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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광 5人의 한국축구를 위한 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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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광 5人의 한국축구를 위한 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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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코미디언



축구는 훌륭한 스포츠다. 우선 정신 건강에 좋고 강한 체력을 기를 수 있다. 또한 축구를 하면 머리가 좋아진다. 어떤 사람들은 축구 선수는 공부를 못한다고 하는데 모르는 소리다. 영리한 사람이 축구도 잘한다. 나는 축구와 공부를 모두 잘했다. 축구를 하면 순발력이 생기고 시야도 넓어진다. 축구는 단체경기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과 잘 어울려야 한다.

50년대 시골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는 축구밖에 없었다. 그때는 축구공이 없어서 새끼를 동그랗게 말아서 찼다. 집에서 학교까지 시오리쯤 됐는데, 논바닥 길을 줄곧 새끼를 차면서 다녔다.

중학교 때부터 선수로 뛰다가 춘천고 시절엔 전국대회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때 태클에 걸려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중요한 시기에 운동을 쉬었다. 당시 박종환 감독은 수비수였고, 나는 라이트윙이었다.



박종환 감독과 경희대에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입학금을 날리는 바람에 못갔다. 그때 대학에 갔으면 나도 틀림없이 국가대표가 되었을 것이다. 83년 박종환 감독이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한국을 4강에 올려놓았을 때 사실 나는 색다른 쪽에서 흥분하고 있었다. ‘나도 계속 축구를 했으면 세계적인 감독이 되었을텐데…’

축구선수로서 나는 재능이 많았던 것 같다. 나는 100m를 12.5초에 뛰었는데 발재간도 있었다. 선배들이 길게 때리고 뛰는 ‘뻥축구’를 하고 있을 때 나는 구석을 파고 들어 짧게 찔러주는 패스를 했다. 코너에서 밀어주는 숏패스는 지금 생각해도 일품이었다. 누가 지도해준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그런 플레이를 터득했다.

나는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요즘엔 많은 선수들이 골을 넣은 뒤에 멋진 골 세레모니를 펼친다. 당시엔 그냥 손을 치켜드는 게 고작이었는데 나는 남들이 하지 않는 제스처를 많이 선보였다. 유니폼을 벗고 관중에게 환호한 적도 있다.

우리가 뛸 때 춘천고는 전성기를 달리다가 졸업한 뒤 성적이 떨어졌다. 한동안 축구부가 해체됐었는데 박종환 감독과 내가 의기투합해서 축구부를 다시 살렸다. 나는 축구붐을 조성하기 위해 연예인 50여명을 데리고 내려가 ‘연예인 축구대회’를 열기도 했다. 나는 84년 ‘연예인 무궁화 축구단’을 만들었고 86년엔 동대문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뭔가 보여주는 연예인 축구대회’를 열었다. 후반전 동점 상황에서 나는 남보원이 치고 들어가다 백패스한 볼을 그대로 중거리슛해 영화배우 남궁원이 지키고 있던 골네트를 갈랐다. 3만 관중이 기립 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나는 4백미터 트랙을 전속력으로 돌았다.



어려울 때마다 도와준 박종환

나와 박종환 감독은 인연이 깊다. 박감독이 나보다 세 살 위지만 친구처럼 지냈다. 박감독은 내가 어려울 때마다 힘을 주었다. 박감독은 내가 무명배우로 일하던 시절 우리 집을 도와주었다. 나도 박감독이 중요한 경기에 나가면 꼭 따라가 응원했다.

83년 박감독이 기적을 일으키기 전까지 나는 축구와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박감독이 엄청난 일을 해내니까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때 효창운동장을 잔디구장으로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어서 내가 1000만 원을 냈다. 박감독이 “잔디구장이 필요하다. 잔디구장만 있었으면 이번에 우승까지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인조잔디를 깔았다. 힘들더라도 그때 잔디구장으로 만들었으면 한국 축구가 조금을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전두환 대통령도 박종환 감독을 좋아해서 나도 청와대 구경을 한 일이 있다. 사실 나는 전두환 대통령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방송출연까지 금지당했으니… 그런데 박감독과 인연이 닿아서 전대통령을 만났는데 그분은 내가 출연정지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후 내가 어려울 때마다 전대통령은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었다. 특히 우리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는 직접 문상을 오셨다. 장례를 치르는 날은 나하고 박감독을 불러서 밤새 술을 마셨다.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는 응원에도 열심이었다. 90년 북경아시안게임 때는 사비를 들여 연예인 10여명을 데리고 갔다. 경기장에서 남한과 북한이 따로 응원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태극기를 들고 북한측 응원단으로 뛰어들었다. 그랬더니 북한 응원단이 “이선생, 이러시면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니까 “이주일씨 다 안다”고 했다. 알고 보니까 그 사람들 대부분이 배우들이었다. 그래서일까? 내가 자기들처럼 동원돼서 온 것으로 생각하고 “다 아는데, 왜 이러십니까?” 라고 해서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있다.

90년 통일축구가 열렸을 때도 잠실 주경기장에서 응원을 펼쳤다. 내가 응원을 하겠다고 하니까 정보기관에서 조사를 해야 한다는 둥 말이 많았다. 사실 나는 그때 준비도 없이 나갔다. 마이크를 잡고 남북한 기자들 앞에서 그렇게 얘기했던 것 같다.



허정무 체제로 가자

“우리는 지금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응원하려고 한다. 북한에서는 연습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남한에서는 연습이라는 게 없다. 지금부터 뭔가 보여주려고 한다.”

내가 코믹하게 파도타기 응원을 했더니 7만 관중이 박장대소를 하면서 따라했다. 내가 운동장에 쓰러질 듯한 포즈를 취했더니 파도타기가 무려 다섯 번이나 주경기장 스탠드를 돌았다. 그때만 해도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나를 다 알아서 호응이 좋았던 것 같다.

내 뒤를 이어 이상용, 이용식, 김흥국 등이 축구장에서 열심히 응원을 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김흥국은 축구에 대한 열정이 있는 것 같다. 후배지만 정말 기특하다. 열심히 해서 2002년 월드컵때 중요한 역할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다.

90년대 후반엔 축구장에 자주 가지 않았다. 그래서 박종환 감독이 국가대표팀 감독을 그만둔 뒤엔 한번도 간 일이 없다. 남들은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박감독이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난 것에 불만이 많다. 대표팀 성적이 좋지 못했던 데는 수많은 이유가 있었는데, 오로지 박감독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박감독과 함께 나도 축구와 인연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미 축구과 인연을 맺은 걸 어떻게 하겠는가? 때론 TV를 지켜보면서, 때론 축구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분을 토하곤 했다.

최근 아시안컵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많은 사람들이 허정무 감독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게 불만스럽다. 왜 우리는 실패한 사람에게 기회를 주지 못하는 것일까? 박종환 감독, 차범근 감독, 허정무 감독 모두 축구로서 국가에 많은 봉사를 했는데, 한 번 실수로 사람을 버리는 것을 보면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물론 박종환 감독의 축구가 최고라는 얘기는 아니다. 박감독은 83년에 청소년축구에서 돌풍을 일으킨 감독이지, 영원히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박감독을 만나면 그런 얘기도 자주 했던 것 같다.

“스타들을 옛날 방식으로 다루면 안된다. 너보다 팬이 더 많은 선수에게 ‘죽여’, ‘살려’ 해서는 안된다. 너는 너무 카리스마가 강하다”

하지만 아무리 얘기해도 박감독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번 형성된 스타일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박감독은 96년 아시안컵에서 추락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때 선수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것 같다. 어떻게 그런 플레이를 할 수 있었을까? 언젠가 박감독을 응원하기 위해 싱가포르에 간 일이 있는데 그때도 선수들이 어이없는 경기를 하다가 패했다. 그래서 박감독과 술을 한잔 하면서 선수들을 탓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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