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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쓸모 있는 인간으로 같이 살면 안 되겠남?”

‘脫시설 장애인 1호’ 기부천사 한꽃님 씨

  • 유해정 |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기록활동가

“쓸모 있는 인간으로 같이 살면 안 되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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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꽃님(가명·52) 씨는 ‘탈(脫)시설’ 장애인 1호다.
  • 2016년 8월은 장애인 시설에서 나온 지 꼭 10년이 된다. 꽃님 씨는 이를 기념해 탈시설과 자립생활을 도와준 단체들에 2000만 원을 기부하기로 했다.
  • 필자는 2009년 여름 그를 처음 만났다.
  • 뇌병변 장애로 말 한 마디를 내뱉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기억을 재구성할 ‘기준점’이 없다는 것도 인터뷰의 난관이었다. 외출이 불가능한 그에게 기억은 뒤엉켜 있었다.
  • 1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그의 이야기를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마’(2013, 삶창)에 담은 필자는 그와 친구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육성을 지면에 옮긴다.
일본에서 장애인들을 집단 살인한 사건 봤남? 살인범이 웃고 있는데, 날 보고 비웃는 거 같았어. ‘장애인들은 쓸모없는 인간이여, 그러니 죽어야 해’라면서. 눈물이 나더라고. 누가 날 봐도 그럴 거 아니여. 가족들도 그랬어. 언제 죽냐, 너만 죽으면 좋은데, 너는 가족들한테 짐만 된다…. 그 소리가 너무 듣기 싫었어. 이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냐, 돌멩이 하나도 쓸 데가 있으니 존재하겠지. 나 같은 중증장애인들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하니까, 나는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어. 그래서 기부를 하는 거야.



힘들어도 자유롭잖아

내가 그 돈, 정말 눈 감고 귀 막고 살며 모았다. 먹고 싶은 거 안 먹고, 가고 싶은 데 안 가고. 2000만 원이면 나 같은 중증장애인한테는 상상도 못할 거금이여. 시설에서 나왔을 때 국가보조금이 한 달에 40만 원이었는데, 거기서 월세 35만 원 내면 5만 원 남잖아. 그 돈으로 먹고살았지.

노들(서울 대학로에 있는 ‘노들장애인야학’과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줄임말.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공부하고 자립활동 기반을 준비하는 민간단체)에서 좀 도와주고, 발바닥(‘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의 줄임말.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공존하는 ‘탈시설’ 자립운동을 주도하는 민간단체) 활동가들이 도와주고. 하루에 김치찌개랑 밥 한 끼만 먹고 2년을 버텼어. 독하게 집 보증금 마련하고서는 8년간 매달 20만 원씩 모았다. 내가 사람들 도움으로 요만큼이라도 사는 거니까 나도 빚 갚으며 살아야 한다, 이 돈은 내 돈이 아니다 그러면서….

나는 시설에 살 때 개, 돼지나 마찬가지였어. 주는 거 먹고, 자라면 자고,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나고. 개, 돼지나 주는 대로 먹잖아. 사람은 먹고 싶은 걸 먹고. 근데 나 이거 먹기 싫으니 안 먹을라요 그 말도 못하고, 나 이거 먹고 싶은데 주세요 소리도 못하고. 근데 시설 밖에선 단 하루라도 가고 싶은 데 가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자유를 느끼고 살잖아. 나만 이렇게 행복할 수 없어서 활동가들한테 돈을 줬지. 그 돈 다른 데 쓰지 말고 한 사람이라도 더 시설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데 쓰라고. 다른 사람들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라고. ‘탈시설 1호’의 어깨가 그렇게 무겁다.





38년을 방에서만 살았어

내 고향? 전라도 영광. 형제는 언니 둘에 오빠 둘. 내가 막내지.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참말로 반평생 구박덩이로 살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똑같은 자식이고 형젠데,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데…. 내가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이러코럼 심하진 않았어. 어릴 땐 혼자 앉기도 하고, 내 손으로 밥도 먹을 수 있고, 방도 치울 수 있었지.

스물다섯 살 무렵에 엄니가 교통사고가 나서 20일 동안 병원에 계셨어. 그러니까 밥을 먹을 수가 있어야지. 언니 오빠는 다들 시집, 장가가고 집엔 작은오빠랑 큰오빠 아이들만 있었어. 작은오빠는 들여다볼 생각도 안했고, 조카들도 학교 가기 바쁜데 어떻게 밥을 달라고 하겠어. 그냥 저녁에 애들 오면 조금 먹고 그랬지. 그렇게 못 먹으니까 점점 기운이 달리더라고. 앉을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고. 기운이 한번 빠져버리고 나니까 찾아지지가 않더만. 그때부턴 혼자 밥도 못 먹었어. 엄마가 퇴원해 날 보더니 내 탓이다, 내 탓이다 그랬지.

태어나서 38년을 방 안에서만 살았어. 엄니랑 형제들이랑 TV만 보고 산 거야. 바깥세상은 TV로만 보고 ‘아 저렇구나’ 상상했지. 어려서 엄니가 장사를 다녔어. 남편도 없이 애들 데리고 먹고살아야 하니까. 엄니가 장에 다녀올 때 집 잘 봐라 그러고, 장에 다녀오면 집 잘 봤니 그러고. 집 안의 개나 마찬가지였어.

바깥이 왜 안 궁금했겠어. 동네 애들 소리만 나도 미치겠지. 그래도 나갈 수가 있어야지. 나가고 싶다고 해봤자 엄니가 데리고 나갈 수도 없으니 말도 못했지. 손님이라도 오면 방 안에서 며칠이고 지냈어. 식구들이 내가 손님 앞에 나오는 게 창피하다고 나오지 말라 해서. 아버지 장례를 집에서 치렀는데 그때도 방 안에만 있었어. 형제들 결혼식 때도 못 가봤어. 가고 싶다는 생각도 못하고 살았지.

가족 간에 서운한 거? 그걸 어떻게 다 말로 혀. 나는 늘 되게 짧은 스포츠 머리였어. 머리 간수도 못 하면서 왜 머리를 기르냐고…. 스님들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뒤에 조금 길면 검어지잖아? 내가 그랬어. 누가 오면 아들이냐고. 그럼 엄니가 ‘네, 아들이에요’ 그라고. 사람들이 스님이냐고도 물어보고. 그 소리가 정말 듣기 싫었어.

언니들이 시집가서 가끔 친정이라고 한 번씩 왔다 가면서 나한테 뭐랬는지 아남? 어째 안 죽냐, 왜 안 죽냐. 그럼 내가 말하지. 나도 죽을 수 있다면 죽을 건데 혼자서는 죽지도 못하네. 그럼, 오래도 살고 있다 그래. 자기네들은 생각 없이 하는 말인데, 내 맘은 굉장히 아프지, 어찌 안 아프단가.

어릴 때부터 나는 시설로 가려고 했어. 텔레비전 보면 가끔 시설이 나와. 그럼 나 좀 저기 보내달라고. 그럴 때마다 엄니가 ‘보내긴 어디 보내야, 나랑 같이 살아야지’ 그랬어. 근데 엄니의 짐이 되긴 싫었어. 엄니가 돌아가실 때도 내가 밟혀서 눈도 못 감고 돌아가실까 봐. 엄니는 어디를 가도 못해. 내가 이렇게 누운 뒤부터는 내가 엄니 없음 밥도 못 먹고, 대소변은 누가 가려줄까 혀서 어디도 다니질 못했어. 그래서 작은올케한테 시설 좀 알아봐달라고 했지. 올케가 속으로 어땠을지 몰라도 겉으로는 그냥 자기하고 살자고. 근데 그게 되남?


300년 같은 3년

시설에 가려고 알아보니까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받는다, 재활이 되는 사람만 원한다…그러면서 다 거부하데. 한 군데서만 받아준다는데, 지적장애인들만 있는 시설이었지. 그때는 그거라도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꼭 구세주를 만난 것같이…. 2002년 10월 20일에 들어갔지. 그때 38세였는데 첫 외출이었어.

시설 원장을 내 피붙이처럼 믿고 의지하고 살았어. 그런데 어느 날은 아침밥을 안 줘. 밥 주는 아줌마한테 왜 나에게는 밥을 안 주냐고 물어봤어. 원장이 주지 말라고 했대. TV 늦게까지 봤다고 벌 준다고. 시설에 들어갈 때 TV랑 라디오를 사 가지고 갔어. 밤에 잠이 안 오면 TV나 보려고 한 건데 9시가 되면 자야 한다는 거야. 원장이 집주인이 자기니까 여기서는 자기 말을 꼭 들어야 한다면서. 그래서 끄고 잤는데, 누가 내가 늦게까지 봤다고 거짓말을 한 거지. 내 말 좀 믿어달라고 했는데 원장이 안 믿더라고. 그날 종일 굶었어.

한번은 휴대전화를 원장 모르게 가지고 있다가 전화하다 들켰어. 원장이 휴대전화를 열어봐. 내가 따지듯이 물었어. “왜 남의 것을 열어보세요?” 원장이 그 자리에 한참을 앉았더니 TV 리모컨을 던져서 박살냈지. 그래놓고 “기분 나쁘면 나가시오. 나도 댁 같은 사람 못 데리고 살겠소” 그래. 내 돈 갖고 산 휴대전화를 뺏어가서 열흘 만에 주고. 그때 이러코럼 내가 살아야 하는가 싶고. 아주 비참한 게,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게….

그러더니 얼마 후에 원장이, 원생들이 동네 사람들한테 자기 욕하고 다닌다면서 나를 지목하더라고. 다른 원생들은 지적장애인들이니 나밖에 없다고. 내가 혼자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러냐고 했는데도 나밖에 욕할 사람이 없다는 거야. 그러면서 다른 원생한테 나를 데리고 살기 싫다, 어디로 보낼 수만 있다면 보내고 싶다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어. 3년 동안 의지하고 믿었는데 그렇게 버리고 싶었다니…. 속은 타들어가는데 사람들이랑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하고 미치겠더라. 미쳐가는 기분 아남? 거기서 3년을 살았는데 꼭 300년을 산 거 같았어. 유리병 안에 갇힌 그런 기분이었어.

그래서 시설 실태조사를 다녀간 발바닥 활동가들한테 연락했지. 시설에서 나가고 싶다, 나 좀 도와달라. 나도 간덩이가 컸지. 한 번밖에 안 본 사인데 도움 청한 걸 보면.

원장이 내가 나간다고 하니까 나가긴 어디를 가냐고, 나가면 죽는대. 나는 아니다, 나가서도 살 수 있다 그러면서 한참 싸웠어. 원장이, 가족이 와서 동의서를 쓰면 나가게 해주겠다는 거야. 집에 전화를 했지. 근데 한참을 기다려도 안 와. 원장의 말 한 마디가 비수가 돼 내 가슴을 찌르고 일분일초가 바늘방석 같은데 안 와.



혼자라는 게 정말 무서웠어

내가 다시 집에 전화해 그랬다. ‘죽으면 죽었지 절대 집으로는 안 갈 거다.’ 정말 집에 가기 싫었어. 집은 시설보다 더 끔찍했어. 하지만 거리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이 시설은 아니다 싶었지. 속으론 걱정이 많았겠지만 올케가 와서 동의서를 써줬지.

사실 죽을 작정을 했으니 나왔지. 시설 밖에선 굶어 죽는다고 생각했어. 나는 이 세상이 너무 두려웠어. 근데 나와 보니 이 세상이 무섭고 두려운 것만은 아니더라고. 개, 돼지처럼 살다 보니 이렇게 좋은 세상이 있는지 몰랐던 거지.

2006년 8월에 나와서 한동안은 고생 많이 했어. 그때는 활동보조인도 없고, 자립생활 체험홈(자립지원주택)도 없었어. 게다가 내가 시설에서 나와 처음으로 혼자 살겠다고 한 사람이니 나를 데리고 나온 활동가들이라고 뭔 대책이 있었겠남?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실에서 일주일간 살다 겨우 체험홈으로 옮겼어. 방이 하나뿐인데 이미 주영이가 쓰고 있어서 나는 부엌에 침대를 놓고 지냈어.

그라제, 너무 서러웠지. 싱크대 밑에서 쥐가 올라와서 내 손등을 뛰어다니는데, 아휴, 내가 뭘 할 수가 있남? 활동보조인이 없는 주말 같은 때에는 이 사람 집에 갔다, 저 사람 집에 갔다, 발바닥 애들 천막농성 하는 데 가서 종일 있다 오기도 하고…. 사람들한테 미안하면서도 서운하고. 이런 고생을 하려고 나왔나 싶고, 비참해 죽고 싶고. 내가 한두 번 운 게 아냐. 근데 여기서 포기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싶고….

하지만 정말 무서웠던 게 뭔지 아남? 혼자 있는 거였어. 나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잖아. 심하게 아프면 어떻게 하지? 도둑이라도 들면? 불이라도 나면? 다리에 쥐가 나도 움직이질 못하니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지. 이러코럼 있다 죽으면 누가 알기나 할까. 신문에 난 것처럼 며칠이고 몇 달이고 있다 발견되는 건 아닐까 싶고….

한번은 체험홈서 독립해 혼자 사는데, 활동보조인이 와서 문을 못 여는 거야. 방 안에서 어떻게 하라고 말을 하긴 했는데 그게 들리나. 이이가 문을 못 열면 센터로 전화를 해야 하는데 그냥 가버렸어. 나 혼자 울고불고…. 무섭고 두려운데 어쩔 수가 있어야지. 하나님한테 제발 누구라도 좀 보내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는지 몰라. 그날이 토요일인데,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내가 주일예배도 안 오고 전화도 안 받으니까 이상하다 싶어 일요일 저녁에 집으로 뛰어왔어. 그래서 살았지.



생명이 달린 문제인데…

내 말이 뭔 말인지 모르겠지? 주영이가 혼자 살다가 4년 전에 집에 불이 나 죽어버렸어. 불이 나자 주영이가 입에 막대기를 물고 119에 신고했대. 소방차가 달려와 10분 만에 불은 다 껐는데 그이도 혼자 움직일 수가 있어야지. 옆에 활동보조인이 없는 시간대라 저세상으로…. 아휴, 그 불길 속에서 혼자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겠냐. 그 소식을 듣는데 너무 무서웠다. 나도 똑같이 죽을 수 있겠구나 싶고…. 그이 죽고 나서 한동안은 밤에 잠도 잘 못 잤어. 깜박 자다 깨면 ‘언니’ 하고 그이가 부르는 것 같고.

사실 난 주영이하고 같이 살 때 좋은 친구가 되지 못했어. 안 맞는 부분도 있었지만 사실은 너무 부러웠거든. 주영인 가끔씩 엄니가 와서 돌봐줬는데, 난 엄니가 있어도 들여다봐주지 못하니 그게 그렇게 부러운 거야. 주말마다 엄니네 가는 것도 부러웠어. 나는 갈 데도 없잖아. 오라는 곳도 없고.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것도 그렇고, 컴퓨터를 할 수 있는 것도 미칠 듯이 부럽고.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부러워서 친구가 될 수 없었지. 근데 그리 가버리니 너무 많이 미안하고 맘이 아프고, 또 무섭고….

근데도 왜 혼자 사냐고? 자유라는 것이 너무 좋아. 누구 눈치도 안 보고, 강요도 안 받고…. 노들에서 공부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교회도 다니고…. 사람 사는 거 같아. 내가 사람처럼 살려면 숨 쉬는 거 빼놓고는 활동보조가 필요해. 내 몸의 일부지. 그러니 제발 사람들이 활동보조 가지고 장난 좀 안 쳤으면 좋겠어. 장애인들 생명이 달린 문젠데 줬다 뺏았다, 등급 나눠서 준다 못 준다 그러고. 처음엔 활동보조 시간이 너무 적어 1분이 금이었어, 금. 싸워서 지금은 시간은 더 많이 생겼는데 그러면 뭐하남. 나 같은 중증은 힘들다고 활동보조인들이 오지 않으니 대책이 없어. 활동보조 서비스가 내 평생의 어려움이지.

아이고, 내가 지금 외로워서 난리가 아니다. 여기 (서울 강서구) 임대아파트 분양받고 이사 와선 후회가 막심해. 나 같은 중증장애인한테 세 주겠단 사람도 없고 월세도 비싸서 여기 들어오긴 했는데 여기서 노들까지 가려면 두 시간도 더 걸려. 동네에 아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고, 거리가 멀어 찾아오는 친구도 없고. 여기는 그냥 나 혼자밖에 없어.



사는 게 굳은살

내 맘 알아주던 유일한 친구도 2년 전에 가버렸어. 노들에서 연결해준 멘토였는데, 그이도 시설에서 살다 나왔지. 내가 너무 외롭다고 하니 ‘언니 이리 와, 우리 같이 살자’ 그러더라고. 그이 동네에 마침 맞바꿀 수 있는 임대아파트가 나와 이사 가련다 전화했더니 입원했대. 갑자기 폐렴이 와서…. 중환자실에 있다니 병문안도 못 가고, 통화도 못 하고. 근데 사람이 어떻게 일주일 만에 갈 수가 있남? 가서 보니 영정사진이 떡하니 있는데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너만 좋은 세상 가지 말고 나도 좀 데려가, 그랬다. 나도 갈 수만 있으면 가고 싶다 그랬어. 그 친구 보내고 나니 사는 게 안 되더라. 에휴….

그래도 어쩌겠남. 외롭고 힘들어도 혼자 사는 무게를 지고 가야지. 나 같은 사람들은 사는 게 굳은살이니. 그래도 시설 밖에 있으니 나는 행복한 거야. 내가 시설에서 나온 지 딱 10년 됐는데,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 첫째도, 둘째도 장애인들도 쓸모 있는 인간이다 그 말을 하고 싶어. 나를 보고 있는 시선, 필요 없는 인간이구나, 저런 인간들은 사람들을 귀찮게 한다, 우리 주머니를 털어간다 그런 눈빛. 거리로 나서는 순간 일상적으로 느끼지. 근데 세상만물 쓸모없는 게 어디 있겠냐. 나라고 이러코럼 태어나고 싶었겠냐.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당당하게 살고 싶다. 당당하게 하고 싶은 거 하고, 가고 싶은 데 가고, 하고 싶은 말 하고. 그렇게 살면 안 되겠남? 쓸모 있는 인간으로 같이 살면 안 되겠남?  


※꽃님 씨의 기부금은 ‘탈시설 꽃님기금’으로 관리된다. 동참을 원하는 분은 계좌입금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 국민은행 488401-01-249324 박경석(꽃님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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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정 |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기록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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