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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한 천국 망한 청춘의 우울한 비망록

  •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힙한 천국 망한 청춘의 우울한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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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한 천국 망한 청춘의 우울한 비망록

천국에서<br>김사과 지음, 창비

새해 벽두 김사과의 소설을 읽는다. 이 말은 21세기 한국 젊은 소설의 최전선과 만나는 것, 동시에 10대와 20대의 일상과 세계 인식을 가장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을 뜻한다. 또한 21세기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질문을 새삼, 다시 던지는 것과 같다. 각설하고, 스물한 살 김사과의 데뷔 단편 첫 장면을 보자.

영이야. 아이들이 영이를 불렀다. 영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영이까지 합쳐서 다섯 명의 영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먼저 은영이의 영이가 명랑하게 뛰어갔다. 정현이의 영이도 은영이에게 달려갔다. 주희의 영이는 예쁜 레이스 치마를 입었다. (…) 놀란 눈으로 영이는 달려가는 영이들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영이는 영이 하나뿐이었는데 아이들이 부르자 하나의 영이와 네 개의 영이들이 된 것이다. -김사과, ‘영이’, 창비

언뜻 이상의 시 ‘오감도’를 연상시킨다. 동시에 초현실주의 화가가 불러낸 무한 증식의 장면들을 보는 듯하다. ‘영이’를 앞세운 김사과의 등장은 그동안 한국의 실험 소설들이 너무 소극적이고 관념적이었음을 반증했다. 첫 장편 ‘미나’ 이후 지속적으로 발표한 ‘풀이 눕는다’, 그리고 ‘테러의 시’는 ‘앙팡 테리블’이라는 수사가 옹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질적이고 파괴적이었다. 혹자는 그것을 단박에 혁명으로 알아보았다.

시적 문장, 참혹한 서사

“민호.” 수정이 인사한다. 문틈으로 수정의 뺨이 약간, 직삼각형 모양으로 드러난다. “수정.” 민호가 인사한다. 수정이 열린 문틈으로 폴짝 뛰어 들어온다. 수정이 빠져나온 틈새가 신속하게 메워지며 현관문 잠금장치가 세 음절로 노래한다.



수정은 천천히 거실을 향해 걷는다. 하늘. 수정이 고개를 꺾고 천장을 바라본다. 샹들리에. 거기 빛이 있다. 수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 짓는다.“미나.” -김사과, ‘미나’, 창비

김사과 소설의 출발은 매우 시적이다. 한눈에 훅 빠져들 정도로 시적인 문장과 이어지는 행간의 흐름은 경쾌하기도 하고 서정적이다. 그런데 서정적이고 경쾌한 시적인 문장 이면에 도사린 서사의 내용은 참혹하다. 마치 세이렌의 유혹처럼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홀려 소설의 함정에 쑥 빠져들지만, 거기에서 빠져나올 때는 끝을 본 자의 공허에 질려 있을 뿐이다. 그가 다루는 내용은 하나같이 한국 사회가 은폐하거나 방기한 최악의 장면, 최악의 사태이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점철된 가족의 일상을 그린 단편 ‘영이’, 죽여서라도 친구의 마음을 느껴보고자 살인을 저지른 10대 소녀의 극단적인 욕망을 그린 ‘미나’, 조선족 제니와 영국인 불법체류자 리를 통해 서울과 한국의 총체적인 파국을 테러의 시간으로 접근한 ‘테러의 시’들이 그것이다.

길은 하늘과 구별되지 않는다. 하늘은 모래와 구별되지 않는다. 모래는 도시와 구별되지 않는다. 노란 꿈이 절정에 닿아 있다. 차가 모래 속에서 전진한다. 모래가 차 위로 전진한다. 커튼 속 여자들이 어둠 속에서 꿈틀거린다. 갑자기, 굉음과 함께 차가 살짝 흔들린다. 여자가 뒤를 돌아본다. 그들이 방금 빠져나온 집이 무너져 내린 것이 보인다.

무너져 내린 집에서 동물의 커다란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 제니가 웃는다. 찢어진 커튼 속에서 제니가 웃는다.

-김사과, ‘테러의 시’, 민음사

소설이라는 종자의 기원은 재미, 그러니까 오락의 기능에 있다. 소설이 많은 독자를 거느릴수록 오락성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순수 문학, 곧 작품으로서의 소설은 예술과 사상, 둘 중 하나에 무게 중심을 둔다. 오락의 세계는 이 둘 중 어느 것과도 결합 가능하다. 작품성과 재미를 두루 갖춘 소설이 그것이다. 거꾸로 재미만으로 작품성을 갖춘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작품성이 높다고 해서 재미가 있는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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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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