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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박정희기념관 파문

“화해하려면 DJ 혼자 하라”

박정희 기념관을 반대하는 사람들

  • 조성식mairso2@donga.com

“화해하려면 DJ 혼자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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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과오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시비다. 지난 11월9일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조문기씨(76)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22인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 중단을 촉구하며 발표한 성명엔 이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젊은 시절 일제에 맞서 싸울 때 박정희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때려잡는 데 앞장선 일본제국주의의 선봉대였다…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한 결과 일본군 장교출신이 대통령이 되는 민족의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를 하던 박정희가 교직을 떠난 것은 1939년. 일본인 아리마 교장을 폭행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후의 행적. 이듬해 23세의 그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1941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벌어졌다. 그 해 그는 창씨개명을 했다. 다카끼 마사오.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졸업한 다카끼 마사오는 우수한 성적 덕분에 일본 본토의 육군사관학교 3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1944년 일본 육사를 3등으로 졸업한 그의 첫 부임지는 관동군 635부대. 이어 만주군 보병 제8단장 부관으로 임명됐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만군장교 박정희는 소속을 잃었다. 8월29일 중국 베이징으로 가 광복군 제3지대에 잠시 몸담았다가 이듬해 5월 부산을 통해 귀국했다.

‘신동아’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각계 인사 15명을 집중 인터뷰했다. 현 정부 초대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 변호사(64)는 “박정희의 경제성장은 근로자 권익을 짓밟는 등 강압적 요인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며 성장의 질을 문제삼았다.



“결과적으로 경제가 성장한 데 대해선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는 데 본질적이고 중요한 요소는 민주주의와 인권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폭군이자 반역사적 인물이다. 역사를 보면 경제성장의 가시적 성과를 내세워 독재를 정당화한 예가 많다.”

소설가 유시춘씨(50)는 박정희 흉상 철거행위에 대해 “올바른 역사의식과 정치적 신념을 가진 양심범의 정당한 행위”라고 평가했다. 유씨는 “박정희는 쿠데타로 헌정질서를 짓밟고 인권탄압을 일삼은 독재자다. 도대체 박정희의 어떤 점을 기리겠다는 것인가”라며 분노했다.

“우리 민족을 가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하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한 공은 인정한다. 하지만 경제개발의 공을 박정희의 카리스마로 돌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온 국민이 열심히 일한 덕분이다.”

인권탄압 일삼은 독재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위원장 김재열 신부(61)는 “광복 후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 군대 장교 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 자체가 민족의 불행”이라며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비판했다. 김신부는 또 박정희의 공과에 대해 “‘경제성장 대 인권’의 이분법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고 말했다.

“경제는 속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언제든 발전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인간다운 삶과 자유를 누리는 것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베스트셀러인 ‘조선왕조실록’의 저자 박영규씨(36). 박씨는 지난 7월26일 동아일보에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반대한다는 뜻을 담은 의견광고를 내 화제가 됐었다. 그는 “제대로 된 국가에서라면 쿠데타를 기념하는 흉상이 세워질 수 없다”며 박정희 흉상 철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는 또 “똑같이 독재를 했지만 이승만은 독립운동이라도 했다”며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강하게 비판했다.

아울러 “박정희는 좌익 전력으로 체포됐을 때 자신이 살기 위해 동지들을 밀고하는 등 인간성에도 문제가 많은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4·19 이후 부패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5·16이 앗아갔다. 2공화국이 무능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하는데, 출범한 지 1년도 안 된 정부를 어떻게 그렇게 평가할 수 있나. 2공화국도 경제개발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며 5·16을 비판했다.

“학교 다닐 때 그 사람(박정희)이 사라지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박정희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다. 세뇌라는 것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그 여파가 최소한 30년은 간다고 봐야 한다.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박정희 추모 열기는 그 시대가 제대로 종결되지 못한 데 따른 후유증이다.”

고려대 사학과 박용운 교수(58)는 “쿠데타로 역사를 후퇴시킨 사람에 대해 아무런 역사적 평가 없이 기념관을 세운다는 것은 시기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돈명 변호사(78)는 김지하 국보법위반사건, 김재규 내란음모사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 각종 시국사건의 변호인으로 유명하다. 이변호사는 “박정희 흉상을 계속 놔둔다는 것은 민족의 정서에 유해한 일”이라며 흉상 철거를 “정당한 역사적 행위”로 평가했다. 그는 또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선포하며 죽을 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으려 했다. 그 탓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을 강요당했나”라며 유신독재를 비판했다. 또한 박정희의 경제발전 공적에 대해서도 이론을 폈다. “당시 경제가 어려웠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박정희 방식이 아닌, 더 합리적인 정책을 추진했다면 폐단 없이 경제개발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10·26재평가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한 이변호사는 특별히 김재규의 ‘진실’에 대해 말했다.

“나는 변호사로서 ‘유신체제의 종결을 위해 박정희를 죽였다’는 김재규의 증언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진실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증거도 있다. 김재규 재판은 재판도 아니었다. 일부에서 CIA 배후설이 제기돼 김재규에게 물어보니 펄펄 뛰더라.”

”기념관은 박정희에게도 부담”

경실련 정책협의회의장인 건국대 경제학과 최정표 교수(47). 최교수는 “쿠데타 주역들이 생존해 있는 지금 박정희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며 개발독재론을 비판했다.

“개발독재가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를 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뤘다면 좋았을 것이다. 우리와 비슷하게 고도성장을 이룩한 싱가포르도 우익독재를 겪었지만 오늘날 선진국가 대열에 올라섰다. 그 차이는 우리의 경우 정권유지를 위해 독재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교수는 박정희를 무조건 비판하지는 않았다. 경제발전 공로를 어느 정도 인정하며 특히 지금 위기에 처한 한국 경제를 박정희 탓만으로 돌리는 데 대해선 반론을 폈다.

“박정희의 국가경영철학과 리더십은 인정해야 한다. 개발독재의 폐해가 한국 경제의 구조를 허약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에 일리는 있지만 그후의 위정자들 책임도 크다. 전임자의 잘못을 고쳐나갔어야 했다. 재벌 문제만 해도 그렇다. 박정희는 재벌을 고도성장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정경유착의 폐단이 심화된 건 80년대 이후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소속 박기호 신부(51·시흥4동 성당)는 박정희 부활현상에 대해 “독재가 오래 지속되다 보면 신념화한 추종자들이 생긴다. 그들과 변혁을 두려워하는 세력이 박정희를 살려내고 있다”고 말했다. 박신부는 또 “박정희식 경제발전은 철저하게 정신세계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정신세계는 경제와 달리 하루아침에 복구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건설을 위해 국민을 희생시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며 박정희식 경제발전의 어두운 측면을 강조했다.

동국대 철학과 홍윤기 교수(44)는 박정희를 ‘반국가사범’으로 규정하고 기념관 건립을 ‘헌법을 부정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그는 “박정희의 정책 구조는 한국형 부패구조의 원형”이라며 “박정희 부활현상은 허약한 민주주의에 대한 반발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것은 미숙했던 우리 정치사의 시행착오다. 그는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불행히도 기릴 만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경제를 조금 발전시켰다고, 국민을 있는 대로 짓밟아놓은 그를 기념하는 것은 애들 교육에도 좋지 않다. 그것은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다. 아마 박정희도 지하에서 부담스러워 할 것이다.”

홍교수는 또 “경제발전 방식이 잘못됐다”며 개발독재의 폐해를 지적했다.

“민주화나 인권을 논하기 전에 박정희의 경제논리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은 철저하게 노동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분배가 시작된 것은 1987년의 6월 항쟁 이후다. 새마을운동만 해도 그렇다. 북한의 천리마운동과 경쟁하기 위해 시작한 그 운동은 농민들에게 거대한 환상만 심어주고 결국엔 농촌을 폐허로 만들었다.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11월3일 박정희 기념관 건립 논쟁을 다룬 MBC의 ‘100분 토론’에 출연했던 동국대 사회학과 강정구 교수(55·학단협 대표). 강교수는 경제발전의 공을 박정희에게 돌리는 것을 경계했다.

“당시 경제발전의 배경엔 미국이 주도한 냉전구도가 있다. 미국은 대만과 남한을 주변의 공산주의국가들에 맞서는 보루로 삼기 위해 경제발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5·16 직전 장면 정부는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짜 놓았다. 그것이 박정희 경제발전계획에 토대가 됐다. 당시 세계는 자본주의경제가 팽창하던 때다. 한일협정도 미국의 압력으로 맺은 것이다. 박정희는 그때 그 자리에 우연히 있었을 뿐이다. 박정희 때문에 경제가 발전한 것은 아니다. 누가 대통령이 됐더라도 경제성장은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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