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하수도법에 의하면 지방자치단체의 장(특별시장·광역시장·시장 또는 군수)은 하수의 유역별로 20년 단위 ‘하수도 정비기본계획’을 수립하고, 5년마다 그 타당성을 검토해, 결과에 따라 공공 하수도의 시설규모 및 배치, 방류 지점 등을 고려해 공공하수도를 설치해야 한다.
1983년 처음 하수도 기본계획이 수립된 이후 현재 서울 지역의 하수도 시설은 10년 설계 빈도로 시간당 75㎜ 이내의 비를 처리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과거에는 이 정도 수준이면 빗물 관리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 기준으로는 더 이상 폭우를 감당할 수 없다. 지난해 추석 연휴 폭우를 겪은 뒤 서울시는 이 기준을 시간당 95㎜(30년 설계 빈도)로 상향 조정했지만, 기준만 올렸을 뿐 현재까지 서울의 하수관은 대부분 시간당 71~75㎜의 우수를 처리하는 규모다. 실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이밖에도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안전불감증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건물 옥상에 철탑 구조물을 세우면서도 대부분 태풍을 생각하지 못한다. 폭설과 태풍 때문에 비닐하우스 붕괴가 걱정된다면 그에 대비해 비닐하우스를 좀 더 튼튼하게 지어야 한다. 비용 부담도 없다. 적은 비용으로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별도 대책을 마련하면 된다. 파이프를 강한 것을 쓴다든지 더 내구성 강한 자재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일이다.
자가용을 마련하면 대부분 자동차 손해보험에 가입한다. 스스로 위험에 대비하겠다는 속셈이다. 그러나 본인이 살고 있는 집이나 자가 소유 건물을 개보수하거나 신축할 경우에는 전문 지식이 없다는 이유로 시공업자에게 전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공업자는 비용절감을 위해 대부분 인허가상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전문 엔지니어를 찾기보다는 본인의 경험을 내세워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 기준을 무시하고 시공한다. 그러다보니 건물의 안전성을 보장해주는 설계기준(보험)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주기적으로 건강 진단을 받는다. 평생 병원에 드나들지 않던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 건강진단을 받는다. 그런데 건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면 병이 들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건물은 그저 막연하게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안전하게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 믿는다면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건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이 든다. 그래서 정기적인 건강진단이 필요하다.
건물도 나이를 먹는다
지난 3월, 건축 설계와 인허가를 담당하는 건축사 100여 명은 3층 이상 건물 건축 허가를 받을 때 제출하는 내진설계확인서를 허위로 작성한 사실이 무더기 적발돼 서울중앙지검에 고발당했다. 가뜩이나 이웃나라 일본이 심각한 지진 피해를 당해 우리나라도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우려가 나오는 시점에서, 전문 기술자의 안일한 태도를 보여준 단적인 예다. 정부에서 1988년부터 도입한 내진설계확인서는 요식 행위를 위한 절차는 아니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 대중, 심지어 다수 건축사까지 우리나라가 지진 안전지대라고 믿고 내진설계확인서를 요식행위로 간주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상이변이나 건물의 안전에 대한 태도가 이중적이다. 자연재해가 코앞에 닥쳤을 때는 호들갑을 떨며 이성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먼 나라 이야기인 듯 비합리적인 행동을 반복한다.
|
지금이라도 기본과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기본과 원칙을 외면해서는 어떤 훌륭한 대책을 마련하더라도 결국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정해진 기준과 원칙을 지키며 자연재해에 맞서 대책을 마련하고 실천한다면 그 피해는 자연히 줄어들 것이다.
기준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실무 건축구조기술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건물의 안전을 책임지는 엔지니어를 장사꾼 취급해서는 곤란하다. 인허가를 담당하는 실무자들도 법과 기준에서 요구하는 원칙에 충실하게 관련 서류를 검토하고 승인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원칙 없는 일부 엔지니어들이 기본 원칙에 충실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