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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남자의 유년 풍경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외로운 남자의 유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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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유배자의 어린 시절

학교를 지나 삼거리에 이르러 다리 쪽으로 향했다. 철길이 지나는 작은 마을, 그 어디쯤에 간이역이 있을 것이고, 그 역을 통해 이오네스코는 파리로, 또 루마니아로 갔을 것이었다. 다리를 건너자 왼편으로 급격하게 구릉의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검푸른 숲 사이로 눈부시게 빛나는 녹지가 펼쳐져 있었고, 얼룩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이오네스코의 산문에서 봄직한 정경에 저절로 발길이 그쪽으로 옮겨졌다. 몇 걸음 걷지 않아 ‘moulin(방앗간)’이라고 적힌 작은 푯말과 마주쳤다.

농장으로 가려면 그 언덕을 내려가야만 했다. 왼쪽과 오른쪽에 움푹 파인 길은 초원의 가장자리를 에워싸고 있는 생울타리를 향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생울타리를 기어오르는 것, 생울타리의 구멍을 통과하는 것, … 그것은 우리를 경이롭게 만드는 발견이요, 탐험이었다. 공간은 광활했고, 풍경들은 2㎞ 정도 사방으로 펼쳐져 끝없이 다양한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 또 다른 물가에, 또 다른 고장에 갔었고, 옆 마을에까지 나아갔으며 결국 그것은 다른 대륙으로 이어졌다. - ‘발견-나는 왜 쓰는가’ 중에서

어린 이오네스코가 살았던 방앗간(제분소)은 부속 건물(창고)만 마당 한편에 남아 있을 뿐 본채는 레스토랑으로 변해 있었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장작더미가 쌓여 있는 창고와 하늘로 뻗은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냇가, 그리고 그 위에 눈부시게 펼쳐진 구릉의 초원을 완상하고 서 있자니 본채에서 주인이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에게서 세상을 등지고 사는 한 외로운 남자의 인상을 엿보았다면 나의 지나친 감상이었을까. 나는 꺼내지도 않고 가방 속에 묻어둔 ‘외로운 남자’의 칼 같은 첫 문장을 떠올렸다.

나이 서른다섯 살이면 인생 경주에서 물러나야 한다. 인생이 경주라면 말이다. - ‘외로운 남자’ 중에서



이 소설이 쓰인 것은 1973년. 이오네스코 나이 64세 때였다. 1950년 부조리연극을 대표하는 ‘대머리 여가수’의 대성공 이후 20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21세기 독자라면 이 첫 문장을 보고 당장 소설을 덮어버릴지도 모른다. 엄혹한 현실의 정글에서 서른다섯이면 막 자리를 잡고 의욕적으로 인생을 운용해보려는 나이. 그런데 인생 경주에서 물러나야 한다니, 이오네스코는 무엇을 믿고 이런 첫 문장을 제시한 것일까?

직장 일이 나는 신물이 났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으니 이른 편도 아니었다. 예기치 못했던 유산을 물려받지 않았더라면 난 권태와 우울증으로 죽고 말았으리라. 아주 드문 일이지만 가끔 이런 횡재를 안겨다주는 먼 친척이 있는 법이다. - ‘외로운 남자’ 중에서

오호라, 인생 최대의 횡재. 프랑스인들이 현실의 막다른 궁지에서 찾는다는 ‘미국 삼촌’(생각지도 않았던 친척이 미국에서 벼락부자가 되어 나타나 상속자가 없어 유산을 나에게 물려준다는 속담)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그것을 가정하고 읽어본다면, 그럭저럭, 서너 시간, 나를 작가에게 맡기고, 환상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이오네스코는 죽기 전 단 한 편의 소설을 쓰고자 했던 것일까. 이오네스코의 말년 작업은 파편화된 유년기를 추적하고 성찰한 자전적 에세이와 스케치. ‘외로운 남자’는 이 모든 자전적 삽화와 회상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한 자전적 소설인 셈. 노작가의 조율에 의해 20세기 이름을 날렸던 소설 주인공들(대부분 그들은 서른다섯 살 무렵 세상에서 물러나거나 제외되었다)이, 숨바꼭질하듯, 익명의 화자에 얹혀 출몰하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톡톡하다.

이제는 멈춰버린 방앗간에서 언덕으로 올라오자 막 기차가 마을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기차 꼬리를 스치듯 다리를 건너 성당을 향해 걸어갔다. 다리를 건너는 중에, 문득, 뒤통수를 치듯,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이곳은 어린 이오네스코의 유배지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에서 스스로 자신을 유폐시킨 서른다섯 살 사내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아 그가 복원하고자 한 것은, 유년기에 멈추어버린 생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끼워 맞춰 한 편의 그림으로 완성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소설만이 유일하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기차 꼬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기차나 나나 갈 길이 멀었다.

신동아 201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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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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