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호

김정일 동선 추적하면 ‘北 도발’ 사전 포착

미사일 발사·핵실험 전후엔 인근에 살다시피 시찰

  • 고재홍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kjh0022@chol.com

    입력2007-05-04 10: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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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의 공식매체에 매일같이 소개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찰 소식을 모아 그 동선(動線)을 추적하면 특정 군사행동에 얽힌 북한 최고지도부의 의사결정체계를 알 수 있다는 흥미로운 분석이 나왔다. 대부분의 시찰을 군부대에 집중하는 그의 움직임을 살펴보니 특히 지난해 7월 미사일 발사와 10월 핵실험을 앞두고는 해당 지역인 강원도 깃대령 인근과 함경북도 일원에 시찰활동이 절대적으로 집중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 이렇게 볼 때 향후 유사한 군사행동이 있을 경우 수개월 전부터 그 징후를 감지할 수 있으리라는 게 필자의 결론이다.
    김정일 동선 추적하면 ‘北 도발’ 사전 포착

    2002년 5월1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해군사령부 시찰 소식을 대대적으로 전하는 ‘로동신문’ 1면. 서해교전 60일 전이었다.

    지난해 북한이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강행한 직후, 학계와 언론에서는 다양한 추론이 제기됐다. 김정일 주도설, 군부 주도설, 당군(黨軍) 갈등설 등 평양의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이견이 엇갈렸다. 이러한 혼란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가깝게는 지난해 5월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합의한 철도연결 시험운행이 소위 “북한 군부의 반대”라는 이유로 취소된 사건이 있었다. 북한의 주요 군사행동에 대한 의사결정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북한 군부 사이의 영향력에 대해 의문을 촉발한 계기였다.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보자. 북한의 주요 군사행동, 즉 두 차례에 걸친 서해상에서의 교전이나 지난해의 미사일 발사, 핵실험 등은 강경 성향의 북한 군부가 주도한 것일까, 아니면 김정일 최고사령관이 직접 계획하고 실행한 것일까(필자는 김정일의 직함과 관련해 국가지도자로서의 ‘국방위원장’과 군통수권자로서의 ‘최고사령관’을 분리해 사용하고 있다-편집자).

    이러한 의문에 답하기 위한 한 가지 시도가 최고사령관 김정일의 동선(動線)을 파악하고 이것이 주요 군사행동과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지 분석해보는 작업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김정일 최고사령관이 움직이고 시찰한 지역과 비슷한 시기 북한의 주요 군사행동이 이뤄진 지역 사이에 연관성이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다. 상관관계가 확인된다면 이는 주요 군사행동을 북한 군부가 아닌 김정일 최고사령관이 직접 주도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또한 이는 김정일 최고사령관이 북한군을 확실하게 통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되고, 따라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추가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등 향후 군사행동 역시 김정일이 주도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가정을 가능케 한다. 뒤집어 말해, 향후 김정일의 시찰지역을 꼼꼼히 분석하고 이를 북한의 주요 군부대 배치상황과 맞춰보면 북한이 어떤 종류의 군사행동을 계획하고 있는지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정일 동선, 어떻게 추적할까



    간단해 보이는 이러한 전제는, 그러나 실제로 작업에 들어가면 그리 쉽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보안상’ 공개가 제한된 김정일 최고사령관의 군부대 시찰동선을 파악할 수 있느냐 여부다.

    김정일의 군부대 시찰활동 가운데 상당수는 북한 언론의 1면을 장식하며 공개된다. 그러나 해당 부대의 대호 이외에 부대 위치나 부대 병종은 공개되지 않으며, 심지어 정확한 날짜가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공개된 활동 이외 비공개 시찰도 상당수 있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다.

    이를 극복하려면 10여 년에 걸쳐 김정일의 군부대 시찰활동을 소개하는 ‘로동신문’이나 ‘(총서)불멸의 향도’ 같은 북한의 공식 선전책자와 탈북자들의 기록을 교차 확인해, 대호로만 돼 있는 부대들의 위치와 기능을 파악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축적된 자료를 꼼꼼히 대조하면 김정일의 군부대 시찰 동선이 서서히 드러난다.

    우선 일반적인 틀이 눈에 띈다. 김정일 위원장이라고 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하루는 북중 국경경비부대를 시찰하고 다음날 휴전선 인근 전연군단 내 관할부대를 시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산맥으로 동서가 분명히 나뉜 북한의 지형 특성상, 서북부 지역에 주둔한 425기계화군단을 시찰하고 다음날 동북부 지역의 9군단을 시찰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김정일이 평남 개천의 제1비행사단인 공군 제797군부대를 방문한 다음날 함경북도 경성군에 사령부를 둔 제264군부대를 시찰한 경우를 보자. 차량을 이용해 묘향산맥과 북대봉산맥(개마고원)을 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실적으로 군용기를 이용했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김정일이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는 세간의 속설은 해외에 나갔을 때만 해당하는 듯하다).

    부대 위치 확인하려면

    김정일 동선 추적하면 ‘北 도발’ 사전 포착

    김정일 위원장의 851군부대 전방지휘소 방문 소식을 전하는 2006년 3월20일자 ‘로동신문’1면. 이 부대는 2개월 보름 후 미사일 발사시험이 행해진 강원도 안변군에 주둔하는 미사일 부대로 추정되고 있다. 보고를 받는 그의 눈앞에는 무엇이 펼쳐져 있었을까.

    이렇듯 가까운 지역에 있는 부대를 한꺼번에 방문하는 특징을 감안하면 특정부대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김정일이 2002년 6월15일 시찰한 부대는 ‘478’이라는 대호를 쓴다. 이 부대는 김일성 주석이 1960년 8월25일 방문할 당시 ‘109’라는 대호를 쓴 부대와 같은 부대다. 북한군 내에서는 ‘붉은기중대운동’이 시작된 곳으로 유명하다. 478군부대는 현재 강원도 창도군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김정일이 세 차례 방문한 833군부대의 경우를 보자. 1999년 5월31일 신병훈련소, 2000년 11월22일 지휘부, 2004년 5월9일 관하 직속중대 등 세 차례에 걸친 시찰 당시 앞뒤에 방문했던 장소를 따져 보면 833군부대가 어디에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시찰일자가 공개되지 않은 경우는 넘기가 쉽지 않은 장애물이다. 그러나 ‘로동신문’이나 ‘조선중앙년감’ 등에 게재된 사진이나 부대 시찰을 전후해 이뤄진 비군사부문 현지지도 활동의 일자를 따져보면 게재 시점과 촬영일자 사이에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속 옷차림이나 날씨, 나무의 상태 등도 마찬가지로 게재 시점과 일치한다. 날짜를 공개하지 않은 경우는 교통과 통신이 불편한 산골 깊숙한 지역의 부대여서 사진을 전송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굳이 보안이나 위장의 의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언론 등에 공개되지 않은 시찰활동의 경우는 알아낼 방법이 없다. 분명 김정일은 지하 핵무기 기지나 핵 관련 부대를 시찰했을 테지만, 이를 공개할 리 없다. 다만 각급 부대 시찰활동을 공개하는 것 자체가 대내 통치에 큰 효용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지하 핵무기 기지 같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무력기관과 군종·병종별 부대시찰은 공개되는 듯하다.

    4개의 정형화된 루트

    염두에 둬야 할 마지막 단서는 김정일이 부대를 방문할 경우 “적의 동태를 살피”고 “멸적(滅敵)의 신념으로 초소를 지키라”는 당부의 뜻으로 쌍안경과 자동보총을 지급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군사학교나 공군, 비전투부대를 방문할 때는 이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진 속 인물들이 쌍안경이나 자동보총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이 역시 해당 부대의 특성을 유추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접근방법을 기초로 1998년부터 2006년까지 김정일 최고사령관의 군부대 시찰 동선을 추적해보면 크게 다음의 몇 가지 라인으로 일반화해 나눌 수 있다. 물론 유추만큼 일부 오차나 왜곡이 있을 수 있지만 큰 틀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닐 것이다.

    ▲평양 및 인근지역(호위·평방·고사포) → 서남부 내륙지역(620포병·820전차·815기계화) → 서남부 전연 및 해안지역(2군단·4군단·서해함대) → 중동부 전연지역(5군단·1군단) → 동중남부지역(108기계화·806기계화·동해함대)→ 동북부 해안지역(7군단·9군단) → 북중 국경지역(10군단·11군단) 혹은 비행부대 방문 → 평양 귀환

    ▲평양 및 인근지역 → 서중부 해안지역(3군단·고사포) → 서북부 해안지역 및 내륙지역(8군단·425기계화) → 북중 국경지역(10군단·11군단) → 평양 귀환

    ▲평양 및 인근지역 → 평남 혹은 황남지역 → 개천1비행사단·황주3비행사단, 항공기 이용 → 동북부 지역 → 평양 귀환

    ▲평양 → 평남·황남·평북·북부·동중부 전연·동북부 → 평양 귀환

    김정일은 이와 같은 군부대 공개시찰 활동을 통해 북한군의 훈련과 보급상태 등 군사 대비태세를 직접 관장하는 기회를 갖는다. 그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북한군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내외적으로 주지시키는 효과도 노린다.

    실제로 북한군의 상장급 이상 주요 군사정치 간부들, 즉 인민무력부 부부장들,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및 총참모부 주요 부서장들, 당 무력기관 정치·군사담당 간부들, 총정치국 부국장급, 전연 군단장과 기계화 군단장, 각 군종·병종 사령관, 후방 기계화 군단장, 인민보안성 부상급 인물들은 김정일 최고사령관이 부대를 방문할 경우 해당 부대의 군사정치 책임간부로서 그를 직접 영접한다. 예컨대 오성산 일대를 방어하는 171군부대를 시찰할 때에는 해당 부대의 지휘관인 1군단 1사단장은 물론 1군단장 전재선 차수가 영접하고, 강원도 내평발전소를 시찰할 때에는 건설책임자인 610관리국장 리태일 상장이, 평양 인근의 비행사단을 방문할 때는 공군사령관 오금철 상장이, 597군부대를 방문할 때는 동해함대 사령관 권상호 상장이 영접하는 식이다.

    이렇게 확인된 김정일 위원장의 부대 시찰 동선과 북한의 군사행동에는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까. 이제부터는 두 차례에 걸친 서해상의 교전(1999년 6월과 2002년 6월), 지난해 7월의 미사일 발사, 10월의 핵실험을 전후해 김정일이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그 구체적인 동선을 추적해보기로 하자.

    서해에 가지 않은 까닭

    김정일 동선 추적하면 ‘北 도발’ 사전 포착

    김정일 위원장이 미사일 발사 이후 40여 일 만에 처음으로 재개한 시찰활동 소식을 전하는 2006년 8월14일 ‘로동신문’1면. 이 때 그가 방문한 757군대연합부대는 미사일시험이 있었던 강원도 안변군 깃대령 일대를 관할하는 806기계화군단으로 분석된다.

    연평해전이 있던 1999년, 김정일 최고사령관의 군부대 시찰은 평북 태천의 게릴라 양성학교인 최현군관학교 방문으로 시작됐다. 이후 그는 자신의 생일인 2월16일 스키부대인 682군의 동계 훈련을 참관하고, 다시 평양 근교의 수송기 부대인 991군 예하 여성고사총 중대를 시찰하는 연례적인 부대 시찰활동을 했다. 연평해전이 일어나기 3개월 전인 3월7일에는 도시군 인민회의 대의원선거로 함흥의 선거구에서 투표했다. 3월13일에는 강원도 전연군단인 1군단 관할 720군 직속 정찰중대를 방문했고 보름 뒤에는 재차 함남 함흥과 동북부 해안방어를 담당하는 7군단 324군부대를 방문했다.

    ‘신동아’ 2006년 7월호 ‘서해교전 4주년 총력취재’ 기사에 따르면, 이후 4월3일 김 위원장은 통전부를 비롯한 3호청사에 대남 우위의 협박전술을 구상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그날부터 3호청사 요원들은 서해 영유권 확보를 위한 단계별 추진전략의 일환으로 남북 함정 간 소규모 총격 위협 수준의 작전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특별지시를 내린 이틀 뒤 김정일 최고사령관은 황북 평산에 사령부를 둔 전연 2군단인 567군부대 지휘부를 방문하고, 이틀 뒤인 4월7일 평양으로 올라와 최고인민회의 10기 2차회의 개막식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주일 뒤인 4월15일에는 또 다시 강화도와 교동리가 보이는 전연 2군단 관할지역인 황남 개풍군 전방지휘부를 방문했으나, 연평도는 보이지 않으므로 서해교전과는 큰 관련이 없는 부대다. 4월25일 군 창건일 즈음에는 평양 인근지역에 머무르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5월에는 황남 신계의 620포병군단 관할부대인 287군부대 전방지휘소를 시찰했다. 평양으로 귀환한 뒤에는 평양고사포사령부 관할 959군부대를 방문했고, 5월18일에는 중부전선의 5군단 관할 김책4보병사단을 시찰했다. 이후 다시 평양에 머무르다가 5월31일 함남 함흥 일대의 군부대를 방문했다. 이상이 연평해전이 벌어진 6월15일까지 공개된 자료에 근거해 추적할 수 있는 김정일의 동선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최소한 연평해전 이전에는 김정일이 공개적으로 남포의 서해함대사령부나 황남 해안지역에 위치한 해군기지들을 방문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연평해전 이후 김 위원장은 자강도와 강원도 경제부문을 현지지도했고, 6월말 황해남도 전방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409군부대를 방문했으나, 이 부대는 연평해전의 해군부대와는 무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시찰 동선에서 연평해전과 관련한 특이사항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7월 들어 김 위원장은 평양에서 김일성 사망 추모대회에 참석했고, 7월27일 전승절에 155군부대인 강원도 원산항 해군기지를 시찰했다. 8월 중순에는 양강도 지역과 황북 지역의 양어장을 방문했고, 평양에 새로 건설된 가금목장을 시찰했다. 8월30일에는 황남 내륙에 주둔한 전연 4군단 관할 635군부대를 시찰했다. 9·10·11월에는 평양 인근에서 보냈고, 12월 들어 황해남도에 있는 부대들을 방문했지만 연평해전과 관련된 서해함대 관할 해군부대나 해군기지가 눈에 띄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서해상의 군사적 충돌과 무관한 듯한 그의 시찰 동선은 2002년 6월29일 서해교전 전후 시기도 마찬가지다. 김정일은 2002년 상반기 이전까지 황남 해안지역에 대한 현지지도나 해군부대·기지 시찰을 아예 하지 않은 것으로 관측된다. 이것은 다른 해의 비슷한 시기 동선과 비교해볼 때 매우 특이한 현상으로, 의도적으로 회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인상을 풍길 정도다.

    김정일 최고사령관은 2002년 1월6일 호위사령부 관할 942군부대 시찰을 시작으로 평양 인근 및 1군단 관할 부대들과 중부전선 부대를 방문했다. 4월3일 평양 사동구역 미림동의 공군사령부 관할 서해지구 항공구락부를 방문하는 등, 다른 해의 4월에 비하면 특이할 정도로 평양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았다.

    해군과 관련된 시찰은 5월1일에만 나타난다. 노동절을 맞아, 2000년 4월15일 방문했던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지구의 해군사령부를 다시 방문하고 직속구분대를 시찰한 것이다. 6월 들어서는 함흥 일대에서 주로 머무르다 6월11일경 평양으로 돌아왔다. 6월 중순경 서해상에서 북한 해군 함정들이 서해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하는 훈련을 거듭하고 있을 때 김정일 최고사령관은 강원도와 평양에 머물렀다. 서해교전 전날인 6월28일에는 평양에서 러시아 모이세예프 국립무용단 공연을 관람했다.

    서해교전 전까지 김정일 최고사령관은 최소한 공개적으로 황남 해안지역에 기지를 둔 서해함대 관할 부대들을 방문하거나 시찰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서해교전 이후 조명록 총정치국장을 비롯한 군 최고수뇌부가 줄줄이 교전 당시 북한군 부상자들이 입원해 있는 평양 대동강구역의 인민군 11호병원으로 병문안을 갔다오고 김윤심 해군사령관 역시 서해교전에 참가한 해군 부대들을 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김정일만큼은 어디도 방문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서해교전 이후 김정일의 첫 군부대 공개시찰은 7월초에 있었는데 황남의 해군기지가 아닌 평북 정주의 425기계화군단 관할 744군부대였다. 8월에는 24일의 러시아 여행 준비로 평양에 머물렀고, 10월 초까지는 북일 정상회담과 신의주 특별행정구 양빈 장관 임명 등으로 시찰활동을 자제했다. 10월 중순부터 양강도 지역과 함남의 공장기업소, 강원도 안변군, 고성군, 평강 일대의 군부대들을 시찰했지만, 역시 황남에 기지를 둔 서해상 해군 부대들은 방문하지 않았다. 이른바 ‘2차 북핵 위기’가 터져 나온 10월 중순 이후 11월 내내 김 위원장은 공개활동을 자제하고 평양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서해에서의 두 차례 교전을 전후해 김 위원장은, 2002년 5월1일 해군사령부를 방문한 것 이외에는 황남 지역의 서해함대사령부(남포) 관할 해군 부대나 기지들을 특별히 방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서해상의 교전에 무신경했던 것일까.

    김정일 최고사령관은 서해교전 발발 2개월 전에 특별한 공로도 없는 해군사령관 김윤심 상장을 진급 5년 만에 다시 대장으로 고속 승진시켰다. 일반적으로 북한군 장령급(우리의 장군급) 1계급 승진에 10년 이상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해교전과 관련한 김정일의 속마음이 드러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김윤심 대장에게 알아서 잘해보라는 듯 서해교전과 관련한 전권을 위임하고 자신은 서해함대사령부 관할 전대나 해군기지들을 결코 방문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지난해 미사일 발사 및 핵실험을 전후한 김 위원장의 동선은 앞서 살펴본 서해교전 즈음의 그것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미사일 발사 시험장과 핵실험 추정지역 인근에서 사실상 ‘살다시피’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다.

    최대의 지휘관 도열

    지난해 미사일 발사시험 당시 북한군은 강원도 안변군 깃대령 인근 발사장에서 스커드 및 노동 미사일 6기를 발사하고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 미사일 발사장에서 장거리 미사일 1기를 동해를 향해 발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핵실험은 함북 길주군 풍계리 지역의 지하 실험장에서 진행된 것으로 파악됐다.

    지역적으로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이 있었던 동북부와 강원북부 지역은 북한군 9군단과 7군단, 108기계화군단 관할지역이고, 강원도 안변군은 806기계화군단 관할지역에 속한다. 그렇다고 이들 군단이 당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주도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군사무기의 하나인 미사일 발사에 대한 결정 권한은 최고사령관인 김정일이 가지고 있다.

    1998년 8월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 김정일은 주로 미사일 제조와 관련된 군수공장들을 집중적으로 시찰했다. 그러나 이번 미사일 발사를 앞두고는 미사일 발사 시험장 인근 지역을 여러 차례 집중 방문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발사시험이 있기 2개월 보름 전인 3월20일 김정일은 김영춘 인민군 총참모장과 리명수 작전국장, 현철해 대장, 최고사령부 작전지휘성원 및 북한군 장령급 10명을 대동하고 강원도 안변군 인근 미사일 부대로 추정되는 851군부대 전방지휘소를 방문했다. 김정일은 이 부대를 2002년 10월15일과 2004년 7월29일에도 방문한 적이 있다. 평양에서 열린 군 공연 관람을 제외하면 2006년 있었던 군부대 시찰 가운데 북한군 장령이 가장 많이 동행한 활동이었다.

    이때의 시찰 소식을 전하는 ‘로동신문’ 1면 사진에는, 김정일 뒤로 김영춘 총참모장을 비롯한 십수명의 최고사령부 장령급 지휘성원이 도열한 가운데 김정일이 전방지휘소에서 806기계화군단장으로 추정되는 백상호 상장으로부터 정황보고를 받는 모습이 실려 있다. 사흘 후 김정일은 원산 해안과 함흥 지역 방어를 담당하고 있는 108기계화군단인 604군부대 관할 구분대를 방문했고, 이튿날에는 함남 덕산의 제2폭격기 사단인 공군 435군부대지휘부와 관할 교육기관인 236신입병 양성부대를 시찰했다.

    4월 들어서도 그의 현지지도는 군사부문에 집중됐다. 6일에 821군부대 관할 포병중대를 시찰한 것을 시작으로, 이튿날 함남 함흥 해안의 마전리에 주둔한 292군부대, 다시 사흘 후 함남 함흥 지역의 108기계화군단 운전원양성구분대, 그 이튿날 205군부대 관할 구분대를 각각 시찰했다. 4월12일에 황북 황주의 제3비행사단인 공군 814군부대를 방문한 것으로 보아 김정일은 3월20일경부터 4월11일까지 20여 일 동안 미사일 발사지역인 강원 북부 및 함남 지역에 장기간 체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잠적 후 첫 시찰이 미사일 시험지역

    10월9일 핵실험과 관련해서는, 그 4개월 전인 5월30일 김정일은 평남 개천의 제1비행사단인 공군 797군부대를 방문하고 같은 날 항공기를 이용해 함북 경성군에 사령부를 둔 9군단 264군부대 지휘부를 방문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튿날부터는 하루 간격으로 9군단 관할 부대로 함북 해안 방어부대로 추정되는 215군부대와 4318부대 관할 구분대, 294군부대를 연이어 시찰했다. 6월3일에는 함남 락원의 해군 269군부대, 이튿날에는 함흥 및 동북부 해안지역 방어를 담당하는 324군대연합부대, 즉 북한군 7군단을 방문했다. 이어 동북부 해안 경계부대인2725군부대와 함남 선덕의 6비행사단 2추격기연대인 공군 970군부대를 시찰하고 나서야 항공기를 이용해 평양으로 귀환한 것으로 보인다.

    20여 일 후인 6월26일 김 위원장은 재차 이 지역을 방문한다. 이때는 함흥에서 열린 것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모이세예프 국립민속무용단의 지방순회 공연을 관람하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6월28일에는 함경남도 함흥시 마전리 해안가에 주둔한 특수부대 292군부대를 방문했고, 이튿날에는 함흥 지역을 방어하는 108기계화군단 관할로 추정되는 823군부대를 시찰했다. 미사일 발사가 있기 하루 전인 7월4일 평양에서 대성타이어 공장을 현지지도한 이후 발사시험 당일인 7월5일부터 40여 일간 김 위원장은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김정일 최고사령관이 미사일 발사 담당부대나 핵실험장을 다녀왔다는 증거를 공개자료를 통해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이 있기 수개월 전부터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이 진행된 강원 북부와 함경도 지역에 장기간 체류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더욱이 김정일 최고사령관은 미사일 발사 이후 근 40여 일 만인 8월14일에 재개한 첫 번째 시찰로 미사일 발사지점인 강원도 안변군 깃대령 지역을 관할하는 806기계화군단(부대 대호로는 757군대연합부대)이 관리하는 토끼·염소목장을 찾았다는 보도가 나온다. 이를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이어 8월29일에는 3월에 방문했던 깃대령 지역의 851군부대를 재차 방문하기도 했다.

    핵실험이 있기 한 달 전 김정일은 건국기념일인 9·9절에 즈음해 함남 지역의 특수부대로 추정되는 1824군부대와 동해안 경계부대인 8211군부대 관할 중대를 시찰하고는, 9월15일 금강산에 올라 해돋이를 보고 평양으로 귀환했다.

    결국 김정일은 미사일 발사시험 1개월 전인 5월30일부터 9월15일까지, 발사시험 직후 40여 일간의 잠적기간을 뺀 두 달 보름 동안 총 30회의 공개시찰을 했는데 그중 20여 회를 동부 및 함경도 해안지역 군부대에 집중했다. 또한 2006년 한 해 동안 예년과 달리 동북부와 강원북부 지역의 군부대를 2월, 3월, 4월, 5월, 6월, 8월, 9월, 11월, 12월에 걸쳐 집중적으로 시찰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최고사령관의 동선과 미사일 발사, 핵실험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다시 말해 김 위원장은 지난해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이 있기 이미 수개월 전에 직접 미사일 발사지역과 핵실험 장소를 방문해 모든 사전점검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지난해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은 김정일 최고사령관의 주도하에 계획되고 준비되고 실행된 ‘김정일의 독주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기 경보 가능성

    북한의 주요 군사행동이 발생한 전후 시기 김정일의 동선을 추적해보는 작업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북한의 주요 군사행동 가능성에 대한 조기 경보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패할 경우 대내외적 파급영향이 큰 주요 군사행동이 철저히 김정일의 주도하에 계획되고 사전점검돼 실행됐음을 감안하면 향후 그의 시찰 동선을 예의 주시할 경우 최소 2~3개월 전에 추가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같은 군사행동의 징후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물론 우리에게 그에 대한 조기분석 및 대책마련의 시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정일 동선 추적하면 ‘北 도발’ 사전 포착
    고재홍

    1965년 경기 동두천 출생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대학원 석·박사

    평화연구원 연구원, 통일정책연구소 연구위원

    現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저서 : ‘북한군 최고사령관의 위상연구’ ‘북한학총서-북한 의 군사’ ‘김정일 이후 북한군 통수체계 전망’ 외


    두 번째로 김정일의 동선 분석을 통해 그가 남북관계를 국제관계의 하위 차원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남북관계에 중요한 서해교전과 국제적 파급효과가 큰 미사일 발사 및 핵실험 시기 김 위원장의 동선 차이를 살펴보면 명확해진다. 전자의 경우 그의 시찰 동선과 큰 상관관계가 없지만, 후자는 긴밀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이는 김 위원장이 남북 문제에 대해서는 일정 정도 하부기관이나 인물에 책임을 위임하는 반면, 국제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챙기고 있다는 분석을 가능케 한다. 이 같은 결론은 지난해 5월 소위 “북한 군부의 반대”로 남북철도시험 운행합의가 무산된 것을 둘러싼 서울의 갑론을박에도 한 가지 단서를 제공한다. 이 역시 남북 문제에 해당하는 사안인 만큼 김정일 본인이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기보다는 하부기관이나 인물에게 일정부분 위임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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