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호

햇살이 춤추는 땅, 예술가들의 천국

미국 샌타페이

  • 이나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byeme@donga.com

    입력2004-11-02 15: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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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시적 자유와 해방의 공간’으로 불리는 샌타페이는 뉴욕, LA와 더불어 미국의 3대 문화도시 중 하나다. 인구 7만명의 소도시에 갤러리만 250여개. 인디언·스패니쉬·앵글로색슨의 문화가 교묘히 결합해 독특하고 이국적인 향취를 풍긴다. 정신이 풍요로운 도시, 샌타페이의 역사와 매력.
    햇살이 춤추는 땅, 예술가들의 천국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건축물인 구 스페인 총독관저. 건물 측면 화랑에서는 인디언들이 좌판을 벌여놓고 수공예 장식구들을 팔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건축물인 구 스페인 총독관저. 건물 측면 화랑에서는 인디언들이 좌판을 벌여놓고 수공예 장식구들을 팔고 있다. 현대 도시, 특히 미국 대도시의 아름다움은 종종 ‘야경(夜景)’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오색 조명으로 장식한 다리, 질주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 다이아몬드 왕관을 쓴 듯 오만하게 반짝이는 고층빌딩의 네온사인과 현란한 스카이라인. 기술과 전기(電氣)와 경찰의 힘으로 움직이는 거대도시에서 사람살이의 감동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샌타페이(Santa Fe)는 분명 특별한 곳이다. 춤추는 햇살, 깊고 푸른 밤, 낮은 집과 구부러진 골목, 정교한 수공예품이 넘치는 구멍가게와 촘촘히 숨어 있는 갤러리들. 미국 최고도(最古都)이자 ‘원시적 자유와 해방의 공간’으로 불리는, 아메리카 인디언과 예술가, 식지 않은 히피 정신의 본향. 거기 세계 최대 경제대국다운 물질적 풍요까지 더해져 방문객들의 찬탄을 자아낸다.

    샌타페이는 미국 최남단 주(州)인 뉴멕시코의 주도(州都)다. 해발 2135m, 로키산맥 남쪽 끝자락을 밟고 서있다. 고도가 높아서일까, 코발트색 아크릴 물감을 풀어놓은 듯 짙푸른 하늘이 눈부시다. 저녁노을은 또 어떤가. 멀리 누운 로키산맥 위로 고요히, 그러나 숨막히도록 선명하게 타오르는 핏빛 노을은 보는 이의 가슴마저 선홍색으로 할딱이게 만든다. 샌타페이의 상징이자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1986)는 이런 말을 했다. “명료함, 그것이 내가 샌타페이를 좋아하는 이유다. 이 곳에서 나는 내 자신이 된다.”

    예술가만 샌타페이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택시기사 패트릭 고메즈(30) 씨는 4대째 샌타페이에 살고 있다. “샌타페이는 빛의 질이 다르다. 아침 점심 저녁의 햇살이 다 아름답다. 지금 다섯 살, 두 살인 내 아이들도 이곳에서 나처럼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에게 샌타페이는 자손대대로 물려주고 싶은 ‘축복의 땅’이다.

    뉴멕시코주는 북미에서도 가장 오래된 인디언 거주지역 중 하나다. 인디언이 이곳에 자리잡은 것은 기원전 1만500년 경의 일이라고 한다. 1598년, 뉴멕시코 지역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다. 1821년, 멕시코 독립과 함께 그곳의 일부가 되었다가 다시 1848년, 멕시코 대 미국 전쟁의 결과 미국 영토로 편입된다. 1870년대, 철도가 깔리면서 급속한 경제발전이 이루어졌고 1912년 1월6일, 마침내 미연방의 47번째 주(州)가 됐다. 뉴멕시코란 주명(州名)은 한 멕시코 탐험가가 ‘새로운 멕시코’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예로부터 이곳을 ‘햇살이 춤추는 땅(Land Of Enchantment Sunshine State)’이라 불렀다.





    400년 역사 지닌 미국의 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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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타페이의 대표적 골프장인 '마르티 산체스 링크'

    샌타페이의 대표적 골프장인 ‘마르티 산체스 링크‘ 뉴멕시코에는 3개의 주요 도시가 있다. 인구 40여 만명의 앨버커키, 6만8000명인 샌타페이, 5만여 명인 로스웰. 서울 인구가 1000만명에 달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인구 밀도가 매우 낮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가장 큰 도시인 앨버커키를 제치고, 우리나라로 치면 경남 거창군 수준의 상주인구를 가진 샌타페이가 주도(州都)가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만큼 오랜 역사와 정체성 뚜렷한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푸에블로족의 땅이었던 샌타페이에 처음 서구식 주거지가 들어선 것은 1609년이었다. 소와 양과 말을 들여온 스페인 정복자들은 샌타페이를 탐험과 전도(傳道)의 전진기지로 활용했다. 스페인인과 인디언간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1610년에는 총독 관저(현 뉴멕시코박물관)를 건설했다. 이 건물은 현존하는 미국 최고(最古)의 공공건축물이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는 수모를 겪었지만 덕분에 샌타페이는 미국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 색채를 띠게 됐다. 이는 웅혼하고 야성적인 자연 환경과 어우러져 샌타페이에 이국적이며 자유로운 향취를 더했다. 회반죽을 발라 모서리 없이 둥글둥글하게 마무리한 어도비(adobe) 건축양식은 대표적인 ‘샌타페이 스타일’이다.

    샌타페이 문화의 지층을 이루는 것은 수천년을 이어온 인디언 문화다. 그 위에 스페인 문화와 멕시코 문화, 다시 앵글로색슨의 문화가 덧칠해졌다. 샌타페이가 세계적 문화 도시로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는 1900년대 초·중반 동부지역 예술가들의 집단 이주다. 격식과 제도, 도시적 감성에 길들여져 있던 백인들은 샌타페이의 원시적이고 이국적인 풍광에서 큰 충격과 강렬한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이들은 허름한 폐광촌, 낡은 어도비 가옥에 둥지를 틀고 전혀 새로운 감수성의 작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강렬한 햇살, 거친 바위산, 황량한 사막과 낯선 생활양식. 이들에게 인디언이나 멕시코 문화는 멸시가 아닌 탐구와 찬탄의 대상이었다. 1950년대 말부터는 히피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샌타페이가 갖고 있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분위기는 이렇게 여러 인종의 문화에 시인·화가·소설가·몽상가·히피·광인, 심지어는 진 해크먼·로버트 레드퍼드 같은 유명 배우들의 아우라까지가 합쳐져 창출된 오랜 융합의 결과물이다.

    샌타페이는 사계절이 뚜렷한 편이다. 주민은 히스패닉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백인, 인디언 순이다. 인디언들은 대부분 카운티 밖 집단 거주지에 산다. 흑인·동양인은 거의 없다. 한국교민은 20가구 정도. 카운티 외곽 주택가나 인근 도시인 로스앨러모스에 거주한다. 이들 대부분은, 복잡계 연구의 메카로 유명한 샌타페이연구소와 인공지능·게놈 연구의 총본산인 로스앨러모스연구소에 근무하는 연구원들이다.

    히스패닉은 17세기부터 이 땅의 주인 노릇을 해왔다. 인구가 많은 만큼 영향력도 커, 지명은 물론 일상 용어에도 스페인어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히스패닉끼리는 스페인어로 대화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처럼 샌타페이의 ‘주류’는 앵글로색슨이 아니라 히스패닉이다. 이는 미국 내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가톨릭 신자가 유난히 많은 것도 히스패닉의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1900년대부터는 백인들의 진출이 늘었다. 외지에서 이주한 백인들은 히스패닉 소유의 땅과 집을 비싼 값에 구입하는 방식으로 이 도시에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속도는 느린 편이다. 시 당국의 통제로 인해 새 건물 짓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행정 당국은 이 도시만의 개성과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건축에 있어 매우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샌타페이시청 직원인 로라 설리번씨는 “가장 중요한 것은 2층 이상의 건물은 지을 수 없으며 어도비 양식을 응용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창문 크기며 모양, 외벽 색깔, 현관 디자인과 천장 높이까지 고려한다. 기존 건물을 개조할 때도 일정한 원칙에 따라야 한다. 샌타페이의 명성과 풍요로움은 그 문화적 가치에서 파생되는 만큼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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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 예술가들의 스튜디오가 밀집해 있는 '캐년 로드'

    유명 예술가들의 스튜디오가 밀집해 있는 ‘캐년 로드‘ 실제로 샌타페이 시내는 동화 속 마을처럼 깔끔하고 아기자기하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조화롭게 배치된 건물들은 세심하게 배려된 색채와 디자인으로 인해 남다른 통일감과 균형미를 자랑한다. 간판 하나, 거리에 깔린 돌 하나도 허투루 놓인 것이 없어 보일 정도다. 고도(古都)답게 아기자기하게 뻗어나간 뒷골목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느껴지는 예쁜 상점, 카페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서너 평 남짓한 스페인풍 뜰이 너무 아름다워 발을 들여놓고 보면 남성용 셔츠 전문점에 딸린 정원이거나, 무슨 역사적 건물인 줄 알고 한참 둘러보고 나니 법률회사 사옥인 식이다.

    대규모 쇼핑센터나 요란한 간판의 패스트푸드점은 전혀 없다. 거리 곳곳은 벽화로 장식돼 있으며 각종 시설물은 물론 쓰레기 수거차에까지 예술가들의 손길이 닿아 있다. 모두 시 당국의 치밀한 계획과 관리로 이루어진 일이다.

    샌타페이로 이주하는 백인들은 대부분 상류층이다. 물가가 높다 해도 로스앤젤레스보다는 낮은 편이니, 그보다는 아무래도 샌타페이 특유의 문화적 분위기를 향유할 수 있는 지식인층이 대종을 이루기 때문이라 봐야 할 것이다. 이들의 상당수는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기 위해 찾아온 50~70대의 장년·노년층이다. 도시의 주수입원이 문화산업과 관광산업인 만큼 그와 관련한 예술가, 전문직 종사자들도 많이 산다.

    비만한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도 특징이다. 샌타페이의 높은 생활 수준을 반영하는 현상이다.

    샌타페이 주민의 50%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칭한다. 이는 결코 빈말이 아니다. 우리나라 군 소재지만한 작은 도시에 대학이 4개, 출판사가 24군데나 있다. 대형박물관·미술관이 8개, 갤러리가 250여 개에 이른다. 샌타페이는 뉴욕, 로스앤젤레스와 더불어 미국의 3대 미술시장 중 하나다. 연간 거래규모는 약 2억달러. 한집 건너 하나 꼴로 갤러리나 공예품·예술품 매장이 있고 인디언 시대부터 존재했던 캐년 로드에는 유명 예술가들의 스튜디오가 즐비하다.

    시내 중심가인 플라자 주변은 각종 장신구를 파는 원주민들로 북적인다.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금·은·구리·보석 세공품과 도자기, 융단, 가죽 제품 등을 생산하는 이들은 모두 자부심 강한 전통예술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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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풍 퓨전 레스토랑

    멕시코풍 퓨전 레스토랑 인구의 나머지 50%는 공무원, 서비스업 종사자, 연구원, 교육자, 법률가 등으로 구성돼 있다. 공무원과 법률가 수가 많은 것은 샌타페이에 뉴멕시코주청사가 있기 때문이다. 예술품 거래와 시민들의 재산 관리를 위해서도 법률가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 서비스업 종사자가 많은 것은 샌타페이가 관광도시이자 휴양도시이기 때문. 상점 판매원, 식당 종업원 등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샌타페이가 미국에서도 ‘잘사는 도시’로 꼽히는 것은 물질적인 면보다 정신적 풍요로움 때문이다. 13년간 로스앨러모스연구소에 근무해온 박민성(43) 박사는 “샌타페이만큼 인종 차별이 적고 개방적이며 예술적으로 고양돼 있는 도시는 세계적으로도 몇 되지 않을 것”이라며 “자연의 아름다움만으로도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을 행운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겨울에는 로키산맥에서 스키를 타고 여름에는 인근 인디언 유적지와 숲·사막·호숫가로 하이킹을 떠나는 것이 일상이된, ‘삶의 질’이 보장된 도시라는 설명이다.

    샌타페이에 인종 차별이 거의 없다는 것은 현지인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언뜻 생각하면 여러 인종이 비슷비슷한 비율로 섞여 있어 갈등이 많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 히스패닉의 수가 워낙 많고 경제력도 탄탄해 백인들이 도시를 좌지우지할 수 없는 데다, 인디언도 나름의 전통과 문화를 지닌 토착민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샌타페이의 정체성은 근본적으로는 인디언 문화로부터 나온 것이다. 실제로 인디언들이 제작하거나 그들의 전통에 기대어 만든 예술품들은 시의 대표상품이자 주수입원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박박사는 “오늘날의 샌타페이는 인디언의 예술과 섬세함, 히스패닉의 열정과 가족애, 앵글로색슨의 합리와 실용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물”이라며 “문화적 개방성이야말로 샌타페이의 숨은 힘”이라고 말했다.

    이곳 생활의 기본은 ‘개인의 자유’다. 이는 미국 어디에서나 통하는 기준이지만 특히 샌타페이에서는 정신적 자유와 금기의 파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도시에서 마약 복용은 ‘절대 해서는 안되는 범죄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일종의 ‘라이프 스타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슬럼이 없으며 대규모 마약상들이 저질의 제품을 마구 뿌려대 문제를 만들지도 않는다. 예술 계통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고급 제품을 조금씩 ‘즐기는’ 수준이다. “권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마약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범죄자 취급하거나 사시의 눈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샌타페이는 ‘미국의 마지막 히피 도시’로 불리기도 한다. 자연, 영성, 예술에 심취한 사람들이 그만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도 유난히 많은데, 이 역시 문제 삼지 않는 분위기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여성의 수가 많다는 것. 다운타운에서 스시 바 ‘코나미’를 운영하는 박유미(35) 씨는 “샌타페이는 여성성의 도시다. 거리가 주는 느낌도 그렇고 각종 문화생산물들도 상당히 여성적이다. 한마디로 여자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도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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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아 오키프의 대표작 '검은 접시꽃과 푸른 참제비꽃'

    조지아 오키프의 대표작

    ‘검은 접시꽃과 푸른 참제비꽃‘ 자연 친화, 자유 중시, 예술에의 경도, 여성적 감수성. 이 모두를 아우르는 샌타페이의 상징적 인물이 바로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다. 20세기 미국 미술계의 독보적 존재로 추앙받는 오키프는 62세 때인 1949년부터 86년 99세로 타계하기까지 샌타페이에 은둔하며 수많은 걸작들을 창조해냈다. 오키프에 대한 샌타페이 시민들의 사랑과 존경은 놀라울 정도다. 샌타페이 시민들은 관광객들을 만나면 “꼭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에 가보라”고 열심히 권한다. 그래서일까, 오키프의 작품 70점이 전시돼 있는 미술관은 세계에서 몰려온 관람객들로 늘 붐빈다. 미술관 앞에서 만난 마리아 콴트로씨는 “오키프는 뛰어난 예술가일 뿐 아니라 자유롭고 독립적인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의 일생과 작품세계는 샌타페이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많은 예술가들이 샌타페이에 이름을 남겼지만 이곳은 누가 뭐래도 오키프의 땅”이라고 말했다.

    위스콘신주 선프레리 근처 농장에서 태어난 오키프는 시카고 미술학교, 뉴욕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공부했다. 1916년 미국 근대사진의 아버지로 불리는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46년, 오키프는 24세 연상의 스티글리츠와 결혼한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를 모델로 누드작품을 비롯한 수백점의 연작 인물사진을 찍는 한편, 그의 명성과 지식을 무기로 든든한 후원자가 돼주었다. 오키프는 결혼 후에도 자기 성을 그대로 쓰는 등 독립적인 삶을 살았다.

    1917년 기차여행 중 뉴멕시코를 지나다 사막 풍경에 사로잡힌 오키프는 1929년부터 뉴멕시코에서 여름을 나기 시작했다. 1949년 남편이 사망하자 샌타페이에 정착해 죽는 날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화면 가득 넘실거리는 파스텔톤 꽃잎과 동물 두개골 그림은 오키프의 트레이드 마크. 말년에는 샌타페이의 맑은 하늘과 사막 풍경을 주로 그렸다. 뼈, 식물 기관, 조개껍데기, 산 등의 자연물에 추상적 아름다움을 부여한 그의 그림은 신비스럽고 탐미적이며 상징적이다.

    시 당국과 주민들은 오키프의 명성과 신비로운 이미지를 샌타페이의 것으로 전이시키는 데 성공했다. 꾸준한 관심과 배려, 후원으로 오키프를 평생 샌타페이에 ‘묶어’두었음은 물론, 사후에는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과 ‘오키프 센터(미국의 미술·문학·건축·사진 속 모더니즘을 연구하는 곳)’를 열어 문화도시로서의 면모를 한껏 과시하고 관광객 유치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샌타페이에, 몇몇 스타 예술가를 적극 상품화하거나 대규모 문화행사 한두 개로 일년 쓸 돈 다 벌고 보겠다는 식의 한탕주의는 없다. 시는 예술가들이 마음 편히 작품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많은 신경을 쓴다. 예술가와 시민의 자발적 노력이 차곡차곡 쌓여 마침내 자연스레 빛을 발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두고 공을 들이는 것이다. 오키프 미술관도 관 주도가 아니라 한 독지가 부부의 열성에 힘입어 1997년 7월에야 문을 열었다. 오키프가 생전에 머물렀던 샌타페이 인근 애비큐의 집과 ‘고스트 렌치’ 목장에 대해서도 시 당국은 “훼손이 우려된다”며 예약 관람객이나 학자, 화가에게만 일부를 공개하고 있다. 예술가에 대한 행정당국과 시민의 적절하고 진심 어린 배려는 변방의 소읍에 불과한 샌타페이가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문화도시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샌타페이시의 ‘예술혼 키우기’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얼마전 이곳으로 80여 명의 뉴욕 예술가들이 몰려왔다. 대부분 9·11 테러로 붕괴된 월드트레이드센터 안이나 근처에서 작품활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샌타페이미술연구소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고 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란 화랑이나 미술단체가 예술가들에게 주거·작업 공간은 물론 작업 재료 일체를 지원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후원 프로그램을 통해 샌타페이는 그 문화적 토양에 양질의 자양분을 듬뿍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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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형적인 샌타페이 스타일 정원

    전형적인 샌타페이 스타일 정원 샌타페이 중심가와 외곽은 명확히 구분돼 있다. 중심가는 거리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길이 꼬불꼬불하고 폭도 좁다. 신호등도 많아 속도를 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주민들은 시내로 들어올 땐 주로 버스를 이용한다. 다운타운이라고는 하지만 규모가 작고 사시사철 쾌청한 편이라 바쁜 일만 없다면 슬슬 걸어다닐 만하다. 관광객들에게도 ‘걸어서 구경하기’를 권한다. 그만큼 구석구석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갤러리와 상점 외에 산미겔 교회(1636), 세인트프랜시스 성당(1869), 인류학연구소(1923) 등 이름난 건축물이 많다. 시내를 돌아보는 데에는 2~3일 정도가 걸린다.

    외곽 지역은 미국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넓고 곧은 길이 쭉쭉 뻗어있고 중급 수준의 호텔, 주택가, 학교와 병원, 작은 식당과 식료품점 등으로 채워져 있다. 조금 더 나가면 스키장, 골프장, 드라이브 코스 등을 만날 수 있다. 중심가에서 외곽으로 빠지는 데에는 자동차로 20~30분이면 충분하다. 때문에 주민들에게 야외 스포츠는 일상이 되어 있다. 메트로시티가 아닌 만큼 빈민가도 없고 치안상태도 훌륭하다.

    온화하면서 사계절이 뚜렷한 날씨이지만 여름에는 매우 건조해 화재 위험성이 크다고 한다. 그래도 잊을 만하면 30분 가량 소나기가 쏟아져 도시를 시원하게 적셔준다. 박민성 박사는 “비가 그친 다음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무지개가 뜬다. 도시 규모가 작고 공기 밀도가 낮아서인지 밤하늘도 무척 맑다. 미국의 상류도시 중 이처럼 수많은 별, 심지어는 은하수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은 샌타페이밖에 없을 것”이라고 자랑했다.

    샌타페이에서는 계절별로 여러가지 축제가 열린다. 1692년 시작된 ‘피에스타(Fiesta)’는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축제다. 매년 레이버 데이(Labor Day, 9월의 제1월요일로 유럽의 May Day에 해당함) 다음 일주일간 계속되는데, 행사의 절정은 조조브라(Zozobra)라 불리는 큰 인형을 불태우는 것이다. 그해의 묵은 찌꺼기들을 태워 없앤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역시 샌타페이 최대 축제는 8월에 열리는 ‘인디언 축제(Inter Tribal Indian Cerimonial)’다. 이 행사에는 토착부족인 푸에블로 인디언은 물론 북미 전체 부족이 참가해 기술, 공예, 댄스, 승마 등 갖가지 장기를 겨룬다. 같은 시기에 열리는 ‘인디언 마켓’도 전국적인 행사다. 인디언 도공, 보석세공인, 직조인, 화가, 바구니 메이커 등이 한데 모여 150여 개 갤러리에서 갈고 닦은 기량을 마음껏 펼쳐 보인다. 아티스트 1200여 명, 평론가와 관객 10만여 명이 몰려드는 대규모 예술축제다.

    7월에 열리는 ‘스페인 마켓’은 히스패닉이 주도하는 행사다. 히스패닉 아트, 수공예품, 음식 등이 한데 모인다. 부리토(고기와 치즈를 얹어서 요리한 빵의 일종), 타말레(옥수수가루·다진 고기·고추 등으로 만든 멕시코요리), 칠레 등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2월에는 시내 중심가와 샌타페이 스키장에서 ‘윈터 페스티벌’이 열린다. 눈 조각대회, 다운힐 레이싱, 풍선 날리기 등의 행사가 있다. 7월 중순 열리는 ‘샌타페이 로데오’도 규모가 크다. 1959년 이래 미국, 캐나다 등 각지로부터 몰려든 참가자들이 로데오 세계 챔피언 자리를 놓고 기량을 겨뤄오고 있다.

    샌타페이는 공연예술로도 명성을 얻고 있다. 1957년 샌타페이 오페라단이 생겼고 이어 샌타페이 심포니, 샌타페이 챔버, 샌타페이 합창단, 샌타페이 발레단 등이 만들어졌다. 6월 말이나 7월에는 ‘샌타페이 오페라’ 행사가 열린다. 7~8월의 금·토·일요일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무료 공연하는 ‘셰익스피어 인 샌타페이(Shakespeare in Santa Fe)’가 개최된다. 샌타페이시 동쪽 언덕의 아름다운 야외 극장이 주무대다.



    1500년 경주가 400년 샌타페이에 뒤처진 이유


    샌타페이가 미국의 최고(最古) 도시라지만 수천년 역사를 헤아리는 유적지가 즐비한 우리나라로서는 다소 호들갑스럽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1500년 고도, 500년 도읍지이면 무엇 하나. 우리의 경주, 부여, 서울과 전주, 부산, 청주는 세계인들로부터 ‘문화도시’라는 칭송을 받지 못하고 있다.

    도심 한켠 옛집과 굽은 길들은 철거 대상이 돼 괄시받아온 지 오래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정교한 손놀림은 공산품의 가차없는 공격 앞에 그 명맥조차 이어가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돈과 정치의 힘에 밀려 사라져간 고분과 유적지는 또 얼마인가.

    그런 점에서 볼 때 400년 남짓한 역사를 소중히 보듬어 정신적·경제적 풍요로움의 바탕으로 삼고, 다시 미래를 위해 긴 안목의 투자를 아끼지 않는 샌타페이시의 선택은 우리의 모범이 될 만하다. 수백년 내려오는 인디언 좌판을 마구잡이로 거둬버리기보다 오히려 시내 제일의 중심가에 넓은 자리를 차지하도록 배려해 도시의 명물로 키워간 그들의 안목과 유연성이 문득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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