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인기가요 ‘낙화유수’
한림은 천변(川邊)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개천의 수량은 겨울치고는 많은 편이다. 시린 손길들이 서둘러 빨래를 헹구어낸다. 얼음 안 언 것만도 다행이다. 한쪽에서는 장작불을 피워 끓는 물에 빨래를 삶아낸다. 동짓달 맨발 벗고 물 길을 때 짚신 삼아주던 시아버지 생각난다더니, 속담이 아니어도 동짓달은 겨울이다. 온종일 영상 기온을 유지하는 이런 날씨가 아마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동지를 지나면서 낮은 조금씩 길어지고 있으나 매서운 추위는 이제부터다. 음기(陰氣)가 극성하다는 동지와 가장 춥다는 소한(小寒) 사이, 오늘은 동짓달 그믐날이다.
십일월 동지에 만물이 미생(微生)하니 일양(一陽)이 초동(初動)이라. 겨우살이 준비에 바빠진 어머니는 이맘때 밤이면 반짇고리 뒤적이며 사친가(思親歌) 한 대목을 부르곤 했다. 해 짧아 덧없고 밤 길어 지루하다. 농한기의 아버지는 그 곁에서 새끼 꼬며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가락을 흥얼대었다. 추위와 어두움은 깊고 길지만 광명과 생명은 여기서 움튼다는, 동지의 뜻을 담은 음률들이다. 시절에 곁들여 자연사와 인간사를 노래하는 이들 가사(歌詞)는 조선(朝鮮) 오백년간 시조(時調)와 함께 보통 교양인의 생활 풍류였다.
요즈음 가사나 시조를 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좀 교양 있다는 양반들도 다들 가요(歌謠)를 즐겨 한다. 신분으로서 양반(兩班)은 이미 조선조와 함께 소멸했다. 나라도 임금도, 양반도 상민도, 주인도 노비도 사라진 산하에서 다들 이 양반아 저 양반아, 서로를 불러댄다. 군밤타령이나 한오백년 같은 민요는 이제 저잣거리 서민들도 하품하고 외면한다. 지체가 높건 낮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새로 나타난 신식 노래에 한껏 빠져들고 있다. 올해 최고의 인기 가요는 단연 낙화유수(落花流水)였다.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졌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밤을 홀로 새워요
가사는 세련되고 가락은 신선하며 창법은 우아하다. 신여성의 모던한 음색을 타고 흐르는 3절의 낙화유수는 저무는 1920년대의 끝자락, 조선인의 가슴에 아련한 물결을 일으키며 흘렀다. 신예 이정숙(李貞淑)은 중앙보육학교(中央保育學校)에서 음악을 공부한 인텔리 여성이다. 올해 일본에서 귀국해 중앙보육학교 교수로 부임한 홍난파(洪蘭坡)를 사사(師事)했다. 중앙보육학교는 훗날 중앙대학교의 전신(前身)이 된다.
낙화유수라는 제목의 활동영화가 단성사(團成社)에서 상영된 것이 2년 전. 이화학당을 거쳐 일본(日本) 유학을 다녀온 복혜숙(卜惠淑)이 유부남 화가와 비련에 빠져드는 기생 역을 맡았다. 무성영화 낙화유수는 흥행에 성공했다. 낙화유수가 상영 중이던 1927년 가을, 열 편 가까운 영화가 상영 중이거나 개봉을 앞두고 있었다. 활동 중인 영화제작사도 열 개에 달했다. 바야흐로 영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그때 이런 기사가 있었다.
조선영화제작계는 제작소의 수효로 보아 끔찍이 번창해졌다. 영화가 나타나는 수효로 보아도 10월과 11월이 영화 시즌이라 그런지, 번창의 조짐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정도로 보아서는 지나치게 번창하여가는 모양이다. 두 달 동안 금강키네마의 ‘낙화유수’, 계림영화협회의 ‘먼동이 틀 때’가 개봉되었다. 11월에 들어서는 조선키네마의 ‘뿔 빠진 황소’가 막 조선극장에서 개봉돼 상영 중이며, 곧 나운규프로덕션의 ‘잘 있거라’가 단성사에서 개봉될 모양이다. 뒤이어 고려영화제작소가 제작 중인 ‘혈마(血魔)’가 개봉 예정이고 그 다음에 조선영화제작소의 ‘운명’이 개봉될 모양이라 한다. 대구(大邱)에서 만경관(萬鏡館)을 중심으로 프로덕션이 하나 일어나서 영화를 제작 중이라 하며 평양(平壤)에서 평양키네마라는 것을 세워 듀마 원작의 춘희(椿姬)를 제작 중이라 한다. 개성(開城)에서 청년들이 모여가지고 영화제작을 하기 시작하여 거의 촬영을 끝마치게 되었다 한다. 그 외에도 영화제작에 뜻을 두는 사람들이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영화 낙화유수는 단성사와 조선극장(朝鮮劇場)의 주임 변사(辯士) 김영환이 대본을 쓰고 감독 이구영(李龜永)의 여동생 이정숙이 주제가를 불렀다. 영화 낙화유수의 인기를 타고 해설집 소리판이 올해 출시되었다. 거기에 낙화유수의 주제곡이 ‘강남달’이라는 곡명으로 실렸다. 콜럼비아레코드사가 제작한 이 음반은 영화 못지않은 인기를 끌었다. 이 노래는 음반으로 출시된 최초의 창작 가요였다. 그때까지 가요는 민요를 변형하거나 일본 엔카(戀歌)를 번안한 노래 일색이었다. 명실상부한 국산 가요의 시대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3년 전에 발표된 윤심덕(尹心悳)의 ‘사(死)의 찬미(讚美)’는 요시프 이바노비치가 작곡한 루마니아의 왈츠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인 일종의 번안곡이었다. 그래도 ‘사의 찬미’는 최초의 가요 취입, 그것도 성악가가 부르는 예술가요 취입이라고 해서 장안이 떠들썩했다.유부남 애인과 현해탄(玄海灘)에 몸을 던진 그녀가 쓴 노랫말은 유언처럼 남았고 오사카(大坂) 닛도오(日東) 레코드에서 취입한 음반은 10만장이 팔려나갔다. 그해 1926년의 경성(京城) 인구가 30만명 선이었다. 일본인과 기타 외국인을 뺀 경성 거주 조선인은 약 20만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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