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영웅 가리발디

오페라 ‘나비부인’의 한 장면. 푸치니에게 ‘나비부인’은 이상적인 여성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가리발디에 대한 시민의 열렬한 환영과 동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보이왕가와 통합해 이탈리아를 통일하자는 국민투표 결과에 가리발디는 즉시 승복하고,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은 채 1861년 사보이가의 왕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에게 자신이 통일한 남쪽 영토를 바친다. 이런 일은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정직하고 청렴한 가리발디의 이름이 세계적인 위인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이탈리아반도는 로마 지역과 베네치아가 있는 베네토 지역을 제외하고는 1차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가리발디는 항상 빨간 셔츠를 입었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붉은 셔츠단’이라 불렸다. 특이한 이력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돈키호테적인 기질로 인해 사람들은 그에 대해 항상 신비감과 강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그가 입던 칼라가 없는 풍성한 긴소매 옷은 일명 ‘가리발디 셔츠’라 이름 지어져, 여성을 위한 블라우스로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한다.
한 비평가는 푸치니에게 “당신 같은 대가는 여성들만 주인공으로 하는 신파조의 작품 말고, 가리발디 같은 국민적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조롱하듯 묻자, 푸치니는 “좋지요. 그런데 그는 전 이탈리아에 오스트리아, 남미, 미국까지 너무 많은 일을 해 그걸 모두 담으려면 10시간짜리 공연이 돼야 하는데 거기에 따른 제작비를 대실 건지요?”하며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푸치니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보자.
이탈리아반도에서 북쪽으로 치우친 중서부의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도시 루카에서 태어난 푸치니는 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족은 연금으로 살아야 했다. 그의 집안은 150년 동안 도시를 대표하는 음악가 집안이어서, 시에서는 5남매 중 유일한 아들인 푸치니를 위해 오르간 연주 자리를 공석으로 두는 배려를 했다. 하지만 어린 푸치니는 마르고 병약했고, 매사에 관심이 없어 작곡가로 대성할 기미를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던 중 1879년 사보이가의 움베르토 1세(1844~1900)가 취임한 지 2년이 되는 해에 전 이탈리아 학생들에게 많은 장학금이 주어졌다. 이미 20세가 넘은 푸치니는 대상이 아니었다. 성년이 지났어도 자리를 못 잡고 방황하는 아들에게 더 좋은 음악 환경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어머니는 출생 일자를 고쳐서 아들을 장학금 수혜 대상자가 될 수 있도록 했다.
궁핍했던 밀라노국립음악원 시절
우여곡절 끝에 밀라노국립음악원에 입학한 푸치니는 오페라 작곡가 퐁키엘리(1834~1886)를 비롯한 최고의 교수진을 만나면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됐고 서서히 실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삶은 고향에서보다 더 궁핍했다. 후에 푸치니는 “밀라노 유학생활은 인생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었으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라고 회상한다.
푸치니는 가난을 비관하거나 가난 때문에 슬퍼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젊음이 주는 권리를 마음껏 누렸다. 이 시기 푸치니의 자유분방한 여성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코모 푸치니와 자코모 카사노바(1725~1798). 이 두 자코모는 이탈리아 남성이 여성편력이 심하다는 인상을 세계적으로 알리며 이탈리아 남성들에게 오명을 씌우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기도 하다.
3년간의 밀라노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에게 첫 기회가 찾아온다. 훗날 그의 평생 지인이 되는 리코르디 출판사의 사장 줄리오 리코르디와의 만남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1884년 5월에 자신의 첫 오페라 ‘빌리’를 무대에 올릴 수 있었고,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동시에 훗날 애증으로 점철되는 인생의 반려자 엘비라 본투리(1860~1930)를 만난다. 그녀와 열정적인 교제 끝에 유일한 혈육인 아들 안토니오(1886~1946)를 낳자 조용한 도시 루카는 발칵 뒤집힌다. 엘비라는 아이가 둘 있는 유부녀였고, 그녀의 부유한 남편은 어린 시절부터 푸치니와 함께 몰려다니던 소꿉친구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