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호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진실

  •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3-11-20 16: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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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진실

    두 도시 이야기<br>찰스 디킨스, 이은정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대양(大洋)의 나들목인 해협을 사이에 둔 두 나라의 역사는 가까운 만큼 서로 치열하고, 치열한 만큼 위협적인 양상을 보여왔다. 이런 긴장 관계는 두 나라의 상이한 민족성과 공간성으로부터 첨예하게 갈라지는데, 19세기 산업혁명의 총아인 런던과 19세기 세계 예술의 수도 파리는 여러모로 비교 대상이 되어왔다.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는 런던과 파리를 소설의 무대로 호명하고, 프랑스 혁명기를 시간적인 배경으로, 거시사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 미시적인 민중의 삶을 촘촘히 복원함으로써 역사의 파수꾼임을 자처한다. 1859년에 출간된 ‘두 도시 이야기’가 그것이다. 우선 런던.

    11월의 어느 금요일 밤, 이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첫 번째 인물 앞에 도버대로가 펼쳐져 있었다. (…) 움푹 꺼진 땅마다 증기 같은 안개가 서려 있었다. 안개는 안식할 곳을 찾지 못한 악한 영혼처럼 쓸쓸하게 언덕을 배회했다. 축축하고 몹시 차가운 안개는 바다의 불길한 파도처럼 대기 중에서 잔물결을 지어 서서히 움직이다 다른 증기들과 뒤섞인다. 안개가 워낙 짙어 마차의 불빛이 비추는 거라고는 이런 안개의 움직임과 몇 야드의 앞길뿐이었다.

    소설 초반부의 이 짧은 묘사는 북대서양의 섬나라 수도 런던의 지리적인 특성에서 기인하는 안개와 해협 특유의 불안정한 파고(波高), 그리고 산업혁명(1830)의 시발지인 리버풀에서 런던을 잇는 대륙횡단열차가 뿜어내는 기관차의 증기 이미지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 다음은 파리.

    떨어져 깨진 커다란 포도주통이 거리에 나뒹굴었다. 수레에서 술통을 내리다 사달이 난 것이었다. 떨어진 포도주통이 떼굴떼굴 구르면서 통을 묶은 고리가 터지고 술집 문 앞 돌멩이에 부딪쳐 호두껍데기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 쏟아진 적포도주는 파리 생탕투안 교외의 좁은 거리를 붉게 물들였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손과 얼굴, 헐벗은 발과 나막신까지도 물들였다. (…) 멀대같이 키가 큰 익살꾼은 포도주가 스며든 진흙을 손가락에 묻혀 벽에 낙서를 했다. 피.

    런던과 파리 넘나들기



    역시 소설 초반부의 파리에 대한 묘사는 파리와 프랑스적인 특징을 몇 개의 의미심장한 단어(기호)로 잘 드러내고 있다. 우선 포도주를 상음하는 민족답게 파리라는 공간과 프랑스인(마네트 박사와 그 딸, 그 딸의 남편인 다네이 등)이 등장할 때면 반드시 포도주가 함께한다. 그리고 시민의 힘으로 폭정의 전제 군주와 귀족 계급을 타파한 프랑스혁명을 향해 치닫는 공간적 배경으로 생탕투안(Saint-Antoine) 거리가 배치된 점이다. 생탕투안 거리는 당시엔 파리 외곽으로 바스티유 감옥과 지척에 있었다. 현재 바스티유는 신오페라극장으로 탈바꿈했고, 그 앞 광장엔 혁명을 기리는 탑이 세워져 탑신 끝 자유의 여신이 창공을 향해 황금빛 날개를 펼치고 있다.

    장작 따위를 재어놓으려고 만든 다락은 어두침침했다. 지붕창은 사실상 지붕에 낸 문이었고, 거리에서 물건을 매달아 끌어올리는 작은 크레인이 달려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 건축물의 여느 문처럼 유리도 없이 두 쪽으로 나누어져 가운데에서 접히게 되어 있었다. (…) 문에서 등을 돌린 채, 술집 주인이 서서 바라보는 창문 쪽으로 얼굴을 향한 백발노인이 낮은 걸상에 앉아 허리를 구부리고 바쁘게 구두를 짓고 있었다.

    이 대목은 생탕투안의 드파르주 술집 옆 골목에 있는 다락방 어둠 속에서 구두를 짓고 있는 백발의 사내를 처음 등장시키는 대목이다. 영화의 카메라 기법처럼 전체에서 부분으로 초점화하는 서술이 전개되고 있다.

    소설의 주요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인물은 이 소설을 작동시키는 몇몇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인 마네트 박사다. 이 장면에는 마네트 박사와 그를 찾아간 술집 주인 드파르주 외에 두 명이 문간에 서 있다. 런던 텔슨 은행원 자르비스 로리와 갓 낳았을 때 헤어지고 망각된 마네트 박사의 딸 루시가 그들이다. 마네트 박사는 보베 출신의 전직 의사다. 자기도 모르는 아주 사소한 일에 연루되어 18년 동안 생탕투안 옆 감옥에 갇혀 있었다. 로리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런던으로 옮겨왔으나, 정신적인 외상을 깊게 입은 상태다.

    드파르주 부인의 뜨개질

    드파르주는 마네트의 옛 하인으로 생탕투안의 술집 주인이다. 감옥 같은 다락방을 찾아와 말을 거는 유일한 방문자였다. 그는 로리와 딸 루시에게 마네트 박사를 인도하고, 훗날 ‘자크(자크리의 난을 지칭해 익명의 민중을 일컬음)들을 모아 바스티유 감옥 습격의 선봉장이 된다. 루시는 마네트 박사가 감옥에 갇힐 무렵 태어난 딸이다. 마네트 부인은 어린 딸을 남기고 일찍 눈을 감으면서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유언해서 딸은 아버지가 죽고 없는 것으로 알고 성장했다. 로리와 함께 파리로 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런던으로 와 극진하게 간호한다.

    독신인 로리는 런던의 텔슨 은행원으로 마네트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무적인 직원의 역할이나, 마네트 부녀의 삶에 깊이 연루되면서 신뢰와 애정으로 그들과 함께한다. 로리는 900여 쪽에 달하는 장대한 서사 흐름에서 이들 부녀 삶의 증인으로서 방향타 구실을 하는가 하면 균형추 구실을 하기도 한다.

    박사의 딸은 (…) 보잘것없는 걸로도 그럴듯한 것을 만들어내는 데 천부적인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 점은 프랑스인의 가장 유용하고 훌륭한 특징이었다. (…) 세 번째 방은 박사의 침실이었다. 침실 귀퉁이에는 파리 생탕투안의 선술집 옆 음침한 건물 오층 다락에서 가져온 사용하지 않은 구두공의 걸상과 연장통이 놓여 있었다. (…) 로리 씨가 둘러보다 말고 말했다. “고통스러운 과거가 떠오를 텐데, 이런 물건을 그대로 두다니!”

    다네이는 마네트 부녀와 로리가 도버해협을 건너는 배 안에서 처음 만난 청년이다. 프랑스 귀족의 삶에 혐오를 느껴 런던으로 떠나 가명으로 살며 프랑스 정세에 밝은 고급 프랑스어 교사이자 번역자와 통역자로 성공한 인물이다. 그는 마네트처럼 자유의지로 조국 프랑스를 떠나 런던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다네이라는 존재는 ‘아버지와 딸의 극적인 상봉과 그 후의 삶’의 전개에서 파국을 견인하는 문제적 인물이다. 마네트 부녀는 처음 도버해협을 건너는 배에서 우연히 만난 이후 결혼에 이르는 과정까지 다네이에게 깃들어 있는 생의 비밀을 모른다. 다네이는 프랑스에서의 샤를 돌네(곧 찰스 다네이), 다름 아닌 마네트 박사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버린 악명 높은 에브레몽드 후작의 조카, 후작의 상속자였다. 이런 관계 설정은 서사 후반의 파국을 예비한 것이다.

    “찰스, 내 딸을 어서 데려가게! 이젠 자네 사람이야!” 루시는 마차에 올라 손을 흔들며 차창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이윽고 마차가 떠났다. (…) 로리 씨는 박사의 방으로 걸어가다가 무엇인가를 두드리는 낮은 소리가 들려오자 걸음을 멈추었다. “맙소사!” 그는 놀라서 중얼거렸다. (…) 그때 미스 프로스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 이런, 세상에!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었어!” 그녀가 맞잡은 두 손을 비틀어대며 말했다. “아가씨에게 뭐라고 하지? 박사님이 나를 몰라보고 구두를 지으시네.”

    ‘두 도시 이야기’는 마네트 부녀와 로리, 하녀 미스 프로스, 라이벌 관계인 다네이와 카턴, ‘자크’로 지칭되는 프랑스 민중의 선봉장인 술집주인 드파르주와 그 아내의 이야기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찰스 디킨스는 행위 위주로 사건과 인물의 심리를 전달하는 서사 기법을 고안해 구사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장면마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생생해서 900여 쪽에 달하는 장편이 단숨에 읽힌다.

    또한 인물의 성격과 소임을 파악하도록 배치한 사물과 행위가 인상적이다. 마네트 박사의 불행한 과거이자 트라우마를 상징하는 구두 짓기, 그리고 드파르주 부인의 한결같은 뜨개질이 그것이다. 드파르주 부인은 술집 귀퉁이에서도 거리에서도 광장에서도 뜨개질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뜨개질은 혁명의 물결에 합류하고 휩쓸리는 수많은 익명의 이름들과 행적을 뜨개질 바늘로 촘촘히 짜고 증언하는 수단이다.

    오후에 왕과 여왕의 마차를 구경하려고 인파 속에서 기다릴 때에도 뜨게감을 손에서 놓지 않는 부인을 보고 있자니 더욱 마음이 뒤숭숭했다. “무엇을 뜨십니까, 부인?” “여러 가지요.”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드파르주 부인이 침착하게 말했다. “수의 같은 거요.”

    소설적 진실의 깊은 여운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이 런던을 무대로 한 대표적인 소설들이라면,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플로베르의 ‘감정교육’,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파리 탐구서라고 할 정도로 소설 속에 세밀하게 살아 있다. 그러나 이 두 공간을 넘나들며 비교를 통해 차이를 명료하게 각인시키는 소설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

    소설가는 역사적인 사실을 취사선택해 자신의 작품 의도에 맞게 우선순위와 강약을 조절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깡그리 배제하고 누락된 이면의 속살을 들추어 보인다. 프랑스혁명을 이야기할 때 거론되는 대문자의 고유명들이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서민의 삶을 바닥에서 온몸으로 체현한 소설가 찰스 디킨스만의 특징이다.

    역사적 사실과 대비된 소설적 진실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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