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초기에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지난 일을 자꾸 쓰다보니 기분이 자꾸 처진다”였다. 심지어는 “일기를 쓰다 보니 그게 우울증에 빠지는 지름길 같아서 일기를 쓰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사람도 있다. “자기반성은 하면 할수록 기분만 나빠진다”는 불평도 들었다. 야심으로 시작된 강좌는 워크숍 시간만 되면 ‘기분이 나빠지는 100가지 방법’을 배우는 것처럼, 분위기가 가라앉기도 하고 눈물로 얼룩질 때도 있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자기를 알고 싶어하면서도 자기반성에는 상당한 거부감이 있음을 알게 됐다. 요즘 풍조도 경험을 되새기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기보다는, 닥치는 대로 경험을 쌓는 게 ‘쿨한 것’으로 여겨, 과거 되새기기에 대한 거부감을 부추기고 있기도 하다.
틱낫한, 크리슈나무르티를 비롯한 많은 현자(賢者)는 “사람이 행복하려면 오늘을 살아야지,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면 안 된다”고 했다. 반대로 사람이 행복하려면 자기 인생에 의미가 있다고 느껴야만 하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려면 과거를 되새겨보아야만 한다. 딜레마다.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선 과거를 되새겨야 할까, 말아야 할까?
또 다른 딜레마도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않아야 발전이 있다고 한다. ‘만족한 돼지가 되느니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게 낫다’는 격언이 있을 정도. 반대로 ‘자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지혜롭지 못하다’는 격언도 있다. 헷갈린다. 도대체 자기에게 만족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은 계속된다. 자기반성을 하지 않으면 인격이 향상되지 않아 자기실현을 할 수 없다. 반대로 자기에 대해 지나치게 몰두하다보면 우울증에 빠지거나 자기애환자(자기도취적 성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가 된다. 그렇다면 자기반성을 하라는 것일까, 말라는 것일까?
이런 문제는 우리가 자기반성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데서 시작된다. 자기반성의 ‘대표선수’라 할 수 있는 일기 쓰기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일기 쓰기란 ‘어떤 일로 인해 기분이 나빴다, 좋았다’ 혹은 ‘앞으로는 어떻게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라 배웠다. 어른이 된 뒤에도 일기에 대한 인식은 바뀌지 않았다.
바른 자아반성이란 무엇일까?
그러나 이건 자기반성이 아니다. 종이에 불평을 털어놓는 과정을 통해 마음은 가벼워질지 몰라도, 자기를 알고 자아를 실현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치유하는 글쓰기’를 가르치는 동안 이런 내용을 말로 풀어 설명하기가 어려워 애를 먹었었다. 그러던 중 불경(佛經)을 읽다가 불현듯 내가 설명하고 싶었던 바를 깨달았다.
제자 나가르쥬나가 부처에게 물었다.
“진아(眞我)란 무엇입니까?”
부처가 대답했다.
“사자가 사슴을 잡을 때와 같으니라.”
눈을 감고 상상해보자. 사자가 사슴을 잡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 ‘사슴이 나를 숲의 왕자라고 두려워할까?’ ‘나를 좋아할까? 무서워할까?’ 혹은 ‘저 사슴의 눈에 내가 우습게 보이는 건 아닐까?’ 등 사슴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한다면, 사자는 그 사슴을 잡아먹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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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는 사슴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사슴은 어느 방향을 향해, 어떤 자세로 있구나. 뿔은 어디를 향하고 있고, 다리는 어떻게 뻗었고, 고개는 어떻게 하고 있으며, 코는 어디로 향해 있고, 달리는 속도는 어느 정도일 것 같고, 어디를 깨물어야 단숨에 숨이 끊어지겠고’ 처럼.
자기반성을 한다는 것은, 자신과 관계된 사람, 사건, 사물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 그저 기뻤다든지, 슬펐다든지, 화가 났다든지 감정을 쓰는 대신, ‘그 상황이 내게 어떻게 감지됐는가’를 쓰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가 나서서 자기감정을 해설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 글은 하소연을 들어주는 사람을 종이로 대신한 감정해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