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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역사기행

‘카페 문학’의 본고장, 오스트리아 빈

문화 혁명가들의 숨결을 찾아서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카페 문학’의 본고장, 오스트리아 빈

  • ● 삶의 질 가장 높은 글로벌 문화도시
    ●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위업
    ● 대화와 토론 넘치는 소통의 집, 카페 천국
    ● 클림트·프로이트가 이룬 문화혁명 탄생지
쇤브룬 궁전. [백승종 제공]

쇤브룬 궁전. [백승종 제공]

‘카페 문학’의 본고장, 오스트리아 빈
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고전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향기로운’ 문화도시다.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슈트라우스와 말러의 숨결이 이곳저곳에서 느껴진다. 도심을 산책하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음악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참으로 신비한 장소다. 

그래서일까. 삶의 질이 세상에서 가장 높아 누구나 살고 싶은 도시로 꼽힌다. 비엔나는 영어식 이름이고 독일어로는 빈(Wien)이라 한다. 인구는 대략 150만 명에 불과하지만 국제사회에서 위상은 매우 높다. 늘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각종 국제회의도 빈번하게 열린다. 통계를 곁눈질해 보니, 2014년 한 해만도 202번의 대규모 글로벌 행사가 열렸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때 빈은 깊은 위기에 빠졌다. 오스트리아 출신 아돌프 히틀러가 문제였다. 1938년 히틀러는 조국을 독일제국에 편입했고, 그 바람에 오스트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주권을 잃었다. 고심 끝에 오스트리아는 중립을 선포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에 속하지 않고, 소련 중심의 동구권에도 가입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는 10년 만에 주권을 되찾았다. 

이후에도 빈은 꾸준히 정치적 중립을 지킴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았다. 국제원자력기구를 비롯해, 유엔마약범죄사무국, 석유수출국기구, 유럽안보협력기구 등이 하나둘씩 빈에 둥지를 틀면서 오스트리아는 자연스레 국제 무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부러운 일이다. 우리나라도 장차 이렇게 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빈이란 이름은 베두니아(Vedunia)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숲의 물결’이란 뜻이다. 실제로 빈은 다뉴브 강가에 자리한 숲의 도시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음악 가운데도 ‘비엔나 숲’이란 곡이 있다. 숲은 아늑한 휴식의 공간이요, 상상의 나래가 절로 펼쳐지는 신비한 곳이다. 



중세의 빈은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 바깥을 널찍하게 비워뒀다. 하지만 근대에 접어들어 화약무기가 발달하면서 성벽의 전술적 가치가 사라지자, 황제는 성벽을 헐어 도시를 확대했다. 1850년 성곽의 자취를 따라 원형의 거리, 즉 링슈트라세가 조성됐다. 이후 그 거리의 앞뒤에 공공건물과 공원이 속속 들어섰다. 시청과 의회, 대학교와 극장, 박물관과 극장이 자리 잡았다. 

링슈트라세에는 볼거리가 많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성 슈테판 대성당이다. 고딕 양식으로 높게 지어진 대성당은 11월부터는 그 뜨락에서 유럽 최대 규모의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언 손을 비비며 따뜻한 뱅쇼(과일 등을 넣어 끓인 와인 음료) 한 잔을 마시던 기억이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다.


지금도 사랑받는 마리아 테레지아

내 친구 요셉은 나를 쇤브룬 궁전으로 이끌었다. 빈 남쪽에 위치한 쇤브룬 궁전은 외관은 바로크풍이지만 내부는 로코코풍의 아름다운 곳이다.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별궁으로 유명한 이곳에는 궁전 뒤편에 널찍한 프랑스식 정원이 있다. 

언젠가 요셉은 쇤브룬 궁전 정원을 산책하면서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줬다. 마리아 여제는 오늘날까지도 시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계몽적 전제군주로, 1740년 이곳에서 즉위식을 치렀다. 재위 기간 다방면에 걸쳐 개혁 조치를 단행한 결과, 오스트리아 황실 즉 합스부르크 왕가는 전성기를 맞았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스위스령 알프스 산악 지방에서 시작됐다. 1273년 가문의 시조인 루돌프 1세(백작)가 ‘로마 독일 왕’으로 선출됐다. 그때부터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를 통치했다. 

“가문의 영토와 재산을 절대로 나누지 말라”는 루돌프 1세의 상속 원칙에 따라, 그 후 650년 동안 이 후손들은 왕실 재산을 분할하지 않으며 단독 상속을 고수했다. 행운도 따랐다. 1452년, 프리드리히 3세가 로마 황제로 즉위하면서 이후 460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는 줄곧 그 자손들이 차지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왕(父王)은 카를 6세였다. 1713년 그는 ‘실용적 조칙(詔勅)’을 내려 자신이 죽은 뒤에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제위를 승계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등극하기가 무섭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시비를 걸어왔다. 슐레지엔(폴란드 남서부와 체코의 수데티 산맥 남쪽 기슭) 영유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켰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강적을 만나 18년 동안 노심초사했다.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적국인 프로이센을 본받아 제도개혁을 실시했다.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행정과 사법을 분리했다. 기득권층의 특권도 제한해 법치국가의 길을 열었다. 결과적으로, 기득권층은 평민과 마찬가지로 납세의 의무를 지게 됐다. 또 중세의 동업조합인 길드의 특권을 제한해 경제생활의 변모를 꾀했다. 

아울러 초등교육을 의무교육으로 선포하고, 가톨릭 수도단체 예수회가 행사하던 빈 대학교의 관리감독권을 취소했다. 중세의 악습도 많이 없앴다. 태형과 마녀재판을 없앴고 농민에게 강요되던 부역도 줄였다. 오스트리아는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로서 전성기를 맞았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운

여제는 조상 전래의 결혼정책을 지속했다. ‘축복받은 오스트리아여, 전쟁일랑 다른 나라에 맡기고, 너희는 결혼에 힘쓰라’는 조상의 유훈대로 합스부르크 왕가는 결혼정책을 중시해온 터였다. 여제는 프로이센을 고립시키기 위해 프랑스 및 이탈리아와 결혼 동맹을 맺기 시작했고 일정 부분 성공했다. 

여제의 11번째 딸 마리아 카롤리나는 시칠리아 공국의 페르디난트 3세와 결혼했다.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도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아내가 됐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 루이 16세와 그의 아내는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죄목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국가기밀 누설죄’다. 오스트리아 황실과 내통하며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제시된 편지 내용이 좀 우스꽝스럽다. ‘어젯밤 루이 16세가 왕비와 동침하지 않았다’는 식의 하찮은 보고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금실은 특별했다. 19세에 자신보다 아홉 살 연상인 프란츠 슈테판 폰 로트링겐, 후일의 프란츠 1세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여제는 16명의 자녀를 연이어 출산했다. 훗날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여제는 “남편이자 친구요, 내 유일한 사랑을 잃었도다!”라고 한탄하며 자신이 죽는 날까지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사후에도 여제는 오스트리아의 영원한 국모로 남았다. 그 아들 요제프 2세도 모후의 뜻을 받들어 개혁을 펼쳤고, 빈은 당대 최고의 근대도시로 발전했다.


‘카페 문학’의 산실

빈에서 유명한 센트럴 카페. [백승종 제공]

빈에서 유명한 센트럴 카페. [백승종 제공]

빈 시민들은 커피를 즐겨 마신다. 하루 평균 0.5L의 커피를 소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드 브레히트는 “빈은 카페의 도시”라고 말한 바 있다. 17세기 말부터 시작된 이 도시의 카페 문화는 단연 세계 최고다. 

빈의 카페는 문화의 산실이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카페에서 몇 시간이고 머무는 사람이 많다. 빈 시민에게 카페는 ‘제2의 거실’인 셈이다. 시내에는 약 1200개의 카페가 성업 중이다. 2011년 유네스코는 이 도시의 카페를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무엇이든 시작이 있기 마련이다. 17세기 후반, 폴란드 출신 게오르그 프란츠 콜시츠키란 이가 있었다. 그는 오스만튀르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출정한 군인이었는데, 적군이 물러간 뒤 폴란드 왕이자 연합군 사령관이던 존 3세는 그들이 남기고 간 커피 원두를 발견했다. 왕은 콜시츠키에게 상당량의 원두를 주었고. 사업 수완이 있었던 콜시츠키는 ‘푸른 병을 향한 집’이라는 카페를 열었다. 

빈에 가면 이른바 ‘비엔나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많다. 먼저 잔에 커피를 반쯤 붓고 우유를 넉넉히 따른다. 그 위에 생크림을 얹고 카카오 가루를 뿌리면 된다. 300년 넘게 이어진 전통의 비엔나 커피의 본모습은 이렇다. 본래는 ‘아인슈판너’라고 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홀아비’ 또는 ‘한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라는 뜻이다. 옛날에 가난한 마부가 한 손으로 고삐를 거머쥔 채 설탕과 생크림을 얹은 커피를 마셨다는 유래담을 읽은 적이 있다. 오늘날 빈에서 비엔나커피를 주문하려면 ‘멜랑쥐(Melange)’ 즉 ‘혼합물’이라고 말해야 쉽게 통한다. 

카페의 유행은 참으로 대단했다. 1788년 ‘프라우엔후버’가 개점할 때는 창업 기념으로 모차르트가 특별 연주를 했다. 18세기에는 150개의 카페가 들어섰고, 1910년에는 그 수가 1200개로 늘났다. 19세기 말에는 카페가 예술가들의 아지트이자 빈 모더니즘의 산실이었다. 다수의 문인은 하벨카, 그린슈타이들, 센트럴 등의 카페에 모여 문학을 논했다. 귀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가난한 지식인들이 유일하게 기를 펼 수 있는 곳이 바로 카페였다. 

센트럴에 가면 시인 알텐베르크를 형상화한 인형이 눈길을 끈다. 과거에 알텐베르크는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편지봉투에 주소를 ‘센트럴’이라고 적었다. 늘상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알텐베르크뿐 아니라 당시에는 하루 종일 카페에서 원고를 쓰는 작가가 많아 ‘카페 문학’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훗날 러시아 혁명가로 이름을 남긴 레프 트로츠키도 망명객 시절 카페 ‘그린슈타이틀’의 단골손님이었다. 기성체제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주로 숨어 지낸 공간으로, 스탈린과 히틀러도 이곳에 자주 왔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빈의 지식공동체는 카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설사 정치적 취향은 다르더라도 이들끼리는 서로 잘 알고 지냈다. 토론과 대화가 오가는 소통의 집이 바로 카페였다.


전설의 초콜릿 케이크

카페 문화를 말하다 보니 빈의 케이크도 빠뜨릴 수 없다. 특히 ‘자허 토르테’가 유명한데, 일종의 초콜릿 케이크다. 케이크 안에는 살구 잼이 들어가고, 표면은 달콤하고 향긋한 초콜릿이 듬뿍 감싼다. 이 케이크를 처음 만든 곳은 자허 호텔이다. 1815년 메테르니히 총리에게 특별한 디저트를 대접하고자 만든 것이라고 한다.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함께 먹는 자허 토르테는 그 맛을 한번 본 사람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아펠슈투르델’이라는 사과파이도 유명하다. 종잇장보다 얇은 여러 겹의 파이 반죽 안에 사과와 건포도를 가득 채워 바삭하게 구운 것이다. 빈을 여행하는 동안 나는 한 카페에서 2~3m는 족히 돼 보이는 긴 사과파이를 만드는 광경을 직접 보기도 했다. 빈에 왔다면 ‘비엔나 슈니첼’도 꼭 먹어봐야 한다. 송아지고기 또는 돼지고기에 밀가루로 옷을 입혀 튀긴 것인데, 어느 레스토랑에서든 쉽게 맛볼 수 있다. 

메테르니히가 총리로 재임하던 시절,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상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빈은 프랑스혁명에 반대하는 모든 유럽 국가의 의지가 집결된 장소로서 보수반동 세력의 철옹성이었다. 

당시 메테르니히는 걸출한 용모와 현란한 화술로 반(反)나폴레옹 노선을 주도했다. 1814년부터 2년간 빈에서는 유럽 각국의 대표들이 모여 지루한 협상을 벌였다. 오죽했으면 “회의는 춤춘다!”라는 조롱 섞인 표현이 나왔을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메테르니히가 조직한 보수반동체제는 위력적이었다. 그들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자유주의를 억압했고, 통일운동의 기운도 꺾었다.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려고 검열제도 강화했다. 하지만 벨기에와 그리스가 독립운동에 성공하자 보수반동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1848년에는 유럽 각국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메테르니히는 실각했다. 그는 초라한 망명객이 돼 영국으로 떠났다.


화단의 혁명가, 클림트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의 운명은 또 바뀌었다. 우여곡절 끝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 들어섰다(1867∼1918). 외교와 군사, 재정 등은 공동으로 결정하되 의회와 정부는 제각기 운영하기로 한 것이다. 빈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본거지로서 당시에도 제국의 구심점이었다. 하지만 1914년 6월,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처가 사라예보에서 피격되는 통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패전국이 됐고, 1918년 11월 합스부르크 왕가는 해체됐다. 

그 무렵 빈에는 문화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화가 클림트와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다. 클림트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화폭에 담은 거장으로, 금박을 붙여 화려하게 장식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클림트의 대표작으로는 ‘키스’가 있다. 

클림트는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에게 ‘베토벤 프리즈’를 헌정했다(1902년). 나는 친구 요셉과 함께 게른트너 거리 남쪽에 위치한 ‘제체시온’으로 향했다. 제체시온은 19세기 말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사조 운동 ‘제체시온(Secession)’을 주도한 예술가들이 주축이 돼 세운 건물로 황금색 월계수 잎을 새긴 돔이 눈길을 끈다. 제체시온은 분리한다는 뜻을 가진 단어로 우리나라에서는 ‘분리파’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합창 교향곡’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벽화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구원의 여정을 담은 작품으로 벌거벗은 연인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과 악마의 시련을 이기고 키스하는 장면까지 실감 나게 묘사돼 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건 당시 사람들은 클림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적 묘사가 지나치다는 비판을 들었는데, 빈 대학의 천장화 또한 같은 이유로 논란에 휩싸였다. 외설이라며 냉대를 받던 클림트의 작품이 오늘날에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고 있다. 시대를 앞선 클림트는 ‘화단의 혁명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빈은 유대인의 도시이기도 했다. 의사, 변호사 등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이들의 절반이 유대인이었다. 그 때문에 이 도시에는 반(反)유대주의 정서가 팽배했다. 히틀러도 그 영향을 받았다. 그의 나치 정권은 유대인 학살로 악명이 높은데, 빈 출신의 유대인으로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이가 약 6만5000명이고, 망명을 떠난 이도 13만 명에 달한다. 

망명객 중 한 명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의 창시자로서 현대사회의 문을 열었다. 인간의 내면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무의식’이 심연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 강조한 인물로, 인간 이해의 새 역사를 썼다. 프로이트 박물관에서 나는 ‘빈이야말로 구체제의 억압과 새 시대의 자유가 충돌한 도시’였다는 생각을 했다. 

20세기 초의 빈은 정치적으로도 특이했다. 사회주의에 경도된 지식인과 시민이 많아 ‘붉은 비엔나’라는 칭호까지 붙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빈은 어떤가. 보수우파가 집권하고 있으며 극우정치가들의 입김이 세다. 특히 이민자의 유입을 막기 위해 국경을 철저히 통제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메테르니히의 보수적 전통이 아직도 빈의 공기를 지배한다.




신동아 2019년 11월호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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