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에서 왜군 시신 수습해준 진도 사람들
한국인들이 펼친 교토 코 무덤 위령제
코 무덤이 귀 무덤으로 둔갑한 이유
왜덕산은 적군을 생명으로 품은 휴머니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덤 옆에 있는 코 무덤은 왜군들의 잔학상을 그대로 증언해주는 역사유적이다. 9월 18일 한국인들이 주최한 평화제 첫 무대를 장식한 진도 씻김굿 무형문화재 전수자 오신숙 씨의 ‘천기기원무’. [허문명 기자]
도요토미의 무덤을 찾다가 길을 잃어 교토여자대학 정문 경비원에게 위치를 물었는데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조금 놀랐다. 일본의 통일을 이룬 영웅이지만 역시 요즘 사람들은 관심이 없는 걸까. 무덤 입구에서 입장료 100엔을 받고 있었으나 찾는 사람도 거의 없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온갖 잡풀이 가득해 버려진 곳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산 정상에 위치한 무덤 앞에 서면 교토 시내가 한눈에 펼쳐진다. 천년고도의 기틀을 잡고 당대의 영화를 누린 최고 권력자도 오랜 시간의 풍파 속에서 이제는 일본인에게조차 잊힌 인물이 돼간다는 사실에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한국인들의 ‘코 무덤 평화제’
교토 주택가 한가운데 서 있는 ‘코 무덤’ 앞에서 열린 제5회 ‘왜덕산 사람들의 코무덤평화제’. [허문명 기자]
봉분 꼭대기에는 돌로 된 오륜 석탑이 마치 무덤 전체를 짓누르기라도 하듯 서 있는데 도요토미 무덤 위에 놓인 것과 똑같은 크기와 모양이다. 얼핏 보면 도요토미 일족이 묻힌 곳인가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 어떻게 이렇게 큰 무덤이 주택가 한가운데 있는가 싶어 입간판 앞으로 다가서 안내문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무덤은 다름 아닌 정유재란 때 왜군이 베어온 조선인의 코가 묻혀 있는 ‘코 무덤’이다. 일본어와 함께 한글도 병기된 입간판에 무덤의 유래가 자세히 설명돼 있다.
‘16세기 말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 진출의 야심을 품고 한반도를 침공한 이른바 분로쿠(文祿) 게이초(慶長)의 역(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일본식 명칭 ·1592~1598)과 관련된 유적이다. 히데요시 휘하 무장들은 예부터 전공(戰功)의 표지이던 적군의 목 대신 조선 군민 남녀의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에 가지고 돌아왔다. 이러한 전리품은 히데요시 명에 따라 이곳에 매장돼 공양 의식이 거행됐다고 한다. 무덤 위 오륜 석탑은 무덤이 축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교토시 2003년 3월).’
주변을 지나는 일본인들에게 무덤의 유래를 아느냐 물어도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무관심한 장소이던 이곳이 9월 28일 오전 갑자기 한국에서 온 풍물패들의 꽹과리 장구 북 징소리로 시끌벅적해졌다.
주말 산책을 즐기던 일본 현지인들도, 배낭을 메고 인근 관광지를 걷던 외국인들도 갑작스러운 이국적 풍경에 놀라 길을 멈춰 섰다.
행사 주인공들은 한국의 전라남도 진도에서 날아온 예술공동체 소리가마를 포함한 남도민속학회 호남우도농악보존회 등 알음알음 행사 취지에 공감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행사 제목은 제5회 ‘코무덤평화제’.
400여 년 전 왜군에게 잔인하게 학살당한 조선인 신체 일부가 묻힌 한(恨)의 땅인 이곳에서 한국인들은 1시간 반 동안 위령제를 지냈다. 공연은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였다. 판을 여는 울림굿을 시작으로 가야금(김현숙) 장구(이윤선)를 배경으로 진도 씻김굿 무형문화재 72호 오신숙 씨의 ‘천지기원무’가 첫 무대를 장식했다. 간밤에 천지신명께 조상들의 넋을 위로하는 기도로 몸과 마음을 정화했다는 오씨는 온몸으로 하늘의 기운을 받아내 영령들의 한을 풀어주는 몸짓으로 행사의 문을 열었다.
평화의 에너지로 승화한 강강술래
행사 하이라이트는 한국과 일본인 참석자와 관객 100여 명이 함께 어울린 강강술래. 너나없이 어울려 축제와 웃음의 한판을 만들어냈다. 한일갈등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허문명 기자]
이어 망자의 혼을 달래는 살풀이춤과 넋을 좋은 곳으로 안내하는 ‘길닦음’ 춤이 이어졌다. 하이라이트는 맨 마지막 참석자와 관객 100여 명이 함께 어울린 강강술래였다. 행사에 참석한 일본인 스님들과 현지 일본인들, 한국인들이 너나없이 어울려 축제와 웃음의 한판을 만들어냈다. 오사카에서 왔다는 가와무라 가즈코(42·주부) 씨는 “다니던 사찰 스님을 통해 이번 행사를 알게 됐다”며 “행사 내내 미안하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조선인의 영령을 위해 기도했다”고 말했다.
한일관계가 사상 최악이라고 하는 요즘, 400여 년 전 참혹한 전란을 일으킨 일본인에 대한 미움이나 원망 분노가 화합과 평화의 에너지로 승화해 교토의 화창한 가을 하늘을 가득 채우는 광경이었다.
코 무덤의 진실
코 무덤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바 있지만 실체를 눈앞에 두고 보니 새삼 어제 일처럼 생생해 분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정유재란을 일으킨 도요토미는 조·명 연합군의 반격으로 전황이 교착에 빠지자 전투를 독려하고자 전리품으로 조선인의 코를 베어오라고 명령한다. 코 무덤과 관련해서는 역사 속 증언이 많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강항은 ‘간양록’에서 “히데요시가 모든 장수에게 명하기를 사람의 귀는 둘이지만 코는 하나이니 마땅히 조선 사람의 코를 베어 머리를 대신하는 것이 좋겠다. 한 사람이 한 되씩으로 하되 소금에 절여 나에게 보내라. 코의 수효가 채워진 이후에야 생포로 인정하겠다”고 기술했다. 사람의 목보다는 코가 부피로나 무게로 훨씬 효과적이라는 발상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왜군은 전과를 올리고자 군·민 남녀노소는 물론 갓 태어난 어린아이까지 마구잡이로 코를 베어갔다고 한다. 조선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해 악명이 높던 가토 기요마사는 ‘청정고려진각서(淸正高麗陣覺書)’에서 “일본인 한 사람당 조선인의 코가 세 개씩 할당됐다. 그 코를 고려(조선)에서 검사관이 검사한 뒤에 큰 통에 넣어 소금에 절여 일본에 보냈다”고 전한다.
일본군 종군 승려 경념(慶念)의 기록은 당시의 참혹함을 이렇게 전한다.
“역사상 이 전쟁처럼 슬픈 것은 없다. 일본 병사들이 가는 곳마다 살육을 일삼았고 불을 지르니 그 연기가 고을마다 가득했다. 조선 사람은 어린이부터 부녀자까지 코를 잘라 대바구니에 담았고 병사들은 피투성이가 된 바구니를 허리춤에 달고 싸웠다.”(2012 성기중 논문, ‘일본에 축조된 비총의 의도와 대응책 연구’ 중에서 재인용)
코 무덤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이의 코가 묻힌 것일까. ‘교토의 귀무덤에 대한 일고찰’(노성환·2009) 중 일부를 인용한다.
“일본 측 기록인 ‘조선물어(朝鮮物語)’에는 ‘정유재란 당시 조선 사람 코 18만5738개, 명군 코 2만9014개 등 모두 21만4752개의 코가 일본으로 보내졌다. (…) ‘대일본고문서’(1925)에 나온 요시가와 집안만 하더라도 1597년 9월 1일부터 10월 9일까지 40일도 안 되는 기간에 3만1000여 명의 코를 베었다고 한다. 역사학자 이진희는 ‘한국과 일본문화’(1982)에서 ‘교토 코 무덤에 묻혀있는 조선인들 코 숫자를 약 5만 개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재정은 ‘교토에서 본 한일통사’(2007)에서 ‘적어도 10만여 명의 조선인의 귀와 코가 잘려나갔을 것’으로 추정했다. (…) 호리 교안이 쓴 ‘조선정벌기’에는 ‘(왜군들은) 조선에서 자른 코와 귀를 수레에 싣고 오사카 후시미 라큐추(교토)를 지나 여러 사람들에게 보였다’고 했다. (…) 이수광(1563~1628)은 ‘지봉유설’(1615)에서 ‘이때 우리나라 사람 중에 코 없이 살던 사람이 많았다’고 전한다.”
코 무덤이 귀 무덤 된 이유
코 무덤은 한자로 비총(鼻塚)인데 교토 무덤 앞 입간판에는 귀 무덤이란 뜻의 이총(耳塚)이라고 적혀 있어 궁금해 찾아보니 사연이 있었다.정유재란 후 도요토미가 죽고 새 통치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등장한 에도 막부가 조선과 통신사 외교를 시작하고 주자학으로 일본의 통치철학을 수립하는 데 기여한 유학자 하야시 라잔이 ‘본디 이 무덤은 코만 묻혔는데 조선통신사들의 숙소가 이곳과 가까운 곳이어서 그들에게 혐오감을 덜 주기 위해 코보다 귀가 나을 것 같아 이총(귀 무덤)으로 바꾸어 불렀다’는 것이다.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초기까지 출판된 교토 안내서 대부분에도 귀 무덤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해 이제는 그게 일반 명칭이 됐다고 한다.
경술국치 직전인 1909년 도쿄대 호시노 히사시 박사가 ‘교토 무덤은 코 무덤이지 귀 무덤이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으며 1997년 9월 28일 교토에서 열린 코 무덤 조성 400주년 기념 학술 토론회에서 이와 관련한 각종 사료가 공개되기도 했다.
나카오 히로시 교토조형예술대 명예교수는 토론회에서 ‘깃가와가문서(吉川家文書)’와 ‘나베지마가문서(鍋島家文書)’를 공개하며 “코 영수증은 있으나 귀 영수증은 한 장도 없는 것으로 미뤄 코 무덤이 확실하다”면서 “도요토미의 명령도 코를 베라는 것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고 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한일 연구자들은 코의 숫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으나 모두 귀 무덤이 아니라 코 무덤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한다(노성환, ‘교토의 귀무덤에 대한 일고찰’).
이번에 진도에서 날아간 한국인들이 무덤 앞에서 제례를 지낸 9월 28일은 도요토미가 봉분을 만든 뒤 교토 내 대형 사찰 승려 400여 명을 모아 성대한 공양식을 한 1597년 9월 28일을 기점으로 삼은 날이다. 꼭 422년 전 그날을 기린 것이다.
도요토미는 무덤이 조성된 후 당시로서는 매우 성대한 법요식을 열었는데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랜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자신의 위엄을 높이고 전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목적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도요토미가 죽은 지 300년 되던 해인 1898년 메이지 정부는 ‘교토 코 무덤’을 대대적으로 개수하고, 예능인을 동원해 도요토미 업적을 기리는 가부키를 만들어 전국적인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평화, 생명존중 ‘왜덕산 사람들’
‘그녀 나비되어 날다’ 치유춤 퍼포먼스 두 번째 주인공 김미숙 씨의 춤사위. 몸짓과 표정이 하도 진지하고 아름다워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자아냈다. [허문명 기자]
“1920년경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크로아티아 부부가 조선과 중국 등을 방문하는 도중에 교토의 비총을 보고 충격을 받아 당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편지를 보내 철거를 요구한 적이 있다.”(성기중, ‘일본에 축조된 비총의 의도와 대응책 연구’)
이번 행사를 기획한 이는 박주언 진도문화원장이다. 그는 진도에서 태어나 진도를 떠난 적이 없는 향토사학자다. 2016년부터 매년 교토 코 무덤 위령제를 지내왔다. 이번 위령제를 위해 전국에 흩어져 살면서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귀한 시간을 낸 것도 대단했지만 각자 자비(自費)로 참석했다는 것도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여기에는 진도 ‘왜덕산 정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게 행사에 참석한 김현숙 예술공동체 소리가마 회장 말이다.
씻김굿 무형문화재 전수자 오신숙 씨도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왜덕산 사람들이 이렇게 코 무덤 평화제를 교토에서 여는 것은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고 기억하자는 의미”라면서 “왜덕산 사람들은 코 무덤 위령제가 죽은 자들을 위한 행사로만 끝나지 않고 생명과 평화를 위한 산 자들의 축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대체 왜덕산 정신이 무엇이기에 생업에 바쁜 이들을 이곳 교토까지 한자리에 모이게 했을까.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422년 전인 명량해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순신 장군이 격퇴한 왜군들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왜군들의 시신을 수습해 묻어준 전남 진도군 왜덕산. [동아DB]
밀물 때는 남해의 바닷물이 한꺼번에 해협을 통과하면서 서해로 빠져나가 물 속도가 매우 빠르고 물소리도 커 명량(물소리가 우는 것처럼 요란하다)이라 불렸다. 순우리말로는 울돌목이다. ‘물이 울면서 돌아나가는 목’이라는 의미다. 진도에서는 울두목이라고 한다. 울두나 울도나 모두 동물 목에 있는 ‘울대’에서 나온 말로 진도·해남 사람들은 명량해협을 ‘바다가 소리를 내는’ 울대로 여겼다는 게 박주언 원장의 설명이다.
1597년 음력 9월 16일 이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에 격퇴당한 왜군들 시신이 진도 해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명량대첩에서 전사한 일본 수군은 대략 2만 4000여 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의 진도대교와 가까운 군내면 둔전리, 고군면 오류리, 연동리, 내산리, 원포리, 벌포리 해변에서는 물이 빠져나가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왜군들의 시신이 개펄에서 드러났다.
진도 사람들은 비록 자신들에게 씻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적군이라 할지라도 넋을 위로해줘야 한다며 고군면 내산리 내동마을에 있는 왜덕산(倭德山)에 시신들을 안장해주었다고 한다.
왜덕산의 내력을 발굴한 이 역시 박주언 원장이다. 그는 2003년 초가을 향토사학자들과 문화 답사를 하던 도중 마을 역사의 산증인 이기수 옹에게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마산리, 내동리, 오산리, 지수리, 지막리, 하율리, 황조리 등 7개 마을 사람들이 100여 구 왜군의 시신을 수습해 일본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잘 묻어주었다. 우리를 도륙한 원수들이지만 비록 영이나마 고향을 생각하며 잠들라는 덕을 베풀어줬다고 해서 ‘왜덕산’이란 이름을 짓게 됐다.”
왜덕산의 존재는 2006년 한 일본인 학자를 통해 일본에도 알려진다. 주인공은 일본 수군(水軍) 연구자인 히구마 다케요시 히로시마수도대학 사회학과 교수.
그는 진도 답사를 하던 중 박주언 원장으로부터 왜덕산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일본으로 돌아가 명량해전 때 일본 측 왜장이던 해적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의 고향 에히메현 이마바리시(市) 지역 신문에 왜덕산에 대한 글을 투고한다.
인구 8만 정도의 소도시인 이곳에는 구루시마와 명량해전에서 함께 싸운 장수들의 후손이 아직도 많이 사는데 구루시마는 죽었지만 살아 돌아간 장수들은 도요토미로부터 수만 석의 농지를 하사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히구마 교수는 “이마바리 사람들은 조상 상당수가 명량해전에서 목숨을 잃은 것까지는 알고 있었으나 조선 사람들이 조상들의 시신을 수습해 묘를 만들어주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글을 읽은 후손들은 당장 한국으로 달려와 2006년 8월 15일 왜덕산에서 400여 년 만에 조상에 대한 위령제를 지냈다. 이듬해에는 왜덕산 이야기를 처음 들려준 이기수 옹 부부를 이마바리로 직접 초청하기도 했다.
한일 민간교류 상징 된 왜덕산
진도 사람들은 왜덕산을 와덕밭이라고 칭한다. [동아DB]
진도인들은 ‘왜덕산 사람들’이란 이름으로 매년 진도에서 평화제를 열어왔고 이것이 교토 코 무덤 위령제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왜덕산은 우리를 참혹하게 도륙한 적을 원수가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과 생명으로 품은 휴머니즘의 현장이다. 아픈 과거를 미움과 분노가 아닌 사랑과 용서로 풀어낸 진도 사람들의 ‘왜덕산 정신’이야말로 2019년 펼쳐진 최악의 한일관계를 푸는 열쇠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교토 코 무덤 앞에서 조상들 넋의 평안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