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호

올림픽 금메달을 강물 속으로 내던져 버리다

팍스아메리카나의 실상을 관통하는 대서사

  • 안병찬│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언론인권센터명예이사장 ann-bc@daum.net

    입력2011-08-19 14: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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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버락 오바마는 알리의 충실한 팬이다. 그는 미국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무하마드 알리를 멘토로 여겼다고 한다. 오바마는 일찍이 ‘알리는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제목의 평론문을 써서 알리의 노력과 용기를 찬양한 바 있다. 권투천재 클레이는 전설적인 트레이너 안젤로 던디와 한 팀이 되어 변칙권투를 구사하고 떠버리 전술을 구사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처음으로 알리를 표지기사로 올려 이렇게 풍자했다. “그가 매섭게 노려보면 힘센 자는 전율하고 그가 미소 지으면 예쁜 여자는 기절한다. 그는 천둥을 일으키고 번개를 만든다….”
    2장/ 챔피언의 꿈

    1. 권투 소년

    올림픽 금메달을 강물 속으로 내던져 버리다

    영화 ‘알리’의 한 장면.

    미국 켄터키 주는 아일랜드 출신인 백인 작곡가 스티븐 포스터가 ‘켄터키 옛집에 햇빛 비치어 여름날 검둥이 시절…’ 하고 서정이 넘치게 노래한 고장이다.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켄터키는 본래 노예의 땅이다.

    클레이의 집안은 그 고장에 끌려간 노예의 후손이다. 조상은 남북전쟁 이전에 아프리카에서 미국 남부 켄터키로 팔려가서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Cassius Marcellus Clay·1810~1903)라는 백인 농장주 밑에서 노예로 일했다. 그 후손은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6세대를 살았다.

    백인 농장주 클레이는 신문편집인이자 군인이며 정치가였다. 남부 출신이면서 노예제 폐지운동에 참여해 지도자가 된 사람이다. 그는 대학생 시절에 노예제 폐지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835년 켄터키 주 의회에 처음으로 진출했으나 1840년에는 노예제 문제로 선거에서 패배하고 루이빌에서 노예제를 반대하는 잡지 ‘더 이그저미너(The Examiner)’를 발행한 경력도 있다. 클레이 집안은 이런 백인 기독교도 농장주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캐시어스 마커스 클레이라는 이름을 썼다. 노예로서 체념과 순종의 삶을 산 것이다.



    알리는 1942년 1월17일 아버지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시니어와 어머니 오데사 클레이의 첫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이어서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주니어라는 이름을 얻었다. 동생 루디는 2년 후에 태어났다.

    어린 클레이는 붉은 벽돌집에서 살았는데 방 다섯 칸은 모두 바닥에 융단이 깔려 있었다. 거실 벽은 아버지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시니어가 손수 그린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버지는 페인트 광고공으로 기독교 감리교 신자였다. 어머니 오데사 클레이는 알리 형제를 데리고 침례교회에 다녔다.

    소년 클레이는 장난꾸러기였다. 부모를 놀라게 하려고 침대 시트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부모에게 와락 덤벼들거나 부모 침실 커튼에 끈을 매서 부모가 침실에 들 때 커튼을 움직여 놀라게 만들었다.

    동생인 루디는 소년 시절에 형 알리가 대단히 민첩했다고 말한다.

    “형은 걸핏하면 돌을 자기한테 던져보라고 했어요. 나는 형이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돌을 던지면 언제나 날쌔게 피했지요. 내가 아무리 여러 번 돌을 던져도 맞힐 수 없었어요.”

    / 새 자전거 도둑맞고 /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가 권투에 입문한 동기는 이렇다. 1954년 10월 어느 날 12세의 클레이는 선물로 받은 새 자전거를 타고 루이빌 시내 서비스클럽으로 갔다. 어린이에게 아이스크림과 풍선을 무료로 주는 시설이었다.

    알리가 회관 앞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잠시 들어갔다가 나와 보니 그 사이에 도둑이 자전거를 훔쳐가버렸다. 클레이는 울면서 지하에 있는 컬럼비아 체육관으로 뛰어갔다. 백인인 루이빌 경찰관 조 마틴이 어린이들에게 권투를 가르치고 있었다. 클레이는 울면서 자전거를 훔쳐간 도둑을 찾아내서 혼내주겠다고 말했다. 조 마틴은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리는 클레이 소년을 달래면서 “도둑을 혼내주려면 먼저 권투를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일을 알리의 어머니 오데사 클레이는 이렇게 얘기했다. (미국 레온 개스트 감독의 다큐멘터리 ‘우리가 왕이었을 때’ 중에서)

    그 애가 자전거를 타고 컬럼비아 체육관에 갔어요. 볼일이 있어 밖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들어갔지요. 나와 보니 누가 자전거를 훔쳐간 거예요. 그 애는 울면서 안으로 들어가 조 마틴이라는 경찰관한테 자전거를 도난당했다고 말했어요. 마침 조 마틴은 소년들에게 복싱을 가르치고 있었지요. 알리에게 복싱을 배워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어요. 그 애는 좋다고 했어요. 자전거 도둑을 찾게 되면 싸워서 이길 생각이었던 거지요.

    알리의 친구인 시나리오 작가 그레고리 앨런 하워드(‘타이탄을 기억하라’의 필자)가 지적한 말이 있다.

    “나이 어린 캐시어스 클레이가 자전거를 도둑맞은 일이 무하마드 알리 일대기의 시작을 알리는 열쇠가 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렇다. 알리가 복싱을 하게 된 운명은 이 자전거 도난사건이 결정지었다.

    조 마틴은 소년 클레이를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클레이는 다른 권투선수들보다 훨씬 열정적이었다. 그는 오직 권투를 연마했다.

    조 마틴의 평.

    “첫째, 그 애는 건방지고 생기발랄했으며, 둘째, 그 애는 내가 가르친 어떤 애보다 열심히 훈련했다. 그 애는 다른 애들보다 더 큰 야망을 품었다. 운동하는 데 값어치가 있는 일이라면 뭐든 희생을 무릅쓰는 아이였다. 알리는 기를 꺾을 수 없는 소년이었다. 그것이 열매를 맺었다.”

    어느 날 알리는 권투 연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라디오를 켰다. 마침 권투 중계방송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헤비급 세계챔피언, 로키 마르시아노입니다!” 하는 아나운서의 소개말이 흘러나왔다. 클레이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훗날 클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뼈를 통과하는 싸늘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 아나운서의 말은 나에게 큰 영향을 준 한 마디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전거 도둑을 혼내주려고 권투를 시작했는데 결국 그것이 씨앗이 되어 큰 꿈으로 자라난다. 클레이의 강점은 집념이었다. 그는 미쳐야만 성공할 수 있음을 터득하고 있었다. 머릿속은 온통 권투로 가득 찼다. 밥 먹을 때도 권투, 학교에 갈 때도 권투, 공부 시간에도 권투를 생각했다. 화장실에 앉아서도 팔을 뻗어 잽을 날리곤 했다.

    아직 어두운 새벽 4시, 잠자리에서 일어난 클레이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낡은 군화의 구두끈을 조인다. 살을 에는 겨울 추위를 뚫고 루이빌 시내를 달린다. 어떤 때는 학교버스와 경주하면서 체스트넛 거리에 있는 학교까지 20구역을 뛰어간다. 친구들은 이런 클레이를 차창으로 내다보면서 “쟨 완전히 돌았어” 하고 킬킬거렸다.

    미국 흑인 대통령으로 무하마드 알리의 팬인 버락 오바마는 ‘알리는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제목의 평문에서 위의 대목을 인용하고 있다.

    이처럼 권투에만 몰두하니 클레이의 학교 성적은 최하위권이었다. 그러나 클레이는 머리가 명민하고 지혜로웠다.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클레이는 조 마틴에게 권투를 배우면서 역량이 빠르게 성장했다. 6주일 후에 클레이는 3분 3라운드짜리 아마추어 권투시합에 출전해서 상대인 로니 오키후를 판정승으로 눌렀다. 그때 클레이 소년의 체중은 40㎏이었다. 대전료로 받은 돈은 4달러.

    캐시어스 클레이는 그렇게 링에서 살며 세계헤비급 챔피언의 꿈을 키워간다.

    클레이는 조 마틴에 이어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아프리코-아메리칸) 트레이너인 프레드 스토너를 만나서 권투 기술을 배웠다. 그 밑에서 18세가 되기 전까지 켄터키 골든 글로브 선수권자 6회, 전국 골든 글로브 선수권자 2회, 아마추어체육연맹 전국선수권자 1회의 전적을 기록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권투에만 열중했기 때문에 클레이의 학업 석차는 꼴찌를 맴돌았다. 1960년에 클레이는 루이빌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 올림픽 금메달

    / 금의환향 /

    1960년 여름, 열여덟 살 생일을 보낸 직후에 클레이는 미국 올림픽팀 대표선수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비행공포증 때문에 로마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하겠다고 버티다가 겨우 마음을 돌렸다.

    첫 코치였던 조 마틴의 아들은 루이빌 쿠리어 저널 신문에 클레이가 로마행 항공기를 어떻게 타게 되었는지 밝힌 적이 있다.

    “로마에 못가겠다고 버티던 클레이는 결국 비행기에 타기로 동의했다. 그는 군수품 중고상을 찾아가서 낙하산을 하나 사더니 실제로 그것을 입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많이 흔들릴 때는 통로에 엎드려서 낙하산이 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는 로마올림픽에서 라이트헤비급 예선전 3회를 승리로 장식한 후 결승전에 올라 폴란드의 즈비그뉴 피에츠고브스키를 꺾고 금메달을 따냈다. 루이빌에서 자전거를 도둑맞고서 6년 뒤의 일이다.

    “아메리카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나의 목표다. 나는 미합중국을 위해서 소련 선수와 폴란드 선수를 차례로 이기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나를 보고 고대의 캐시어스 시저보다 낫다고 말했다.”

    클레이는 이렇게 금메달을 딴 소감을 말하며 영광을 미합중국에 돌렸다. 금의환향한 클레이는 뉴욕과 루이빌에서 메달수상자 퍼레이드에 참가하며 영웅 대접 같은 환영을 받았다. 고향은 축제 분위기였다. 클레이의 집 현관은 성조기로 뒤덮였다. 페인트공인 아버지는 계단을 성조기 색깔인 빨간색과 하얀색과 파란색으로 칠해서 축제 분위기를 띄우고 이웃들을 불러 모아 미국 애국가 ‘별이 반짝이는 깃발’을 합창하며 아들을 환영했다. 그 뒤에 클레이는 금메달을 자랑스럽게 목에 걸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 100승 5패 /

    그런 클레이에게 치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미국의 인종차별이 지금보다 훨씬 심각한 시절이었다.

    ‘백인 전용 식당’에 햄버거를 사러 들어간 그에게 백인 여자 종업원은 흑인은 접대할 수 없다고 냉정하게 거절한다. 게다가 식당 안에 있던 백인 건달들이 클레이를 보고 ‘검둥이’라고 경멸하며 시비를 걸었다.

    이때 클레이는 뿌리 깊은 인종차별 앞에는 올림픽 금메달조차 무의미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미국의 골이 깊은 인종주의는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루이빌 시내를 흐르는 오하이오 강가로 나간 클레이는 올림픽 금메달을 강물 속으로 내던져버렸다고 한다.

    캐시어스 클레이는 아마추어 복서가 된 후 고향인 루이빌 지역의 기업인 유지들이 결성한 ‘루이빌 스포팅 그룹’의 후원을 받았다. 클레이가 두각을 나타내자 후원단체는 샌디에이고에 있는 전설적인 복서 아치 무어에게 훈련을 받도록 다리를 놓아주었다. 남부 미시시피주 센트루이스 출신인 아치 무어(1913~98)는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으로 220전 185승 131KO의 전적으로 KO 최다 기록을 세우며 1950년대를 주름잡은 선수다. 은퇴한 후에는 미국 흑인(아프리칸-아메리칸)의 민권운동에도 가담했다. 아치 무어는 클레이의 매력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우리 마누라는 클레이란 녀석한테 미쳤어. 우리 애들도 그 녀석한테 미쳤어. 나도 그 녀석한테 미쳤어. 그런데 말이야, 그 녀석은 내가 하라는 대로 안 했다니까.”

    클레이의 아마추어 전적은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을 포함해서 100승 5패였다.

    / ‘KO왕’ 아치 무어에 KO승 /

    클레이가 직업선수로 전향한 것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그해 10월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차별받는 흑인이 갈 길이란 권투밖에 없다는 생각을 굳힌 터였다.

    클레이는 ‘루이빌 스폰서링 그룹’과 프로 계약을 체결하고 선수금 1만달러를 받자 평소에 가지고 싶어하던 분홍색 캐딜락을 사들였다.

    직업선수로 전향한 후 첫 경기는 1960년 10월29일 고향 루이빌에서 열렸다. 상대는 웨스트버지니아 주 라파이에트빌 경찰서장인 터니 헌세이커인데 6회전을 싸워서 심판 전원일치의 판정승을 거두었다.

    패자가 된 헌세이커는 뒷날 클레이에 관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싸운 클레이는 겉만 번드레한 녀석이었어. 그는 번쩍번쩍하는 분홍색 캐딜락을 몰고 루이빌 관장을 싸다녔지.”

    그 후 2년 동안 클레이는 4 KO, 8 기권승(TKO), 2 전원일치판정승으로 무패행진을 이어갔다. 프로로 전향한 후 열여섯 번째 대전은 흥미로웠다. 한때 자기 코치였던 47세의 KO 왕 아치 무어와 1962년 11월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맞붙은 것이다. 대전을 앞두고 클레이는 선수 대기실 칠판에 “4회에 KO승을 한다”고 써놓았는데 예언한 대로 4회 KO로 아치 무어를 이겼다.

    / ‘떠버리 클레이’/

    클레이는 고향인 루이빌에서 프로 권투를 계속하던 어느 날 레슬링 선수인 고저스 조지 와그너가 라디오 인터뷰에서 하는 말을 들었다. 와그너는 레슬링 경기에 관한 질문을 받자 크게 허풍을 쳤다.

    “내가 그 녀석을 죽일 거야. 그 녀석 팔을 꺾어서 뽑아버리고 말겠어. 봐라.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레슬러다.”

    조지의 허풍 전술은 단박에 클레이의 머리에 박혔다. 사람들은 선수가 큰소리로 떠벌리는 것을 좋아하고 상대 선수가 망신당하는 것을 좋아한다. 영민한 클레이는 장차 이 방법을 자기의 전술로 개발해서 랩을 뇌듯이 활용하게 된다. 그에게 ‘떠버리 클레이’라는 별명이 붙은 계기였다.

    캐시어스 클레이는 시인 흉내도 냈다. 젊은 날에 캐딜락을 사서 예쁜 아가씨와 함께 타고 달리며 세계챔피언을 꿈꾼다는 내용의 유치한 시도 지었다.

    나는 켄터키 경마축제일 ‘더비데이’에

    큰길을 캐딜락으로 달릴 거야

    다들 말할 테지

    “저기 캐시어스 클레이가 간다”고

    예쁜 아가씨가 나와 같이 있을 거야

    다음해 경마축제일에

    캐시어스는 세계헤비급 챔피언이 되어 있을 거야

    클레이는 언어 감각이 뛰어났다. 촌철살인의 문안(카피)을 뽑아내는 예능적 감각을 권투생활에 십분 활용했다. 1963년에 그는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서 직접 앨범을 제작했다. 그 안에 클레이는 “나는 가장 위대하다(I am the Greatest)”라는 구절을 삽입했다.

    이 말은 무하마드 알리를 상징하는 문안이 되었다.

    / 전설의 훈련사 안젤로 던디 /

    1960년 말 클레이는 37세의 전설적인 트레이너 안젤로 던디를 맞이한다.

    12월19일 클레이는 던디의 코치 아래 마이애미 5번가 체육관에서 허브 실러라는 선수와 만나 4라운드 KO승을 거둔다. 이 대전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한 팀이 되었다.

    당초 젊은 클레이는 당돌하게 던디를 찾아가서 만난 사연이 있다. 1957년이었다. 루이빌에 안젤로 던디가 왔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무작정 호텔로 찾아갔다. 던디는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윌리 파스트라노와 방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를 던디는 이렇게 술회한다.

    우리가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어. 젊은 녀석 목소리였어. 그 녀석은 “미스터 던디, 제 이름은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에요. 난 켄터키 루이빌의 골든 글로브 챔피언이지요”하더니 앞으로 자기가 싸워서 이기고 싶은 거창한 챔피언들의 이름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방으로 올라가서 우리를 만나고 싶다고 했지. 난 윌리한테 말했어.

    “이보게, 전화에 천둥벌거숭이가 나왔는데 자네를 만나고 싶대!” 그랬더니 윌리가 “제기랄, 텔레비전도 재미없는 판인데 잘됐군” 하더군.

    몇 분 뒤에 그 녀석이 동생 루디와 같이 방으로 올라왔지. 형제가 다 잘생기고 예의도 반듯했어. 우린 대부분 복싱 얘기를 했지. 그렇게 서너 시간을 같이 있었어.

    그때 클레이는 던디에게 궁금한 것을 미주알고주알 캐물었다. 던디가 훈련시키는 챔피언들은 무엇을 먹는지, 얼마나 자는지, 조깅을 몇 시간 하는지, 대전 연습(스파링)을 어느 정도 하는지 질문했다.

    1959년에 클레이는 루이빌을 방문한 안젤로 던디를 다시 만난다. 던디는 윌리 파스트라노 선수와 같이 와 있었다. 윌리는 라이트헤비급 세계선수권을 노리는 유망주였다. 클레이는 경기장으로 던디를 찾아가서 윌리의 스파링 상대가 되겠다고 자청했다. 안젤로 던디는 일급 프로선수 윌리와 열일곱 살짜리 아마추어 클레이가 붙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반대했으나 윌리가 굳이 이를 원했다. 클레이는 윌리를 상대로 한 스파링에서 우세한 경기를 펴서 던디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훗날 안젤로 던디는 무하마드 알리의 특징을 이렇게 짚었다.

    알리를 훈련시키는 일은 다른 선수들과 전혀 다르지. 내가 굳이 밀어붙일 필요가 없어. 알리는 제트 추진력을 발휘하지.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제풀에 저절로 떠오르지. 중요한 건 이거야. 알리가 항상 자신감을 갖게만 하면 되는 거지.

    알리는 내가 저를 훈련시키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맞는 말이야. 난 방향만 가리켜주고 그가 스스로 혁신가라고 믿게 만들면 되는 거야. 난 그 친구한테 이렇게 말하지.

    “자넨 기막힌 레프트 펀치를 날릴 수 있어. 어깨와 몸을 싣고 발가락을 실은 주먹 한 방이면 기막힌 것이지!”

    그러면 알리는 다음 경기에서 실제로 그런 펀치를 날려요. 난 로키 마르시아노의 트레이너인 찰리 골드만한테 배웠어. 그는 스타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경기하고 있다고 믿게끔 만들라고 했지.

    / 변칙 권투 /

    클레이는 권투 자세가 매우 특이했다. 양손을 높이 올려 얼굴을 방어하는 통상적인 스타일을 버리고 한 손을 내린 채 빠른 발로 상대의 펀치를 피했다. 그는 춤추는 복싱을 했다. 초기의 코치였던 아치 무어는 클레이가 구사하던 비전통적인 권투 자세를 바꾸려고 했다.

    던디는 아치 무어와 달리 알리가 오른팔은 들어 올리고 왼팔은 늘어뜨리는 비전통적 권투 자세를 취하는 것을 인정했다.

    클레이는 안젤로 던디의 마이애미 훈련장에 합류하면서 헤비급에 도전할 준비에 몰두했다. 그는 권투계가 금기시하는 이단적인 복싱 자세를 굳혀갔다. 클레이는 젊은 시절부터 자기의 비전통적인 복싱자세를 고수했다. 그는 몸통보다 머리를 노리는 복서다. 리치가 길기 때문에 접근전을 피하고 상대방의 머리를 가격한다.

    두 번째로 클레이는 ‘춤추는 권투’를 한다. 강력한 발의 근력으로 마치 링 위에 부양하듯이 춤추면서 불시에 상대를 가격한다. 이것이 이른바 ‘알리 셔플(알리 발재간)’이다. 현란한 발놀림으로 어느 쪽으로 뛸지 예측하기 힘들어 상대방을 현혹하는 기법이다. 아마도 권투 역사상 가장 강력한 다리를 가진 복서이기에 ‘알리 셔플’은 가능했을 것이다.

    세 번째로 그가 복싱에 도입한 요소는 입이다. 그는 권투할 때 입을 다무는 법이 없다. 그 때문에 젊은 날부터 ‘루이빌 떠버리(루이빌 립)’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의 입놀림은 조롱하는 정도가 아니다. 끊임없는 ‘장광설’이다. 그 시절에 권투선수는 언론을 상대로 직접 발언하지 않았다. 매니저가 선수를 대신해서 말했다. 그렇지만 클레이는 자기가 직접 언론을 상대로 모두 얘기했다. 그는 걸핏하면 상대를 KO시킬 라운드를 예언했다.

    “8라운드에 쓰러뜨려서 내가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줄 테야!”

    / 첫 타임지 표지 /

    1963년에 영국 런던에 원정한 것이 그가 처음으로 해외 경기를 한 기록이다. 클레이는 5만5000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상대인 헨리 쿠퍼와 피투성이 접전을 벌여 4회전에 왼손 훅을 얻어맞고 다운당했다. 그러나 5회전에 쿠퍼의 눈 위가 깊이 찢어져서 TKO로 승리한다. 클레이는 경기 전에 기자들에게 예언한 대로 5회전에 쿠퍼를 이겼다.

    쿠퍼와는 3년 뒤에 런던에서 재대결을 했는데 15회전 경기 중 6회전에서 KO승을 거두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1963년 3월22일자에 처음으로 캐시어스 클레이를 표지에 올렸다. 제목은 ‘스포츠의 꿈’이었다. 켄터키 시골에서 자라면서 권투의 큰 꿈을 일구어 성공한 클레이를 사뭇 익살스럽게 그린 기사였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캐시어스 클레이는 마침내 “나는 가장 위대하다(I′m the Greatest)”고 선언했다. 캐시어스 클레이는 말이 너무 많다. 사실 클레이는 웃으면서 끊임없이 떠든다. 그는 제 자랑도 심하다. 기회만 생기면 우스꽝스러운 시를 읊어댄다.

    “난 아~름~다워요” 하든지 “난 최고야. 난 두 배로 최고야. 난 깔끔하고 불꽃을 일으키지. 난 깔끔하고 불꽃을 일으키는 챔피언이지”하고 소리친다.

    캐시어스 클레이는 무쇠 같은 주먹과 아름다운 황갈색 피부를 가진 사내다. 그는 열두 명과 싸운 헤르쿨레스다. 그는 황금 양가죽을 찾아가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이아손이다. 아서왕의 원탁의 기사 갤러해드이고, 코가 큰 검객 시라노이고, 삼총사의 주역 달타냥이다.

    그가 매섭게 노려보면 힘센 자는 전율하고 그가 미소 지으면 예쁜 여자는 기절한다. 그는 천둥을 일으키고 번개를 만든다.

    그는 이렇게 허풍을 친 일이 있다.

    “내 말 들으쇼. 난 머리가 커서 요람에 누웠을 때 딱 조 루이스 같았어.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니까. 어느 날 난 생전에 처음으로 펀치를 날렸는데 바로 엄마 입술에 맞았지. 엄마는 넉 아웃됐어. 날 못 믿겠으면 가서 우리 엄마한테 물어보쇼….”

    캐시어스 클레이는 프로선수로 전향한 후 1960년부터 3년 동안 19전 전승 15KO의 전적으로 승승장구했다. 1961년 4월에는 40전 연속으로 KO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하던 라마 클라크를 KO로 이겼다. 30승 20KO승의 강타자 더그 존스를 전원일치 판정으로 이겼고(1963년 3월), 앞에 소개한 것처럼 영국의 권투 스타 헨리 쿠퍼는 TKO로 제압했다(1963년 6월).

    1964년 2월25일.

    19전 전승의 가도를 달리던 캐시어스 클레이는 무서운 철권의 소유자 소니 리스튼과 마이애미에서 대전할 기회를 잡았다. 세계권투협회(WBA) 및 세계권투평의회(WBC) 통합 선수권을 건 첫 번째 대결이다.

    이 극적인 대결은 캐시어스 클레이가 무하마드 알리로 이름을 바꾸는 전환점에서 벌어졌는데 프로로 전향한 후 스무 번째 경기다.

    리스튼을 이긴 후 9일 만인 3월6일에 흑인 인권조직 ‘이슬람 민족’의 창시자 엘리야 무하마드는 클레이에게 ‘찬양받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새 이름 ‘무하마드 알리’를 부여한다. 캐시어스 클레이는 이슬람교도인 무하마드 알리로 다시 태어났다.

    (3장에 계속)

    안병찬

    올림픽 금메달을 강물 속으로 내던져 버리다
    경찰에 앞서 살인사건 2건을 해결해 이름을 날린 사건기자 출신. 한국일보 베트남 특파원 시절이던 1975년 남부 베트남 패망(베트남 통일)의 마지막 현장을 취재하고 탈출한 후 르포르타주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발간해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한국일보 주불특파원·논설위원을 거쳤고 시사저널 편집·발행인을 역임한 후 경원대 언론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민영통신 뉴시스의 고정칼럼 ‘기자 49년차―안병찬의 영상르포르타주’(http://www.newsis.com)를 집필하고 소셜뉴스 위키트리의 개인 데스크 ‘안병찬 기자 49년차’(http://www.wikitree.co.kr)를 운영하며 언론인권센터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다. ‘신문 발행인의 권력과 리더십’ 등 저서 16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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