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보는 쪽에서 좌측에 유마거사가 새겨지고 우측에 문수보살이 새겨져 있다. 유마거사는 네모진 침상에 걸터앉아 고무나무 잎새처럼 생긴 포선(蒲扇; 부들 부채)을 흔들며 얘기에 열중한 모습인데 병든 몸을 가누기 힘든 듯 오른손은 몸 뒤에서 상을 짚어 몸을 지탱하고 있다.
의복은 깃과 섶에 검은 천을 댄 심의(深衣)를 입었으나 왼쪽으로 여며서 북위의 옷 입는 풍습에 선비족 전통이 가미됐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머리에 쓴 관(冠)은 마치 조선시대 탕건(宕巾)처럼 층급진 원뿔형이다. 휘장을 드리우고 침상 뒤로 가리개 병풍을 둘러서 실내의 침상임을 상징하였다.
그 반대쪽에 반가 좌세로 좌대 위에 걸터앉은 문수보살은 설법하는 손짓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유반가 좌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오른손 팔굽을 오른쪽 무릎에 붙이고 머리까지 오른쪽으로 기울여 미륵보살이 짓는 사유반가의 앉음새를 계승하고 있다.
유마거사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며 대답하고 있는 표현으로 알맞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했을 듯하나, 아직 유마거사와 대담하는 문수보살의 자세가 확립되지 않아 미륵보살사유반가상의 자세를 빌려 왔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문수보살 머리 뒤에는 원형광배가 새겨져 있고 그 뒤로는 일산(日傘)을 상징하는 덮개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많은 수행대중(隨行大衆)이 새겨졌을 듯한데 하단의 마멸이 심하여 알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이에 뒤따라 480년경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운강석굴 제6동 남벽 하층 중앙부의 (도판 3)에서는 석가삼존상 양식으로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을 석가모니불 좌우에 배치하여 담론하게 하고 있다.
기왓골이 분명한 전각 안에 3존상이 가득 차도록 새겨져 있는데 중앙의 수미좌 위에는 석가여래가 시무외인을 짓고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고, 그 왼쪽(보는 방향에서는 오른쪽)에 유마거사가 역시 침상에 걸터앉아 있으며, 오른쪽(보는 방향에서는 왼쪽)에는 문수보살이 네모진 좌대 위에 걸터앉아 있다. 그러나 문수보살은 좌대의 높이가 낮아 반가좌의 앉음새를 제대로 짓지 못하고 오른쪽 무릎을 비스듬히 눕혀 유희좌(遊戱坐)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의 의복 표현은 모두 포복식불의(袍服式佛衣)로 중국화되어서 (제5회 도판 10)이 조성된 이후에 그와 같은 양식 기법으로 조성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가부좌한 석가모니불좌상의 발목 부근을 덮어내린 옷자락 주름이 다만 4겹으로 단순해진 것은, 이 가 6동에서도 비교적 늦은 시기에 조성됐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요소다.
석가불좌상 뒷면은 두광과 신광이 겹겹으로 표현되어 있고 화불도 새겨져 있으나 문수보살상은 다만 두원광만 표시되어 있다.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의 어깨 뒤로는 가리개 병풍이 둘러쳐져 석가모니불의 화려한 광배와 대조를 이룬다.
이후 이런 유마경변상도는, 헌문제굴인 운강석굴 제6동을 조성했던 효문제(孝文帝, 467∼499년, 헌문제의 장자)가 태화(太和) 17년(493) 8월 낙양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고 10월에 용문(龍門)에 석굴을 뚫기 시작하면서 용문석굴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6세기 전반 이곳에서 그 유행의 절정기를 맞이한다.
그 결과 용문석굴 고양동(古陽洞)이 태화 17년 10월부터 굴착되기 시작한 가장 초기 석굴인데도 그 북벽 2층 3감에 가 얕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진다. 그런데 보는 쪽으로 오른쪽에 새겨진 (도판 4-I)에는 포복식불의를 입은 문수보살 좌상 뒤로 무수한 비구승이 표현되어 있어 석가모니불의 10대 제자를 비롯한 500제자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던 것이 효명제(孝明帝, 516∼527년) 시기에 조성되었으리라 생각되는 용문석굴 미륵동 북2동 북벽 불감 (도판 5)나 용문석굴 육사동(六獅洞) 정벽 좌측 상부의 (도판 6)에 이르면 10대제자로 압축 표현하려는 의지가 엿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효문제가 돌아간 후 그를 위해 경명(景明) 원년(500)부터 빈양중동(賓陽中洞)을 거대한 규모로 굴착하기 시작한 선무제(宣武帝, 483∼515년)가 27세 때인 영평(永平) 2년(509) 10월에 식건전(式乾殿)에서 승려와 조정 신하들을 위해 ‘유마경’을 직접 강의했다고 할 정도로, 역대 황제들이 ‘유마경’에 대한 이해가 깊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인 듯하다.
10대 제자의 출현

또 다른 원시경전(原始經典; 소승경전)에 속하는 ‘잡아함경(雜阿含經, 435∼443년, 求那跋陀羅 번역) 권16에서는 13명의 대표제자를 열거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촌 아우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시기하여 해치려는 마음으로 악행을 일삼다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다는 제바달다(提婆達多)도 있다. 선악을 불문하고 대표적인 인물을 숫자 개념 없이 뽑아내니 13인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런 것을 100인이라는 숫자 개념을 가지고 모범이 될 만한 대표자를 추린 것이 ‘증일아함경’ 권3 제자품에 열거한 인물들이다.
석가모니불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아서 깨달음을 얻은 성문제자(聲聞弟子; 음성, 즉 말씀을 듣고 깨달은 제자)를, 자기 자신의 깨달음만을 목표로 삼고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다 하여 소승(小乘)이라고 깎아내리던 대승(大乘)경전에는 이 성문제자들에 대한 체계적인 언급이 별로 없다. 이웃을 모두 함께 깨닫게 하려는 서원을 세운 보살의 존재를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마경’은 성문제자들이 유정(有情)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여 불이법문을 체득하지 못함을 강조하기 위해 오히려 그 대표격인 10대 제자를 일일이 열거함으로써, 석가모니불의 10대 제자를 분명하게 밝혀 놓는 최초의 경전이 되었다. 대승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대승적인 경전에서 소승 성문제자의 대표자를 분명하게 확정짓는 모순적인 결론을 맺어준 것이다. 양극이 상통하는 이치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그래서 오나라 지겸이 번역한 ‘불설유마힐경’ 권상 제자품 3(253년 번역)에서는 ① 사리불(舍利弗) ② 대목건련(大目連) ③ 대가섭(大迦葉) ④ 수보리(須菩提) ⑤ 반욕문타니자(頒褥文陀尼子) ⑥ 가전연(迦延) ⑦ 아나율(阿那律) ⑧ 우바리(優婆離) ⑨ 나운(羅云) ⑩ 아난(阿難)의 10대 제자를 들고 있다.
후진(後秦)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년)이 번역한 ‘유마힐소설경’ 권상 제자품 제3(406년 번역)에서도 똑같은 10대 제자를 열거하는데 다만 ⑤ 반욕문타니자를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라 표기하고 ⑥ 가전연을 마하가전연(摩訶迦延)으로 표기하며 ⑨ 나운을 라후라(羅羅)로 표기하여 음역을 달리하는 차이를 보였을 뿐이다.
현장(玄, 602∼664년)의 ‘설무구칭경’ 권2 성문품(聲聞品) 제3에서는 더욱 소리 번역과 뜻 번역을 뒤섞어 바꿔놓고 있으나 결국 같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사리자(舍利子) ② 대목련(大目連) ③ 가섭파(迦葉波) ④ 대선현(大善現) ⑤ 만자자(滿慈子) ⑥ 마하가다연나(摩訶迦多衍那) ⑦ 대무멸(大無滅) ⑧ 우파리(優波離) ⑨ 나호라(羅羅) ⑩ 아난타(阿難陀)가 그것이다.
앞의 번역들과 억지로 다르게 하려고 소리가 비슷한 다른 한자로 바꾸었거나 뜻 번역으로 바꾸고 소리번역과 뜻번역을 합쳐서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① 사리자는 소리 번역과 뜻 번역을 뒤섞어 놓은 것이고, ④ 대선현 ⑤ 만자자 ⑦ 대무멸의 경우 각기 수보리, 부루나미다라니자, 아나율의 뜻 번역이다.
현장의 신역(新譯)이라는 것이, 이와 같이 이미 통용되고 있던 이전의 잘된 번역을 혼란스럽게 원칙없이 흐트려놓은 경우가 많다. 내용도 이전 번역이 잘 요약해 간추려 놓은 것을 중언부언하여 지루하게 해놓은 경우가 허다하다. 이전 번역에 대한 개선이 아니라 개악인 것이다.
어떻든 3종의 ‘유마경’에서 소리 번역이나 뜻 번역을 어떻게 했든 간에 10대 제자의 인물내용과 그 차례는 동일하여, 이들 10대 제자가 이후 석가모니 부처님의 1250인 성문제자의 상수(上首; 우두머리)제자로 점차 석가 회상(會上; 모임)의 시위(侍衛)를 담당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