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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왕관을 쓴 예수, 地神 얼굴을 한 마리아

  • 권삼윤 문명비평가

잉카왕관을 쓴 예수, 地神 얼굴을 한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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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무슬림과 가까운 거리에서 늘 서로 부닥치면 살았던 유태인들의 삶의 방식도 무슬림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유태인의 조상이 아브라함의 적자인 이삭이고, 아랍인은 그 서자인 이스마일의 후예라는 고사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유태인이 살았던 땅과 이슬람을 태동시킨 땅은 근본적으로는 똑같이 메마른 사막이었던 것이다. 그걸 이겨내며 사는 지혜라는 게 피가 다르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유태인들 쪽이 더 혹독스러웠기에 그 강도가 더 심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우르에서 떠난 것을 비롯해 출애굽과 광야생활 40년, 바빌론 유수, 디아스포라(로마의 압제로 인한 유태인들의 유랑생활) 등 그들은 모진 박해의 세월을 이겨냈다. 또한 개종과 선교는 아예 생각지도 않았기에 타민족과 타협할 이유도 없었으니 그들의 율법인 ‘토라’는 이슬람의 샤리아보다 더 가혹한 것을 요구했다.

토라는 여느 종교의 경전과는 달리 개인의 결단과 대단한 학습을 요구한다. 유태인 부모에게서 태어난다고 다 유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이 100세의 나이에도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할례를 행했듯이 할례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하느님의 계율을 지키는 아들로서 유태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일회적인 작업만으로 ‘유태인 되기’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도를 올리고 토라 공부를 하는 평생학습을 거쳐야 한다.

매일 올리는 기도와 1주일에 한 번 갖는 안식일은 형식상 이슬람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 내용을 파고들면 토라가 더 혹독한 것을 요구함을 알 수 있는데, 유태인의 안식일에는 모든 생산적인 일을 쉬고 오직 하느님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그 예다. 그때 만나는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닌 오직 그들만의 하느님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곳으로 저 유명한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이 있다. 이는 외지 관광객들도 별도의 절차 없이, 돈도 내지 않고 확인할 수 있어 유태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학습의 장이 되기도 한다(‘신동아’ 2000년 9월호 520쪽 ‘동예루살렘, 피의 역사는 끝나는가’ 참조).



석벽에서 10m 거리를 두고 허리춤 높이에 쇠줄이 쳐져 있는데, 그 안쪽이 바로 기도 공간이다. 그것은 다시 남녀의 구역으로 나뉜다. 남녀 부동석은 유태사회의 삶의 방식이다. 유태인뿐 아니라 이들과 뿌리를 같이하는 이슬람과 기독교에서도 그러하다. ‘정통 기독교’인 가톨릭의 여신도가 머리 위에 너울을 쓰는 것이나 지난 1000년 동안 여성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아토스 수도원 등이 바로 그런 예다.

사막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유태사회의 성 모럴은 남녀의 절대적 구분과 부계 중심이었다. 신을 만나는 순간 신이 그걸 말해주었으니까 달리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흔히 유교사회가 남녀를 엄격히 구분하고, 그래서 ‘남녀 칠세 부동석’이란 것이 있지 않았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임진왜란 이후 남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남성 중심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다 보니 예외적으로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지, 유교 본래의 것은 아니었다. 유교에서는 남녀간에 지킬 바를 강조했을 뿐이다.

이에 비해 구약성서에는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다든지, 여자가 사악한 뱀의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원죄를 저질렀고 그리하여 남녀 모두 낙원에서 쫓겨났다는 내용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聖都

나는 기도소 입구에서 나눠준 고깔모자 ‘키파’를 머리에 쓰고 벽 가까이로 다가갔다. 벽은 아스라히 높았다. 거대한 빌딩 벽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벽을 이루고 있는 돌들은 매우 컸고, 형태는 사각이었다. ‘미찌(mizzi)’라 부르는 이 돌은 유태인이 건물을 지을 때 사용하는 것으로 그 특유의 베이지색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사람의 키가 닿지 않는 높은 곳에는 녹색을 띤 풀포기들이 바위틈을 비집고 고개를 내밀고 있고, 그 아래 조금 작은 크기의 바위들 틈에는 꼬깃꼬깃 접은 쪽지들이 박혀 있었다. 아마도 기도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간절한 기원을 적은 것일 터.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기도하게 만들었을까?

종교적 명절이 민족의 명절이 되고, 종교적 공동체가 민족의 그것이 되어 세속적인 국가공동체를 포용해버린 이스라엘. 그들이 보여주는 종교와 민족의 일치는 타종교·타민족과의 고립을, 고립은 배척을, 배척은 자신들의 고난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들의 2000년에 걸친 세속적 역사는 고난,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세속적인 고난이 하나님의 심판일 이후에는 영광이 될 수 있다는 믿음, 그래서 혹시 세속적인 영광이 있다면 그걸 즉시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려버리곤 했던 삶의 태도, 그것은 세속을 초월한 지극한 구원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이곳에서 간곡한 기도를 올리는 것을 보면 기도의 공간이라는 게 굳이 거창하고 화려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성전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또 거창하면 거창할수록 그 속에서 기도하는 인간의 심령은 오히려 신과 멀어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지붕이 없는 통곡의 벽 기도소는 기도의 공간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이렇듯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의 중동 사막에서 태어난 종교로는 마니교와 조로아스터교가 있다. 마니교도가 지금도 살고 있는지, 그렇다면 거기가 어딘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어 혹시나 하고 마니교가 태어났다는 이라크의 크테시폰까지 가봤으나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여행안내서엔 조로아스터교의 성도인 이란의 예즈드(Yezd)에 가면 조로아스터교도를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성전과 무엇보다도 ‘영원한 불’을 볼 수 있다고 돼 있어 이란 여행중 시간을 내어 그곳을 찾았다.

이란 동남쪽의 아주 외진 예즈드에는 정말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 모셔진 아테시카데 성전이 있었다. 평지붕 형태의 흙벽돌 가옥들이 옹기종기 박힌 시내 한곳에 자리한 그곳은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성전은 분명 성전이었다. 정면 지붕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인 ‘아후라 마즈다’의 신상이 걸려 있었고, 그 뒤로는 굴뚝이 보였다. 성전 안의 영원한 불이 내뿜는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한 것이었다.

문을 열고 성전 안으로 들어서자 6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노인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관리인이자 안내인이었다. 장방형 공간의 정면 벽에는 교조 조로아스터의 대형 초상화가, 작은 전시대에는 경전 ‘아베스타’가, 그 한가운데엔 ‘영원한 불’이 있었다. 그 앞을 유리로 막아 신성한 공간임을 알렸다. 영원한 불은 밝은 빛을 내며 타고 있었다.

불의 의미

오전 11시가 되자 하얀 성의를 입은 성직자가 예를 올리고는 새 나무를 화단에 집어넣었다. 그는 하얀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자신이 내쉬는 숨이 그 청정한 불꽃에 직접 닿아 오염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노인은 깨끗하고 단단한 통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한다고 일러줬다.

그들이 이렇게 불을 신성시하는 것은 불이 신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깨끗한 것이면서 위로 상승하는 성질이 있어 그들이 최고신으로 모시는 아후라 마즈다를 가장 잘 상징해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에는 빛과 선과 창조의 신 아후라 마즈다와, 어둠과 악과 파괴의 신 ‘앙리 마이유’, 이렇게 두 개의 최고신이 존재하는데, 서로 대결하며 싸우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인간 영혼의 세계에서도 이 두 최고신을 우두머리로 한 천사와 악령의 싸움이 계속된다고 믿었다.

조로아스터교는 우리에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비로소 알려졌지만 페르시아 제국시대엔 국교가 됐을 만큼 역사가 오래다. 아시리아 제국에까지 영향을 끼쳐 한때는 서아시아 일대를 지배할 정도로 대단한 세력을 형성했으나, 7세기에 이 지역이 이슬람화 되면서 쇠퇴일로를 걸었다. ‘알라 외의 신은 없다’고 외치는 이슬람은 조로아스터교와의 공존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신도가 박해받아 죽거나 그 땅을 떠나야 했고, 그 결과 지금은 인도에 오히려 더 많은 신자가 남아 있게 됐다. 그 중심인 뭄바이(옛 봄베이)에는 10만 명의 성도(聖徒)가 있다는데, 정작 성도(聖都)라고 하는 예즈드에는 1만 명도 채 되지 않는다. 지금의 이란은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이슬람 공화국이니 당분간은 교세를 늘릴 희망도 없어 보였다.

그 옛날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춘분 전후의 축제기간인 ‘노 루스’가 되면 찾았다는 성지 ‘착착’에는 순례자들을 위해 세운 숙박시설은 많았으나 모두 폐허로 변해버려 쇠락의 징후가 역력했다. 그래도 영원한 불은 타고 있었다.

조로아스터교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높은 곳에 널어놓아 새들에게 뜯어 먹게 하는 특이한 조장(鳥葬) 풍습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시신을 더러운 것으로 생각해 신성한 불로는 태울 수 없고, 그렇다고 매장해서 땅을 오염시킬 수도 없다고 여겨 높은 곳에 널어뒀다가 맹금류에게 뒤처리를 맡겨버렸던 것이다. 예즈드엔 그것을 증명하는 ‘침묵의 탑’이 두 개 있었다.

흙벽돌을 쌓아 올려 지은 원통형 침묵의 탑은 외딴 가파른 언덕 정상에 있어 택시기사는 무서운 듯 오르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혼자 20분을 걸어 올라서야 사람 키를 훨씬 넘는 탑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어 한 바퀴 돌다 보니 다행히 벽에 갈라진 틈이 있었다. 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바닥은 편평한데 가운데가 움푹 패어 있었다. 뼈를 수습하기 위한 것인 듯했다. 보존상태는 양호했다. 그러나 그날 독수리는 보지 못했다. 아마도 조장이 금지된 지 오래여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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