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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빔 벤더스·페드로 알모도바르·라스 폰 트리에

영혼으로 만나는 세상

  • 글: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

장 뤽 고다르·빔 벤더스·페드로 알모도바르·라스 폰 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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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빔 벤더스·페드로 알모도바르·라스 폰 트리에

라스 폰 트리에(왼쪽)에게 “도그마선언은 유효하냐”는 질문을 던지게 한 영화 ‘어둠 속의 댄서’302

여하튼 알모도바르의 이 탁월한 색채 감각에 우연성과 작위성으로 가득한 종잡을 수 없는 스토리, 그리고 과도한 장식성이 더해지면서 지극히 알모도바르적인 세계가 만들어졌다. 그 세계에서 알모도바르는 언제나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치 타인에 대한 뒷얘기를 다루는 패션 잡지의 그것과 같다. 그는 사랑·쾌락·고통·진실·자유·죽음 등 평범한 주제들을 복잡하게 얽어 재미난 농담 같은 이야기로 풀어낸다.

알모도바르 영화 세계의 모든 특징이 집약적으로 펼쳐진 영화는 아마도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1988)일 것이다. 주인공인 페파는 이반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직감하고는 격분한다. 영화는 신경쇠약 직전의 상태에 놓인 이 여자의 아파트에 그녀의 동생, 그녀의 애인 이반, 이반의 전처와 이반의 새 애인, 거기다 경찰과 전화수리공까지 순차적으로 집결시켜 광란적인 앙상블 코미디를 만들어낸다. 작위적 우연들로 가득한 이 원색의 세계는 다른 범용한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중심을 잃고 헤매는 영화가 돼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모도바르의 손을 거치면서 우울함과 특별한 유쾌함이 뒤섞인 독특한 코미디가 되었다.

이렇게 ‘쾌활한 과잉의 세계’를 탁월한 감각으로 소화해낸 알모도바르는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원숙의 단계에 접어든 듯하다. 그렇다 해서 이전의 영화 세계를 깡그리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최근의 걸작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은 알모도바르적이라 불리는 요소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영화다. 그러면서도 여기에는 일종의 평정(平靜)의 미학이 덧씌워져 있다.

특유의 원색에는 온색의 느낌이 가미됐고, 신경쇠약 직전까지 간 여인들의 시끌벅적한 수다에는 삶의 결이 새겨졌으며, 우연으로 점철된 혼잡한 소동에는 운명의 힘마저 느껴진다. 그렇게 알모도바르는 키치적이고 과잉으로 점철된 가볍고 유치한 세계를 통찰력 가득한 원숙의 단계로 끌어올린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라스 폰 트리에



‘순결한 영화’와 ‘오염된 영화’사이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의 유럽 영화사를 훑어볼 때 누벨 바그보다 더 중요한 영화사적 사건을 꼽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지난 40여 년 동안 유럽의 많은 영화감독들은 그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이제 와 그 유산을 깡그리 부정하려는 이(들)가 있다.

“도그마 95는 구제 행위다!” ‘도그마 95 선언’ 참가 감독들은 이렇게 외치며 매우 도발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도그마 95는 1995년 봄 코펜하겐에서 결성된 영화감독 집단이다. 이들의 목적은 ‘오늘날 영화에서의 어떤 경향에 대항하는 것’이다. 작가(auteur)라는 낭만주의적 개념에 기댄 1960년대의 반(反)부르주아 영화는 그 자체로 부르주아적인 것이 되었고, 누벨 바그라는 것도 잔물결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도그마 95는 그 정의상 퇴폐적일 수밖에 없는 개인주의 영화에 대항하고 또한 자신들의 영화에 일종의 ‘유니폼’을 입힐 것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더는 ‘예술가’가 아니며 더는 ‘작품’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들이 내세운 열 가지 ‘순결 서약(‘촬영은 현지에서 행해져야 한다’ ‘촬영은 카메라 들고 찍어야 한다’ ‘인위적인 행위를 담지 않는다’ 등)’은 그런 맹세의 증거다. 도그마 집단에게 이는 환영(幻影)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이기도 하다.

인위적인 기법들을 대체로 거부한, 즉 도그마 원칙에 충실한 영화 ‘백치들’(1998)을 발표한 이래 라스 폰 트리에(1956~ )는, 어떤 식으로든 도그마 원칙과 관련해 자신의 영화에 대한 질문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돼버렸다. 예컨대, 2000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뮤지컬 영화 ‘어둠 속의 댄서’는 과연 ‘도그마 영화’인가 하는 질문들이다. 이건 아마도 많은 이들이 기존 영화의 철저한 전복을 기도한 도그마 95가 실제 어떤 행보를 보일지 주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호의의 눈길이든 아니면 의혹의 눈초리든). 게다가 폰 트리에는 도그마 집단의 선봉장이라 불릴만한 인물이 아닌가. 집단적 선언이라고는 하지만 도그마가 그토록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건 무엇보다 폰 트리에의 명성과 재능 덕분이다. 그는 과연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영화’를 지키는 성인이 될 것인가.

사실 폰 트리에의 이전 영화들은 대부분 도그마 원칙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들이다. 이른바 ‘전후 유럽 3부작’으로 불리는 그의 초기 대표작들, 즉 ‘범죄의 요소’(1984), ‘전염병’(1987), ‘유로파’(1991) 등은 모두 형식주의와 스타일의 과잉 차원을 넘어 ‘포화 상태’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유로파’를 예로 들자면, 여기에는 독일 표현주의부터 필름 느와르에 이르는 영화사적 지식들이 두루 나열돼 있으며 독창적이면서도 때론 유치하게까지 느껴지는 온갖 테크닉들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다. 이 영화들로 폰 트리에는 매우 대담하고 독창적이며 황홀한 비주얼을 보여주는 스타일리스트라는 찬사와 더불어 ‘스크린의 마스터베이터(masturbator)’라는 비아냥마저 듣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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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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