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호

‘답사기 元祖’ 유홍준 문화재청장

“문화재, 스스로 무너질 때 까지 인위적 복원 않겠다”

  •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5-01-25 13: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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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것의 민족적 아이덴티티 제시한 데 자부심
    • 개성공단 문화재 복원 발굴 조사, 남북협력 가능
    • 문화유산에 가장 관심 컸던 대통령은 박정희
    • 익산 미륵사지 동탑은 최악의 복원사례, 폭파해버리고 싶다
    • 노 대통령 가는 길은 정조와 비슷, 두 사람 다 수도이전 실패
    • 중국내 고구려 문화유산 답사기 쓸 생각
    ‘답사기 元祖’ 유홍준 문화재청장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한국 출판사에 굵은 획을 그은 책이다. 비소설 분야에서 나온 최초의 밀리언셀러. 1993년 첫 출간된 1권은 지금까지 130만부가 나갔다.

    이 책의 저자 유홍준(兪弘濬·56)은 우리 문화재를 보는 눈을 열어주었다. 시인 고은은 ‘다른 사람이 가는 곳은 석양머리 적막강산이지만 유홍준이 성큼성큼 가면 거기 몇천 년 잠든 보물들이 깨어나 찬란한 잔치를 베풀기 시작한다’고 찬사를 보냈다. ‘인간은 아는 것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는 유홍준이 만들어낸 1990년대 어록.

    그한테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책 한 권으로 부귀공명(富貴功名)을 모두 이뤘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의 독자이던 노무현 대통령은 그를 문화재청장(차관급)에 임명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전혀 거들떠보지 않던 문화재의 숨은 가치를 찾아 국민에게 알려준 안목을 문화재청에 심어주면 거기서 혁신이 나올 것이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유 청장을 서울 중구 필동 ‘한국의 집’에서 만났다. ‘한국의 집’은 조선조 사육신 박팽년(朴彭年)의 집터가 있던 곳. 일제강점기엔 정무총감 관저로 쓰였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영빈관으로 사용됐다. 지금은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관리하며 문화공연을 하고 전통 한정식을 판다. 고졸(古拙)한 병풍이 쳐진 방에 들어가 앉자 맵시 좋은 한복을 입은 미인들이 찻잔을 날라왔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역작용



    -인세 수입이 꽤 많았을 거 같아요. 공직자 재산등록은 얼마나 했습니까.

    “베스트셀러가 되리란 예상을 못하고 보통 인세 계약할 때와 똑같이 10%로 계약했습니다. 많이 팔렸다고 해서 더 받은 건 없습니다. 인세로 대강 20억원 정도 들어왔지만 세금으로 3분의 1 가량이 나갔죠.

    내가 기부를 잘 하니까 마누라가 인세 통장을 뺏어갔어요. 나는 원고료 강연료를 받아서 용돈을 썼죠. 이번 재산등록 때 보니까 마누라 통장에 13억원이 들어 있더군요. 동산 부동산을 합해 25억원 가량 등록했습니다.”

    -거부(巨富)라고 할 순 없지만 차관급 이상 공직자 중에서는 상위 그룹에 들어가겠군요.

    “한마디로 운이 좋았죠. 시운이 따르지 않으면 절대로 밀리언셀러가 될 수 없습니다. 영어로 쓰인 책 중에는 밀리언셀러가 많지만 우리 도서시장에서는 어렵죠. 한국에서 100만부가 팔렸다면 세계시장에서라면 해리 포터 정도의 대중성을 얻은 겁니다.

    사실 책의 내용은 어렵습니다. 내 책을 하나의 모델로 삼는다면 대중화가 꼭 수준을 낮추는 것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문적인 내용을 대중적 수준으로 풀어 써야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 사이에 마이카 시대가 열렸다. 1994년 8월엔 자동차 대수가 700만대를 넘어섰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마이카를 놀이문화에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곤혹스러운 중산층에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해답을 주었다고 분석했다.

    “마이카 시대의 개막도 중요한 요인입니다. 문화유산에 여행이라는 매체를 집어넣으면 사람들이 볼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행 자유화로 대다수 사람이 외국여행을 해봤습니다. 외국에 나가본 사람일수록 정작 우리 것을 모른다는 자괴심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분들에게 우리 것의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제시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김훈씨의 ‘자전거 여행’도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 있더군요.

    “뉴욕의 반즈 앤드 노블 같은 유명 서점에 가보면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이는 코너가 트래블(travel·여행)과 바이오그라피(biography·전기)입니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관심이 많고 돈과 시간이 생기면 여행을 갑니다. 인간의 본능에 가깝습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때문에 전남 담양군 소쇄원 같은 문화재에 인파가 몰려들어 망가졌다는 비판이 나오던데요.

    “역작용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어느 유적지든 수용할 수 있는 인원에 한계가 있습니다. 소쇄원의 경우 쾌적하게 관람하려면 한 번에 30명 정도가 알맞습니다. 그런데 여름방학 때면 30만명이 몰려든다고 합니다. 전남 강진에도 외국인을 포함해 연간 8만명이 방문합니다. 내가 답사기 쓸 때는 강진에 여관이 하나뿐이었습니다. 지금은 13개나 되지요. 그러니까 지역경제가 일어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한 셈입니다. 그 덕에 제가 명예 군민증을 받았습니다.

    손님들이 몰려오니까 지방자치단체가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생각에 도로를 포장하고 주차장을 만들었습니다. 책에서는 비포장길의 정취를 얘기했는데 그 길에 아스팔트를 쫙 깔았습니다. 포장을 하더라도 정취는 살렸어야죠. 주차장도 유적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만들어야 하는데 유적지 가까이 갖다놓는 과잉 친절을 베풀었죠.”

    ‘답사기 元祖’ 유홍준 문화재청장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한국 문화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유홍준 문화재청장(왼쪽).

    -문화재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 아닙니까. 중고교 수학여행 코스가 대부분 경주고요. 그런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에는 그때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전남 해남과 강진이 첫머리에 들어 있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입니다. 학생들을 데리고 10여년 답사 다니는 동안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茶山草堂), 고산 윤선도의 고택 녹우당(綠雨堂), 남도의 들판과 꽃을 보고 향토적 서정에 푹 젖어들게 됐죠. 마음속에 있던 고향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문화유산과 자연과 삶을 분리해 미술품으로 볼 때는 경주가 좋지만 우리 역사와 현재의 삶과 체취를 연결해 볼 때는 남도가 주는 의미가 강합니다.

    잘 쓸 수 있는 데를 먼저 쓴 것이죠. 강진 해남은 허름한 여관이라도 여관집 주인이 따뜻하고 그 집 누렁이가 정겨웠습니다. 전라도 음식이 맛있고 값도 비싸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편해지는 거죠. 거기에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 같은 분의 삶이 녹아 있기 때문에 책에서만 본 그분들의 행적을 현장에서 확인하면서 역사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유 청장은 서울 종로구 창성동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5형제가 모두 거기 사셨습니다. 저는 청운초등학교에 다녔죠.”

    해남 녹우당 박물관에는 윤선도의 증손인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자화상이 있다. 국보 제240호다. 1980년대 후반 그곳에 갔다가 안내하는 여학생이 초상화를 빼다박은 듯이 닮아 놀란 적이 있다. 직계 후손이었다. 유 청장도 그 여학생을 만났는지 궁금했다.

    “만난 적은 없습니다. 정양모 선생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학예실장 할 때 ‘한국의 초상화’라는 특별전을 연 적이 있어요. 유명한 가문마다 영정을 빌려주십사 부탁을 했죠. 종손들이 영정을 신주 모시듯 들고 오는데 그 얼굴이 대부분 영정과 비슷해요.”

    한 대가 내려갈 때마다 외부의 DNA가 50%씩 섞이는데도 몇백 년 뒤의 후손이 조상을 복사판처럼 닮는 것은 놀라운 조화다. 필자가 “씨는 못 속이는 거군요”라고 하자 유 청장은 지갑에서 1000원권 지폐를 꺼냈다.

    “여기 퇴계 초상이 잘못 그려졌어요. 퇴계 초상화가 전해지는 게 없으니 상상으로 그린 거죠. 종손을 모델로 했어야 합니다. 화가들이 대체로 자기 얼굴 비슷하게 그리는 경향이 있어요. 누구나 자기 얼굴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생각하거든요. 세종대왕, 이순신, 율곡도 초상화가 없죠. 지금 있는 것은 화가들이 상상력으로 그린 겁니다.”

    -우리 문화재가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에 다수 복원됐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문화재와 권력의 관계에 대한 기술이 자주 나오잖아요. 권력이 개입해 문화재를 살려놓은 사례와 망쳐놓은 사례를 하나씩 들어봐주시죠.

    “경주 천마총과 불국사 복원은 박정희 시대의 작품이죠. 역대 대통령 중에서 박 대통령만큼 문화유산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 없습니다. 관심이 지나쳐서 문제가 되었지만요. 박 대통령 옆에서 문화재 전문가와 건축가 한 사람이 보좌를 해주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아산 현충사, 칠백의총, 신사임당 기념관은 천편일률적으로 콘크리트 한옥에다 미색 수성 페인트를 칠해놓았죠. 지역적 환경에 맞춰 건물을 지었다면 근사한 근대 유산으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아주 박제화하고 획일화해 놓았어요. 그 시절엔 대단한 것이었지만 소득이 1만달러를 넘어가니까 우스운 집이 돼버린 거죠.

    문화재청 예산이 3500억원으로 국가예산의 400분의 1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빨리 3만달러로 올라야 문화재예산도 함께 올라갑니다. 소득 1000달러 시대에 복원한 문화유산과 1만달러 시대에 복원한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2만달러 시대에는 더 잘할 겁니다.”

    세종로 충무공 동상은 降將의 자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보니 박정희 정권이 군사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이순신을 비롯한 군사 영웅관(觀)을 조성했다고 썼더군요.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그 이상의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분 아닙니까.

    “그렇죠. 다만 영웅주의 사관을 창출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거죠. 마치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혼자 싸우고 나머지는 무서워 도망간 것처럼 돼버린 문화가 문제입니다.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 유적인지, 박정희 기념관인지 모를 정도로 과장돼 있어요. 본래 있던 현충사는 옆으로 밀어내고…. 한산섬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 개인만 놓고 보면 지금 이상의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정치적으로 오버랩 되니까 사람들한테 오히려 주저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 거죠. 역작용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세종로에 있는 충무공 동상은 미학적으로 어떻습니까.

    “김세중씨 작품인데요. 동상 자체가 왼손잡이로 돼 있습니다. 오른손에 칼을 쥐고 있어 항장(降將)의 자세라는 지적이 있어요. 북도 세워놓지 않고 뉘어놨잖아요.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공간에 영웅적으로 우뚝 세워놓는 것이 좋을지, 광장에 세워서 시민들이 기념사진을 찍으며 같이 어울리게 하는 게 좋을지,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됐죠.”

    -지난해 말 청내교육을 하면서 ‘문화재 행정이 규제와 지시에만 익숙하고 문화유산이 포괄하는 정신적 의미가 빠져 있다’고 지적했던데요.

    “문화재청이 없어진 건물을 다시 짓는 일에는 능숙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얽힌 역사적 사실이라든지, 분위기를 살리는 데는 서툴러요. 미륵사탑을 해체 복원할 때 석조 기술자들만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백제를 전공하는 역사학자, 서동요를 연구한 국문학자들도 그 유물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논문과 강의를 통해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가 국민에게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지요. 문화재청은 (문화재) 관리라는 면을 뛰어넘어 정신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기관이 되어야 진정한 의미가 살아납니다.

    예를 들어 허허벌판을 놓고서도 칭기즈칸의 전쟁터라든지,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이라든지, 아서왕 이야기의 들판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문화유산에 서려 있는 설화까지 보전하고 활용하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동탑이 복원됐습니다. 서탑은 지금 복원 공사중이죠. 그 동탑을 최악의 복원사례라고 지적하며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는데요.

    “정말 끔찍스럽습니다. 그것을 복원할 때 문화재청과 전문위원 중에 찬성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1980년대 초에 전라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미륵사지 개발계획을 세워 발굴하고 복원했습니다. 돌을 그냥 그라인더로 밀고 드릴로 잘라서 생경하게 만들어놓았습니다. 미술작품은 형태와 라인보다 텍스처(texture·결)가 중요하거든요. 똑같은 목기라도 요새 만든 목기와 옛날 목기는 땟물이 다릅니다. 사람의 손때가 가고 손자국이 있습니다.

    옛날엔 돌멩이를 정으로 쪼았는데 지금은 그냥 반듯하게 깎아놓으니까 부분과 부분이 조합하면서 생기는 조화가 없습니다. 중간 중간에 나올 수 있는 감칠맛이 다 없어져버리고 형태만 남는 거죠. 전주 사람들이 정말 부숴버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차라리 빈터로 있을 때는 역사적 상상력이 살아났는데 생경한 탑을 만들어놓으니까 허망감이 생기는 거죠.”

    문화재 내부 원상 복원은 불가능

    -문화재위원회가 석가탑과 감은사지 석탑 복원 결정을 했는데 유 청장이 재검토 지시를 했더군요. 일각에서는 보수를 자꾸 늦추다 무너지면 어쩌냐는 걱정을 합니다.

    “언론보도대로라면 첨성대와 정림사탑은 벌써 50번은 무너졌습니다. 현장에 가보면 무너질 것 같아요. 기울어지고 틈새가 벌어졌죠. 문화재연구소에서 석 달에 한 번, 여섯 달에 한 번씩 측량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라면 피사의 사탑은 벌써 허물고 다시 바로세워졌을 겁니다.

    미륵사탑 같은 데서 보듯이 옛날엔 판축(板築)공법으로 기초를 다졌습니다. 떡시루처럼 진흙판을 덮고 그 위에 모래를 깝니다. 그런 방식으로 지하 3~4m까지 들어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지진을 방지하고 물이 스며들어도 모래를 타고 옆으로 가기 때문에 지반이 안정됩니다. 어떤 충격에 의해 약간 기울더라도 곧 중심을 잡아주는 구조입니다.

    지금 석가탑이나 감은사지 석탑을 해체해서는 그대로 복원하지 못합니다. 1500년 전 사람들이 훨씬 더 잘했기 때문입니다. 반듯하게 깎아서 두붓모처럼 올리는 것은 우리가 잘하지만 내부를 원상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수 진남관(鎭南館·국보 제304호)이 대표적입니다. 그 집을 해체 복원하는 데 80억원이 들어갑니다. 썩은 부재(部材)를 갈아서 새 걸로 끼워놓으면 맞지 않으니까 새 집으로 짓게 돼요. 200~300년 된 옛날 문화재를 헐어버리고 21세기 건물을 짓는 것입니다. 형태만 똑같이.

    하지만 그럴 거라면 그 집이 무너진 다음에 지어도 되지 않겠어요. 20년 후에 무너질지, 50년 후에 무너질지 모릅니다. 보강을 해놓고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문화재 보전입니다. 틈이 벌어진 부분은 불안감을 느끼지 않게 가리려고 합니다.”

    -취임 기자회견에서 조선시대 왕릉을 묶어서 세계 문화유산 등록을 추진하겠다고 했던데요. 서울 근교 왕릉에 가보면 커다란 봉분하고 석물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문화재적 가치가 큰가요.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을 보세요. 아마 선릉이 없었으면 빌딩으로 가득 차 버렸겠죠. 잔디와 나무, 박석(薄石)을 따라서 들어가는 진입로, 빨간 홍살문, 정자각 비각, 석물이 서 있는 구조가 한 시대 왕의 존엄성을 보여줍니다. 건축적 조경설계로서도 주목받을 수 있습니다.

    시대가 오래 돼야만 가치가 있는 게 아닙니다. 손상을 입지 않은 왕릉이 13개 지구에 42개가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습니다. 동구릉이 100만평, 서오릉이 50만평입니다. 능 주변의 숲을 합하면 대개 30만~40만평 규모예요. 능 주변엔 화려한 나무를 심지 않고 소나무, 오리나무, 참나무를 심어 엄숙한 분위기를 냅니다.

    건원릉(태조 이성계)부터 홍릉(고종황제)까지 살펴보면 능의 석인상(石人像)이 시기별로 다 달라요. 마치 백자 항아리가 15세기와 18세기의 것이 다르듯이. 석물도 아주 단순한 구조이면서 거기에 근엄한 표정을 넣었습니다.

    왕릉을 밑에서 올려다보면 다 똑같은 것 같지만 위로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주변의 좌청룡 우백호와 어울려 자연과 함께 호흡할 수 있습니다. 관람 동선을 왕릉 위로 넓히는 작업을 능별로 하고 있습니다. 서오릉은 5개 중에서 하나, 동구릉도 9개 중에서 하나, 그리고 영릉(효종)을 개방하려고 합니다.

    문화재적 가치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려면 여러 가지 면모를 갖춰야 해요. 그중 현재의 활용도도 따지게 되는데 각 능에 아직까지 비지터 하우스(visitor house)가 없어요. 관람객에게 능의 구조, 장례 절차, 왕릉의 분포, 주인공의 치적을 보여주는 비지터 하우스를 만들어야 합니다. 세종대왕릉과 동구릉 앞의 음식점들을 매입해 정비하려고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능은 어느 곳입니까.

    “사람들에게 제일 사랑받는 능은 경기도 여주의 영릉(英陵·세종)과 또 다른 영릉(寧陵·효종)입니다. 조각이 아름답기는 영·정조 때 문화수준이 높아 화성의 건릉(健陵·정조)과 융릉(隆陵·사도세자)이 제일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능은 영릉

    유 청장은 지난해 10월 마지막 일요일, 노무현 대통령 가족과 창덕궁 후원을 돌아보고 청와대에서 점심을 같이 들었다. 보통 차관급 공직자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어서 이후 ‘실세 청장’이라는 말이 돌았다.

    “창덕궁에 영부인과 며느리, 손녀가 오셨더군요. 규장각은 정조대왕이 만든 거고 옥류천은 인조대왕이 만든 거라는 설명을 해드렸죠. 정조 때 문화가 상당히 발달해 규장각 건물과 부용정을 치워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능선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꾸었습니다. 규장각은 요즘 정신문화연구원 같은 데죠. 거기서 연구한 결과를 정치에 반영했습니다.

    내가 역대 왕 중에서 정조가 노 대통령하고 가는 길이 가장 비슷하다고 말했습니다. 우선 수도를 옮기려다 실패했습니다. 천도는 권력분산 의도였죠. 정조는 수원으로 수도이전을 하려다 노론세력에 의해 못했고 노 대통령은 보수세력이 반대해 실패한 거죠. 정조의 개혁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했더니 흥미를 느끼시는지 정조에 대한 책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박광용 교수가 쓴 ‘영조와 정조의 나라’, 정옥자 교수의 ‘정조시대의 문화’를 보내드렸습니다.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유물 답사를 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 때 철거설이 나돌던 불상이 있습니다. 조선총독이 경주 남산에서 들고 온 작고 예쁜 불상입니다. 8세기에 만들어졌죠. 조선총독이 얼마나 좋은 것을 집어왔겠습니까. 암벽에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고 새겨진 글씨도 있습니다. 300년 정도 된 글씨지요.”

    -창덕궁 후원을 일반에 완전 공개할 수는 없나요.

    “옥류천 구역은 한번에 30~50명 정도 머무를 적에 아름답지, 사람이 바글거리면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관람객 수를 조절해야 합니다. 인정전 같은 데는 1000명이 있어도 관계 없지만. 아무나 마음대로 가게 하고 거기서 무작정 머무르도록 그대로 둘 수는 없어요.”

    청와대에서도 유물 답사

    -참여정부 출범 초기에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차관급으로 승격되면서 공모에 응했다가 인터넷을 통해 공격이 들어오자 그만둔 일이 있지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일하던 권기홍씨와 유인태씨가 차관급으로 격상되는 문화재청을 맡으라고 찾아왔지요. 둘 다 대학 때부터 친구이고 반말하는 사이입니다. 문화재청장을 차관급으로 승격시키고 국립중앙박물관을 그 밑에 두는 것이 참여정부의 공약사항입니다. 내가 두 사람한테 국립중앙박물관을 장관급의 별도 기관으로 올려주고 날 그걸 시켜달라고 했는데 차관급으로 조정됐죠. 공모에 응할까 말까 하다가 정식으로 시험 치르는 기분으로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반대파에서 인터넷으로 공격했어요. 나는 모든 것이 노출된 사람이잖아요. 50년 숙원사업을 한숨에 풀어준 건 내 공인데 이 사람들이 서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고 싶어서 ‘유홍준이 자기가 하려고 친구를 시켜 국립중앙박물관장직을 차관급으로 승격시켰다’고 비난했어요. 난 그걸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란 생각에 중도에 접었죠.”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 명예관장을 맡았더군요. 그분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라겠지만 간략하게 요약해주면 독자에게 유익할 것 같습니다.

    “그분은 1950, 60년대 간고한 시절을 살면서도 인간애가 넘치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 애기 업은 언니, 쪼그리고 앉아 있는 할아버지… 전부 서민의 삶을 그렸어요. 고무신 신고 포대기에 애기를 업은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에서 그 시대의 정서를 느낄 수 있죠.

    그 시절 모든 사람이 모더니즘을 향해 뛰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할 때 그는 순박하게 사는 이웃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서양화가 들어온 지 반세기가 지나 화가들이 인상파 표현주의 모더니즘 추상미술을 받아들이고 다른 나라의 사조를 흉내내려 애쓸 적에 박수근은 한국적 서정을 담는 형식을 창조했습니다. 화강암에 마애불을 새기는 것 같은 선으로 불상이 아닌 서민의 모습을 그렸죠.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우리 근대미술을 상징하는 작가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그림값이 호당 1억원을 넘어섰습니다.”

    박수근의 작품은 국전에서조차 낙선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 충격으로 음주가 심해지면서 명을 재촉해 그는 1965년 51세로 타계했다. 미국인 여성 마거릿 밀러(Margaret Miller) 여사가 꾸준히 그의 그림을 사주었다. 미국에 돌아가서도 여러 미술저널에 박수근을 소개하고 전시에 출품케 해주었다. 초등학교 학력의 화가는 국내 화단의 냉대 속에 350점 가량의 작품을 남겼다.

    1960년대 초, 밀러 여사가 40~50달러에 산 작품이 2002년 3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7억5000만원에 팔렸다.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 세계적인 그림이 된 것이다.

    근대미술 상징하는 작가는 박수근

    유 청장은 2002년 ‘완당평전(阮堂評傳)’을 썼다. 본격적인 김정희(金正喜) 평전으로는 처음. 1998년부터 ‘역사비평’에 연재하던 걸 책으로 묶어 출간하자 ‘무림의 고수’들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서연구가인 박철상씨는 ‘완당평전’에 오류가 200군데가 넘는다고 지적했다. 전서와 예서도 구분 못 하는 사람이라는 모욕적인 비판까지 나왔다.

    “그 사람들 비판이 옳아요. 다만 비판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거죠.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펴낸 완당전집이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한문을 한글로 번역한 책이지요. 그 책은 한 500군데가 틀렸어요. 인용한 원전이 틀린 걸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얘기입니까. 내가 한문 전공자는 아니잖아요.

    책을 펴내기 전에 한문, 사상사, 역사 전공자들에게 돌려가며 교정을 보게 했습니다. 그 사람들 이름을 댈 수는 없어요. 그들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거니까.

    추사의 사상만 전공한 사람도 있고 문학만 전공한 사람도 있습니다. 둘을 함께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 추사가 갖고 있는 여러 영역 가운데 미술 서예 사상 문학까지 평전에 써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대단한 것입니다. 문학이나 사상의 영역은 학계에서 나온 성과를 반영하는 이상으로 평하기 힘들죠.

    추사는 서예가로서 이름을 얻었으니 미술사 하는 사람이 쓸 수밖에 없는 거죠. 결과적으로 남은 건 사상가나 정치가 추사보다는 서예가 화가로서의 추사잖아요. 오류로 잡아냈다고 하는 200군데 중에는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도 있어요.”

    -예서와 전서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비난 때문에 상처를 입었겠군요.

    “어떤 사람이 성취를 했을 적에 여기에 부분적인 비판을 하면 자기는 그 사람보다 더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높아지는 게 아니라 내가 상처를 받지요. 우리 지식인 풍토에서 잘못된 거죠. 한양대 국문과 정민 교수가 내 책이 나오자마자 읽고 35군데를 지적해 이메일로 보냈어요. 재판에서는 전부 다 고쳤지요. 아마 동네 이름 틀린 것까지 합해 200군데가 아니고 80군데 정도 틀렸을 겁니다.”

    -다작(多作)을 하다 보니 성긴 부분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다작이라서 실수한 건 아니에요. 그 책을 쓰는 데 20년이 걸렸는데요. 중고등학교 때부터 한문을 배웠으면 고생 덜했을 텐데…. 1980년부터 여태까지 한문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실력이 안 늘어요. 바둑 실력 안 느는 것처럼. 지금은 해석이 안 되면 실력 있는 분한테 물어봅니다. 차라리 그게 빨라요.”

    -완당의 경우 위작(僞作)이 많이 돌아다니죠.

    “위작이 많습니다. 도자기는 위작을 가릴 때 전문가들의 견해가 대개 일치합니다. 그러나 추사는 전문가들이 서로 자기가 고수라고 버티기 때문에 견해가 합치되지 않을 경우가 많아요.”

    ‘답사기 元祖’ 유홍준 문화재청장

    유홍준 청장은 “문화재청장이 안 됐다면 지금쯤 중국내 고구려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고 있을 것”이라 말한다.

    유홍준은 1997년 두 차례에 걸쳐 27일간 북한 문화재를 둘러보고 ‘나의 북한문화유산 답사기’ 상권을 펴냈다. 하권은 금강산 편. 금강산이 남쪽에 개방된 후 사계절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다섯 차례 갔다.

    “어떤 독자가 남한의 문화재를 쓸 때는 아주 비판적으로 쓰더니 북한 문화재를 다룬 글에서는 왜 그런 안목이 없느냐고 비판했습니다. 방북 초청 조건이 사람 이야기는 쓰지 않고 문화유산만 쓴다는 것이었죠. 초청자가 제시한 조건을 지켜야 했고 남북이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 교류를 시도하는 시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를 초청했던 아태평화위원회 사람들은 긍정적 시각으로 써줘서 고맙다고 했어요.”

    -북한 문화재 중에서 뭐가 가장 볼 만하던가요.

    “고구려 벽화죠. 덕흥리 고분은 물론이고 강서대묘의 사신도 그림은 세계 어디서 저런 무덤 벽화를 또 볼 수 있을까 싶더군요. 채색이 어제 그린 것처럼 살아 있어요. 북한 고구려 벽화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벽에다 회칠을 하고 위에 그린 거예요. 프레스코 기법이죠. 그건 보존상태가 나빠요. 강서대묘 사신도는 바위에다 직접 광물질 안료로 그린 겁니다. 화학 안료가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남아 있는 거죠.”

    -북한 문화유산보존국 김석환 국장과 문화재 교류를 위한 회담을 하고 싶다고 밝혔죠.

    “개성공단의 문화재 복원 발굴조사에서 남북이 협력할 수 있죠. 우리 장비와 기술이 들어가면 더 치밀하게 발굴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북한에는 금강산에만 이른바 구호 바위 60여개가 있다. “수령님의 위대성과 불멸의 혁명 업적을 널리 선전하고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전국의 명승지 바위에 김 주석의 어록을 새기기 시작했다.

    -통일이 된 후에는 금강산 백두산 묘향산의 구호 바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역사의 자취로 그냥 놓아둬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너무 크고 붉은 색칠을 해놓아 보기 흉하니 복원이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있죠.

    “선택을 해야겠죠. 정말 흉한 것들은 체제를 떠나 자연보호 차원에서 복원해야죠. 바위가 직각으로 선 것이 아니라 15도 정도 기울기가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5m 크기의 느낌을 주기 위해 글을 쓰려면 실제로는 12m를 파야지요.

    지금 우리 보존 기술로 ‘땜방’할 수 있습니다. 바위색으로 다시 복원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아요. 삼일포 봉래대에는 50년 전에 써놓은 글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은 그냥 역사의 자취로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만폭동에 가면 봉래 양사언(楊士彦)의 글씨도 있고, 조선시대 선비들의 시도 있고, 이름도 있잖아요.”

    -고구려 유적이 지안(集安)에 많지 않습니까. 중국에 있는 고구려 문화유산에 대한 답사기를 써볼 계획은 없습니까.

    “지안에 두 차례 갔다왔습니다. 거기에는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이 있죠. 퉁거우(通溝)라는 하천 양 옆으로는 피라미드형 적석묘가 1만2000기 있습니다. 쓸 겁니다. 아마 청장이 안 됐으면 지금 그걸 집필하고 있을 겁니다.”

    -남쪽의 고구려 문화재를 통해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처할 방안은 없습니까.

    “남쪽의 고구려 유적이라고 해봐야 고구려 영토의 남방한계선상에 있는 유적들입니다. 산성과 보루 중심이거든요. 진짜 문화는 평양에 있죠. 그 전 수도인 지안에 많고.

    고구려의 영역은 남쪽으로 최대 충북 중원과 경북 영주군 순흥까지 확대됐습니다. 우리 문화재 전체로 보면 비중이 낮지만. 순흥에는 고구려 시대 무덤이 있죠. 중원에는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비가 있어요. 포천 파주 연천에 고구려 산성이 전부 50여개 있습니다. 대개 군사지역하고 겹쳐 있죠. 국방부와 협조해 내년에 몇 개를 복원하려 합니다.”

    이쯤에서 평이하지 않은 유 청장의 이력을 훑어보는 것도 그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서울대 미학과 3학년 때 3선개헌 반대 시위로 무기정학과 강제징집을 당했다. 1974년 복학 2개월 만에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징역 1년을 살았다. ‘공간’ ‘계간미술’ 기자로 활동하다가 1980년 복교해 14년 만에 졸업장을 취득했다. 그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해 미술평론 부문에 당선됐다. 1983년 건국대에서 미술사 전임강사 발령을 받았으나 미복권자라는 이유로 24시간 만에 취소됐다. 1991년 영남대 교수가 될 때까지 시간강사로 떠돌며 답사를 다녔다.

    -지난해 12월27일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더군요.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나중에 받으려고 했어요. 우리 때문에 인혁당 관련자 9명이 억울하게 죽었거든요.”

    -인혁당은 조작이라는 것이 지금은 정설로 돼 있는데.

    “1965년도에 무죄판결을 받은 사건이 그때 재탕이 됐죠. 젊은 시절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당해서 피폐해진 사람이 무척 많아요. 사건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간 사람은 20% 정도밖에 안 돼요. 우리는 괜찮아요. 그렇지만 정말 보상을 해줘야 할 사람이 있어요. 정신병이 생긴 사람도 있고….”

    이 정부에는 유달리 민청학련 관련자가 요직에 많다. 이해찬 국무총리, 장영달 유인태 의원, 정찬용 전 청와대 인사보좌관, 유홍준 문화재청장, 이철 전 의원, 이강철씨…. 필자가 ‘민청학련 정권’이라고 이름짓자 유 청장은 웃었다.

    -민청학련 동지들이 정치를 하라고 권유하지 않았나요.

    “민청학련 관련자 중에서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나 나 같은 사람은 정치 안하고 제 길을 가고 있죠. 열린우리당에서 비례대표를 주겠다고 했는데 나는 그냥 문화재 전문가로 남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선수를 못하겠거든 심판을 하라며 비례대표 심사위원을 맡겼어요. 문화재청은 내가 공부한 것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니까 맡은 거죠.”

    서울대 미학과 8년 선배인 김지하 시인은 학창시절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59학번인 김지하 시인은 폐병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요양소 생활을 하느라 대학을 7년 반이나 다녔습니다. 대학에서 학생운동과 문화 딴따라 선배로서 지휘를 했어요. 음악 김민기, 미술 오윤, 춤 이애주 채희완, 연극 홍세화, 미학 유홍준, 판소리 임진택… 이 사람들이 전부 김지하 사단 출신입니다. 재야 문화운동의 교주였던 거죠. 그는 문화운동의 탁월한 리더였습니다.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천재성, 포용력,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를 포함해 내 또래 사람들은 다 그 선배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민청학련에 가담한 것도 김지하 시인의 영향이었습니까.

    “가담은 무슨 가담? 민청학련은 무슨 큰 조직이 아닙니다. 신직수씨가 부장 할 때 중앙정보부가 이것저것 엮어서 만들어준 단체입니다. 그래서 동료의식도 별로 없어요. 김지하 선배가 서중석 유인태 윤한봉 뒤에서 코치하다가 물려들어와 민청학련 배후조종자로 엮였죠.

    유신헌법 반대하면 5년 이상 사형에 처하는 긴급조치가 있었지만 그래도 데모하는 학생들이 있었죠. 전국 대학을 돌아다니면서 대학 이름을 쓰지 말고 전국민주청년연합이라는 공통된 이름을 쓰자고 했지요. 줄여서 민청학련이에요. 경북대 회장이 이강철이고, 전남대는 윤한봉, 국민대는 장영달이 회장이었죠. 그걸 연결하기 위해 돌아다닌 이철을 수괴로 만들어놓은 거죠.”

    “386은 잘 튄다”

    유 청장은 67학번. 지금 정치권에 대거 진출한 80년대 학번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386들이 맺고 끊고 과감하게 나가는 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우리는 거리에서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가투(街鬪)는 상상도 못했죠. 그저 플래카드 들고 가다 경찰이 패면 맞으며 끌려갔지요. 거기에 대항할 생각을 감히 못했어요. 386은 주체사상까지 끌어들였잖아요. 우리는 그냥 주어진 제도적 틀에서 양심세력으로 컸다고 할까요.

    386세대는 이념화하고 조직화하고 투쟁화했죠. 운동 자체로는 엄청난 비약이었습니다. 그러한 힘으로 6월항쟁을 끌어낸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공적입니다.

    386들이 지닌 강성이 거대한 독재권력과 싸울 때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많은 계층과 이해집단들을 아울러야 할 때는 이 사람들의 입장이 항상 튈 수밖에 없는 약점을 갖고 있어요. 저희 유신세대나 민청세대 사람들이 완충지대에서 중화시켜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게 잘 안 돼요. 이부영 의원이 과격 상업주의라고 말한 것에도 유신세대와 민청세대의 감각이 담겨 있습니다.”

    문화재청 행정 업그레이드할 것

    -소설가 성낙주씨의 글(‘인물과 사상’ 2권)에서 유 청장의 붓끝이 학연에 따라 오락가락한다고 지적했던데요. 은사인 김원룡 전 서울대 박물관장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황수영 전 동국대 총장에 대해서는 가혹하다는 거죠.

    “고고학과 미술사학과 미학과는 1980년까지 서울대에만 있었습니다. 다른 대학엔 학과가 없으니까 전부 서울대 출신일 수밖에 없었던 거죠. 김원룡 교수는 정직한 사람이라 무령왕릉 발굴에서 실수한 것에 대해 금방 반성문을 썼습니다. 황수영씨는 석굴암을 그렇게 만든 분이거든요. 죄송하지만 그분이 그렇게 공들여서 해놓고 훗날 후배들한테 공격받을 줄은 몰랐겠죠. 성낙주씨가 동국대 출신입니다.”

    -문화재청장이 되기 전부터 ‘문화권력’이란 비판을 받았는데 이제 진짜 문화재 정책을 결정하는 권력자가 됐군요.

    “옛날에 어떤 기자가 이문열씨와 나를 문화권력이라 쓰면서부터 그 단어가 유행했습니다. 문화계에 영향력을 끼친다는 점에서는 수긍하지만 실제로 권력을 행사한 일은 없었습니다. 의견을 냈을 뿐이죠.

    장관과 청장은 다릅니다. 장관은 정책을 수립하지만 청장은 현장을 갖고 있습니다. 문화재 복원에서 보전이냐 개발이냐의 방침을 정해 직원들에게 지시하면 그대로 수행하게 됩니다.

    행정조직이 튼튼하고 군대보다도 더 상명하복(上命下服)식이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아침에 국장들하고 커피 마시면서 ‘저건 잘못된 거 같네’라고 하면 점심 먹고 나서 금방 페이퍼가 나옵니다. 늦어도 다음날 아침이면 딱 올라오죠.

    대신에 행정의 병폐가 있다면 감사에 안 걸리기 위해 방어적이고 수비에 익숙다는 거예요. 기업과 정반대죠. 문화재 안내판 고치는 걸 예로 들면, 누가 제일 잘 쓰는지를 알아내 그 사람에게 맡기면 되는데 그러면 수의계약이라 감사에 걸려요. 그러니 세 번 네 번을 고쳐도 만날 엉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책임질 테니 공격 좀 하자고 했습니다.

    직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8주 연속강좌를 열었죠. 공무원들이 재교육받을 기회가 별로 없어요. 국회에서 예산을 많이 증액해줬고 내가 사회적으로 인지도가 높아 문화재청이 더 이목을 받으니까 일하는 사람에게 신명이 생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 임기 동안 문화재청의 행정이 한 단계 올라설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의 철학이 바로 행정으로 집행된다는 점에서는 엄청난 문화권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유 청장은 술을 별로 안 한다. 젊어서는 꽤 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술이 싫어지더란다. 마시는 시간, 취해 있는 시간, 깨고 회복하는 시간을 합하면 코스트가 과다하다는 것. 그가 술을 좋아했더라면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저술을 여럿 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술은 또 깊이 있는 사고를 방해한다.

    -저서는 모두 몇 권이나 됩니까.

    “13권입니다. 번역서와 공저도 대여섯 권 될 겁니다. 참 부지런 피우며 살았어요. 어떻게 1년에 한 권씩 책을 낼 수 있냐고 하는데 10년 전부터 진행해 1년에 하나씩 결실이 나온 거죠. 1년 동안 학술자료 수집해서 책을 낼 수 있다면 누구든지 하게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대중성은 저자의 필력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읽을 맛이 나게 썼다는 거죠.

    “고교 때부터 그쪽에 취미가 있어서 국문과에 갈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요.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에 나오는 소설을 꾸준히 읽으며 대학시절을 보냈어요. 백낙청 선생이 유홍준의 책은 반은 문학적이고 반은 학술적이라고 했어요.

    소쇄원과 석굴암 답사기는 다른 패턴으로 썼습니다. 소설가적 발상과 기승전결 구성으로 단편소설같이 쓰려고 했어요. 한 꼭지를 200자 원고지 80~100매로 맺었어요.”

    건축상 휩쓴 자택 ‘수졸당’

    대학 다닐 때 감명 깊게 읽은 책은 루쉰(魯迅)의 ‘阿Q정전’. 중학교 때부터 박종화 박태원 삼국지와 고우영 만화 삼국지까지 죄다 구해 보았다.

    “기록문학 쪽을 좋아합니다. 문학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흔히 소설과 시만 생각하는데 기록문학과 전기도 중요한 분야입니다.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전기 작가가 드물어요. 그런 사람이 많아져야 우리 문화가 더 풍부해집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유명한 집 ‘수졸당(守拙堂)’에서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건축학과 학생의 답사 코스가 된 집이다. 똑같이 찍어낸 아파트는 별 차이가 없지만 단독주택에는 집마다 주인의 체취가 배어 있다. 다음에 집으로 초대해달라는 청탁을 했다.

    -건축가 승효상씨가 그 집을 짓고 상을 많이 받았다지요.

    “건축문화대상을 비롯해 상이란 상은 다 받았어요. 설계비보다 상금이 더 많았다니까요. 건평 52평짜리 집이 대상을 받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이러다 문화재청에 집을 뺏기지 않을까 겁납니다.

    내가 6남매의 장남입니다. 영동고등학교 앞 비가 새는 집에 살고 있었어요. 아파트로 이사 가면 부모님 모시기도 힘들죠. 그래서 집을 새로 짓게 된 거죠.

    김수근씨가 꾸리던 공간사에서 승씨는 설계실에 있었고 나는 잡지 편집실에 근무했어요. 우리나라에 좋은 건축가가 안 나오는 이유는 좋은 클라이언트(client·고객)가 없어서입니다. 집주인이 설계해놓고 건축가보고 그대로 지으라는 식이죠. 효상이가 마침 일이 없을 때 지어달라고 부탁했어요. 설계하고 집 짓는 동안 저는 땅 팔 때, 상량식 때, 준공하고 열쇠 받으러 딱 세 번 갔습니다. 모든 것을 건축가한테 맡겨버린 거죠.

    미술사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전통을 살리되 한옥은 불편해서 못살겠으니 서도동기(西道東器)로 해달라고 주문했죠. 현대식 집을 지으면서 한옥이 갖고 있는 아늑함을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돈이 모자라 건축비를 될수록 아꼈습니다. 집 열쇠 받는 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 초판이 나왔어요. 책이 잘 팔려 집 짓느라 진 빚을 1년 만에 다 갚았습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뒤에 지었더라면 더 좋은 집을 가질 수 있었겠군요.

    “그랬으면 그런 집이 안 나왔을 겁니다. 효상이가 어떻게 하면 돈을 적게 들여 건축적인 아이디어로 그 집을 지을 것인가 고민했기 때문에 작품이 나온 것입니다.”

    “수졸당이 호화주택은 아니냐”고 묻자 “건평 52평짜리 호화주택도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깨끗하게 번 돈으로 좋은 집 짓고 살면 안 됩니까”라고 대답했다.

    수졸당(守拙堂)이라는 이름은 ‘노자’의 ‘대교약졸(大巧若拙·큰 재주는 소박해 보인다)’에서 따왔다. 재주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재주라는 의미다. 우리나라 옛집 당호(堂號) 중에는 수졸당이 많다.

    휴가병과 여학생

    유 청장은 부인 최영희(51)씨와 사이에 아들 둘을 두었다. 큰아들은 대학에서 민속학을 전공한다. 작곡과에 다니는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면 ‘엄청난 딴따라’다.

    유홍준은 군대생활을 하던 1972년 12월 첫 휴가를 나와 국립박물관에서 조선시대 회화 500년전을 관람했다. 오후 3시경이었다. 관람객은 유홍준과 여학생 한 명뿐이었다. 겸재 정선의 ‘옹천(甕遷)’이란 그림 앞에서 둘은 마주쳤다. 옹(甕)은 항아리, 천(遷)은 좁은 샛길을 의미한다. 해금강에서 통천으로 가는 도중 동해안 쪽으로 항아리처럼 바짝 붙어 있는 가파른 벼랑이다.

    휴가병은 고미술 실력을 발휘해 여학생에게 ‘옹천’의 숨은 그림 찾기를 하자고 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바위를 돌아가는 커브 길에 나귀의 꼬랑지와 다리가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그걸 가르쳐주자 여학생은 재미있어 했다. 여학생이 대학에 떨어져 재수하던 시절이었다. ‘옹천’ 그림이 휴가병과 재수생을 중매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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