보호하는 곳이었다. 청나라 황제들이 피서산장에서 군사훈련과 외교활동을 하며 휴식을 취한 것처럼, 중국 공산당 수뇌부는 매년 여름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휴양을 즐기며 은밀히 회의를 연다. 그 유명한 베이다이허 회의다.

    결국 허베이는 베이징의 방패이며, 피서지이고, ‘빵셔틀’이다. 허베이는 스스로를 위해 존재한다기보다 베이징을 위해 존재했기에, 허베이인은 베이징에 대해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품고 있다.



    대지진의 추악한 진실

    탕산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에도 베이징에 예속된 수도권의 비애는 묻어난다. 1976년 7월 28일 새벽 3시 42분, 허베이 탕산(唐山)에서 리히터 규모 7.5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한순간에 160만 인구 중 24만여 명이 죽고, 16만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시 대부분이 파괴됐기 때문에 이 수치조차 축소·은폐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정부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었다고 밝혔지만, 국가지진국의 일부 과학자들은 이미 7월 말에서 8월 초에 탕산 일대에 큰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1976년 당시 중국에서는 저우언라이, 주더 등 걸출한 인물들이 세상을 떠났고, ‘위대한 영도자’ 마오쩌둥  역시 곧 꺼질 생명을 힘겹게 붙들고 있었다. 4인방과 화궈펑은 후계자 자리를 두고 암투를 벌였다.

    이런 와중에 탕산 대지진을 예측한 보고에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탕산 인근의 칭룽(靑龍)현 현장(懸長)은 주민들에게 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고 알린 뒤 민병대를 조직해 순찰을 돌게 하고 지진 대처방법을 교육했다. 그 결과 7000여 채의 건물이 완전히 붕괴한 상황에서도 사망자는 1명에 불과했다. 그 1명도 심장마비로 사망해 지진이 직접적 사인은 아니었다. 칭룽현 현장은 인민영웅이 돼야 마땅하지만, 정부는 오히려 이 사실을 오랫동안 은폐했다. 칭룽현의 사례가 밝혀지면 지진 자체는 천재지변이지만 지진으로 인한 대참사는 인재(人災)임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위정자들이 탕산 대지진의 경고를 무시하고 넘어간 이유는 탕산이 중요하지 않은 도시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매우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이리라. 당시 탕산은 중국 면적의 0.001%, 인구의 0.01%에 불과했지만, GDP의 10%를 생산하는 핵심 공업도시였다. 중국 석탄 생산량의 5%를 차지했고, 전력 생산·철강·자동차·기계·시멘트·방직·도자기 등 수많은 기간산업이 있었다.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를 지진 때문에 베이징의 공장인 탕산 가동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었을 때, 탕산인들은 비로소 마음껏 울 수 있었다. 부모형제를 잃고도 꾹꾹 눌러온 통곡을 한 달여 만에 터뜨릴 수 있었다. 10월 6일 화궈펑은 4인방을 체포하며 탕산 대지진을 중요한 명분으로 내세웠다.

    왕리보(王利波) 감독의 다큐멘터리 ‘얀마이(掩埋, 매장)’는 국가지진국 과학자들이 탕산 대지진의 조짐을 지속적으로 보고했는데도 정부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음을 고발한다.  

    사람보다 돈이 우선되는 사회, 민초의 고통보다 과시적 성과를 우선하는 사회.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다. 산해관 장성(長城)박물관은 만리장성을 극찬한다. 만리장성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정신의 물질적 상징으로 문화교류 ·민족융합의 장이었고, 고대 노동인민의 피와 땀과 지혜의 결정체로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약속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찬사가 지나쳐 궤변이 됐다. 만리장성은 한족과 북방 유목민과의 전쟁 때문에 탄생했고, 민초들의 피눈물로 지어진 괴물이다. 민초들은 만리타향에서 만리장성을 짓다 죽고, 싸우다 죽어야 했다. 상건은 애달피 노래하며 허무하게 죽어간 이들의 원혼을 위로했다.

    “구르는 해골들은 장성의 병졸들인데, 해 저무는 모래밭에 재가 되어 흩날리네.”



    민초의 피눈물

    맹강녀는 머나먼 산둥성에서 산해관까지 노역으로 끌려온 남편을 찾아왔으나, 남편은 이미 공사 중에 죽었다. 맹강녀가 통곡하자 장성이 돌연 무너지며 엄청난 수의 백골이 쏟아져 나왔다. 공사 중 죽은 인부들이었다. 맹강녀는 백골이 사랑하는 사람의 피를 빨아들인다는 말을 듣고, 손가락을 깨물어 백골에 일일이 피를 떨어뜨려 마침내 남편의 백골을 찾았다. 맹강녀는 고향에 돌아와 남편을 장사 지낸 뒤 남편의 무덤 앞에서 굶어 죽는다.

    중국 민초들은 맹강녀 설화를 통해 노역의 고통, 가족이 파괴되는 슬픔, 위정자에 대한 분노를 이야기했다. 강희제는 민초들의 경고를 받아들여 만리장성 대신 피서산장을 국방과 외교의 대안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 정부는 만리장성으로 이데올로기를 선전한다. 장성에 얽힌 대립과 적대의 역사를 무시하고 민족 친목과 융합의 장이라고 주장한다. ‘옛 전쟁들은 하나의 중화민족을 만들기 위한 필연적 내전’이라며 오늘의 정치적 요구에 따라 과거를 재단한다. 장성을 짓느라 희생된 민초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고 위대한 성과만 강조한다. 너희 인민들도 위대한 중화민족의 번영을 위해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이나 하라는 소리다.

    산해관 장성박물관은 중국 정신세계의 명백한 퇴행을 보여준다. 옛 시인만큼 진실하지도 않고, 맹강녀와 민초의 원혼을 위로하지도 않으며, 강희제의 애민(愛民)정신도 없다. 중국이 이처럼 인민을 외면하고 ‘위대한 성과’에만 집착하는 한 중국은 부강한 나라는 될 수 있어도 아름다운 나라는 될 수 없다.



    김 용 한
    ● 1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