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호

첫사랑처럼 설레는 가을여행지 경기 양평· 여주

새벽 강 안개 걷히고 두물머리엔 추억이 내려앉았다

  • 글: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사진: 김성남 차장 photo7@donga.com

    입력2004-10-28 18:0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강은 여자의 이미지를 품고 있다. 강은 젖줄인 동시에 맨발을 씻어주는 어머니의 손길이다. 따갑도록 투명한 가을햇볕에 맨살을 드러낸 채 이리저리 뒤척이는 강물의 잔 떨림은 옷고름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수줍은 여인의 옆모습이다. 그래서 강줄기를 따라 떠나는 가을여행은 늘 설레는 프로포즈와도 같다.
    첫사랑처럼 설레는 가을여행지 경기 양평· 여주

    북한강과 남한강이 처음으로 만나는 두물머리의 아침. 희부옇게 피어나는 물안개만으로도 서울을 벗어난 보람을 만끽할 수 있다.

    첫사랑처럼 설레는 가을여행지 경기 양평· 여주

    양평에서는 해마다 가을이면 허수아비 축제가 열린다.

    가을이 황금빛 절정의 꼬리를 내리기 전에 단 하루만이라도 어디론가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이번 주말 당장 차에 시동을 걸어보라. 변변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을 때 가장 손쉽게 택할 수 있는 코스 중 하나가 양평이나 여주 쪽으로 한강변 드라이브를 즐기는 것이다. 대학시절 대성리나 용문산 MT를 통해 양평 한번쯤 안 가본 사람이 없겠지만, 그렇다고 양평이 자랑할 만한 명물들을 꼼꼼히 짚어보고 온 사람도 드물다. 그 시절 MT라는 게 밤새 막걸리 퍼마시고 띵한 머리를 서울행 기차 차창에 부딪치며 돌아오는 것이었기에.

    양평을 제대로 구경하려면 두물머리에서 시작하는 것이 정석이다. 남한강과 북한강 줄기가 만나 서울을 향해 흘러내리는 분기점에 옛사람들은 ‘두물머리’라는 앙증맞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두 갈래 물줄기가 머리를 맞대 합쳐진다는 뜻이니 얼마나 기막힌 조어법인가. 여기서 남한강 발원지까지는 394km, 북한강 발원지까지는 325km를 굽이돌아야 닿을 수 있다니 우리가 밤낮으로 건너다니는 한강이 얼마나 깊은 데서 시작됐는지를 알 수 있다.

    요즘 양평의 화두는 단연 ‘웰빙’이다. 양평군이 비교적 인접한 서울 강북구와 자매결연을 맺어 ‘웰빙투어’라는 상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웰빙투어’는 두물머리와 세미원 등 양평 지역의 관광명소를 돌아보고 용문 5일장에 들러 흙내음과 시골내음이 풀풀 나는 저녁 찬거리를 사가지고 돌아올 수 있게 한 당일여행 코스. 남편과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치여 ‘내 청춘 돌려다오’를 외치는 아내를 위해 준비해볼 만한 프로그램이다.

    첫사랑처럼 설레는 가을여행지 경기 양평· 여주

    전통 목공예와 불교 미술품으로 가득찬 목아박물관.

    ‘웰빙’을 이야기하면서 먹을거리를 빼놓는다면 헛일이다. 사람들은 양평 하면 서울에도 이미 수백개 업소가 상륙한 ‘양평해장국’이나 40년 전통의 고속도로변 ‘옥천냉면’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막상 양평엘 가보면 산더덕과 참송이버섯 등 시골장에서만 살 수 있는 토종 먹을거리가 지천이고 특히나 최근 들어선 유기농 식단으로만 꾸민 ‘슬로 푸드’형 음식점이 하나둘씩 생겨나 있음을 알게 된다.

    콩비지찌개를 일컫는 ‘콩탕’과 감자송편으로 유명한 남시손칼국수(031-771-4263)는 평일에도 점심시간엔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유명한 유기농 음식점이다. 용문산 어귀에만 10여곳이 모여 있는 한정식집에 들어서면 담양 대나무를 베어다 속에 찹쌀을 넣고 찐 대통밥을 맛볼 수도 있다. 밤 은행 흑미 등 10여가지의 잡곡을 넣은 대통밥에 복분자주를 한잔 곁들이면 나들잇길 한끼 식사로도 그만이다. 그뿐인가. 용문산 아랫 자락에 있는 ‘보릿고개마을’에 가면 봄에는 냉이를 캐고 가을에는 밤을 줍는 슬로 푸드 체험 프로그램도 즐길 수 있다.



    유기농 음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만5000평 콩밭에 농약 한 방울 쓰지 않고 기른 콩으로 빚은 전통 된장과 간장을 파는 수진원농장도 들러볼 만하다. 이 농장은 ‘말표 구두약’으로 평생 기업인의 길을 걸어온 정두화(85) 회장이 30년 전부터 직접 콩밭을 매 일궈놓은 곳이다. 된장 항아리에는 미생물이 번식하고 햇빛이 잘 들도록 특수제작한 뚜껑을 사용하고 2년 이상 숙성하지 않은 된장은 손도 못 대게 하는 것이 정 회장의 ‘된장 철학’이다.

    북한강을 끼고 청평으로 이어지는 363번 지방도로는 특히 강 쪽에 바짝 붙어 있어 햇살에 고기비늘처럼 반짝이는 북한강의 미세한 물결까지 느낄 수 있는 최적의 드라이브 코스다.

    그러나 수확의 계절이라는 가을을 맞아 먹을거리 볼거리가 많기로는 이 길보다는 6번 국도에서 갈라져 남한강을 끼고 여주로 향하는 37번 국도를 타는 것이 좋다. 여주 일대에는 들러볼 만한 곳이 많다.

    지하철 객차를 전시장으로 개조해 각종 생활용품 20여만점을 전시한 한얼테마박물관은 비좁고 어두워 번듯해 보이지는 않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한번쯤 들러볼 만한 곳이다. 또 불교 유적을 모아놓은 목아박물관에서 가을의 고즈넉한 햇살 아래 맑게 울리는 풍경소리를 듣고 있으면 한 주일 동안 쌓인 번뇌가 걷히는 것만 같다.

    첫사랑처럼 설레는 가을여행지 경기 양평· 여주

    ① 10월 한달 내내 여주에서는 주먹보다도 큰 고구마 수확으로 바쁘다.<br>② 이우로 관장이 평생 모은 생활용품 20여만점이 전시된 여주 한얼테마박물관.

    첫사랑처럼 설레는 가을여행지 경기 양평· 여주

    ① 남한강 뱃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주던 천서리 막국수는 지금도 여주의 명물이다. ② 10여가지 잡곡을 대나무에 넣고 찐 대통밥.



    첫사랑처럼 설레는 가을여행지 경기 양평· 여주

    북한강에서 바라본 양수리. 수도권 주민들이 강바람을 쐴 수 있는 곳이다.

    여주는 두말할 것도 없이 먹을거리가 풍성한 곳이다. 임금님 수라상에 올렸다는 여주쌀이나 땅콩 고구마 등 지역 특산물이 이 지역 땅이 얼마나 기름진가를 말해준다. 게다가 남한강을 끼고 있어 여주는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포나루라고 불리던 천서리에는 지금도 막국수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남한강이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를 실어나르던 유일한 운송로였던 구한말부터 일제시대까지 뱃사람의 속을 든든히 채워주던 장터 막국수가 지금까지 여주의 명물로 남아있는 것이다. 3대째 막국수집을 하고 있다는 홍원막국수(031-885-0559) 이대원(59) 사장은 “지금도 춘천이나 가평에 사는 노인들이 옛맛을 잊지 못해 차를 타고 천서리 막국수를 먹으러 올 정도”라고 전한다. 양평, 여주, 이천 일대의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마치고 허기를 느낀 주말 골퍼들이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한번쯤 들러볼 만하다.

    입가심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제는 서울로 돌아갈 일이 걱정이다. 남한강변 6번 국도나 북한강변 45번 국도의 주말체증이야 안 봐도 뻔한 일이니, 여주에서 출발한다면 아예 남한강을 건너 이천을 거쳐 중부고속도로를 타거나 3번 국도를 이용해 성남 쪽으로 들어오는 것도 괜찮을 법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이 좀 막힌다고 짜증을 부릴 바에야 아예 떠나지 않는 것이 낫다. 그깟 교통체증 때문에 황금빛 가을여행의 여운을 깨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