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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

혼자 걷는 이의 뒷모습을 보라

‘취화선’ ‘태극기 휘날리며’와 외암리

  • 글 · 오동진 | 영화평론가, 사진 · 김성룡 | 포토그래퍼

혼자 걷는 이의 뒷모습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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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천안 미디어센터에서 열린 ‘극장을 찾아서2’ 기획전에서는 ‘펑정지에는 펑정지에다’ ‘삼례’ ‘58년 개띠 몽상기 딜쿠샤’ ‘여름이 준 선물’ ‘커튼 콜’ ‘수색역’ ‘봄’이 상영됐다. 일반인은 전혀 못 들어본 영화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기획전을 통해 많은 사람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됐다.

원장의 집에 도착한 것이 워낙 어두운 밤이라 사위를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저 뒤쪽에 병풍처럼 산이 펼쳐져 있는 게 더욱 더 마을을 평화롭게 보이게 했다. 여기가 송악면이라고 했다. 뒤쪽 산은 광덕산일 거라고도 했고. 근처 5분 거리에 민속마을이 있는데 한번 가보겠냐고도 했다. 다소 시큰둥한 기분에 따라나섰다. 그 아침의 산책이야말로 그날 오후 비교적 늦은 시간까지 외암리를 다니게 된 계기가 됐다.



대취한 장승업을 만나다

혼자 걷는 이의 뒷모습을 보라

충남 아산 외암민속마을.

외암민속마을은 쉽게 말해서 이 최첨단의 시대에 여전히 부족 마을을 구성하고 살아가는 곳이다. 500년 전에 만들어진 마을의 숨결, 그 시간의 흐름이 여전히 느껴진다. 고택(古宅)과 초가집, 돌담길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사람이란 무릇 끊임없이 배우고, 돌아다니고,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잘난 체하면서 살았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 나를 마을 구석구석으로 안내하던 충남문화산업진흥원장은 갑자기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갈했다. 아니, 명색이 영화평론가라는 사람이 ‘취화선’과 ‘태극기 휘날리며’가 촬영된 곳을 몰랐냐고.



사실은 원장이 그렇게 소리를 치기 전에 이미 아산건재고택(牙山建齋古宅)의 대문을 보는 순간 알았다. 그 용마루에 턱하니, 그러나 위태위태하게 걸터앉은 채 장승업이 호리병을 한 손에 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형광등이 반짝하고 켜졌다. 여기구나, 그 장면이 여기서 찍혔구나, 그랬구나.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에서 가장 멋진 장면. 가장 영화스러운 장면. 주인공 장승업이 마음속 광풍을 어쩌지 못하고 미쳐서 날뛰던 시절의 모습. 그러나 바로 이 장면 때문에 소위 예술가연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는 장면. 그게 바로 여기서 찍혔구나….

기시감(旣視感)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내가 언젠가 함께 존재했음직한 느낌이 드는 것. 그건 어쩌면 영화가 해내는 마력(魔力)과도 같은 일이다. 마치 파리의 어느 골목길에서 갑자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역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떠오르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영화는 사람을 유니버스(universe)하게 만든다. 우리 모두를 한 공간과 한 시대의 의식으로 밀어 넣는다.

아산건재고택 앞에서 흐린 눈으로 맞닥뜨린 건 바로 그것이었다. 내 앞에 장승업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장승업 역을 맡은 최민식이 역에 집중하기 위해 침묵하고, 그 앞에 크레인에 카메라를 매단 채 촬영감독이 조용조용 카메라 워킹을 하고 있으며, 저쪽 구석에서는 모니터 앞에 임권택 감독이 앉아 이걸 몇 개의 커트로 나눠 찍을지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콘티 작업을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2002년 어느 더운 날, 스태프 수십 명이 이곳 아산건재고택 앞에서 그렇게 땀을 흘렸을 것이다. 그리고 십수 년이 흐른 지금 나는 이 앞에서 그 영화를 기억하게 됐는데, 정작 이 오래된 집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묵묵히 시간을 보내고 있는 참이다. 언제나 그렇듯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는 것이다.



 외암리에 스며든 탁류

혼자 걷는 이의 뒷모습을 보라

취화선’의 임권택 감독과 장승업 역의 최민식.

혼자 걷는 이의 뒷모습을 보라

‘취화선’에서 최민식이 아산건재고택 용마루에 걸터 앉았다.

최민식은 그사이에 톱스타가 돼서 ‘명량’과 ‘대호’를 찍고 통화 한 번 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사람이 됐다. 임권택 감독은 인간이 맞이하게 되는 가장 건조한 죽음에 대해 시어(詩語)로 점철된 영화 ‘화장’을 찍었지만, 들리는 말에 따르면, 본인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최종 편집이 이뤄져 감독 스스로의 미학적 성취는 물론 대중적 성공도 이루지 못한 결과를 맞았다. 고택 지붕 위로 유유히 흐르는 구름을 보고 있자니 ‘화장’을 찍고 나서 만난 임 감독이 회한이 서린 목소리로 한 말이 떠올랐다. “이제는 은퇴할라요. 그래야 허지 않것소.”

그런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인 데 그게 한편으로는 그렇게 서러운 일일 수가 없다. 경기도 죽전의 한 아파트에 칩거 중인 임권택 감독을 떠올리며, 그 말년의 우울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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