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호

미국은 동맹국 없이도 전쟁치른다

‘악의 축’ 이후 한반도 독해법

  • 이춘근 < 전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정치학 박사) > choonkunlee@hotmail.com

    입력2004-10-29 16:2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와 북한 등을 가리켜 ‘악의 축’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 나라가 국제 테러를 지원할 수 있는 의도와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았기에 부시는 그렇게 말했다. 미국은 이러한 나라를 상대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알 카에다 소탕전을 끝내면 미국은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나라를 상대로 전쟁에 들어갈 것이다. 한국은 미국의 속내를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 것인가.
    작년 9월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과 워싱턴의 국방성 건물이 납치된 여객기들에 의해 피습당한 것은 역사상 최악의 테러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던 가운데 일어난 것은 아니다.

    하버드 대학의 국제정치학 교수인 조셉 나이(Joseph Nye Jr.) 박사는 이미 1997년 6월 ‘LA타임스’ 기고 논문에서 미국은 미국 본토에서 미국 시민들이 대규모로 살상될지도 모를 테러 공격을 당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했다. 1999년 제출된 게리 하트와 워렌 러드만의 보고서 역시 미국 내에서 미국 국민들이 대량 살상당할 수 있는 테러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정확히 경고한 바 있었다.

    물론 9·11 테러사건은 수단의 측면에서 볼 때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었던 것임에는 틀림없다. 대형 민간 여객기들이 다수 납치되고 그 비행기들이 자살 공격용 미사일이 되어 동시 다발적으로 대형 건물을 들이받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셉 나이 교수, 게리 하트 전 상원의원 등이 예측한 대규모 테러 공격은 흔히 말하는 대량파괴무기, 즉 화생방 무기나 핵무기에 의한 공격을 가리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이같은 경고들을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인가? 바로 이러한 질문의 답을 구하는 데서 우리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대(對)테러 전쟁 전략을 분석하는 실마리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표류해온 탈냉전기의 미국 외교


    미국이 냉전에 승리함으로써 소위 탈냉전시대 혹은 신국제질서의 시대가 개막된 1990년대 이후, 미국은 국제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을 결여하고 있었다. 일부 논자들은 신국제질서는 오히려 냉전시대보다 복잡하고 전쟁의 가능성도 높으니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다른 이들은 이제 냉전이 끝났고 임무를 완수했으니 미국은 세계문제에서 손을 떼고 국내 정치에나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은 세계정치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미국은 그럴 능력이 없으니 일본 및 유럽의 강대국들과 함께 세계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같이 다양한 주장들은 미국의 외교정책이 중심을 잡지 못한 데서 나왔다. 탈냉전시대의 미국을 상징하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국의 외교정책은 특별한 목표와 원칙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는 탈냉전시대에만 있는 고유한 특징은 아니다. 평화시 미국의 국제정치 혹은 외교정책의 원칙은 본래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미국 외교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미국 외교정책의 특징으로 이상주의, 현실주의, 고립주의, 개입주의, 자유주의, 법치주의, 일방주의, 무력개입 등 상충적인 여러 요인들을 제시하며 평화시 미국외교에는 이같은 요인들이 혼합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미국은 세계문제에 개입하고 있으면서도 고립주의적 전통을 고집하는가 하면 법치주의를 외치는 한편 무력으로 협박하는 경우도 흔했다. 이같은 다양한 외교적 전통의 혼재(混在)는 장기적 전략의 존재를 어렵게 만든다. 냉전시대의 전략 이론가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미국은 전략이 없고 그때그때 문제해결만 하는 나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냉전에 승리한 후 미국의 TV와 신문 등 언론기관들은 해외 주재 특파원을 줄이거나 아예 철폐하는 조치들을 단행했다. 국제정치는 더 이상 관심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2000년 미국의 TV 뉴스에서 국제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1989년 국제뉴스가 차지하는 비중의 3분의 1에 불과할 정도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안보를 강조하는 자들은 수구파, 냉전론자, 혹은 바보로 취급당했다. “야 이 바보야 중요한 것은 경제야!(It’s Economy Stupid!)”라며 공화당 후보를 비웃은 클린턴의 선거 구호는 1990년대 미국 국제정치관의 상징이었다.

    개인의 자유를 특별히 강조하는 미국에서, 미국인이 미국 본토에서 대규모로 살상당할지도 모르니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쇠귀에 경 읽기였다. 김포공항의 분위기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특별한 검문검색 없이 환송객들이 비행기 탑승구까지 들어가서 떠나는 이들을 보낼 수 있는 미국의 공항을 보고, 그 자유를 부러워했다. 한편으로는 이래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불안감을 품기도 했었다. 미국인이 누렸던 그 같은 자유를 테러를 예방한다는 미명 아래 제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미국에 잠깐이라도 살아본 사람들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일순간에 바꾸어버린 일이 2001년 9월11일 아침에 일어났다. 이제 미국 공항의 살벌한 분위기는 김포공항이나 인천공항과 비교할 수 없다. 승객들은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기 위해 신발까지 벗는 모욕을 감수해야 한다. 폭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확인 첩보에 공항 전체가 몇 시간씩 완전 소개(疏開)되는 불편도 겪는다.

    놀라운 것은 이에 대해 짜증부리거나 투정하는 미국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2001년 9월11일 당일, 대통령 전용기에 대한 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군부대 지하 벙커에 들어가 있던 부시 대통령을 마치 개구멍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비꼬는 기사를 쓴 평론가가 그 다음날 해고당하는 판국이다. 불교신자인 유명 배우 리처드 기어는 평화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가 청중의 야유를 받고 말꼬리를 감추어야 했다.

    미국인들은 직접 당할 때까지는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경고에 대해 무감하지만 한번 당하고 난 후에는 무서울 정도로 단합한다는 사실을 상징하기 위해 학자들이 만든 용어가 바로 ‘진주만 멘탈리티’와 ‘공격당한 민주주의’다.

    진주만 공격이 있기 전까지 미국은 일본의 기습 공격이 미국 본토를 향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와이의 산 중턱에 레이더 기지를 설치해야 한다는 군부의 주장은 하와이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환경보호 세력과 힘겨운 투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진주만 멘탈리티는 미국 특유의 현상이기보다는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들은 전쟁에 잘 대비하지 못하지만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무서운 단결력을 과시하며, 전쟁 수행에서 더욱 월등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어디서고 볼 수 있는 모습은 공격을 당한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이 무섭게 뭉치는 현상이다. 9·11 테러 공격은 그동안 불확실하던 미국의 외교정책을 한순간에 분명한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미국의 현실주의자들과 공화당의 국가안보 정책들은 9·11 이후 국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지금 미국은 전쟁중이다. 미국이 자랑하던 사상의 다양성, 토론의 다양성은 자취를 감추고 있다. 1960년대 한국에서 보았던 것과 흡사한 각종 구호들이 미국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광고주를 기다리는 도로변의 빈 광고판은 예외 없이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God Bless America)’ 혹은 ‘뭉치면 산다(United We Stand)’ 등의 구호로 뒤덮여 있다. 집집마다 자동차마다 성조기를 게양하고 있으며 각종 스포츠 행사는 애국을 위한 궐기대회처럼 되어 버렸다.

    우리는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개막식 당시, 파괴된 무역센터에서 발견되었다는 찢어진 성조기를 들고 나온 미국인들을 통해 일면 유치하지만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단단한 단결력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테러 세력을 향한 미국인들의 전쟁 의지가 얼마나 단호한 것인가를 읽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국민들은 ‘대화’와 ‘전쟁’은 완전히 구분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화’는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고, ‘대화’를 통해 국제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북한의 대량파괴무기도 오로지 대화로만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정치 및 전쟁의 역사는 국가간의 갈등을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잘 말해주고 있다.

    국제문제가 전쟁까지 가지 않고 대화 혹은 외교로 해결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대부분은 군사력의 협박으로 전쟁 직전의 위기 상황에서 한편이 전쟁을 택하기보다는 굴복함으로써 이루어졌던 것이다.

    클린턴은 북한의 핵문제를 대화로 해결한 데 반해 부시는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클린턴 역시 무력 공격 태세를 완비하고, 작전개시 명령을 내리기 직전의 상태에서 북한과의 대화를 이끌어냈던 것이다.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남긴 국제정치의 금언 “군비 없는 외교는, 악기 없는 음악과 같다”의 의미가 지금 미국의 대외정책 결정자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정확히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은 미국을 공격한 테러 세력들이 먼저 전쟁을 걸어온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제 되받아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9·11 이후 야기되고 있는 국제정치의 변화는 전통적인 전쟁과 평화 및 국제정치의 개념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국제정치의 역사는 대부분의 강대국들이 현상에 만족하고 있는 현상유지의 시대와, 그들 중 일부가 현상에 불만을 품고 그 현상을 타파하려는 혁명적 시대 두 가지로 나뉜다. 물론 강대국들이 현상을 타파하려는 시대는 불안과 긴장, 그리고 전쟁의 상황이다.

    힘이 급속히 팽창하는 후발 강대국들이 걸맞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존의 챔피언(패권국)에게 도전했던 것이 대전쟁이 일어난 주요 원인이었다. 챔피언에 해당하는 강대국 및 그 동맹국들이 도전국의 공격을 되받아침으로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세계대전은 국제분쟁을 해결하고 새로운 국제체제를 창조하는 또 다른 메커니즘으로 작동했던 것이다.

    지금 미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초강대국으로서 현상에 만족해야 하는 국제적 지위를 갖고 있으면서도, 이 현상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되는 기이한 처지에 놓였다. 지금 미국이 치르고 있으며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전쟁은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전쟁은 물론이고, 한국전쟁·월남전쟁과는 그 본질이 다르다. 이전의 전쟁들은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이 벌이는 전쟁은 국가와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테러조직과 싸우는 것이다. 때문에 미국은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어떻게 끝날지, 어떤 경우 전쟁에 이겼다고 말해야 될지 알 수 없는 그런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9·11 테러 공격은 미국에게 진주만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상으로 단합된 의지를 갖고 뚜렷이 보이지 않는 국제 테러조직, 그리고 반미 세력들을 향해 ‘선전’을 포고하였다. 사상 처음 치르는 이 특이한 전쟁에 임하는 미국의 전략은 무엇인가?

    부시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독트린으로 부르기에는 이른 감이 없지 않으나, 이미 일부 국제정치학자들은 부시 대통령의 대테러 전쟁 수행을 위한 전략 원칙을 ‘부시 독트린’으로 표기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 이후 테러세력을 근절하기 위해 몇 가지 간단 명료한 원칙을 제시하였다.

    “테러리즘을 비호하는 나라는 테러리스트이며, 테러리스트를 지원하는 나라 역시 테러리스트다. 그리고 (미국은) 그런 나라들을 테러리스트 대하듯이 취급하겠다.”

    미국의 대테러 전쟁 전략은, 테러를 직접 행한 세력과 이를 지원한 세력으로 공격의 대상을 나누는 데서 출발한다. 테러를 직접 행한 세력은 특정한 국가가 아니라 특정한 집단이다. 오사마 빈 라덴이 지휘한 알 카에다 조직이 바로 테러를 행한 세력이고, 미국이 벌이는 대테러 전쟁의 1차적인 공격 목표가 된다.

    제2차 공격 목표는 알 카에다 테러조직 이외의 각종 테러조직들이다. 현재 미국은 필리핀에 교관단을 보내, 테러조직 근절에 투입될 필리핀 정부군을 훈련시키고 있다. 지난 3월초에는 구 소련의 일부였던 그루지야공화국의 대 테러전을 지원하기 위해 그루지야 영토 로 미군을 투입하였다.

    냉전시대라면 상상도 못할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냉전시대라면 어떻게 미군이 소련의 코앞에 있는 나라에 헬리콥터와 지상군을 파견할 수 있었겠는가?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미군의 그루지야 파견을 ‘필요한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역사상 최초로 국가가 아닌 테러조직을 대상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전쟁에서 국가가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늘날의 민족국가는 어떤 정치조직보다도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조직이다. 때문에 민족국가는 약 500년 전 도시국가, 중세 교황 중심의 봉건국가 등 인간이 만든 다른 정치제도를 모두 제압하고, 인간 역사에 등장한 막강한 정치조직이다. 이 조직들은 계속 힘과 영역을 확대해 남극을 제외한 지구 표면은 모두 민족국가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테러조직은 바닷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하늘에 떠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 특정 민족국가의 영토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테러리스트들은 그들 스스로 무기를 만들 능력이 없고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민족국가에 기생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

    빈 라덴과 알 카에다 조직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에게 거금을 지급했고, 탈레반 정부는 이들이 아프가니스탄 영토에서 먹고 자며 훈련받고 9·11뿐 아니라 각종 테러를 기획, 수행할 수 있도록 비호했던 것이다. 미국은 이같은 기초적 사실에서 테러리스트를 지원하는 나라는 테러리스트와 동류로 취급한다고 선언하고 이들 역시 미국의 대테러 전쟁의 표적으로 삼겠다고 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으로 지칭한 북한·이란·이라크 3국은 9·11 테러보다 훨씬 무서운 대량파괴무기를 지원할 ‘능력’과 ‘의도’를 가진 나라라고 미국은 인식하고 있다.

    어느날 테러조직이 “우리는 지금 워싱턴 한복판에 핵폭탄을 장치해놓았다. 미국은 이스라엘 지원을 완전 중지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철수하라. 기한은 ○월 ○일까지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핵폭탄을 폭발시킬 것이다”고 협박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러한 가정은 필자가 한 것이 아니라 미국 학자와 전문가들이 9·11이 있기 이전에 만들었던 시나리오다. 이 경우 미국 정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이다. 테러리스트슬의 협박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조차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같은 상황의 도래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노력이 바로 대테러 전쟁 3단계 전략이다. 대테러 전쟁의 3단계는 테러리스트들에게 유입될 가능성이 있는 대량살상무기(WMD)를 제거하는 일이며 이는 9·11 테러공격 이전에 부시 행정부가 이미 계획하고 있었던 외교 정책의 중요 내용이었다.

    부시 대통령이 국정연설에서 “시간은 우리편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9·11 이후 대량살상무기의 제거가 절박한 일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미 핵폭탄으로 미국 정부가 멸망할 가능성에 대비해 그림자 정부를 운영중이라는 사실까지 발표했다.

    미국 에너지성은 3월3일, 방사능 감지장치(radio active sensor)를 개발했다고 발표하고 미국 및 해외의 중요 시설에 이를 설치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였다. 대량살상무기, 특히 핵폭탄이 사용될지도 모를 최악의 테러전쟁에 임하는 대내적 준비 태세를 공개한 것이다.

    물론 미국의 대테러 전쟁 전략이 단계별로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알 카에다 조직과 오사마 빈 라덴의 제거라는 1차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직접 지원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를 동시에 공격, 제거 하는 데 성공하였다. 여기서 특기할 사항은 미국이 목표하는 것은 테러리즘을 지원하는 정부를 붕괴시킨다는 것이지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민족국가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처럼 제한된 목표를 갖고 있는 대 테러 전쟁이지만, 이 전쟁에 임하는 미국인의 태도는 과거 미국이 참전했던 역사상의 대전쟁, 특히 2차대전을 수행할 당시 미국인이 보여준 태도와 너무나 유사하다. 미국 전쟁사의 권위자인 와이글리(Weigley) 교수는 그의 명저 ‘미국의 전쟁양식(The American Way of War)’에서 미국인의 전쟁 수행의 특징을 몇 가지로 논하고 있다.

    미국인의 전쟁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일단 전쟁을 시작하면 끝장날 때까지 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전멸의 전략(strategy of annihilation)’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멸의 전략은 그리스적 군사전통으로 서양 전쟁사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으로 결정적 승리와 무조건 항복으로 끝나는 전쟁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한두 가지 특징을 첨가한다면 미국인들은 기술 의존적 전쟁을 좋아하며, 철저히 문민 우위의 군사 전통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미국은 각종 전쟁에서 그들이 선호하는 양식대로 싸울 수 없었다. 소련이라는 군사강국이 있는데 전쟁을 끝까지 벌인다는 것은 결국 모두 죽는 자멸의 상황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91년 이라크와 전쟁을 하면서 기술 의존적인 측면에서는 탁월한 전쟁을 했지만 전쟁 목표를 스스로 제한하고 만 데 대해 대단히 후회하고 있다. 후세인 정권을 끝장내지 않았다는 후회인 것이다. 지금 대테러 전쟁에 임하는 미국은 미국의 전통적인 전쟁양식으로 이 전쟁을 몰고 갈 태세다.

    그러나 미국에도 어려움이 있다. 테러리스트 조직과 테러를 지원할 가능성이 있는 ‘악의 축’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결정적 승리를 추구하려는 군사전략과, 힘이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세력과의 전쟁에서 압도적인 과학기술 군사력을 사용하는 데서 야기될 수 있는 전략상의 문제점을 노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9·11 테러사건은 기왕의 테러사건과 특이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대개 테러리스트들은 테러 공격을 한 후 동기를 당당히 밝힘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인 행위에 대해 지지를 획득하거나 자신들을 거부하는 세력에 공포심을 줌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왔다. 그러나 9·11 테러 공격은 인명의 대량 살상 자체를 일차적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이 사건을 정치적 사건으로 보지 않고 미국을 향해 악마들이 벌인 최악의 범죄라고 판단하고 있다.

    때문에 이를 응징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하면서 미국은 ‘전쟁’이란 말을 주저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의 전쟁사 교수인 마이클 하워드는 미국이 ‘전쟁’이란 용어를 너무 성급히 사용함으로써 ‘범죄자’에서 ‘전사’로 테러리스트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잘못을 범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100년 이상 아일랜드 테러리스트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영국은 이 싸움을 전쟁이라 부르지 않고 ‘긴급상황(emergence)’라고 부름으로써, 아이리시 테러리스트들이 줄기차게 요구하는 전사(belligerent)로서의 대우해주는 것을 거부하고 이들을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다.

    테러리즘과의 전쟁은 영토장악을 위한 싸움이 아니며 마음과 신념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이다. 때문에 무조건 항복, 압도적 승리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마약과의 전쟁, 범죄와의 전쟁은 마약 및 범죄가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지 않는 수준으로 내려가면 종료할 수 있지만, 테러리즘과의 전쟁은 종료될 수 있는 하한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바로 미국의 심각한 딜레마가 존재하는 것이다.

    미국은 국제 테러리즘을 소탕하기 위해 국제협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테러리즘 전쟁 수행을 위한 국제외교를 본격적으로 전개했고, 상당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전통적인 유럽 우호국들의 지지는 물론 러시아, 중국 특히 온건파 회교국들의 지지까지도 획득했다.

    그러나 대테러 전쟁 수행 전략의 각론에 들어가면 미국은 세계 각국과 협력적인 전략을 취하기보다는 독자적으로 작전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최근 한국의 한 여론조사는 한국인들이 미국을 비판하는 이유 중 하나가 9·11 이후 너무 독단적으로 행동한다는 데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유럽 국가들이 미국을 비난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9·11에 대한 공격을 세계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 미국에 대한 공격이라고 간주하며 결국 미국 스스로 해결해야 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미국은 이 문제가 유엔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더 나아가 미국이 독단적으로 대테러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는 기가 막히는 현실적 이유가 작용하고 있다. 즉 미국의 군사력과 함께 작전할 수 있는 수준의 군사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걸프전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이 문제는 1999년 코소보 폭격 작전 이후 더욱 분명해졌다.

    나토(NATO)가 합동작전을 전개한 코소보 공습에서 유럽 각국은 폭격기의 40%, 미국은 폭격기의 60%를 제공했다. 그러나 폭탄 투하량에서 미국은 83%, 유럽은 나머지 17%였다.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들을 살상했다며 유럽 각국이 미국의 오폭을 비난했지만 미국의 전투기들은 모두가 정밀폭격이 가능했던 반면 유럽 전투기는 단 10%만이 정밀폭격이 가능했을 뿐이다.

    다만 미국은 이들의 비난에 유구무언일 뿐이다. 스텔스 폭격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도 미국뿐이며, 땅굴 입구를 정확히 파고 들어가는 폭탄을 가진 나라도 미국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수행 능력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미국 국방비 중 연구 개발에 들어가는 액수는 독일의 전체 국방비와 비슷한 것이 현실이다.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은 미국의 테러전쟁을 지원한다며 항공모함을 파견했지만, 미국이 거의 혼자 전쟁을 진행해 불만을 토로했다.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정도의 군사력이 없는 한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진정한 동맹국 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 영국학자의 자조적 탄식은 오늘날 미국 파워의 현실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 미국은 유럽 이외의 전역(戰役, Campaign) 즉 아시아 및 중동에서 전쟁이 발생할 경우, 동맹국의 군사적 지원을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 피터 로드맨 미 국방차관보는 이미 미국은 동맹국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한 전쟁 계획 수립이라는 악순환에 빠져들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훌륭한 외교는 가능한 한 동맹국과 친구들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군사 과학기술의 발달을 함께할 친구와 동맹국이 있는 것을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들이 없어도 혼자서 다할 수 있는, 그리고 혼자 하는 것이 차라리 편하다는 역설적인 상황을 창출하고 있다.

    코소보 폭격작전에서는 미국 본토에서 출격, 코소보를 폭격하고 다시 미국 본토의 기지로 귀환하는 장거리 폭격을 시도했다. 이번에도 미국의 B-2 폭격기들은 미국 본토에서 출격,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에 있는 알 카에다의 땅굴들을 정밀 폭격하였다. 이러한 미국이 군사적 능력은 군사력은 고사하고 기지(基地)를 제공할 동맹국의 도움조차 필요하지 않은 날이 곧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교와 군사의 괴리는 미국의 대테러 전쟁 수행에서 해결 난망의 문제점이 될 것이다. 미국은 공중 폭격하고 다른 나라는 육군 병력을 지원하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같은 군사환경에서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유혹을 더욱 많이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 경우 대테러 전쟁에 필수적인 동맹국들, 친구들의 심정적 지원문제는 어떻게 될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중동 각국의 미국대사관 앞에 미국행 비자를 받기 위해 서있는 아랍인들의 행렬이 길어지면 길수록 반미 테러도 함께 격화되는 역설적인 상황과 마찬가지로, 설명하기 아주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가 미국의 대테러 전쟁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미국은 수천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9·11 테러가 아니라 수만, 혹은 수십만의 인명 피해가 발생할지도 모를 대량파괴무기에 의한 테러를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미국의 대테러 전쟁의 대상은 테러조직을 넘어 일부 민족국가로까지 확대될 수도 있다. 미국이 지칭한 나라들은 국제테러 조직에 대량파괴무기 즉 생화학무기, 핵무기, 미사일을 제공할 ‘능력’이 있는 나라들이며 그럴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우려되는 나라들이다.

    부시 대통령의 방한 이후 한국의 분위기는 그 이전과 크게 달리진 것 같다. 그러나 미국의 북한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한국은 미국의 대테러 전쟁을 적극 지원한다고 약속했는데, 미국의 대테러 전쟁 다음 단계는 대량살상무기(WMD)에 대한 전쟁이다. 미국의 WMD에 대한 전쟁에 적극 동참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북한을 주적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데, 한국 정부가 생각하는 동참은 미국 정부가 기대하는 협조와 같은 것일까?

    한국의 많은 이들이 북한이 테러 세력과 직접 관계가 없는데 미국의 행동이 너무 앞서 간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이 진정 사실이라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게 풀릴 수 있다. 북한이 미국에게 북한의 WMD가 국제 테러조직과 연계되지 않는 것임을 증명해 보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냉전시대의 안정된 국제정치 구조는 끝났다. 복잡한 시대는 복잡한 전략 사고를 요구한다. 우리는 한반도가 다시 국제긴장의 초점으로 빠져드는 일을 지혜로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 북한을 설득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미국의 대테러 전쟁의 진면목 그리고 9·11 이후 너무나 급격히 변해버린 세계 정치의 구조를 냉철하게 인식하는 일인 것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