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구치소 근무 당시 고중렬씨의 교도관 신분증명서.
두 동료 교도관에 이끌려 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 선 인물은 진보당 당수 조봉암. 당당한 걸음걸이, 흔들림 없는 눈빛. 가족들이 맞춰 보낸 흰 한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들어선 그에게선 기품과 위엄이 흘렀다. 어느 누가 죽음 앞에서 저리도 초연할 수 있을까.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서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유언을 하는 조봉암의 목소리는 떨렸다. 이윽고 두 손과 무릎, 두 발이 포승줄에 묶인 조봉암의 머리에 흰 주머니가 씌워졌다. 한 교도관이 그의 목에 밧줄을 건 뒤 나무판자를 두드리자 다른 교도관이 마루청과 연결된 ‘포인트’를 잡아당겼다.
‘쿵!’ 밧줄에 매달린 조봉암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곧 숨이 끊어졌지만 30분도 넘게 매달아뒀다. 민족지도자로 추앙받던 죽산 조봉암은 간첩 누명을 쓰고 이렇듯 하루 아침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왜 죽여야 합니까?’
오랫동안 이 같은 의문이 고씨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억울한 죽음을 ‘방조’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자신의 처지에 가슴이 시렸다.
그러나 국가공무원인 교도관은 명령을 거스를 권리가 없다. 차마 맨정신으론 집에 돌아갈 수 없어 고씨는 눈물로 통음했다.
19년간 사형수 담당
19년 동안 사형수 담당 교도관으로 근무한 고중렬씨는 조봉암의 사행집행을 목격한 유일한 생존자다. 1952년부터 1971년까지 사형수 교화 담당 교도관으로 근무하며, 200명이 넘는 사형수의 죽음을 목격했다.
교도관을 그만둔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에겐 사형제 폐지운동이 삶의 이유이자 목표다. 사형제 폐지운동가들 사이에서 그는 독보적 존재로 통한다. 전직 교도관으로서 사형 폐지를 공개적으로 주장해온 유일한 인물이고, 사형수들의 삶과 죽음을 가장 많이 지켜본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여야 국회의원 175명이 서명 제출한 ‘사형제 폐지 특별법안’이 국가보안법 파동 등으로 유야무야되는 광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 법안은 지난 16대 국회에서도 의원 156명의 서명을 받아 법사위에 상정했으나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고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형제도가 폐지되는 것을 보고 죽는 게 마지막 소망”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마지막을 지켜본 사형수들의 이름과 죄수번호를 적은 메모를 조심스럽게 보여주면서 “이 세상에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가 사형제 폐지를 이토록 간절히 바라는 이유는 뭘까.
“국가가 범죄자에게 형을 집행하는 것은 교정·교화를 위함인데, 사형은 보복에 지나지 않아요. 범죄자에게 참회와 속죄의 기회를 주지 않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건 또 다른 ‘살인’일 뿐입니다.”
그는 ‘시간이 걸릴 뿐, 인간은 교화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그건 19년 교도관 생활이 그에게 준 가르침이다. 형장에서 죽어간 이들을 위해 그는 지금도 매일 기도를 드린다.
고씨가 사형수 담당 교도관이 되기로 한 것은 종교적 사명감 때문이었다. 1950년대 초 교도관 학교를 졸업하고 군산형무소에 배치된 그는 처음으로 사형수와 대면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신의 고귀한 뜻을 알려주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일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주저없이 서대문구치소행을 자청했다. 더 많은 사형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1954년 서대문구치소 ‘사형수 교화담당 위원’으로 발령받았다. 보안과장, 교도소장으로 승진할 기회도 있었지만 이를 모두 거부하고 사형수를 위한 교화위원으로 남을 것을 고집했다.
‘지옥 3정목’에서 주저앉다
고씨가 교도관으로 재직하던 시절은 국가가 행하는 살인의 공포가 극에 달하던 때다. 한국전쟁을 겪고 난 뒤 급격한 이념 대립으로 사형을 당하는 ‘간첩’들이 넘쳐났다. 죄 없는 양민들도 ‘공산당에 부역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하기 일쑤였다.
“교도관 생활 초기인 1954년부터 3년 동안은 출근해서 해질 때까지 하루 10∼15명씩 사형이 집행됐어요. 닭장에서 닭을 꺼내 목을 비틀듯 너무도 쉽게 사람을 죽였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목숨을 이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 걸까…. 의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