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호

신숙주가 본 ‘죽마고우’ 성삼문

세종의 위업 살리려 나는 살았고 세종의 유훈 지키려 그는 죽었다

  •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hyunmp@aks.ac.kr

    입력2006-03-29 10: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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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숙주(申叔舟·1417~75)와 성삼문(成三問·1418~56)은 세종의 전폭적 지원 아래 집현전에서 ‘신흥강국 조선’의 꿈을 현실로 옮긴 당대 최고의 엘리트 학자였다. 두 사람에게 세종은 현실 세계를 초월한 ‘영원한 주군’이었다. 그러나 세조의 집권으로 가족보다 더 가깝던 두 사람의 우정은 깨지고 신숙주는 부귀영화의 길로, 성삼문은 ‘사육신’의 길로 갈라선다. 신숙주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옛 동무 성삼문을 보며 회상에 젖는다.
    신숙주가 본 ‘죽마고우’ 성삼문

    1445년경 중국 화공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신숙주의 초상화 (보물 제613호).

    신숙주가 본 ‘죽마고우’ 성삼문

    2002년 ‘7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성삼문.



    “네가 어떻게 그 말씀을 잊을 수 있단 말이냐!”

    두 손이 오랏줄에 묶인 채 이미 만신창이가 된 성삼문이 나를 쏘아보며 던진 한마디였다. 시뻘건 쇳조각이 배꼽 위에서 지글지글 끓는 상태에서도 그는 태연히 “다시 달구어 오라, 나으리(세조)의 형벌이 참 독하다”며 독기를 부렸다. 그의 허벅지는 쇠꼬챙이로 뚫린 지 오래고, 팔도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도승지로서 주상(세조) 앞에 입시한 내게 그가 던진 말은 내 가슴을 깊숙이 뚫고 들어왔다.

    “옛날에 너와 더불어 집현전에 숙직할 때 영릉(英陵, 세종)께서 원손(元孫, 단종)을 안고 뜰을 거닐며 말씀하지 않으셨더냐. ‘내가 죽은 뒤라도 너희들은 이 아이를 잘 돌보라’는 그 말씀이 아직 귀에 쟁쟁하거늘, 네가 이토록 악할 줄 미처 몰랐다.”(이긍익, ‘연려실기술’ 단종조 고사본말, 396)



    “도승지는 뒤편으로 피하라.”

    곤혹한 처지의 나를 구해주려는 주상의 배려였다(‘연려실기술’). 하지만 나는 그때 그 자리에서 매죽헌(梅竹軒, 성삼문의 호)에게 따져묻고 싶었다. 세종의 ‘잘 돌보라’는 말씀이 꼭 왕위에 앉혀놓으라는 말씀이었는지를. 오히려 당신 사후에, 또는 적어도 2년이 겨우 지난 뒤 문종께서 훙(薨)하셨을 때, 사직을 보존할 수 있는 분에게 왕위를 돌렸어야 하지 않았느냐고.

    세종께서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임금과 세자에게 유고가 있을 시 반드시 왕자가 섭정하라”(세종실록 32년 1월18일조, 이하 ‘32/1/18’ 형태로 표기)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그런데 문종께서 승하하셨을 때 김종서 등은 ‘유훈’을 어기고 왕자, 곧 수양대군이 아닌 혜빈 양씨(楊氏, 세종의 후궁. 나중에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됨)를 내세우지 않았던가(문종실록 2/5/14). 그 후 단종조에 이르러 수양께서 섭정하게 되셨지만, 처음 잘못 끼운 단추는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켰다.

    박팽년(朴彭年). 그는 나와 동갑내기(1417년생)로 평소 조용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지녀 주위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25세 때(세종 24년, 1442년) 삼각산 진관사에서 박팽년과 나, 그리고 한 살 연하의 성삼문이 왕명을 받들어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를 할 때, 우리는 틈만 나면 시를 지어 주고받았다.

    성삼문이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하면, 박팽년은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랴 /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마다 좇을소냐”(‘추강집’)라고 받는 식이었다.

    무엇을 향한 절개인가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선비의 절개와 지조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향한 절개요 지조냐가 더욱 중요했다. 태조 임금이 세우시고, 태종과 세종대왕에 이르러 기초가 닦인 이 조선왕조를 반석 위에 얹어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런데 지금은 간사한 환관들이 힘을 얻고 더벅머리 선비들이 국정을 좌우하는 형국. 즉 “뱀을 손으로 움켜쥐고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과 같은 위태로운 형세”(신숙주, ‘제고화병십이절’)가 아닌가. 무엇보다도 세종께서 물려주신 “팔진도(八陣圖, 유비와 제갈량이 이룩한 위업)”를 계승해야 했다.

    “불 꺼질 듯 한나라 지킬 수 없었는데 / 위험한 때 당하여 명 받잡고 자기 한 몸 잊었네 / 사람을 논함에 꼭 성패를 따질 것이 아니니 / 천고에 아직도 팔진도가 전해지고 있으니.”(신숙주, ‘제갈량’)

    그 점에서 나의 조부 신포시(申包翅)의 판단은 옳았다. 조부께서는 끝내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킨 성삼문의 조상 성인보와 다른 길을 택하셨다. 당신은 고려가 망했을 때 잠시 은거했지만 세종의 정치를 보고 다시 출사하셨다. 이미 고려왕조보다 더 뛰어난 왕조가 탄생했는데, 굳이 왕(王)씨 가문에 절의를 지킨다는 것은 ‘독야청청하다’는 허명을 위한 일일 뿐이다.

    특히나 매우 높은 수준의 위민(爲民)정치를 베푸는 군주가 나타났지 않았는가. 적어도 내가 배운 “인을 베푸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해야 하는” 군자는 특정 왕조나 군주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 존재가 아니었다. 모름지기 참된 군자는 “얼음 깨고 펄펄 뛰는 잉어를 얻는” 것과 같은 기상을 지니고, “나라의 안태(安泰)”를 우선시하며 “성은(聖恩)의 시절을 위해 마음을 다 바치는” 충성된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신숙주, ‘보한재집’ 권12; 권9).

    기상과 충성으로 말하자면 사실 김종서 대감만한 인물도 없다.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고, 7년 동안의 함길도 근무에서 보듯이 성은에 대한 충성심이 누구보다 뛰어났다. 김종서 대감은 특히 6진(鎭)을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세종 임금의 지시를 받아 “오랑캐의 침입을 막아낼 방략”을 입안한 것에서 보듯 뛰어난 군사 전략가였다.

    조선 건국기의 북방 방위전략은 수비 위주의 ‘주진군(主鎭軍)체제’에서 공격과 수비를 병행할 수 있는 ‘익군(翼軍)체제’로의 전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세종임금 때 만들어진 새로운 방략은-나중에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익군체제에 공격편제를 더욱 강화해 ‘적을 제압해 승리를 거두는(制勝)’ 공세적인 방략체제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김구진 외 ‘제승방략의 북방방어체제’ 1999, p.15).

    1439년(세종21) 7월 “북방 오랑캐의 침입에 대응할 방략을 자세히 갖추어 보고하라”(21/7/21)는 세종임금의 하명이 있었다.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 대감과 김 대감의 종사관(從事官)이던 나는 6진의 지리·지형을 자세히 조사한 끝에 그곳에 적합한 방략을 고안해 올렸다. 그것은 종래의 열진방어(列鎭防禦) 태세 외에 6진 대군분(大軍分)과 3고을 분군(三邑分軍)이라는 공격전술이 추가된 것이었다.

    6진 대군분(大軍分) 편제는 큰 강(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오랑캐 지역을 공격할 때 사용되는 작전 지침이었다. 3고을 분군 편제는 정벌군이 만주에 투입되었을 때 전방의 정벌군을 계속 지원하거나 다른 오랑캐들이 후방지역을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작전 지침이었다.

    무엇보다 이 체제는 거미줄처럼 세밀한 연락망, 파수(把守), 복병 등을 통해 적진의 변화를 알리는 봉화체제를 그 생명으로 하고 있었다. 파저강 토벌에서 보듯이, 유사시에 조정에 긴급 연락하여 정벌군이 출동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비록 지친(至親)과 자제라 하더라도 이 방략에 대해서는 완전히 비밀로 하라”(19/3/11).

    세종임금의 특별 전지에서 보듯, 이 제승방략은 중대한 국가기밀이었다. 만약 이 기밀이 새나갈 경우 국가안보는 물론이고 자칫 왕실의 안녕도 위태로울 수 있었다. 뒤의 ‘이징옥의 난’처럼 국가기밀의 누설은 곧바로 나라의 안태를 위협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幾而不密殆).

    내가 보기에도 수비와 공격을 유연하게 전개하는 이 방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1460년(세조6) 7월 오랑캐 낭볼칸(浪兒罕)이 침입해왔을 때 주상께서는 나를 함길도 도체찰사로 임명하면서 이 방략을 내려주셨다.

    당시 나는 대군분 편제에 따라 함길도의 토착군사 1만2800명을 동원했다. 거기에 강원도 등지의 군사까지 합세했다. 보병과 기병 다수로 구성된 혼합군사 체제는 비록 짧은 시간에 편성되었음에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세조실록 6/9/11).

    내가 무장이 아닌 사람으로서 성공적으로 작전을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김종서 대감의 덕분이었다. 즉 김 대감은 6진을 개척하면서 조정 대신들과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 나와 함께 북변(北邊)의 정황을 세밀히 조사해 세종임금께 보고하곤 했다. 그 보고서를 만들 때 김 대감이 빠르게 구술(口述)하면 내가 붓을 잡고 즉시 받아 적곤 했다. 김 대감은 그 글을 보고서 “내 문장도 실로 자부하는 바이지만, 그대의 글재주 또한 쉽게 얻기 어려운 문장”이라고 감탄하곤 하셨다(‘연려실기술’ 권3, 세종조고사본말).

    이처럼 문무를 겸비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충일한 김종서 대감이야말로 내가 존경하는 분이었다. 그러나 문종 임금이 즉위한 다음부터 우리의 신뢰는 무너지고 있었다. 선택한 주군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신수찬!” 운명을 바꾼 부름

    “신수찬(申修撰)!” 낯익은 목소리였다(‘수찬’은 사서를 편찬하던 홍문관의 벼슬 이름). 고개를 돌려보니 수양대군께서 빙긋이 웃고 계셨다. 말에서 내려 읍(揖)을 하자, “어찌 집 앞을 지나면서 들어오지도 않느냐”고 말씀하셨다. 마침 정수충과 술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수양은 내게 한잔을 권하면서 대뜸 “사람이 죽지 않으려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사직(社稷)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고 물으셨다(단종실록 0/8/10). ‘사직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그 말씀, 근래 수양께서 애용하는 표현이었다.

    문종께서 훙서(薨逝)하신 후 황보인·김종서·정분이 의정부를 독차지하고, 시문에 뛰어난 안평대군에게 선비들의 관심이 쏠렸다. 이 때문인지 수양대군은 자신과 함께 ‘사직을 위해 죽을’ 동지를 규합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는 듯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선택의 때가 왔음을 느꼈다. 세종임금께서 “신숙주는 큰일을 맡길 만한 사람”(문종실록 1/8/5)이라고 칭찬하신 때문인지, 이미 양측에서 여러 차례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이번처럼 ‘세력’의 최고 실력자로부터 ‘함께 죽을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직접적 제의를 받은 적은 없었다. 약간 뜸을 들인 다음 나는 작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장부로 태어나 아녀자(兒女子)의 수중(手中)에서 편히 죽는다면 그것 역시 세상물정 모르는(在家不知) 자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일생 가운데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오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나의 선택이 잘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특히 상대적으로 열세인 세력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운명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 모험이었다. 사람의 생애에는 저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인 ‘명(命)’이 있다(태어나고 죽는 일 등). 하지만 불확실하지만 내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운(運)’의 제비를 나는 뽑아든 것이다. 이럴 땐 내가 ‘역사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그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내게 대군께서는 선뜻 “그러면 중국에 함께 가자”고 제안하셨다(단종실록 0/8/10).

    “안평은 적수가 못돼”

    수양대군이 ‘중국행’을 결단한 것은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물론 집현전 교리 권람과 같은 사람은 극구 반대했다. 중국에 있는 사이 안평대군 세력이 선수(先手)를 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안평이 나의 적수가 못 되고, 황보인·김종서 또한 호걸이 아니니 (내가 중국에 가 있는 사이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임금(단종)만 보호하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단종실록 0/9/10)

    수양대군의 말이었다. 수양은 또한 나름의 대책을 세워놓았다. 즉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과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를 함께 데려간 것이다. 그런데 수양대군의 이처럼 호기로운 결정은 인사권을 쥐고 흔들며 갖가지 구설에 오른 김종서 대감과 대조되었다. 이 때문에 인심을 많이 얻었다. 안평대군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길창군 권근의 손자 권람은 문과에 급제한 후, 집현전에서 수양대군과 함께 ‘역대병요(歷代兵要)’의 음주(音註)를 편찬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됐다. 그는 수양께서 “나의 장자방(張子房, 장량)”이라고 칭했던 한명회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 세력규합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평소 “수양대군이 비록 제세(濟世)의 재능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친분을 맺은 세력이 없어서 필부와 같다”(단종실록 0/7/28)고 본 한명회는 수양을 만난 다음부터 갖은 계책을 내놓았다. 한명회는 특히 무인(武人)과 장사(壯士)를 끌어모으는 재주가 있었다.

    신숙주가 본 ‘죽마고우’ 성삼문

    경남 합천 해인사에 있는 조선 제7대 임금 세조(世祖)의 전신 화상(가운데 인물). 즉위 4년인 1458년 제작됐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탓에 번번이 과거에 떨어졌다. 다행히 관포지교로 지내던 권람의 추천으로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만났고, 홍달손·양정 등 무인 30여 명을 우리 쪽으로 끌어왔다. 사병(私兵)을 거느릴 수 없는 국법이 있었다 하지만 문종 사후 시절이 수상하다 보니 안평대군을 비롯해 김종서 등 이른바 ‘요인’들은 모두 무인과 장수를 개인적으로 거느리고 다녔다. 언제 누가 선수(先手)를 쓸지 모르는 불안한 정국이 계속되었다.

    “역대의 왕조는 그 수명이 짧기도 하고 길기도 했다. 하지만 말기엔 임금이 사람을 잘못 썼다는 공통점이 있다.” 수양대군께서 한명회를 만났을 때 하신 말씀이다.

    “다행히 주상(단종)께서는 비록 나이 어리시지만 큰 도량이 있으니, 잘 보좌하기만 한다면 족히 수성(守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대신(大臣)이 간사하여 어린 임금을 부탁할 수 없으며, 또 도리어 두 마음을 품어 선왕의 뜻을 저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계유정난, 그 길고 긴 하루

    근래 부쩍 잦아진 김종서 일파의 비밀 회동 횟수와 안평대군의 오만한 거동을 지적한 말이었다. 한명회가 이 자리에서 말한 것처럼 “안평대군이 대신들과 결탁하여 장차 불궤(不軌)를 도모하려는 것은 길 가는 사람도 다 아는 일”이었다. 하지만 워낙 비밀리에 진행되는 일이라서 “그 역모를 드러낼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단종실록 1/3/21).

    1453년(단종1) 10월10일 마침내 ‘거사일’이 밝았다. 그보다 앞선 10월2일 황보인이 공(公, 수양대군)이 거사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김종서에게 비밀 편지를 보낸 사실이 알려졌다. 안평대군의 심복인 조번을 한명회가 공들여 매수한 덕분에 우리는 그쪽의 동향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다행히 김종서는 황보인의 편지를 받은 뒤 느긋한 반응을 보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 정보를 접하고 수양께서는 “열흘 안에만 거사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저들이 모여서 회의하는 데 사흘, 대책을 마련하는 데 사흘, 그리고 약속하는 데 사흘이 걸린다는 판단이었다(단종실록 1/10/2).

    우리는 ‘거사일’을 여드레 후인 10월10일로 잡았다. 새벽에 공께서 권람·한명회·홍달손을 불러 “오늘은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히 하려고 한다. 내가 깊이 생각해보니, 간당(姦黨, 간사한 무리) 중에서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자로는 김종서 같은 자가 없다. 만일 저 자가 먼저 알면 일이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한두 역사(力士)를 거느리고 곧장 그의 집으로 가서 선 자리에서 베고 알리겠다”고 말했다.

    공은 권람 등과 약속한 대로 궁궐 후원에서 무사들을 모아 활쏘기를 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해가 저물자 공은 무사들을 이끌고 후원 송정(松亭)에 이르러 말했다.

    “지금 간신 김종서 등이 권세를 희롱하고 군상(君上)을 무시하며 비밀리에 이용(안평대군)에게 붙어서 장차 불궤한 짓을 도모하려 한다. 이것들을 베어 종사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이 말이 끝나자 다들 의아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송석손 등이 겨우 나서서 “마땅히 먼저 (주상께) 아뢰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자들은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반대했다. 이처럼 의견이 분분하였고 북문을 따라 도망치듯 나가는 자도 있었다.

    수양대군이 당황해 옆에 있던 한명회에게 “반대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한명회는 “길 옆에 집을 지으면 3년을 지어도 이루지 못하는 법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큰일은 어떠하겠습니까. 일에는 역(逆)과 순(順)이 있는데, 순으로 움직이면 어디를 간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모의(謀議)가 이미 먼저 정해졌으니, 지금 의논이 비록 통일되지 않더라도 그만둘 수 있습니까. 청컨대 공이 먼저 일어나면 따르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옆에 있던 홍윤성도 “군사를 쓰는 데 있어 해(害)가 되는 것으론 이럴까 저럴까 결단 못하는 것이 가장 큽니다. 지금 사기(事機)가 심히 급박하니, 만일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른다면 일은 다 어그러질 것입니다”라고 결단을 촉구했다.

    하지만 송석손 등은 수양대군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면서 주상께 먼저 알릴 것을 여러 차례 청했다. 그러자 수양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너희들은 다 가서 먼저 고하라. 나는 너희들을 의지하지 않겠다.”

    마침내 수양은 일어서서 말리는 자를 발로 차면서 하늘을 가리켜 맹세했다.

    “지금 내 한 몸에 종사의 이해가 매었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장부가 죽으면 사직(社稷)에 죽을 뿐이다.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나는 너희들을 강요하지 않겠다. 만일 고집하여 사기(事機)를 그르치는 자가 있으면 먼저 베고 나가겠다. 빠른 우레에는 미처 귀도 가리지 못하는 법이다. 군사는 신속한 것이 귀하다. 내가 곧 간흉(姦凶)을 베어 없앨 것이니,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드디어 수양께서 중문으로 나오자 부인(나중의 자성왕비)께서 갑옷을 가져와 손수 입혀드렸다.

    갑옷을 입은 수양대군은 단기(單騎)로 가동(家童) 임어을운만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갔다. 수양이 김종서 대감의 집 동구(洞口)에 이르렀을 때였다. 무사 세 사람이 무기를 든 채 서로 귀엣말을 하고 있었다. 이날 김종서는 역사들을 불러 모아 음식을 먹이고 무기를 정비하다가 수양대군이 도착하자 사람을 시켜 담 위에서 엿보게 하면서 “사람이 적으면 나아가 접하고, 많으면 쏘라”고 지시했다. 엿보는 자가 “적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칼 두어 자루를 뽑아 벽 사이에 걸어놓고 나왔다. 그 때부터 미복(微服, 남루한 옷)을 입은 양정·유서가 칼과 활을 숨기고 수양대군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정승의 사모 뿔 좀 빌립시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대감의 집에 이르니 수양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온 김 대감의 아들 김승규가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다가 수양을 보고 인사를 했다. 수양대군이 좀 보기를 청한다고 하자 김승규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김 대감은 한참 만에 수양대군더러 들어오라고 말했다. 수양이 “해가 저물었으니 문에는 들어가지 못하겠고, 다만 한 가지 청할 게 있어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김 대감이 두세 번 더 들어오기를 청했으나, 수양은 끝내 거절했다.

    이에 김 대감이 부득이 앞으로 나왔다. 그때 마침 수양은 자신의 사모(紗帽) 뿔이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급히 오느라 채비를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수양은 웃으면서 “정승의 사모 뿔 좀 빌립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 대감이 창황히 사모 뿔을 빼서 주었다. 아마도 청할 것이 사모 뿔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잠시 긴장이 누그러진 상태에서 수양이 말했다.

    “종부시(宗簿寺, 왕실의 보첩을 관리하던 관청)에서 영응대군의 부인을 탄핵하려고 하는데 정승께서 그 일을 지휘하십니까?”

    이때 가동 임어을운이 앞으로 나오려 하자 수양이 짐짓 그를 꾸짖어 물리쳤다. 김종서 대감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김승규와 얘기를 나누던 사람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수양이 그들에게 “은밀한 부탁이 있으니 너희들은 물러가라”고 말했다. 그들은 마지못한 듯 멀찍이 물러섰다.

    수양은 “부탁을 드리는 편지가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종자(從者)에게 편지를 받아 김종서에게 전했다. 김종서가 편지를 받아 물러서서 달빛에 비춰보는데, 수양의 독촉을 받은 임어을운이 철퇴로 그를 내리쳤다. 옆에 있던 김승규가 깜짝 놀라 아버지 위에 엎드리자 뒤따라오던 양정이 칼을 뽑아 내리쳤다. 이날 밤 김종서는 다시 깨어나서 김승규의 처가에 숨었다가 다음날 양정 등에 의해 살해되었다(단종실록 1/10/10).

    죽고 사는 건 순간의 선택

    그날 밤 벌어진 참혹한 일들을 겪으면서 나는 불과 14개월 전 선택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김종서 대감과의 인연으로 ‘그 편’이 되었더라면 나는 ‘네 겹으로 둘러싸인 문’들을 지나다가 ‘제3문’쯤에서 철퇴를 맞아죽었을 것이다. 아니 집현전 뒤편의 경회루 어디쯤에서 베임을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우연히도 나는 그때 수양대군 집 앞을 지나갔고, 술잔을 받았으며, ‘사직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의기에 투합했다.

    우리들은 “황보인은 나약하고 김종서는 전횡(專橫)한다”(단종실록 1/6/28)면서 김종서의 권력남용을 비판했다. 심지어 ‘세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미화하려는 그를 보면서 그 옛날 사헌부 관리로서 불의에 항거하던 그 사람인가 회의(懷疑)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제아무리 정치세계가 비정하고 권력은 냉혹한 것이라 해도 함께 ‘수성의 치세’를 일궈온 동료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집현전의 생각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말을 잃었다. 그 활발하던 집현전도 냉랭하기 그지없는 거대한 책 창고로 변하고 말았다.

    “이내 몸은 맡겨진 것 같으니 / 명을 따르며 스스로 편안해하리 / 내 마음 이와 같으니 / 죽고 사는 것을 뉘라서 어렵다 하랴 / 인생에 누군들 근심 없으랴만 / 걱정 생기면 술 마시고 풀어버린다….”(성삼문)

    “세상 만사 정신을 뒤흔들어 늘상 고단하기만 하니 / 그저 수향(睡鄕)이 돌아가 쉴 만한 곳 / 또 쉰다 해도 돌아갈 곳 알지 못한다면 / 뉘라 능히 다시 도원 골짜기 들어갈 수 있나.”(신숙주)

    죽고 사는 것이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고, 우리의 몸은 이미 누군가에게 맡겨져 있다. 이제 다시 ‘도원 골짜기’로 돌아갈 수 없는 우리의 처지를 함께 슬퍼하며 술이나 마실 수밖에 없었다.

    집현전에서 함께 밤을 새워가며 토론하고 어진 임금께 정책을 제안하던 일들이 문득 꿈만 같이 느껴진다. 좋은 울타리 안에서 서로를 경쟁적으로 자극하면서 논쟁하며 겨루었다. 친구로서 어우러지던 시절이 엊그제 아니던가.

    새로운 정책과 아이디어의 보고(寶庫)

    집현전에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우리는 세종임금의 명을 받아 집현전에서 훈민정음을 해석하고 범례(凡例)를 짓는 일과 운회(韻會) 언문으로 번역하는 일도 함께 했다(세종실록 26/2/16; 28/9/19). 집현전 안의 노학자들은 훈민정음을 만드는 일이 “대국을 섬기고 중화(中華)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럽다”고 했다(26/02/20).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대개 지세(地勢)가 다르면 풍습과 기질이 다르며, 풍습과 기질이 다르면 호흡하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안팎 강산이 저절로 하나의 구역을 이루어 풍습과 기질이 이미 중국과 다르니 어찌 호흡하는 것이 중국과 동일하겠는가.”(세종실록 29/9/29)

    중국과 풍습이 다르고 호흡을 달리하는 우리나라가 따로 문자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언문창제 사실이 중국에 전해지면 자칫 외교적 문제로 비화할 수도 있다는 최만리 등의 주장은 옳았다. 세종께서 공들여 쌓은 조선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夷狄)과 같아지려는 것”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었다.

    내가 성삼문과 함께 당시 유배 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의 도움을 얻기 위해 요동을 열세 차례나 내왕하면서 알게 된 것은 주변 국가들이 모두 고유한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이적이라고 얕보는 거란(920∼924년)과 서하(1036년), 여진(大字는 1119년, 小字는 1138년)과 일본조차 자국의 언어로 대화하며 자국의 정사(政事)를 기록하고 있었다.

    중원의 역대 제왕들이 그랬듯, 정치의 통일 이후 우선 해야 할 일이 언어의 통일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생각을 공유할 수 없고, 생각을 함께할 수 없으면 공동체 의식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진과 일본이 자국의 언어를 가지면서 정치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이제 새 왕조를 개창한 지 50여 년이 되었고, 새 왕조가 과거와는 다른 차원의 국가라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도 우리글은 필요했다. 세종께서 용비어천가를 만드시고, 백성을 널리 가르치시며(訓民), 공문에 우리 글(正音)을 사용하게 조치하신 것도 모두 이런 까닭이었다.

    집현전은 이런 모든 일을 의논하고 협의하는 터전이자,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전을 연구하는 도서관이었다. 우리는 조선을 작지만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한 정책방안들도 제시했다. 사실 우리들 각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그러저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우리들이 일단 한 곳에 모여 토론하자, 우리가 미처 예측하지 못한 아주 새로운 아이디어와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까다롭고도 예민한 문제를 살펴 답변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었다. 폐단을 구제하는 급무, 즉 사창(社倉)제도 시행 여부(30/5/15), 사형수의 처벌시기(12/3/2), 관원들의 고과방법(12/12/27), 외직(外職)을 피하려는 관원을 처벌하는 방법(13/8/6), 명나라 황제가 사로잡힌 가운데 새 황제가 등극했을 때 취해야 하는 예법(31/10/1)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국가의 일을 기록하고(5/6/24) 치국(治國)에 도움이 되는 서적을 편찬하는 일은 물론이고, 경연(經筵)을 주관해야 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야말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해야만 했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세종께서는 집현전을 “국가의 인재가 모인 터전(國家儲才之地)”이라 부르셨다. 재위 16년부터는 우리들이 강독한 분량을 기록했다가 월말에 보고하게 하는가 하면, 매월 열흘에 한 차례씩 당상관이 시문의 글제를 내어 시험 치르게 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기도 했던 당신께서 공부의 방향을 제시하신 것이다.

    일등으로 입격한 시(詩)와 문(文)을 가려서 월말에 모두 등사해 보고하도록 함으로써 격려와 경쟁을 유발하기도 하셨다(16/3/17). 상께서는 우리들이 다른 관청으로 옮기는 것을 억제하셨다. 연구는 온축(蘊蓄)의 시간을 필요로 하며, 숙성되고 정제된 자료만이 ‘나라를 위해 소용’된다고 보셨기 때문이다.

    “근래 들으니 집현전 관원 중에 대간(臺諫, 사헌부·사간원)과 정조(政曹, 이조·병조)로 진출을 희망하는 자가 자못 많다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묻기도 하셨다. 그리고 타이르셨다.

    “그대들은 마음을 태만하게 갖지 말고 학술을 전업으로 하여 종신토록 이에 종사할 것을 스스로 기약하라.”(16/3/20)

    아! ‘종신토록 학술에 전업하라’는 그 말씀.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 피 튀기는 살벌한 정치세계의 현장에 비하면.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없는 법”

    “네가 이미 신(臣)이라 일컬었고, 또 내게서 녹(祿)을 먹었으니, 지금 신이라 일컫지 않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다시 주상(세조)의 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집스레 주상에게 상감(上監)대신 ‘나으리(進賜, 종친에 대한 세칭)’라 부르는 박팽년에 대한 진노 섞인 꾸짖음이었다. “나는 상왕(단종)의 신하로 충청감사가 되었고, 나으리에게 올린 장계에는 한번도 신이라 일컫지 않았소.”

    장계를 조사해보니 그의 말대로 정말로 ‘신(臣)’이라는 글자는 한 자도 없었다. 모두 ‘거(巨)’자로 적혀 있었다.

    “녹봉도 전혀 먹지 않았다”는 그의 말대로 녹봉은 그의 집 창고에 따로 보관되어 있었는데 어느 달 어느 날 받았다는 것이 일일이 표시되어 있었다. “독한 놈이로고! 그의 입을 짓찧으라”고 명하면서, 주상이 다시 성삼문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은 왜 모반을 하였는가?”

    한 차례 물바가지를 뒤집어쓰고 겨우 의식을 차린 성삼문에게 던진 말씀이다.

    “모반이라니 당치 않소. 본 임금을 복위하려는 것이 어찌 반역이란 말이오. 자기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 모반이고, 나으리처럼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여 빼앗는 것이 충성이란 말이오?”

    주상이야말로 모반자라는 말이었다.

    “그러면 처음 선위(禪位)받을 때 저지할 일이지, 지금껏 내게 맡겨두었다가 이제 와서 나를 배반하는 이유는 뭐냐?”

    주상의 이 말에 성삼문은 “사세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오. 나으리가 평소 곧잘 주공(周公)을 끌어댔는데, 주공도 이랬습니까”라고 답했다. 오히려 주상을 꾸짖는 형국이 되었다. 왕망(王莽)의 예를 거론하기도 했다. 후한 말기에 주공의 이름을 빌려 스스로 황제에 올랐지만, 끝내 나라를 망친 ‘왕망의 길’을 가고 있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너도 신(臣)이라 일컫지 않고 나으리라 하는구나. 하지만 네가 이미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앞뒤가 전도된 것이 아니더냐?”

    주상께서 옹색한 지경에 몰리신 것이 확실했다. 박팽년에게 했던 말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취조를 받는 성삼문이 오히려 당당했다.

    신숙주가 본 ‘죽마고우’ 성삼문

    성삼문의 신주를 모셨던 요어(가마, 충남도 지정 민속자료 제20호).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가 어떻게 나를 신하로 삼을 수 있겠소. 무릇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는 법이오. 내가 또 나으리의 녹봉을 먹지 않았으니, 만일 믿지 못하겠거든 나의 집을 적몰해 따져보시오.”(‘연려실기술’ 396).

    그들은 똑같은 일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희안도 역모 사실을 아느냐?”

    주상께서 다시 캐묻자 성삼문이 대답했다.

    “이미 우리 아버지도 숨기지 않았는데, 하물며 누구를 숨기겠소. 그러나 그는 실지로 알지 못하오. 나으리가 선조(先朝)의 명사를 다 죽이고 이 사람만 남았는데,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남겨두어 쓰시오.”(‘연려실기술’ 398).

    “나으리, 어서 목을 치시오!”

    “내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김종서 등을 처단할 때 너는 이미 나와 같은 배를 타지 않았더냐. 불궤를 부인하고 내게 돌아오면 모든 것을 덮어주리라.”

    그의 재주를 아낀 주상의 권유는 사뭇 애원에 가까웠다. 급기야 일찍이 태종께서 정몽주에게 부르던 노래까지 읊었다. 그러자 성삼문은 ‘단심가’로 회답했다(‘연려실기술’ 444).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성삼문의 대답은 오히려 담담했다. 어떤 미움도 원망도 없는 말투였다.

    “나으리, 어서 내 목을 치시오. 나으리는 나으리의 일을 할 따름이고, 나는 내 길을 갈 뿐이오.”

    아! 어디에서부터 우리의 길은 갈라졌던가. 우리는 시종 같은 길을 걸어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늘과 땅을 사이에 두고 서 있지 않은가. 우리는 다 같이 21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다. 성삼문은 세종 20년(1438년)에, 그리고 나는 그 이듬해에 문과에 합격했다. 이후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관직생활을 계속했다.

    비록 내가 그보다 5년 먼저 집현전에 들어갔지만(세종23) 우리는 집현전에서 그야말로 잔뼈가 굵고 우정을 키워온 동지였다. 내가 중국에 가면 그도 따라갔고, 그가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엔 나도 따라갔다.

    우리는 함께 사가독서를 하며 “밭갈이하는 자는 밭두둑을 양보하고, 길가는 사람은 길을 양보하며, 늙은이는 짐을 들지 않는” 그런 세상을 얘기했다(‘치평요람’ 22). 비록 천승(千乘)의 나라이지만 어진 정치를 펴서 안으로 민심을 얻고 밖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작지만 강한 나라(强小國)’를 꿈꿨다. 일찍이 관중이 말했고 맹자가 확인했던 것처럼, 국가의 강하고 약함은 영토의 크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를 잘하면 영토가 작은 나라라 할지라도 (영토가 큰 나라보다도) 국력은 더 클 수 있기(國小而政大者 國益大)” 때문이다(‘관자’ 패언, 228).

    다만 1443년(세종25) 내가 26세의 나이로 통신사 일행을 따라 일본에 갈 때만은 예외였다. 부인과 가족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성삼문과 내가 유일하게 떨어져 있던 때였다. 당시 나는 오랫동안 앓다가 일어난지라 세종께서 염려하셨다. 하지만 나는 “신의 병이 완쾌되었으니 어찌 사양하오리까”라며 일본으로 갔다. 떠나는 날 박팽년, 하위지, 성삼문, 이개 등 ‘오랜 벗들(舊友)’이 마련해준 송별회는 친형제의 그것보다 애틋했다.

    지인들이 경상도 수령과 만호에게 부탁하여 기생 10여 명을 우리에게 붙여주었다. 군자가 비록 친하면서도 마음을 뺏겨서는 안될 것이 해당화의 요염(妖艶)인지라, 우리는 시와 악을 더불어 즐겼을 뿐이다. 그럼에도 사헌부 이종겸은 우리를 탄했다. 나와 통신사 변호문이 2~3일간이나 따라오는 기생들을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께서는 “우리나라의 인심에서는 대개 이와 같이 하는 경우가 많은데, 수령과 만호가 왕명을 받들어 멀리 바다를 건너는 사신을 위로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또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용서 못할 죄도 아니니 어찌 파직하랴”며 우리를 변호하셨다(25/5/28).

    이징옥이 난을 일으켰을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듯했다.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이 새로 제수되어 내려온 박호문을 처단하고 반기를 들었을 때(단종실록 1/10/25) 조정은 아연 긴장했다. ‘제승방략’으로 훈련된 정예 군사가 도성으로 쳐들어오면 조정의 위태로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북변의 안보는 어찌될 것인가. 종성 도호부사 정종의 재치와 천우신조로 차단되었지만 이징옥의 난은 이 나라의 앞날을 심히 우려스럽게 한 사건이었다.

    옥새를 끌어안고 울다

    성삼문과 나는 조정에서 올린 계유년 정난(靖難)의 공신 명단에서 우리의 이름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했다(단종실록 1/11/18).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6일 후에 올린 성삼문의 상서 내용이 이상했다. 그는 사간원 좌사간의 직책에서 물러나려 했다(단종실록 1/11/24).

    그의 속마음을 읽은 주상(세조)이 한 달여 만에 반격을 가했다. “성삼문은 백관(百官)이 왕비를 맞아들이도록 청할 때, 이름을 얻고자 꾀하여 전후에 말을 바꾸었으니, 그 고신(告身)을 거두고 국문(鞫問)하라”는 지시가 그것이었다(단종실록 2/1/23).

    하지만 주상의 목적은 그를 처벌하려는 데 있지 않았다. 당신께서는 그를 회유하려 하셨다. 나의 간곡한 요청도 있었지만, 집현전 학사를 다수 포용하여 당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으신 듯했다. 용서(25일)와 처벌(28일)을 반복하면서 당신께서는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다.

    그러나 1455년(단종3년) 윤6월11일. 단종께서 “이 무거운 짐을 풀어 우리 숙부에게 부탁하여 넘긴다”면서 선위했을 때(세조실록 1/6#11), 우리의 길은 완전히 갈라졌다. 그날 그는 승지로서 옥새를 보내라는 전지를 받자 옥새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박팽년은 경회루 못에 빠져 죽으려 했다. 가까스로 성삼문이 “아직 상왕이 살아 계시니 다시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고 설득했다(‘연려실기술’ 390).

    성삼문 등이 ‘불궤를 도모하는 일’ 또한 아슬아슬했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연회를 베푸는 날(세조2년 6월1일) ‘거사’를 도모하려 했으나, 주상께서 공간이 비좁다면서 늘상 수반하는 별운검(別雲劍, 운검을 차고 임금을 옆에서 모시던 무관의 임시벼슬)을 없애라고 하명하신 것이다. 성삼문이 승정원에 건의해 별운검을 없앨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최종적으로 살펴본 뒤 취소시켰다. 서로 다른 곳에 서 있지만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성삼문 등은 후일 관가(觀稼, 임금이 농작물의 작황을 돌아보던 일)할 때 노상에서 거사하기로 작정했는데 정창손과 그의 사위 김질이 이를 고변하여 실패로 끝난 것이다(세조실록 2/6/2).

    세종의 팔진도를 되살리기 위해

    “신숙주는 나와 좋은 사이다. 하지만 죽여야 마땅하다.”

    성삼문이 불궤를 꾸미면서 지시한 말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 섰더라도 그와 똑같이 말했을 것이다. 지난 계유정난 때 그러했던 것처럼, 그와 내가 각기 선택한 길은 처음엔 흐릿하게 개연성만을 보이다가, 다가갈수록 뚜렷해졌다. 처음엔 보이지 않던 상황들이 윤곽이 드러나면서 결과적으로 나에게는 ‘충신’의 이름이, 그에겐 ‘역도’의 이름이 씌워졌다.

    신숙주가 본 ‘죽마고우’ 성삼문
    朴賢謀
    ●1965년 전남 함평 출생
    ●서울대 박사(정치학)
    ●現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연구실장
    ●저서 : ‘정치가 정조’


    성삼문과 박팽년이 그처럼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운의 제비’를 뽑았고, 그 결과를 의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자네가 살아남아서 조선의 부흥을 이룬다면 세상은 나라를 위해 살아남은 신하가 있다며 칭찬할 걸세.”

    살아남은 자에게는 역사적인 사명이 있다. 제갈량이 선왕 유비와의 약속을 지켰던 것처럼, 세종의 ‘팔진도’를 되살리고, 안착시키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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