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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항해기

제48회 신동아 논픽션 공모 우수작

  • 김연식

지구별 항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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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알렉세이

이어서 알렉세이는 주점을 소개했다. 농구장처럼 지붕이 높고 넓은 가게는 우리가 들어가자 문을 열었다. 탁자는 달랑 8개. 길손은 우리뿐. 하얗게 입김 나오는 홀에서 마신 맥주가 한 병에 6달러나 했다. 우리는 노인에게 잔뜩 실망했다. 두 번째 상륙 때는 이 여우에게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밤사이 배에 올라온 인부들에게 물어 주변 명소를 알아놨다. 알렉세이는 내 메모를 슬쩍 보더니 시큰둥하게 알았다고 끄덕였다. 한참을 달려 노인이 차를 세운 곳은 황량한 주차장. 밖에서는 ‘우우웅’하고 매서운 바람소리가 났다.

“벤츠빌스는 해변이 유명해. 가봐.”

“뭐야, 이렇게 추운데 밖에 나가라고?”

해도 너무했다.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알고 한국말로 노발대발했다.



“잘 보라고! 유. 적. 지. 유적지를 가자고!”

나는 종이를 들이밀며 언성을 높였다. 노인은 다 알겠다는 듯이 웃으며 일단 다녀오라고 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저 늙은 여우에게 끌려 다녀야 하는 거야.”

일행은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둔덕을 오르며 투덜거렸다. 꼭대기에 오르자 칼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상하다. 이렇게 바람이 부는데도 주변은 고요하다. 알 수 없는 느낌이다. 물가에 가자 다들 탄성을 터뜨렸다. 바다가 얼었다. 그것도 파도 치는 모습 그대로. 난 처음 보는 모습에 눈이 동그래졌다. 바다의 푸른빛을 담은 파도는 마녀의 마법에 ‘뿅’하고 얼었는지 물결을 그대로 간직했다. 수평선까지 모두 얼었다. 새들은 바다 한가운데를 잔디처럼 걸어 다녔다. 얼음 맛을 봤다. 짜다. 우리는 신이 나서 그 울퉁불퉁한 얼음 위를 뒤뚱뒤뚱 오르내렸다. 만날 보는 바다에 이렇게 감동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참 만에 알렉세이의 차로 돌아갔다. 그는 시계를 보며 ‘얼마나 놀랐기에 이제 오느냐’ 하는 표정이다. 이어서 노인은 영웅 야니스의 동상, 중세 광장, 주말시장, 도서관을 안내했다. 촌음을 다퉈 바쁘게 돌아다녔다. 나는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반나절이면 돌아와야 하는 짧은 여행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만들려 버둥거렸다. 그래서 박물관이니 유적지니 하는 것들에 욕심을 냈다. 오늘도 노인을 그렇게 닦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열심히 다닌 뒤 기억에 남은 건 겨울의 마법뿐이다. 대단한 유적보다 일상의 작은 변화가 놀랍고 신비하다. 아마 이때부터일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 짧은 여행을 나서기 시작한 건.

라트비아의 석탄을 벨기에 앤트워프에 하역했다. 동화 ‘플란다스의 개’의 배경이고, 세계 최대 면세점이 있다. 매력 있는 항구지만 항만국 검사를 받는 바람에 상륙은커녕 정신없는 사흘을 보냈다. 다음은 지구의 꼭대기 러시아 무르만스크(Murmansk). 항해하는 내내 노르웨이의 험준한 설산이 보였다.

늦깎이의 실수 연발

항해사는 4시간씩 하루 2번 항해당직을 맡는다. 3항사는 오전 8시부터 정오까지, 저녁 8시부터 자정까지다. 2항사는 매 12시부터 4시까지, 1항사는 4시부터 8시까지다. 항해는 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GPS와 레이더 같은 첨단장비가 발달해 이제는 사람의 역할은 장비를 감시하는 데 그친다. 배에 사정이 생겨 당분간 나는 4시부터 8시까지 일한다. 새벽에 곤히 자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지금 몇 시예요!”

2항사가 냉랭하게 쏘아붙이고 수화기를 거칠게 내렸다. 벽에 걸린 배의 시계를 보니 새벽 4시다. 자명종은 3시를 가리킨다. 아차! 한 시간 전진한 걸 깜빡하는 바람에 당직에 늦었다. 어제 내가 이렇게 방송했다.

“선내에 알립니다. 금일 본선은 한 시간 전진합니다.”

배는 동(東)이나 서(西)로 15도씩 항해할 때마다 1시간씩 시계를 돌리는데 이를 전진, 후진이라 부른다. 지구 한 바퀴 360도를 24(시간)로 나누면 15도다. 서울에서 동쪽으로 15도를 가면 해가 전보다 한 시간 일찍 뜬다. 서쪽은 반대다. 그래서 동쪽으로 가면 시간을 당기고 서쪽으로 가면 늦춘다. 나는 어제 배의 시계를 1시간 앞으로 돌려놓고, 내 자명종은 그대로 놔뒀다. 사고를 친 셈이다. 이미 4시 10분. 교대시간을 한참 넘겼다. 배에서는 근무시작 15분 전에 선교에 오는 게 원칙이다. 항해 상황을 익히고, 어두운 바다에 맞춰 동공이 열리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2항사는 잔뜩 화난 표정이다. 그는 내 고등학교 1년 후배다. 하급자로 늦깎이, 그것도 가까운 인연이 왔으니 족보가 꼬이기 시작했다. 이럴수록 내가 실수 없이 잘해야 하는데, 가끔 이렇게 깜빡할 때가 있다. 나는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종일 울적했다.

처음 배에 왔을 때 수직적인 조직 분위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3등 항해사라면 일단 반말이다. 대부분 해양고교나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승선하기 때문에 3등 항해사와 기관사는 어리다. 상급자일수록 나이가 많다. 또 해양계 학교 출신들은 승선으로 군복무를 대신한다. 이런 사정이 얽혀 위계가 엄격하다. 하지만 나는 병역을 마쳤고, 이곳은 직장일 뿐이다. 그런데 다시 이등병이 된 느낌이다. 어쩌랴. 나는 모두 내려놓고 바짝 엎드렸다.

그 사이 배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돌아 러시아의 북서쪽 끝 콜라반도에 들어섰다. 눈 덮인 동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무색의 도시 무르만스크가 나왔다. 이파리 없는 나무로 뒤덮인 검은 산, 그 속에서 검은 연기를 뿜는 재래식 가옥. 수면은 무거운 구름을 머금어 하늘처럼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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