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침대에 실린 채 수술실로 향하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탄 암환자의 퀭한 눈빛. 절박감에 사로잡힌 그를 그저 간절함으로만 지켜볼 수밖에 없는 가족의 무력감. 이후 몇 겹 유리문 저편, 단절된 미지의 공간에서 벌어질 일에 대한 피 말리는 긴장감과 형언키 어려운 온갖 상상.
언제, 누구라도 맞닥뜨릴 수 있는 암수술 현장을 생생히 보여주려 한 그 르포 취재에서 아직껏 잊히지 않는 장면 하나가 있다. 개복(開腹) 수술이 이뤄지는 동안 살짝 훔쳐본 73세 남성 대장암 환자의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 의식이 없어 자신의 몸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사투 따위는 까맣게 모를 수밖에 없는 극명한 대비. 순간 떠오른 건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었다.
당시 집도의는 국내 최고의 대장암 명의(名醫)로 꼽히는 김남규(60) 세브란스병원 외과부장 겸 연세대 의대 외과학교실 주임교수다. 김 교수가 본격적으로 대장암(결장암+직장암) 수술에 나선 건 1993년. 이후 올해 5월 말까지 그가 수술한 대장암 환자는 9500여 명에 달한다. 대장암 외 항문질환, 염증성 장질환, 외상 등을 합치면 총 수술 건수는 1만2000여 건. 전공의를 시작한 1982년부터 30여 년을 거의 다 수술실에서 보내지 않고선 불가능한 횟수다.
수술 방법도 개복 수술에서 복강경 수술, 로봇 수술에 이르기까지 환자의 상태에 맞게 최적화한다. 360여 건의 직장암 로봇 수술도 국내 최다 기록이다. 대한대장항문학회장과 이사장을 지낸 그는 대한대장암연구회장, 아시아태평양대장암학회장도 맡고 있다.
年 450건 수술
8월 2일 김 교수를 만났다. 매일같이 생명의 회복과 소멸을 접해야 하는 삶이 궁금했다. 오후 4시. 그는 경남 창원에서 올라온 70대 남성 환자를 수술실에서 살피고 나온 참이었다.“첫 수술을 내가 했는데 항암치료를 받다 암이 재발해 다시 수술하는 거예요. 다른 환자 수술이 많아 예정 시각보다 30분쯤 늦게 시작됐죠.”
▼ 수술을 얼마나 자주 합니까.
“지금은 암수술만 하는데, 연간 450여 건쯤 돼요. 전에 더 많이 할 땐 500건도 넘었죠. 월·목요일은 하루 종일 수술하고, 화·수·금요일은 오전 혹은 오후 반나절 외래진료를 하고 나머지 시간엔 수술을 합니다. 주말 빼곤 매일 수술해요. 일주일 평균 10건 이상. 조교수급까지는 ‘응콜(응급실 콜)’을 받아 주말에도 응급수술을 나가야 하지만, 나처럼 나이 든 사람은 안 받지. 의사들끼린 ‘응콜’을 ‘별밤지기’라고도 하죠.”
일과가 빽빽하다. 오전 6시 전에 서울 도곡동 자택에서 차를 몰고 나와 신촌의 병원에 도착하면 6시 20분쯤. e메일을 점검하고 7시에 주임교수로서 외과 전체 회의를 주재한다. 그러고는 곧 외래진료나 수술. 수술이 늦게 끝나도 환자가 병실로 옮겨진 후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하느라 퇴근은 밤 11시를 넘기기 일쑤다. 귀가 후에도 밀린 일을 하거나 논문을 수정한다. 수면은 4~5시간. 그럼에도 피곤한 기색이 안 보인다.
▼ 왜 하고많은 직업 중 의사를….
“내 주변에 의사가 한 명도 없었어요. 평소 의대 진학은 생각지도 않았고. 그런데 피난민 출신인 부모님이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느 날 말씀하셨어요. ‘넌 장남이고 성격이 차분한 데다 공부도 잘하니 (동생들도 보살필 겸 안정적 직업인) 의사가 되는 게 좋겠다.’ 피나 인체 해부 사진 등은 끔찍해서 아예 못 보고 눈을 감아버릴 정도로 마음이 여리고 약했는데도 주저 없이 ‘네’ 했죠.
원래는 이공계 순수과학을 전공해 교수나 교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땐가 고1 땐가 신앙에 눈뜬 뒤로, 사회에 나가면 지식을 전달하는 것보다 남한테 좀 더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의술을 배워야겠다던 참이었어요. 그래서 연세대 의대 진학을 결심했죠.”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세례명은 ‘비오(Pius).’
“김군, 대장항문외과 해라”
▼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달프기로 이름난 외과를 왜 선택했습니까.“수련의 과정을 마치면 임상과를 지원하는데, 당시 세브란스병원 외과의 트레이닝 강도가 너무 세서 분위기가 안 좋았어요. 한두 주 해보다 도망가는 게 다반사고. 의대 졸업성적이 최상위권이라 어떤 과도 지원할 수 있었지만, 환자의 몸에 직접 손을 대서 병을 치료하는 외과의 매력을 떨칠 수 없었죠. 어릴 때부터 미술이나 손으로 만드는 것에 재능이 있었고, 논리적이고 추론하는 능력보다는 관찰력과 기억력이 좋았던 때문이기도 해요. 그런 특성이 외과에 맞지 않겠냐 싶어 남들이 힘들다고 말려도 뛰어든 겁니다.”
하마터면 그는 대장항문외과 전문의가 되지 못할 뻔했다.
“군의관 복무 후 1989년부터 전임의(펠로) 과정 2년 동안 타의에 의해 강남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간과 담도, 췌장을 전문으로 하는 간담췌외과에서 일했어요. 이후 2년은 경기 광주시에 있던 분원까지 가서 전임강사로 있게 됐죠. 그땐 외과의인데도 수술 환자가 거의 없어 외래진료만 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1993년, 전공의 시절부터 나를 눈여겨보신 주임교수님께서 나를 신촌 병원으로 끌어올려 1년간 도제식으로 술기(術技)를 가르치며 훈련시킨 뒤 ‘김군, 대장항문외과 해라. 앞으로 관련 질환이 엄청 늘어날 거다’ 그러셨어요. 대장암 수술이라곤 일주일에 두세 건밖에 없을 때였죠. 지금 우리나라 대장암 발병률이 세계 1위이니 교수님의 선견지명이 맞아떨어진 거죠.”
지도교수 말씀을 하늘같이 여길 때였다. 일방적 지시라도 어쩔 수 없었다. 자의는 아니었지만, 대장항문외과 선택은 김 교수의 운명을 바꿨다.
김 교수의 정교한 수술 능력은 외과의 사이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암조직은 확실히 없애되 주변 장기는 거의 건드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통상 직장암이 생기면 직장간막(직장을 둘러싼 조직)에까지 암이 퍼지기 쉬운데, 그가 맡은 직장암 2·3기 환자 1000여 명의 직장간막 절제수술 후 암 재발 비율은 6%에 그친다. 그가 수술한 환자의 평균 5년 생존율은 결장암의 경우 88.4%, 직장암은 84.5%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이다.
면허 받은 ‘칼잡이’
▼ 암수술을 주로 하는 외과의로서 어떨 때 보람을 느낍니까.“어떻게 하면 나의 해부학적 지식과 경험을 한껏 적용해 암덩어리를 완벽히 제거하고 장기를 보존할까 하는 목표를 위해 환자 몸에 직접 손을 대서, 이른바 상해를 가함으로써 뭔가를 이뤄내는 거예요. 외과의 가장 큰 묘미죠. 내과는 그러지 못하잖아요. 아무나 인체를 들여다보진 못하죠. 면허 받은 ‘칼잡이’랄까.”
▼ 생명과 건강을 지키고 연장하기 위한?
“그러기 위해 칼을 옳게 쓰는 거죠. 병이 치료되고 환자가 회복돼 가정과 직장, 사회로 복귀할 때 ‘외과의사 되길 참 잘했다’ 생각해요.”
▼ 고충도 적잖을 텐데요.
“수술 결과가 나쁠 때 오는 피드백. 예컨대 합병증이 생겼을 때요. 내 잘못도 있겠지만 환자와 보호자의 문제로 인해 생긴 것도 분명히 있는데, 해결하기까지 오래 걸릴 땐 답답하죠. 경제적 손실 보상을 요구할 땐 절충안을 찾아야 하고. 환자가 돌아가셨을 땐 피의자 신세로 조사받거나 분쟁에 휘말리기도 했고, 법정까지 간 적도 있어요. 그럴 땐 힘들죠.
그런데 의사는 질병 치료에서 이후의 일을 두려워해선 안 돼요, 진료행위가 움츠러들거든. 옳다고 믿으면 그냥 가야 돼요. 그다음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걸 최소화하는 현명한 지혜, 그걸 수용하고 대응하며 해결할 수 있는 담대함이 있어야 해요.”
▼ 외과의에게 필요한 자질인가요.
“그렇죠. 그런 자질을 회피하면 반쪽짜리 외과의밖에 못 되지.”
▼ 30년 넘게 수술을 해오면서 회의를 느낀 적도 있을 텐데요.
“분명 느꼈겠죠. 그렇지만 잊어버렸어요.”
▼ 어떻게?
“기억력이 나쁘거나, 아니면 새로운 더 강한 그 무엇이 내게 왔거나. 수술이 많아서 회의가 드는 게 아녜요. 결과가 나빠서죠. 그래서 난 후배나 제자들한테 그래요. 네가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해도 뜻하지 않게 여러 가지 힘든 일에 처해 회의가 들 수 있을 거다. 그러나 정도(正道)를 걷는다면 큰 문제가 안 될 거다. 난 그렇게 믿습니다.”
“교수님 진료실은 조용해요”

“외래진료 시간이 늦춰지는 경우가 잦아요. 내 신조(信條)가 ‘이 환자한테 30분 설명이 필요하면 그대로 한다’거든요. 뒤의 환자들한텐 좀 미안하지만. 환자들은 예약한 시각에 진료받지 못하면 곧잘 불평하죠. 호통도 치고. 그런데 우리 담당 간호사가 ‘교수님 진료실은 조용하다’는 거예요. 왜 진료시간이 늦어지는지 환자들이 알기 때문이죠. 이유 있는 기다림이랄까. ‘저 의사한테 가면 그래도 들어야 할 건 제대로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봐요.”
▼ 의술(醫術)이 먼접니까, 인술(仁術)이 먼접니까.
“인술. 의대는 어찌 보면 의학기술을 가르치는 전문학교예요. 여느 학과랑 다르죠. 그런데 실제로는 그 기술, 즉 의술만 갖고는 질병을 치료하기에 불충분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병을 100% 치료할 수 있겠어요. 그건 하나님의 영역이죠. 의사는 단지 제한된 지식과 경험으로 거기에 조력하는 것뿐이라 생각해요. 아무리 뛰어난 의술을 가졌어도 인성이 나쁘면 진정한 치유의 힘을 전달할 수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의사는 겸손해야 합니다. 환자를 치료해도 나 혼자 한 게 아니라 여러 의료진이 협력한 거고, 환자와 보호자도 병을 치료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것 아닙니까.”
▼ 잊을 수 없는 환자라면.
“많은데…당장 한 명 들라면, 20대 초반 남자 대학생이에요. 7년 전 찾아왔는데, 직장암 4기에다 암세포가 간으로 전이돼 있었어요. 수술과 항암치료를 했는데, 몇 년 후 재발했죠. 다시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해도 2번인가 더 재발했는데, 지금은 잘 살고 있어요. 졸업해서 직장 다니고, 여자친구도 있고. 재발 소견이 없어 다행인데,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본 어머니가 그사이 유방암에 걸려 치료받느라 가족이 많이 힘들었죠.
수많은 환자를 같은 방식으로 치료했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건 환자가 처한 상황에 맞게 궁리를 거듭한 뒤 나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을 만큼 잘 치료해서 결과가 좋았을 때 같아요.”
음악 못 듣게 하는 까닭
▼ 수술실에선 무척 엄격할 듯한데요.“나이 들어선 많이 나아졌는데…일단 수술에 들어가면 굉장히 예민해져요. 그래서 신경질을 많이 냈죠. 급한 상황에서도 마음에 거슬려 서로 협조가 잘 안 됐거나,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려는 경우도 많았고, 창피한 과거지만. 그만큼 긴장했던 거죠. 그런 건 윗사람한테서 배워요. 선생님들 중엔 정말 힘든 상황에서도 점잖고 끈기 있게 수술 잘하신 분, 소리만 지르고 사람을 힘들게 한 분도 계셨어요. 양쪽을 다 배운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좀 좋은 모습으로 대해야겠다고 나름대론 노력합니다. 다만 좀 엄숙하게는 하죠. 예를 들면, 수술 중에 음악을 절대 못 듣게 해요.”
▼ 음악?
“수술 중에 라디오나 CD 음악을 듣는 외과의가 적지 않아요. 긴장감을 완화하려고. 하지만 수술에 임할 땐 항상 ‘올인’해야 한다고 봐요. 또한 환자가 의식 없이 누워 있는데 음악을 듣는 건 주치의에게 몸을 맡긴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그래서 수술에 참여한 의사와 간호사들한테 얘기해요. ‘우리가 누구 덕에 봉급 받느냐. 당신이 당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게 이분들이 여기서 수술받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시간만큼은 올인하자. 최선을 다하자’ 그러죠.”
▼ 외과를 선택하는 전공의 비율이 해마다 낮아집니다.
“지난해 국내 전체 외과 전공의 확보율이 66.8%예요. 매년 걱정이죠. 뚜렷한 대책은 없고 원인은 분명해요. ‘3D 진료과목’이니까. 자기 시간 적지, 수입도 다른 과보다 적지, 위험도 높지. 그러니 요즘의 영리한 애들이 하겠어요? 설령 하겠다고 해도 부모가 말려서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당분간 이런 상태로 갈 겁니다. 대책은 외과 수가를 올려 외과의의 수입을 늘려주는 겁니다. 보상만 제대로 주어지면 올 애가 많아요.”
▼ 앞으로의 계획은.
“만 65세 정년까지는 지금처럼 꾸준히 수술과 진료를 하면서 후학을 위해 내 나름의 수술·진료 노하우와 연구 성과를 정리한 전문 학술서적을 내고 싶어요. 정년 이후에도 건강하다면 우리 병원보다 규모가 작은 병원으로 가서 진료와 봉사를 할까 합니다. 힘이 닿는 한 초심(初心)을 회복하고 싶다고 할까. 명성 따윈 다 내려놓고 환자에게 다가가길 결코 마다하지 않는 그런 의사로 남고 싶습니다.”
▼ 대장암 진단을 받은 환자에게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습니까.
“쉽지 않겠지만, 우선 환자 본인의 정확한 상태를 알려주는 의사를 만나라, 상태를 안 후엔 적극적인 투병 의지를 키워라, 다른 장기로 전이됐더라도 희망의 불씨를 끄지 말라, 그러면 완치될 수 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러려면 삼위일체가 필요해요. 의료진, 환자 본인, 가족. 그래야만 좋은 치료 효과를 냅니다. 희망을 끈을 놓지 않도록 노력하세요. 꼭 가족과 사회의 품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연구실의 낡은 신발
김 교수의 연구실에서 눈길을 잡아챈 게 있다. 군데군데 해지고 구멍이 날 정도로 낡은 신발 몇 켤레. 하루 평균 8시간씩 수술실에서 서서 보낸 그의 체중과 번민을 고스란히 지탱해준 징표다. 그는 “현재 대학원에 다니는 아들(25)이 한때 아빠 일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일에도 충실하지 못해 많이 싸웠는데, 언젠가 한 번쯤은 보여주고 싶어 보관 중”이라고 귀띔했다.김 교수는 지난 5월 에세이집을 펴냈다. 제목은 ‘당신을 만나서 참 좋았다’. 수많은 대장암 환자를 치료해온 그가 환자들과의 소중한 인연 속에서 느낀 소회와 그것을 자양분 삼아 더욱 성숙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책이다. 인세 전액은 어려움을 겪는 세브란스병원 환자들을 위한 치료비로 기부된다.
어쩌면 김 교수를 만난 환자와 보호자들도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교차점에서 ‘당신을 만나서 참 좋았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