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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시대의 클래식 캐릭터 ②

대한민국 수퍼맘과 그리스 여신 데메테르

최첨단의 모성과 신화 속의 모성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대한민국 수퍼맘과 그리스 여신 데메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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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수퍼맘과 그리스 여신 데메테르

드라마 ‘하얀 거짓말’의 신정옥 회장은 아픈 아들이 사랑하는 여인을 아들이 원하는 장난감’으로 여긴다.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로 시작되는 모녀, 모자가 그 누구보다 끔찍한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역전되는 이 비극은 어디서 연원한 것일까. 자식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불의도 파렴치도 만행도 서슴지 않겠다는 이 잔혹한 모성의 기원은 무엇일까. 모성은 처음부터 이토록 배타적인 애정과 집착을 정당화하는 것인가.

모성의 신화적 기원을 찾아서

풍성한 수확을 관장하는 대지와 모성의 여신 데메테르. 그녀에게는 다른 여신들처럼 애틋하거나 파격적인 러브 스토리가 없다. 그녀 또한 수많은 ‘제우스의 여인’ 중 하나였으나 이오나 레다나 다나에처럼 드라마틱한 러브 라인을 형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데메테르는 남성과의 로맨스 못지않게 절절한 ‘딸 사랑’으로 유명하다. 데메테르는 최초의 유능한 싱글맘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부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도록 아름답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던 딸 페르세포네. 그녀는 들판에서 친구들과 함께 꽃을 따며 놀다가 아름다운 수선화를 발견하고는 꽃을 따려고 가까이 다가간다. 그 순간 땅이 갈라진다. 검은 말들이 이끄는 황금 마차를 타고 혜성처럼 등장한 죽음의 신, 하데스. 죽음을 관장하는 신 하데스는 아름다운 소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기 위해 몸소 지상으로 외출을 감행한 것이다.

페르세포네는 제우스에게 도와달라고 절규했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메아리로 울리는 페르세포네의 외침을 듣고 데메테르는 미친 듯이 페르세포네를 찾기 시작한다. 아흐레 밤낮 쉬지 않고 모든 땅과 바다를 샅샅이 뒤졌다. 잠도 음식도 거부한 채. 휴대전화도 GPS도 없던 시절 데메테르는 오직 자신이 가진 감각의 힘으로 딸을 찾아야 했다. 그녀는 아직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었다. 딸 찾아 삼만리를 나선 지 열흘 째, 데메테르는 달의 여신 헤카테를 만난다.



데메테르의 슬픔에 공명한 헤카테는 데메테르에게 태양신 헬리오스를 만나러 가자고 제안한다. 태양신 헬리오스는 드디어 페르세포네의 소식을 알려준다. 죽음의 신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해 페르세포네는 ‘원치 않는 신부’가 되었다고.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해 강간했다는 엄청난 소식까지. 헬리오스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데메테르에게 이미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슬픔에 빠지지 말라고 충고했다. 하데스 정도면 그다지 ‘스펙’이 달리는 사위도 아니니까. 결론은 이미 하데스의 신부가 되어버린 페르세포네를 데메테르의 힘으로는 데려올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모성의 블랙홀

그러나 절대적 모성의 화신이었던 데메테르의 사전에 타협이란 없었다. 이때부터 데메테르는, 하데스는 물론 그 어떤 도움의 손길도 뻗치지 않는 제우스를 증오한다. 제우스에게 강간당하거나 제우스와 사랑에 빠졌던 다른 여인들과 달리, 데메테르는 제우스와 정면대결을 시작한다. 최고의 신 제우스에게 정면 도전하는 데메테르는 모성의 이름으로 기꺼이 세상 모든 권력과 싸울 준비가 된 투사형 모성의 원형이다. 지상의 풍요를 관장하여 세상 모든 생물을 먹여 살리는 데메테르가 사상초유의 총파업을 시작한 것이다.

데메테르는 올림푸스 산을 떠나 평범한 노파로 가장하고 부랑자가 되어 떠돌았다. 어느 날 엘레우시스에 도착해서 우물가에 앉아 있는 노파 데메테르를 엘레우시스의 통치자인 켈레오스의 딸들이 발견한다. 아무리 꼬부랑 할머니로 변장해도 어쩔 수 없이 풍겨 나오는 여신의 품위와 아우라에 반해 그들은 그녀에게 다가간다. 데메테르는 자신을 보모자리를 찾고 있는 할머니라고 소개한다. 켈레오스의 딸들은 어머니 메타네이라에게 데메테르를 데려간다. 메타네이라에게는 귀여운 늦둥이 데모폰이 있었다.

데메테르는 마치 페르세포네에게 주지 못한 모성애의 대리물을 찾으려는 듯이 데모폰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한다. 데모폰에게 신의 음식을 먹이고 데모폰을 신성한 불에 그을려 불멸의 생명을 주려고 하는 순간, 마침 메타네이라가 들어와서 아기를 태우려는 줄 알고 비명을 지른다. 그제야 데메테르는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노파로 변장했던 데메테르의 본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잘 익은 벼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황금빛 머리카락, 그녀가 내뿜는 생명과 모성의 향기가 집안을 그득하게 채웠다.

데메테르는 자신을 위해 신전을 지어달라 명령한다. 이제 본격적인 파업투쟁에 들어간 것이다. 그녀는 신전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아 1인 시위를 시작한다. 이제 땅에서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으며 어떤 새 생명도 태어나지 않는다. 데메테르의 총파업으로 때 아닌 가뭄이 덮쳐오고 인류 멸망의 순간이 초읽기에 들어간다.

데메테르의 모성은 절절하지만 그녀는 딸 하나를 위해 지구 전체를 버릴 수도 있는 ‘모성의 블랙홀’을 증언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모성애라는 삶의 중심이 생기면 그 어떤 인간관계나 기존의 의무나 다른 감정들은 깡그리 망각될 수 있다. 오직 내 아이만을 생각하기에 타인은 굶어 죽거나 다치거나 꼴등을 해도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드디어 제우스가 나선다. 데메테르가 제우스의 회유에도 꿈쩍하지 않자 올림피아의 모든 신이 번갈아 그녀를 방문해 선물을 바치면서 그녀를 설득한다. 데메테르는 요지부동이다. 페르세포네가 돌아오지 않는 한 절대로 올림포스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지상에 어떤 생물체도 자라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요구조건이었다.

마침내 제우스가 항복한다. 헤르메스를 하데스에게 보내어 페르세포네를 되찾아오도록 명령한 것이다. 풀죽어 지내던 페르세포네는 제우스의 전령 헤르메스를 보자 뛸 듯이 기뻐한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내를 순순히 보내줄 하데스가 아니다. 하데스는 페르세포네에게 달콤한 석류씨를 주어 남편의 정을 표시한다.

페르세포네의 비밀 다이어리

드디어 돌아온 페르세포네. 엄마와 딸은 얼싸안고 기뻐한다. 데메테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혹시 지하세계에서 음식을 먹지 않았는지 묻는다. 하데스의 회심의 유혹을 담은 석류씨를 먹은 덕분에 페르세포네는 ‘영원히’ 돌아올 수는 없게 된다. 1년의 3분의 2는 어머니인 데메테르와 함께, 3분의 1은 지하세계에서 하데스와 함께 보내게 된 것이다. 이제 데메테르는 땅에서 곡식이 자랄 수 있게, 지상에 생명체가 태어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녀는 지치고 피곤한 엄마들이 각종 음담패설과 유쾌한 농담으로 마음껏 스트레스를 풀고 모성의 연대감을 확인하는 축제 ‘엘레우시스 제전’을 마련한다. 이 거대한 모성의 축제는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죽음 또한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여성들만의 카니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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